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나 아카나 에세이 번역 출판 프로젝트, 첫 번째 이야기
자유롭게 일하고 싶다는 열망으로 독립을 하고 혼자서 4종의 책을 만들었다. 물론 순수하게 혼자 일한 건 아니다. '1인출판'이라고 하지만 인쇄, 제작, 유통을 비롯한 모든 과정에서 전문가와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다만 지금까지는 번역이든 편집이든 디자인이든 어떤 선택을 할 때 모든 결정은 내 몫이었다. 어디서 조언을 구한다고 해도 나만큼 큰 결정권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때로는 이것이 좋기도 했지만 때로는 힘들고 외로웠다.
혼자 일을 한 지 5년이 넘어가면서 힘이 들 때가 있다.
특히 책을 만들 때, 새로운 일을 벌이고 싶을 때,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을 때다.
- <이것도 출판이라고>(더라인북스) 중에서
간절히 바랐던 '자유 일꾼'이 되었지만 체계 없이 내키는 대로 일하다 보니 혼자 잡스럽게 벌린 일들로 어질러진 우물 속에서 살고 있는 듯했다. 우물 밖에서 사람들은 이런 저런 교류를 하며 신선한 일을 벌이고 있는데 나 혼자 뭐 하나 끌어안고 아둥바둥 낑낑대는 느낌이랄까.
인생은 묘하게도 이렇게 갈증을 느끼는 순간, 타이밍 좋게 어떤 인연을 던져 주곤 한다. 그것도 내가 과거에 했던 어떤 선택으로 인해 생각지도 못한 인연이 다가왔다.
첫 번째 인연은 책덕의 두 번째 책인 <예스 플리즈>를 텀블벅에서 펀딩을 하던 때 시작되었다. 펀딩의 리워드 목록의 가장 끝에는 가장 비싼 리워드를 작성한다. 바로 북토크가 포함된 리워드였는데, 솔직히 고백하자면 지인들 빼고는 2~3명 정도의 낯선 사람이 참여하는 리워드였다. 아직 책을 한 권밖에 펴내지 못한 출판사의 북토크이니 미리부터 10만원이라는 큰 돈을 선뜻 지불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해도 무리스러운(!) 이 리워드를 선택한 낯선 사람이 있었다. 대체 누구일까 궁금했고 그 실체(?)를 확인할 날이 다가왔다. 지인들을 빼고 보니 실제로 이 북토크 옵션을 선택한 사람은 2~3명뿐이었기 때문에 한 분, 한 분 1:1로 만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해서 어느 여름 날, 낯선 이에게 10만원이라는 거금을 투자한 Y 님을 합정역에서 만나게 되었다.
처음 만났는데도 IT 전공을 한 점과 번역에 관심 있는 점, 그리고 외국 드라마를 좋아하는 점까지 공통점이 많아서 정신 없이 수다를 떨었던 기억이 난다. 연고 없는 지방에서 일하고 있는 Y 님이 언젠가 좋아하는 번역 일을 하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 되는 대로 챙겨갔던 번역 정보가 담긴 자료도 주며 응원을 했다. 집에 돌아오면서 너무 오지랖을 부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긴 했지만.
그로부터 3년이 지난 2019년. <보시팬츠>와 <민디 프로젝트>라는 책을 동시에 출간하고 방전된 상태로 골골대던 어느 날, 메일함에...
여기서 잠깐, 먼저 두 번째 인연과 얽힌 메일부터 이야기하는 게 좋겠다. 잠시 몇 달 전으로 되돌아가 책덕의 네 번째 책인 <민디 프로젝트>를 편집하던 때였다. 메일함에 한 통의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책덕 대표님,
안녕하세요? 프리랜스 번역가 H라고 합니다.
몇 달 전, 중고서점에서 민디 캘링의 책을 발견하고(오피스 덕후) 번역서가 있는지 알아보다가
1인 출판사 책덕의 존재를 알게 됐고, 민트리님의 눈부신 여정에 무릎을 꿇고 탄복했습니다.
헐. 와. 대박...을 반복하며 블로그를 독파했어요...(최근 <미란다처럼> 중쇄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다름이 아니라, 책덕의 간판 프로젝트인 코믹 릴리프 시리즈에 도서 제안 드리고자 합니다.
