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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리 Sep 06. 2017

웃기지만 우습지는 않다

여성 코미디언 에이미 폴러의 책 <예스 플리즈>

양껏 나댈수록 힘이 세진다


학교 뮤지컬 무대에서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도로시 연기를 하던 11살 소녀는, 대본에 적힌 대로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말을 즉흥적으로 내뱉었을 때 사람들을 웃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자신의 원하는 방식으로 나댈 때 얻을 수 있는 짜릿함을 쫓아왔다. 

                              

거침없는 풍자와 생방송 콩트로 유명한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이하 SNL)>에서 여성 코미디언 전성기를 이끌고, 시트콤 <팍스 앤 레크리에이션>에서 초긍정 페미니스트 여성 공무원역을 연기하고 각본 및 감독에도 참여했으며, 티나 페이와 함께 3년 연속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날고 기는 할리우드 스타들을 여유만만하게 까며 웃음을 끌어냈던 코미디언 에이미 폴러의 이야기다. 


https://www.youtube.com/watch?v=CnTLwn8nyww&t=350s


그녀는 부통령 후보 사라 페일린 앞에서 임신 9개월째 만삭의 배를 출렁거리며 폭풍 같은 랩을 내뱉었고 힐러리 클린턴 앞에서 똑같이 분장한 채로 재기 발랄한 유머를 날렸다. 미국 방송 사상 최초로 티나 페이와 함께 <위켄드 업데이트>의 여성 듀오 앵커가 되었으며 젊은 여성들을 밀어주고 격려하기 위해 ‘에이미 폴러의 스마트 걸스’ 재단을 설립했다. 국내에는 애니메이션 영화 <인사이드 아웃>의 기쁨이(joy) 목소리 연기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dQlgkq_EW64&t=6s



웃기지만 우습지는 않다



에이미 폴러는 누군가 부여한 역할이 아니라 온전히 자신이 인정한 역할이 될 때, 사람들을 웃길 수 있으며 그것이 강력한 힘이 된다는 사실을 일찍이 깨달았다. <예스 플리즈>는 그런 그녀가 인생 중반에 이르러 그동안의 삶을 통해 얻은 삶의 기술을 풀어놓은 책이다. 물론 그녀답게 직접적인 조언보다는 풍자와 비틀기와 솔직한 자기고백이 더 많다. 어릴 적 경험했던 마약 이야기부터 섹스에 관한 조언, 이혼에 대처하는 방법, 부당한 취급을 당했을 때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 쌍욕을 했던 자신의 과거와 생방송에서 저지른 실수 때문에 3년 동안 속앓이를 하다가 사과를 건네기까지 겪었던 감정의 변화까지, 읽다 보면 솔직해도 너무 솔직한 거 아닌가 싶을 정도다. 정신없이 웃음을 터뜨리다가도 행간 사이, 사이에서 문득 폐부를 깊숙이 파고드는 날카로운 통찰력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스 플리즈”



이 책 제목이 “예스 플리즈”라고 해서 무작정 삶을 긍정하라는 내용일 것이라고 짐작했다면 그 예상은 완전히 빗나갈 것이다. 여성으로서 살다 보면 긍정의 힘으로는 쉽사리 극복할 수 없는 고비를 만난다는 것을 에이미도 충분히 알고 있다. 코미디의 세계에서 에이미는 항상 남자들로 둘러싸여 있었고 할리우드에는 여전히 ‘여자는 못 웃긴다’라는 속설이 퍼져 있다. 그런 환경을 극복하고 정상에 선 에이미조차 권력을 가진 남성의 포옹을 거절하지 못했다고 고백하는 일화는 우리에게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기울어진 사회에서 약자의 정체성을 지니고 살아가다 보면 피해의식 때문에 자신을 더욱 고립시키고 어디서나 가시를 곤두세우게 되며, 심하면 괴물과 닮아가기까지 한다. 그런 태도는 결국 다시 우리 자신을 갉아먹으며 기존 세계를 공고히 하는 데 보탬만 될 뿐이다. 불리한 조건에서도 방패를 내리고, 사회를 바꾸며 함께 살아갈 권리를 포기하지 않고 세상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누구보다 우리 자신을 위해 얼마나 필요한 일인지, 에이미는 자신의 삶을 통해 증명하고 있다. 



