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이면서 늘리는 다이어트
은퇴할 나이쯤 되면 관계가 정리되기 시작한다. 서로 주고받을 게 있는 나이에는 억지로라도 관계를 맺으려 노력하게 되지만 은퇴하는 시점에 이르면 먹고살기 위해 맺었던 관계는 대체로 정리된다. 관계를 쉽게 맺고 끊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대체로 관계를 유지하려면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필요에 의해 생긴 관계는 서서히 정리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나의 경우는 다른 사람의 관심을 받으려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에 속한다. 대체로 대인관계를 주도하는 편이라 먼저 연락해서 모임을 만드는 쪽이다. 자주 못 만나는 사람이 머리에 떠오르면 먼저 연락해서 안부를 묻고 몇몇 사람을 엮어 약속을 정해 만나는 식이다.
늘 그렇게 살아오다가 어느 때인가부터 내가 먼저 연락하는 것을 자제하고 기다려본 적이 있다. 그렇게 몇 개월을 보내면서 내가 먼저 연락하고 싶은 충동에서 다시 연락한 경우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 상대로부터 먼저 연락이 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상대는 지금까지의 관행에 의해 내가 먼저 연락하기를 기다렸을 수도 있고 아니라면 내가 먼저 연락하기 전에는 만남의 의미가 없는, 내키지는 않지만 먼저 연락했기에 만나줬을 수도 있다. 그렇게 좀 더 시간을 보내자 자연스레 만남이 정리되고 있다.
어떤 심리학자로부터 이런 얘기를 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사람과의 관계를 잘 맺지 못하는 사람을 다른 관점에서 보면 혼자 잘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나의 생각을 뒤집는 얘기였다. 어쩌면 나는 관계를 잘 맺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열심히 관계를 맺으려 노력했지만 이 분의 관점에서 나는 혼자 잘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기도 한 셈이다.
혜민스님이 사람의 관심을 구걸하지 마라. 관심을 구걸하는 것은 자신의 인격을 거지 취급하는 셈이라고 했다. 나는 그동안 나의 대인관계능력(?)이라 오해하며 사람의 관심을 구걸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관심은 상대방의 인정을 갈구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심한 사람을 관종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누구나 어느 정도는 관종 성향이 있다고 봐야 한다. 남들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욕구는 인간의 기본 욕구이기도 하고 그것이 긍정적으로 작용하면 자신의 삶에 동기를 불어넣는 힘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과하면 ‘구걸’이 되고 나는 ‘거지’가 된다.
관심을 받고자 상대의 인정을 갈구하게 되면 상대를 과도하기 의식하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살 수 없다. 자신의 강점과 장점은 과소평가하게 되고 타인과의 비교에서 약점에 의한 콤플렉스가 커지게 되어 자신감을 가지고 살 수 없게 된다. 이렇게 길들여지면 나이가 들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추구할 수 있을 때가 되어도 여전히 남에게 좌우되는 삶을 살게 된다. 나를 돌이켜보면 대체로 그런 궤적의 삶을 살아왔던 것 같다. 이제라도 거기서 탈출하려는 나의 몸부림이 있어 다행이라 생각한다.
나이가 들면서 정리되는 만남은 같은 과거를 보냈다는 이유만으로 함께 해온 만남이다. 같은 학교, 같은 동네에서 만들어지는 향수를 공유하는 모임은 격식이 생략되어 편하기도 하고 오래된 친구가 주는 장점도 많은 모임이기는 하다. 이런 류의 과거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만남은 편하기는 하지만 공허하다. 그 시절을 회상하는데 도움은 되지만 거기까지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한결같이 그 시대의 ‘엄석대’로 돌아간다. 미래의 삶이 아니라 자신이 과거에 화려했던 모습과 상대의 초라했던 모습을 들춰내고서 승리감에 젖어간다. 또 현재의 돈과 지위를 내세워 상대로부터 우월감을 느끼고 싶어하는 인간의 동물적인 본능에 집착하고 있다는 마음을 갖게 만든다. 그래서 모임을 마칠 때면 왜 이런 만남이 필요할까로 회의하게 되고 서서히 그런 모임의 가치를 느낄 수 없게 된다. 이런 류의 모임은 자연스레 멀어지거나 최소화하게 된다.
의도적인 휴먼네트워킹의 필요성이 줄어들자 이제는 정신적인 교감이 가능한 사람들과의 만남이 늘어난다. 그래서 새로운 네트워킹이 시작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 나이에 또 새로운 관계를 만들려 하느냐며 타박하지만 웃어넘긴다. 나이가 들면서 맺게 되는 만남은 단순히 주고받는 관계를 벗어난다. 좀 심한 표현일 수 있지만, 계속 주기만 할 수도 있고 계속 받기만 할 수도 있는 관계가 된다. 또한 자주 보지 않아도 유지되는 관계다. 이런 관계는 쉽게 사그러지지 않는다. 애써 주고받는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모임은 생각을 함께 하는 모임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가치관이 비슷한 사람들과의 모임이다. 그 수준도 같을 수야 없겠지만 적어도 방향은 같은 사람들의 모임이다. 이들의 특징은 변화를 즐기며 끊임없이 성장하려 노력한다. 이들은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력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나이가 들면서 육체적 다이어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관계 다이어트다. 살을 뺄 때와 마찬가지로 무조건 빼다가는 몸을 망치는 것처럼 관계도 무조건 빼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관계를 위한 다이어트가 필요하다. 육체적인 다이어트에서도 먹는 것을 무조건 줄여서는 안 되는 것처럼 관계 다이어트에서도 어떤 관계를 더 늘려야 건강한 관계 다이어트가 된다.
나이가 들수록 건강한 관계가 늘리면서 관계다이어트하고 있다면 잘 살고 있는 증거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