프로젝트의 특성상 다른 번역가와의 협업을 염두에 두시지 않는다고 짐작되지만
이번에 제가 기획한 책이 코믹 릴리프 시리즈와 결이 잘 맞는다고 생각해서 감히 프로포즈해 봅니다.
번역 기획서 첨부하오니, 살펴보시고 관심 있거나 궁금한 점 있으시면 언제든지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민디 프로젝트>의 저자 민디 캘링은 사실 한국에서 인지도가 매우 낮아서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그 책을 검색해보고 책덕을 발견했다는 말에 굉장히 반가웠다. 게다가 코믹 릴리프 시리즈에 어울리는 기획서도 마음에 들었다. 어떻게 알고 코딱지 만한 출판사 책덕에도 원고 투고 메일이 꽤 들어오는데, 책덕의 출판 방향과 어울리는 기획서를 받은 건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기 때문이다. (출판사의 출간 방향성을 확인하고 투고해야 하는 이유.txt) (아, 추가로 이 글을 쓴 후에 책덕과 어울리는 투고 메일을 하나 더 받았다, 와우!)
H 님은 만나자 마자 느낌이 좋은 사람이었다. 만났을 당시에는 번역 아카데미에서 번역 공부를 하고 번역 스터디를 하면서 여러 출판사에 기획서를 투고하던 번역가 지망생이었다. 한 번밖에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는데도 뭘 해도 잘할 것 같은 똑부러지는 느낌이 있어서 함께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민디 프로젝트>의 추천사를 써달라고 부탁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책덕의 코믹 릴리프 시리즈는 모두 여성 코미디언의 에세이이고 <미란다처럼> 때부터 책에 그 여성 코미디언을 좋아하는 덕후들의 추천사를 실어왔다. 마침 민디에 대해 언급한 블로그에 추천사를 부탁하는 메시지를 보냈지만 답변이 많이 오지 않아 어떻게 할지 고민 중이었다. H 님은 이 제안에 흔쾌히 응답을 해주었다.
얼마 후에 H 님이 첫 번역서를 작업하고 있다기에 추천사의 이름에 '번역가'라는 타이틀을 넣게 되었다. 책을 만들면서 만나는 인연들이 각자의 길에서 자신만의 목표를 성취해가는 것을 보면 함께 성장하는 기분이 들어 굉장히 뿌듯하다.
그 후 정신 없이 세 번째, 네 번째 책을 내고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가 겨우 여유가 생겨서 H 님이 제안했던 애나 아카나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270만 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대형 크리에이터지만 국내에서는 '영화 <앤트맨>의 씬스틸러'로 조금 알려져 있는 정도였다.
H 님이 덕후답게(!) 벌써 애나 아나카의 책을 번역 중이었기 때문에 쉽게 책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덕후라면 응당 판권이 살아있든 말든 내가 재밌으니까 번역하고 보는 거 아니겠소?) 코믹 릴리프 시리즈를 확장하고 새로운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책이라는 느낌이 왔다. 그리고 이 시기쯤에 메일함에 Y 님의 소식이 도착한다.
드디어 첫 번째 인연에 대해 다시 이야기할 타이밍이 왔다. 이때 받은 메일은 영국에서 막 귀국한 Y 님의 메일이었다. 몇 년 전에 만났을 때는 회사원이었던 Y 님이 영국에서 지내다 왔다니 그동안의 행보가 궁금해졌다.
예전에 예스 플리즈 텀블벅 모금 리워드 행사(?) 자리 때
주신 명함을 오랜만에 꺼내서 메일을 써봅니다.
그 사이에 저는 1년 정도 미란다 하트의 나라(?) 잉글랜드에서 잠시 지냈답니다...!!
길에서 우연히 미란다를 만나면 인사라도 한 마디 건네보자!는 상상을 해본 적은 있지만
실제로는 매일 거의 동네에서만 지내느라 그런 행운은 꿈도 꿔보지 못하고
얼마 전에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요즘은 코로나 19 때문에 비자발적 감금 생활을 하고 있답니다.