‘책덕’ 셀프 인터뷰


Q1. 코믹 릴리프 시리즈 이름의 뜻은 무엇인가요? 어쩌다 이런 이름을 붙이게 되었나요?


‘코믹 릴리프’는 첫 책인 <미란다처럼>을 번역하다가 알게 된 연극 용어로, ‘진지한 이야기에서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삽입하는 해학적인 장면이나 등장인물’을뜻합니다. 갈등이 심화되거나 소통이 되지 않아 답답한 순간, 갑자기 어디선가 터져 나온 웃음이 분위기를 뒤집듯이 웃음으로 극적인 전환을 꿰하고자 하는 바람이 담겨 있습니다. 

영드, 미드를 즐겨보는데 제가 주목한 여성 코미디언들이 출연한 드라마를 보면서 이 ‘뒤집기의 순간’을 경험한 적이 많아서 ‘코믹 릴리프’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습니다. 사실 ‘웃기는 여성’이라는 정체성 외에는 결혼 유무, 추구하는 개그 스타일, 나이, 인종이다 다르기 때문에 그’ 웃기는 여성’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도 독자의 취향에 따라 다양하게 책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약자, 소수자의 포지션에서 대화를 할 때 유머는 주도권을 쥘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자 기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의 편견을 뒤집는 여성 코미디언들로부터 기술을 배우고 싶다는 개인적인 프로젝트에서 시작된 시리즈이기도 합니다.


Q2. 드라마와 여성 코미디언에 주목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미 해온 대로 하는 것은 쉽지만 새로운 구성으로 창작물을 만든다는 것은 기존의 것을 답습하는 것보다 몇 배 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성별과 인종이 차별 없이 등장하는 작품을 만들기란 그리 쉬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에이미 폴러가 작가이자 감독이자 주연 배우로 참여한 시트콤 <팍스 앤 레크리에이션>에서는 페미니스트 레즐리 노프가 성평등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가끔씩 불법을 저지르기도 하고 억지를 부리기도 합니다. 지금보다 다양한 젠더, 인종, 정체성이 두루 섞여 사는 사회는 아직 오지 않은 길이죠. 지금 상태만을 답습하지 않고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해 상상하고 새로운 시도를 하는 시트콤 속은 마치 카오스처럼 혼란스럽게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뒤집고 섞은 후에야 더 많은 사람이 참여할 수 있는, 새로운 판을 위한 질서가 만들어지지 않을까요? 

“새로운 지도를 꺼냅시다.
우리가 사용해왔던 오래된 지도 말고
우리가 가야 할 곳이 그려진 새롭고 빳빳한 지도 말입니다.
새로운 여행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두고 봅시다.”

- <팍스 앤 레크리에이션> 시즌 4 에피소드 22


Q3. 책방에서만 주는 책갈피가 있다고요?

작은 책방, 지역 서점에서 책을 사려면 정가를 주고 사야 합니다. 그래야 책방에도 어느 정도 마진이 남습니다. 작은 책방은 대형서점보다 더 비싼 도매가로 책을 공급받기 때문이죠. 무차별적인 도서정가제의 뒷면인데, 어쨌든 그런 거꾸로 된 관행을 조금이 나마 뒤집어보고 싶어서 혼자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 책방에서만 굿즈를 주는 것은 2년 전 <미란다처럼> 때도 시도 했던 것인데, 이번에도 책방에서 정가를 주고 사는 손님들에게 대형서점에서 제공하는 10% 할인의 유혹을 이겨내실 수 있도록 책방용 책갈피 굿즈를 만들었습니다. 책방에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진 않지만 그냥 혼자 하는 캠페인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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