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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리 Jul 09. 2020

내가 정말 좋아하는 편집자의 일

편집자가 대체 무슨 일을 하냐구요?

집에서 혼자 작업을 하다가 가끔 밖에 나가 사람들을 만났을 때 직업을 물어오면 선뜻 마땅한 대답이 생각나지 않았다. 골똘히 생각한 끝에 나온 답변은 ‘편집자’였다. 번역을 하든 삽화를 그리든 디자인을 하든 동시에 여러 역할을 하면서도 내 안에는 편집자라는 정체성이 가장 크게 자리잡고 있었다. 다른 일보다 경험이 더 많기도 했고 역시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편집자의 손에서 시작해 편집자의 손에서 마무리된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단순하게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 편집자의 일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편집자는 책과 함께 굴러간다.’ 나는 종종 이렇게 상상한다. 책이라는 직물을 짜기 위해 처음에는 실 한 오라기를 잡고 데굴데굴 구른다. 잘 짜여져 나온 완성품을 상상하며 원고를 다듬고 저자, 역자에게 가서 씨름하고 북디자이너에게로 다시 굴러간다. 일러스트레이터, 다른 편집자(혹은 편집장), 마케터, 제작처, 서점까지 데굴데굴 데구르르… 그러면서 책이 만들어진다. 책에 관여하는 다른 기여자에 비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설명하기가 쉽지 않지만, 확실한 것은 편집자가 없으면 책은 혼자 저절로 굴러가지 않는다. 


편집자의 일을 명확하게 설명하기 힘든 이유는 아마 편집자가 책을 만드는 모든 단계에 관여하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나 역자와 원고를 사이에 두고 전체적인 틀을 잡고 세세하게는 교정/교열을 진행하고 디자이너와는 조판 디자인과 표지 디자인을 사이에 두고 조율을 한다. 마케팅 전략을 짜거나 제작 사양을 고민할 때도 원고와 책에 대해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편집자의 견해가 필요하다. 각 전문가들의 목표를 살펴보면 애매해 보였던 편집자의 일이 확실하게 보인다. 저자와 역자는 원고를 쓰는 것, 디자이너는 북디자인을 하는 것, 마케터는 책을 파는 것, 제작자는 책의 물성을 만드는 것이라면 편집자의 목표는 ‘책을 만드는 것’ 그 자체다.


번역자인 내가 번역을 완료하면 편집자 모드로 변신한 내가 원고를 편집한다. 번역자가 원서를 충실히 옮겨 내는 데 중점을 둔다면 편집자는 독자가 그 내용을 수월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애를 쓴다. 텍스트 속에 파묻혀 있을 때와 다르게 한 발짝 떨어져서 원고를 보면 번역할 때와는 다른 요소들이 눈에 들어온다. 국내 독자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농담을 풀어 쓰거나 ‘Music’, ‘Diet’ 같이 딱딱한 소제목을 ‘음악 유전자, 없어도 괜찮아’, ‘다이어트는 힘들어’ 같은 식으로 친근하게 각색하고 전체적인 책의 느낌을 제목과 표지에 반영한다.


편집자의 손길이 가장 크게 닿는 요소 중 하나가 번역서 제목이다. 미란다가 쓴 원서의 제목은 <Is It Just Me?>지만 그대로 한국어로 해석한 ‘나만 그런가요?’를 그대로 제목으로 할지 아니면 한국 독자들에게 책의 성격을 더 잘 전달할 수 있는 새로운 제목을 붙일지 고민했다. 아무래도 영드 <미란다>를 아는 팬들에게 어필하고 싶다는 생각에 제목에도 ‘미란다’를 넣고 드라마 속 배경과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우기로 했다. 책의 발랄하고 유쾌한 성격은 부제목에서 드러내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책 제목은 <미란다처럼 : 눈치 보지 말고 말달리기>가 되었다. 


