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목요일 일월 십팔일 아침. 나는 능숙한 솜씨로 네이버에서 자동 재생되는 엠비시뉴스를 선택했다. 화면을 몇 번 터치하니 듣기 좋은 아나운서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오늘의 날씨를 알려준다는 말에 귀를 쫑긋하게 세웠다. 예쁜 아나운서는 ‘일월십팔일’이라 예쁘게 말했고 내 귀는 ‘이런 시팔일’로 들었다. 혼자 웃음을 흘리며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했다. 그렇게 오전과 오후가 무탈하게 흘러갈 때쯤. 반가운 진삼형에게 전화가 왔다.
- 오늘 저녁에 뭐허냐? 진규형이 너 보고자프다고 헝게 같이 보자. 다섯 시 오십 분에 송천동써 보기로혔다. 뭔 족발집이라고 혔는디....
- 네. 형님. 장소 잡으시면 연락 주셔요. 송천동이믄 바로 옆잉게 바로 달려갈게요.
그리고 잠시 후, 도착한 문자가
- 송천동에 족발타령으로 와라.
나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혹시나 시릴 손이 걱정돼서 장갑까지 챙겼다. 사무실을 나와 지쿠터 전동킥보드를 탔다. 언제나 그렇지만 울퉁불퉁한 인도는 꽤 많은 집중력을 요구한다. 나는 온몸에 잔뜩 힘을 싣고 킥보드를 몰았다. 앞쪽에서 달리던 전기자전거 한 대가 보였다. 묘한 승부욕이 발동한 나는 죽자 살자 레버를 눌렀다. 드디어 추월을 하고 전기자전거에게 비웃음을 흘리려던 순간, 뻘건 신호등에 걸렸다. 옆을 흘깃 쳐다보니 전기자전거 운전자는 나에게 관심이 일도 없다. 그러고 보면 우린 가끔 스스로 세운 우스꽝스러운 목표를 가지고 성취하려 애쓰며 산다. 남이 보면 웃길 일이다. 요런 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 때였다. 진삼형에게 전화가 왔다. 나는 오른손 장갑을 벗고 화면을 건드렸다.
- 응. 선태야. 약속장소가 바뀌었다. 호남각 아냐? 호남각 뒷골목에 왕만족뒷고기로 와라.
- 네. 형님. 알아서 찾아갈게요.
나는 공손하게 답변하고 네비에게 도움을 다시 청했다. 다행히 족발타령 근처였다. 녹색으로 얼굴색을 바꾼 신호등이 약속장소로 후딱 이동하라 했다.
무사히 도착한 왕만족뒷고기는 나름 동네에서 소문난 노포맛집인 듯했다. 힘껏 문을 열고 들어선 식당에는 남녀노소가 엉켜 고기를 굽고 있었다. 얼핏 봐도 한눈에 진삼형을 알아볼 수 있었다. 나보다 일곱 살이 많은 백발머리 진삼형 뒷모습이 보였다. 성큼성큼 자리에 찾아가니 진삼형이 형이라 부르는 진규형과 동암형이 진삼형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처음 인사드리는 자리였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진삼형이 형이라 부르는 형들이어서 그런지 오랫동안 알고 지낸 형 같았다. 진규형은 미술을 전공하고 동암형은 체육교육을 전공했다. 진삼형은 국문학을 전공했기에 학과 선후배로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우린 즐겁게 학창 시절의 무용담을 이야기했다. 진규형은 연신 고기를 구워 공급했다. 진규형이 잠깐 쉬는 사이, 내가 가위와 집게를 들어 고기를 잘랐다. 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진규형 하는 말이,
- 땡. 탈락, 고기 자르는 거 보니까 실격.
나는 가위와 집게를 빼앗겼다. 진삼형도 동암형도 진규형이 내린 엄격한 판결에 동의하는 듯했다. 세 사람이 놀고먹는 삼백정을 짓고 인생을 알차게 보내는 이야기에 정신줄을 놓은 지 한 참이었다. 백수 세 사람이 노니는 정자여서 삼백정이라 했던 것 같다. 나는 형들의 이야기만 듣는 게 미안해서 예전에 진삼형이 이야기한 것을 머릿속 저편에서 끄집어왔다.
- 예전에 진삼형이 이렇게 말했거든요. 나는 세상에 올 때 내가 날을 잡아서 오지는 않았지만, 죽을 때는 내가 날을 정하고 곡기를 끊을 생각이다.