전에 뵀을 때 해주신 말씀대로 용기를 내서 출판계로 뛰어들진 못했지만(?)
그래도 대신 어설프나마 요즘은 영상 번역 쪽 일을 하고 있어요.
런던에 있을 때 《보시팬츠》랑 《민디 프로젝트》 출간 텀블벅 프로젝트 소식은 접했는데
고맙게도 번역가 H가 북토크 소식도 전해주고 멀리까지 책도 함께 보내줘서 정말 감사히 잘 읽었어요ㅜㅜ
늦었지만 메일로나마 감사인사를 전하고 싶어서 이렇게 알맹이 없는 메일을 씁니다.
전 사실 티나 페이식 코미디는 몇 번이나 시도를 해봐도 저와는 좀 잘 맞지 않는 느낌이라서
이젠 그만 봐야겠다 생각한 시점이었는데 《보시팬츠》를 읽고 나서는
적어도 왜 다들 보시팬츠, 보시팬츠 하는지 정도는 알 것 같은 기분이더라고요.
그러고 나서 <30 rock>를 시작했는데 이젠 티나 페이라는 인물에게 좀 더 마음을 열게되었습니다(?)ㅋㅋㅋ
책덕님께서 이 책 번역본을 기획해주지 않으셨으면 아마 제게 티나 페이는
좀 더 오래, 어딘지 데면데면한 코미디언으로 남아있었을 거예요. 감사합니다!ㅋㅋㅋ
좀 늦은 감은 있지만 새해 인사도 함께 전해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여기서 밝혀지는 놀라운 사실! 바로 Y 님이 H 님과 아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두 사람이 함께 번역 아카데미에서 공부했었던 친구였고 영국에 있던 Y 님에게 H 님이 <보시팬츠>와 <민디 프로젝트>를 보내주기도 했다고니 신기한 인연에 깜짝 놀랐다. (나중에 알고 보니 몇 년 전에 Y 님이 H 님에게 책덕이란 곳이 있다고 전해줬었다고 한다.)
그후 Y 님과 일주일에 한 번 꼴로 만나 서로의 작업 이야기와 일상을 나누었다. 이번에 만난 Y 님은 놀랍게도 영상번역가가 되어 있었다. 게다가 관심사가 다양해서 정보력이 뛰어나고 여러 가지 관점에 대해 신선한 이야기도 많이 해주었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해서 서평을 자주 쓰는 서평가이기도 했다. (Y 님 서평 보러 가기)
자연스레 애나 아카나의 책에 대해 의논을 하다가 Y 님은 자신이 책을 홍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H 님에게도 이 이야기를 전했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 새 우리는 세 사람이 함께 책을 만들어 가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내가 나의 직함을 '자유일꾼'이라고 짓고 자유롭게 일하고 싶었던 이유는 현실에서 '협업'을 경험했을 때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말만 협업이지 일방적이거나 관행에 따라 정해진 결과물로 직진하는 식이 많았다. 결과물도 중요하지만 만들어가는 과정이 배려 넘치고 재미도 있고 서로가 성장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를 묶어주는 최소한의 장치도 필요할 것 같았다.
계약서을 쓸까?
그동안 접해온 계약서를 떠올렸다. 갑과 을을 맺어주는 수많은 계약서들. 책덕식으로 계약서를 써보자, 우리는 세 명이니까 가위, 바위, 보는 어떨까? 서로 물고 물리는 관계, 가위바위보처럼 일하는 것 가능할까?
우리는 매우 다른 사람들이고 아직 서로 모르는 면도 많아서 갈등도 있을 거고 오해도 있을 거다. 의견이 달라서 한 가지로 결정을 내리려면 골머리를 앓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조금 다르게 계약서를 쓴 만큼 조금 다르게 일해 보자고, 생각해 본다. 어쨌든 하던 대로 하는 것보단 재밌을 거고(일단 재밌게 하는 게 목표고) 이전에 없던 새로운 방식을 경험한 우리는 한 뼘 도 성장해 있을 것이다.
* 계약서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서 상세히 소개해 보겠습니다.
https://www.tumblbug.com/akana
277만 유튜버 애나 아카나의 《슬프니까 멋지게, 애나 언니로부터》절찬리 펀딩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