제목을 생각하는 동안 적은 포스트잇들


언젠가부터 재미있게 읽은 번역서의 원서 제목을 찾아보는 것이 취미가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원래 제목을 왜 바꾸냐고 의아해 할 수도 있지만 해외 출판 시장과 국내 출판 시장에서 선호하는 제목 유형이 다르기 때문에 원서 제목을 그대로 출간하는 경우가 더 적다. 그리고 언어의 체계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오히려 원서 그대로 내는 것이 책의 내용을 잘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정의란 무엇인가> 같은 경우도 원제는 <Justice>지만 <정의>가 아니라 <정의란 무엇인가>라고 바꾸어 출간되었다. 아주 작은 차이지만 독자로서 두 제목을 받아들이는 느낌이 분명 다르다. 그런가 하면 반대로 문장형 제목을 단어형 제목으로 바꾸는 경우도 있다. <사피엔스의 미래>의 원제는 <Do Humankind’s Best Days Lie Ahead?>이다. 이 책이 출간될 무렵 마침 주목받던 책인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의 독자층을 흡수할 수 있는

내용이라 판단해 ‘사피엔스’라는 키워드를 제목에 넣은 편집자의 센스가 돋보인다(이 책은 공저자가 4명인데, 저자 이름을 나열한 순서도 눈여겨볼 만하다. 원서와 달리 한국 내 지명도대로 나열했기 때문이다).


2013년에 출간되었던 <진짜 여자가 되는 법>은 <How to be a woman>이라는 원제를 거의 그대로 살렸다가 2015년에 표지갈이를 해 재출간하면서 제목도 바꾸었다. <아마도 올해의 가장 명랑한 페미니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바뀌었는데, 새로 출간할 시기에 관심도가 높았던 ‘페미니즘’이라는 키워드를 제목에 전면적으로 내세운 전략이 드러난다.


이런 식으로 놀다(?) 보면 자연스레 책을 만들 때 분야별 편집자들이 어떤 점에 중점을 뒀는지 엿볼 수 있고 시기별 제목 트렌드에 맞춰 제목을 변형한 편집자의 재치도 눈에 들어온다. 뭐, 이런 취미가 제목 짓는 기술을 늘려 준다고는 장담할 수 없지만 나 같은 경우엔 재미가 있어서 하는 일이다(직업병은 아니다. 결단코!).


<미란다처럼>의 제목을 짓고 보니 ‘덕후가 만든 책, 덕후를 위한 책’이라는 것을 더욱 드러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시간이 조금 많이 걸리더라도 일반적인 출판사에서 내는 것과는 다르게 만들고 싶었다. 출판사 소개서에 썼던 ‘책덕 출판사의 유일한 책이기에 정성을 다해 만들고 싶다’는 말을 지키고 싶기도 했다.


다른 출판사에서 계약을 해서 만들었을 경우보다 더 세련되지는 못할지라도 ‘덕후스러움’만은 월등하기를 바란 것이었다. 번역할 때 덧붙였던 옮긴이 주석으로 설명했던 영국의 예전 영화나 음악 콘텐츠들이 유튜브에 올라와 있어서 이것을 한데 모아 두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보를 블로그에 올리고 ‘미란다처럼 사전’이라고 이름 붙여서 독자들이 찾아올 수 있게 책에 링크를 적어 두기로 했다. 그리고 미란다의 일거수 일투족이 궁금할 덕후들을 위해서 미란다의 활동 이력을 샅샅이 뒤졌다. 미란다 하트의 공식 홈페이지, IMDB(영화, 배우, TV 드라마, 비디오 게임 등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온라인 데이터베이스), 유튜브 영상 등 짧게라도 출연했던 쇼를 찾아내서 책 뒤에 부록으로 끼워 넣었다. 언제 이렇게까지 누군가의 기록을 뒤져 본 적이 있었던가. 진정 덕후가 되어 가는 느낌이었다.


