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니까 멋지게> 책 만들기 프로젝트 2
책을 함께 만들기로 결정한 후 첫 회의가 열렸다. 세 사람이 한 자리에 모이는 첫 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카페에 둘러앉았다. 모두 프리랜서라서 평일 낮 모임이 가장 좋았다.
책을 번역한 H 님은 영어덜트 소설인 《드라이》를 번역하고 그 다음 작품을 번역하고 있었고, 영상번역을 하고 있는 Y 님은 영화《해리엇》을 비롯한 여러 작업을 하고 있었다. 출판번역가와 영상번역가와 잡스러운 일꾼(나)의 협업이라니 괜히 써넣고 보니 멋지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5478651
▲ 읽다 보면 목이 타는 본격 가뭄 재난소설. 번역가 H는 청소년들에게 영감이 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을 주로 번역한다.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88471
▲ 미국 20달러 지폐 앞면에 새겨질 인물로 선정된 흑인 여성 운동가 해리엇 터브먼 전기 영화. 번역가 Y는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할 여성의 이야기가 담긴 콘텐츠를 번역한다.
우리는 프로젝트의 골자를 짜기 시작했다. 일단 당시 신문물이었던 '노션'에 진행 상황을 공유하기로 했다. (이건 나의 제안이었는데 사실 잘한 짓인지는 잘 모르겠다. 노션 활용법을 잘 모르는 채로 그냥 제안했기 때문에 제대로 활용하기 어려웠던 점이 아쉽다.)
첫 회의에서는 번역 원고를 읽어본 감상을 나누고 어떤 부분을 개선하면 좋을지, 그리고 전체적인 컨셉은 어떤 방향으로 잡을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목은 어떤 것으로 하면 좋을지 각자 고민해서 몇 가지 안을 내놓고 그 안에서 정하기로 했다.
당시 나왔던 제목 시안들 (어떤 것이 정해졌는지는 나중에 나옵니다.)
《용기 내서 살고 싶었어》
《사랑의 최상급은 슬픔이야》
《슬프니까 멋지게 해내야지》
《뭘 해야 할지 몰라 다 해버렸어》
《깨진 마음에서 흘러나온 것들》
《열세 살에 멈춘 너에게》
《13살 너를 다시 만난다면 해주고 싶은 이야기》
《13시, 너의 시간이 영원히 멈추었다》
《남아있는 사람, 남아버린 말》
《애나 언니로부터》
.......
당시《우리는 모두 자살 사별자입니다》라는 책이 나올 예정이라 우리 사회에서 '자살'과 트라우마에 대한 논의도 이루어지기 시작할 때라 자살 유가족, 자살 생존자인 애나 아카나의 이야기도 울림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텀블벅을 통해 펀딩을 한다면 책의 색과 맞게 의미 있는 방식으로 진행하고 싶다는 이야기도 나누었다.
이렇게 생산적인 회의를 한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책과 출판 과정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의견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즐거웠다. 하지만 지금 이 모든 건 무보수로 이루어지는 일이었다. 내가 두 사람을 고용한 것도 아니고 일을 의뢰한 것도 아니었다. 자발적으로 출판 프로젝트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두 사람이 본업이 따로 있고 사이드프로젝트로서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다지만 책덕에서 출판권을 가지고 있고 추후 책 판매 수익이 난다면 책덕으로 들어올 것이기 때문에 뭔가 그럴 듯한 수익 분배 시스템을 갖추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 가지, 계약서를 써야 겠다고 생각한 것은 각자가 프로젝트에 임하는 최소한의 책임감을 가졌으면 이기도 했다. '좋은 마음', '선의'로 시작하여 흐지부지되거나 해야 할 일을 적당한 시기에 마무리 짓지 못하는 경우도 봤기 때문이다. 좋은 마음이 좋은 관계를 해치지 않으려면 적당한 책임감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며칠 고민을 하며 최대한 간략하게 계약서를 써보았다. 갑과 을의 일방적인 흐름이 아닌 다른 형태의 상징을 생각하다가 가위, 바위, 보가 떠올랐다. 서로 물고 물리며 둥글게 돌고 도는 순환하는 흐름을 위한 계약서다.
저작물 표시
제목 : So much I want to tell you - Letters to my little sister
저작자 : Anna Akana
이 계약서는 위 저작물을 국내에서 번역 및 출판하는 과정을 함께하는 김민희(가위), 이민희(바위), 서미연(보) 사이의 약정을 맺는 내용입니다.
제1조(출판 목적 및 의사결정) 가위, 바위, 보 세 사람은 애나 아카나의 책을 만들고 사람들에게 알리는 과정에 함께 참여하며 최대한 재밌는 방식의 협업을 시도합니다. 기획, 편집, 마케팅 등 의사결정을 내릴 때는 세 사람의 만장일치로 의결합니다.
