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변호사?, 공무원?, 군인?
우리나라 부모처럼 자녀의 미래를 걱정하고 심지어는 간섭하고 주도하려는 부모들이 있을까? 자세히 조사해 보지는 않았지만 감으로는 없는 것 같다. 세계 최고의 교육열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만약 간섭율이란 지표가 있다면 이것도 세계 최고가 아닐까 싶다. 자녀의 인생은 내 인생이 아니므로 내가 책임질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걱정하고 도와주는 정도로 충분하다. 그 이상은 인생을 책임지는 주인이 해야할 몫으로 남겨둬야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마치 부모가 자기 인생인 양, 대신하고 결정하려하는 분들이 주위에 많다.
이런 부모들의 입김은 자녀의 미래 직업 선택에도 영향을 미친다. 의사자격증, 변호사자격증과 같은 라이센스를 취득하는 것이 최고의 직업이라고 하며 자녀의 적성과는 무관하여 능력만 되면 무조건 의대, 법대로 진학시키려고 했다. 그리고 평생직업이 보장되는 직종이라 할 수 있는 경찰대학, 공사, 육사, 해사와 같은 군인경찰직도 부모들이 좋아하는 직업군이고 공무원과 교사와 같은 직업이 안정적인 미래를 위해 최고의 직장으로 여기며 자녀들을 밀어 붙였다.
이러는 가운데 기업에 대한 선호순위는 맨 나중으로 밀려 있는 것 같다. 경기에 따라 수시로 구조조정, 명예퇴직 등의 이름으로 직원을 내보내는 기업을 바라보면서 자녀들을 걱정하는 부모들의 입장에서는 선호직업군에서 마지막으로 밀리는게 당연한 것 같기도 하다. 30년 가까이 기업에서 보낸 내 생각도 그렇게 생각하는 부모들과 비슷하다. 단지 다른 부분이 있다면 현재 안정적인 직장군이 미래에도 그럴까 하는 부분을 잘 생각하고 결정하라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의사,변호사, 경찰, 군인, 공무원, 교사의 직업은 미래에도 안정적일 것 같기는 하다. 다만 달라지는 것은 어느 조직이든 과거보다는 훨씬 더 경쟁이 치열해질 것이며 고객(수요자) 중심조직으로 바뀔 것이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느 조직에 있든지 경쟁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면 스스로 그만 둘 수 밖에 없는 조직분위기가 될 것이라는 얘기다. 결국 어느 조직에 몸담던 조직 속에서 인정받고 전문능력을 확보한 사람들만이 평생직장의 혜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보면 기업도 마찬가지다. 기업에서 자신의 직업경력을 쌓더라도 기업이 원하는 전문능력과 소통능력을 갖는다면 언제든지 환영받을 뿐 아니라 훨씬 더 빠르게 자신이 원하는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는 곳이 기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기업 속의 다양한 직무들 중에도 평생직업의 안정성 확보에 더 도움이 되는 직무가 있을까? 있다. 그것은 사람이 사는 조직, 앞에서 말한 의사,변호사, 군인, 공무원, 교사의 직업군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게 무엇일까?
세상의 모든 일을 관계 속에서 일어난다. 기업이 모든 일들도 대부분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일어난다. 이러한 사람과의 관계를 맺고 도와주는 일을 주업무로 하는 곳에 일하는 직무군이 롱런할 수 있는 직무들이다. 이런 직무군은 기업 내부에 있을 때는 대체로 기피하는 업무에 속한다. 왜냐하면 주로 을의 입장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영업, 홍보, 대외협력과 같은 직무군이다. 동등한 입장에서 일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는 상대 또는 상대 기관에 자사의 상품을 팔거나 자사입장이 유리한 입장에서 서도록 어필하는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기피하는 이유중 하나는 늘 술을 동반한 저녁자리가 많다는 점이다. 상대에게서 정보를 얻어내거나 뭔가 부탁해야 하는경우가 많아 술이 빠질 수가 없다. 이러한 일들은 평소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신뢰가 형성되어 있어야 하므로 또한 술이 윤활유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원래부터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저녁술자리가 많은 이런 일을 선호할 리 없다.
세일즈나 대외협력, 홍보와 같은 업무를 하는 사람을 만나면 대개 상대를 배려하거나 겸손함이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이들의 주업무는 관계를 맺는 업무이기 때문이다. 기업내 다른 업무, 마케팅, 기획, 회계, 제조, 기술 등 대부분의 업무에서도 일을 잘한다는 직원들의 공통점은 업무능력도 없지 않겠지만 다른 부서와의 관계를 잘 맺는 직원들이다. 그렇지만 영업, 홍보, 대외협력업무는 관계를 맺는 일이 주가되는 업무이다. 그래서 이들의 직무군은 생존력이 높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대학원에서 같이 공부한 동기 한 사람을 만났다. 이 분은 외국계 제약회사에서 20년 가까이 근무해온 분으로 같이 공부할때는 마케팅 부서에 있다가 지금은 수 년 째 대외협력업무를 하고 있는데, 경력이 쌓일수록 정말 좋은 업무라고 하면서 만족도가 높다고 한다.
헤어진 후, 같이 그 동기를 만났던 분의 말을 통해서 그 동기의 태도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공감할 수 있었다. 과거 마케팅 부서에서 잘나가는 엘리트로 자부심 넘치게 근무할 때 보기 힘든 겸손함과 상대를 배려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대외협력업무를 하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몸에 배여든 '관계능력'인 것이다.
이러한 직무군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생존력은 기존 근무지에서 나왔을때 여지없이 발휘된다. 그 동안 쌓아왔던 관계망에 의해서 금세 새로운 일자리를 찾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더 나은 직장으로 옮기기도 쉽다. 이 처럼 휴먼네트워크의 힘이 가장 크게 작용하는 업무 군이 영업, 대외협력이나 홍보업무다. 결국 그 부서 사람들은 일찌감치 자신의 업무를 통해 일종의 생존법을 익히는 셈이다.
이들 직무군 종사자들은 힘든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퇴직과 같은 어려운 일이 생겼을때는 물론 평소에도 서로에게 큰 도움이 되어준다. 다른 직무군 종사들보다 더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고, 겉으로는 경쟁이나 자사의 이익 때문에 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뒤로는 서로 밀어주고 도와준다. 그게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빛나 보이지 않지만 자신의 인생을 가장 빛나게 만들 업무, 관계가 주된 업무를 몇 개를 거론했지만 결국은 삶의 중요한 방법을 얘기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