덕후스러운 정보로 가득한 뒤표지와 날개


여기에 마침표를 딱! 찍어 줄 뭔가가 없을까? 고민하다가 추천사를 넣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홍보를 위해서 유명인이나 책과 관련된 분야의 권위 있는 사람에게 추천사를 받지만 이 책은 미란다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애정 어린 추천사를 넣고 싶었다. 이름하여 ‘덕후들의 사랑스러운 추천사’! <미란다>를 재밌게 보고 리뷰까지 남겨 준 애정 있는 블로거들을 검색해 일일이 메시지를 보냈다. 혼자 책을 만들고 있는데 짤막하게 추천사를 써 주신다면 책에 싣고 싶다고. 감사하게도 나보다 더 반가워하며 흔쾌히 추천사를 보내 줬다.


편집자의 주요 업무라고 하면 교정과 교열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를 아주 꼼꼼하고 세심하게 보는 일에 자신 있는 편은 아니다. 편집 일을 막 시작했을 때는 내가 편집자 자질이 없는 건 아닐까 고민하기도 했다. 선배 편집자가 자신이 만든 책에 치명적인 실수가 있다고 해서 이리저리 훑어봤지만 결국 어디에 오류가 있는지 찾지 못한 적도 있었다. 좀 더 꼼꼼한 편집자가 되어 보고자 기본적인 교정교열 훈련을 받고 선배 편집자와 <열린책들 편집매뉴얼>을 붙잡고 스터디를 하기도 했다.


정말 세심한 편집자들처럼 책을 보진 못하는 이유는 아마 내가 독자일 때부터 그렇게 엄격한 스타일이 아니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책에서 오타가 나올 때 거슬려 하기 보다는 반가워하는(?) 편이다. 물론 오타가 밥 먹듯이 나오거나 터무니없는 오류가 난무하는 책은 짜증을 유발하지만 완벽해 보이는 책의 빈틈이 보이는 순간 왠지 인간미가 느껴지는 건 나뿐일까? 그 오자에서 잠시 멈추는 바람에 책 바깥으로 생각이 튀는 것도 재미있다.


마치 원래 목적지는 아니지만 우연히 발견한 여행지의 매력적인 골목길처럼 말이다. 예를 들어, 책을 펼치자마자 ‘저자의 말’이 ‘자자의 말’로 된 걸 발견하는 바람에 ‘저저의 말’이 된 것보단 나은 걸까, 라고 생각한다든지 여행작가의 소개글에 경력이 110년이라는 오타를 발견하고 11년일까 10년일까, 혹시 진짜 경력이 110년인 여행가라면 진짜 재밌겠다, 라는 상상을 한다든지… 


맞춤법과 띄어쓰기에 심하게 집착하지 않는 이유는 또 하나 있다. 말과 글은 사람들의 욕구를 담아 내는 그릇이기 때문에 시대의 변화에 따라 함께 변화하고, 편집자도 그 흐름 속에서 시대와 소통하는 책을 만들어 내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법칙’을 찾아서 기계적으로 맞춤법 검사를 하는 것이 편집자 일의 전부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애매한 영역과 마주쳤을 때(예를 들어, 자신의 언어적 감과 법칙이 다를 때) 근거 있는 자기 기준을 바탕으로 판단해 가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다 보면 각자 다른 편집자들의 의견이 모여 자연스럽게 서로의 언어에 영향을 끼치는 책세계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물론 기본적인 문법을 지키는 것은 수준 이하의 책을 만들지 않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나도 항상 1인 출판사에서 만든 책이라 허접하다는 평을 듣지 않기 위해 실수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한다. 어쨌든 편집자보다는 독자로서 책을 만나는 즐거움을 잃고 싶지 않은 나에게는 다양한 편집자들이 자신의 판단력을 발휘해 만든 책들을 살펴보는 것이 즐겁다. 스티븐 킹이 이렇게 말했다고 했던가. “글쓰기는 인간의 일, 편집은 신의 일”이라고. 그렇지만 나는 신이 만든 책보다는 인간이 만든 책이 훨씬 덜 지루할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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