제2조(역할) 가위는 책덕 출판사 운영자로서 위 저작물을 계약하고 기본적인 출판 과정(편집, 제작, 유통 등)을 책임집니다. 바위는 위 저작물을 기획 및 번역합니다. 보는 위 저작물의 기획 및 마케팅을 담당합니다. 세 사람의 주된 역할이 정해져 있긴 하지만 각자의 업무가 더 나아질 수 있도록 서로서로 보완해줍니다.
제3조(유효 기간) 위 저작물의 번역 판권 계약 만료일인 2025년까지로 정하고 연장을 하게 될 시 이 계약서도 연장합니다.
제4조(원고 발행 기간) 2020년 안에 발행하는 것을 목표로 작업합니다.
제5조(비용 부담) 위 저작물의 번역 판권 계약 비용 및 출판 제반 비용은 가위가 부담합니다. 번역 노동에 대한 비용은 바위가 부담합니다. 마케팅 노동에 대한 비용은 보가 부담합니다. 제작비는 펀딩을 통해 마련하되 부족한 비용은 가위가 부담합니다.
제6조(증정 부수 등) 증정본은 가위, 바위, 보 각자 10부씩 가져갑니다. 이후 추가적으로 구매하고 싶을 때는 정가의 50%를 지불하고 구매할 수 있습니다.
제7조(수익 공유) 도서 매출액에서 로열티 및 제작 비용을 제외하고 남은 순수익을 4(가위):3(바위):3(보)로 나눕니다. 가위가 4인 이유는 재고 및 주문 관리, 세금 처리 등의 제반 업무 비용을 부담하기 때문입니다. 수익금 지급은 출간 후부터 반기별(매년 6월, 12월)로 정산합니다.
제8조(기타)
계약서에 명시하지 않은 내용은 서로 의논하여 결정하며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을 때는 누구라도 언제든지 문제를 제기할 수 있으며 나머지 두 사람은 적극적으로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합니다.
2020년 10월 3일
가위 김민희 (인)
바위 H (인)
보 Y (인)
수익금이 얼마나 될지, (아니 나오기는 할지) 미지수지만 세 사람이 모두 동의하여 맺은 첫 계약서다. 이 계약서가 흥미로웠는지 얼마 <스트리트H> 인터뷰에도 실렸다.
https://street-h.com/magazine/104833/
그러면 출판 외에 어떤 일들을 병행하고 있는가?
외주 편집일은 2013년에 출판사를 차렸을 때부터 꾸준히 해오고 있고, 전자책, 북트레일러 제작도 하고 강의도 하는 식으로 출판의 다양한 영역의 일을 하고 있다. 크게 보면 다 출판과 관련된 일인데 그중 내가 좋아하는 콘텐츠를 제작으로 풀자고 생각하고 있다. 사실 내는 출판사를 키우고 싶다는 그런 생각은 별로 없다. 그보다는 나 자신이 더 유능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나처럼 이런 식의 출판을 응원하는 분들과 서로를 밀고 당기며 이끌어주는 그런 네트워크를 만들고 싶다. 이름도 정했다. ‘자유 일꾼 클럽’.
‘자유 일꾼 클럽’을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
4번째 책 <민디 프로젝트>를 낼 때, 메일 한통을 받았다. 자신도 민디를 좋아해서 해당 출판사를 응원한다는 번역가 지망생 분이었다. 사실, 민디 캘링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에 이런 '찐 팬'을 만난 게 반가웠다. 그래서 서로 만나고 추천사도 받고 연락을 유지해오던 중에 이 분이 자신이 좋아하는 유튜브 크리에이터의 책을 추천했고 책이 괜찮아 내기로 했다. 그런데 얘길 해보니, 이 분 지인이 두 번째 책 <예스, 플리즈>의 텀블벅 펀딩에서 가장 큰 금액을 밀어준 후원자였다. 영상 번역을 하는 분인데, 이 분은 그럼 자기가 마케팅을 맡겠다고 나섰다. 이분들이 책을 내는 것 자체가 고맙다고 비용 받기를 거절하셔서 ’가위 바위 보 계약서‘라는 걸 만들어보고 있다. 갑을 관계가 아니라, 서로 상생하여 서로의 노동력을 써서 만들고 수익이 나면, 제작비를 제하고 나눠 갖는 그런 계약서다(웃음). 어차피 남들이 안하는 출판을 한다면 과정도 이렇게 재미있게 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덕은 덕을 알아본다고 독자도 제작에 참여하며 함께 출판에 참여하는 그런 커뮤니티를 만들어보고 싶다.
가위바위보 계약서 샘플은 책덕 아카이빙 페이지에 공유해 놓았다. 더 나은 형태로 개선하거나 더하거나 빼면 좋을 내용이 있다면 언제든지 알려주면 좋겠다. 더 나아지기 위해서라면 조금 부족할지라도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이 헛짓이 아니라고 믿는다.
《슬프니까 멋지게, 애나 언니로부터》텀블벅 프로젝트가 오픈했습니다. 애나의 창작 노하우를 따라할 수 있도록 만든 크리에이터스 노트 텀블벅 후원자만을 위해 만들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https://www.tumblbug.com/akana
많관부, 많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