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옷 같은 친구

by 김선태

새벽에 일어나 화장실에 가서 빵빵한 방광을 비우고 침대 머리맡에 앉았다. 뭘 할까 잠깐 고민하다가 며칠 전부터 읽고 있는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책 속 주인공 엄마는 오래 입어 팔꿈치나 무릎은 늘어질 대로 늘어진 희미한 분홍 내복 차림으로 요 위에 엎드려 일본어 회화책을 펼쳤다. 순간 내가 입고 있는 늘어질 대로 늘어진 잠옷 소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보드랍기가 오사게 좋은 축 늘어진 잠옷은 입는 순간부터 마음이 편안하다. 몸뚱이에 걸쳤던 삶의 갑옷대신 아늑한 쉼터에 어울리는 옷. 잠옷. 그러고 보면 친구 중에도 잠옷 같은 친구가 있다. 언제 만나든 어색함은 1도 없는 그런 친구. 맘 속 깊은 곳부터 무장해제를 하고 그저 바라만 봐도 기분이 좋아지는 친구. 나도 그런 잠옷 같은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다.

낙엽을 바람으로 치우는 시끄러운 기계소리가 창밖에서 우렁찬 기계음을 쏟아낸다. 슬슬 책을 접고 궁둥이를 땔 시간이다. 오늘 하루 보드라운 잠옷 같은 그 녀석과 통화라도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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