내 이야기를 듣던 진삼형이,
- 물론 지금도 그려.
형들도 나도 적잖이 놀랐다. 진삼형은 하던 말을 이었다.
- 근디 이게 혼자 힘으로는 안되는 것 가터. 옆에서 도와줘야지 혼자서는 힘들것어. 죽을라고 수면제랑 약은 받어다가 모아 놨어도, 문제는 수면제를 어디다 놨는지 기억이 안 난다는 거시여. 글고 수면제가 어디 있는지 알어도 누워서 움직일 수가 없으믄 어떡허냐고.
진삼형 말에 형들도 나도 낄낄대고 웃었다. 갑자기 동암형이 말하길,
- 매스컴 못 봤어? 한 할머니가 있었는디, 이 분이 정신은 멀쩡혀. 근디 병원에 계속 누워있응게 자식들 헌티 피해를 안 줄라고 창문밖으로 뛰어내리려 했댜. 어렵게 어렵게 한발짝썩 옮겨서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려 했는디 간호사한테 목덜미를 잡혔댜. 슬로모션으로 움직잉게 잡혔지.
이번엔 동암형 말에 형들도 나도 허연이가 보이게 웃었다. 그렇게 한참을 떠들고 우린 고깃집 바로 앞에 있는 가맥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가맥집 앞에서 진삼형이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나는 진삼형 라이터를 빼앗듯 손에 쥐고,
- 형, 내가 불 붙여줄게.
나는 왼손을 동그랗게 움켜쥐고 손바닥에 공간을 만들었다. 라이터 가스 버튼을 눌러 손바닥 안으로 가스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 불을 붙였다. 손바닥 안에서 퍼런 불꽃이 일어났다. 진삼형은 기다렸다는 듯이 담배 끝을 불에 갖다 대고 힘껏 빨았다. 뻘건 불이 담배 끝에서 동그랗게 커졌다. 잠깐의 옛 추억 이벤트를 마치고 우린 가맥집 문을 열었다. 막내인 내가 먹태를 먹고 싶다 했고 형들은 기꺼이 먹태를 주문했다. 얼큰하게 취기가 오른 형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길 주저하는 듯했다. 군산에서 온 진삼형은 진규형 집에서 하룻밤을 묵을 계획이었다. 우린 가맥집에서 나와 진규형 집으로 향했다.
진규형 집에 도착해 하얀 테이블 주위에 둘러앉았다. 갑자기 진규형이,
- 니들 계란 프라이 먹을래? 먹을 사람?
얼큰하게 취한 사람 중 계란 프라이를 거부할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하다. 우린 진규형 제안을 덥석 물었다. 드디어 각자의 턱 밑에 예쁜 프라이 우주선이 도착했다. 나는 한 입에 날름 삼켰다. 쪼끔 뜨거운 프라이를 큼지막한 입에 털어 넣으면 입속에서 노른자가 터진다. 그 풍미는 감동 그 자체다. 프라이 만찬이 끝나고 진규형은 갖가지 술과 커피를 대령했다. 우린 밤이 무색하게 맛난 이야기로 시간과 공간을 채웠다. 한 살 어린 진규형은 동암형에게 격이 없는 반말을 날렸고 동암형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모두 받아들이듯 진규형 말에 장단을 맞췄다. 가끔은 물에 비친 모습처럼 서로의 역할이 바뀌었다. 모든 게 신선했다. 새로운 세상을 짧은 순간에 다녀온 느낌이었다.
드디어 헤어질 시간. 동암형과 나는 형들의 배웅을 받으며 진규형 집을 나섰다. 조금 걸어 나와서 동암형이 택시를 타고 떠난 후, 나는 걷기 시작했다. 날씨는 추웠지만 걷는 내내 마음은 따뜻했다. 신기한 세상을 여행하고 온 느낌이랄까. 앞으로 나이를 먹으면 내가 살게 될 세상을 답사하고 온 느낌이었다. 참 좋은 사람들과 인연이 닿은 날이다. 그나저나 총기를 잃지 않고 몸이 건강해야 곡기도 끊을 수 있다는 깨달음도 있었다. 그렇게 한 시간쯤 걷다 보니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덕진호수와 연화정도서관. 한 참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었던 그 밤은 그렇게 새벽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