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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원희 Jun 20. 2016

속삭이는 자작나무

속삭이는 자작나무를 보지 않고 자작나무를 얘기하지 않는 삶을...


동해여행을 마치고 귀경 길에 아내가 문득 '원대리 자작나무숲'을 보고 싶다고 했다. 함께 근무하는 동료들이 여러 번 언급하면서 한번 가보고 싶다는 곳이었기에 실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사실 여행 막바지의 피로감 때문에 산을 오른다는게 마뜩치는 않았지만 아침 시간에 바로 귀경하기에는 왠지 아쉽다는 생각도 들어 설악산 인제에 위치해 있는 원대리로 향했다.


아직 오전 9시를 조금 지났을 뿐인데도, 주차장을 비롯해서 등산로 입구에는 형형색색의 등산복 차림의 많은 사람들로 붐비었다. 제법 소문난 곳인가 보다 하는 생각을 하면서 입구안내판을 보니 0.9키로 40분 정도면 '속삭이는 자작나무숲'이란 곳을 볼 수 있다해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입구를 조금 지나니 오른 편 산 위로 자작나무 숲이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 더 올라가자 좀 더 많은 자작나무 숲이 멀리 보였다. 여러 번 카메라를 눌러대며 산행을 계속했다. 그렇게 2키로 정도를 걸었는데도 다른 자작나무 군집이 나타나지 않자, 멀리 뵈던 자작나무 군이 '속삭이는 자작나무숲'이었나 라고 생각하면서 소문보다 좀 시시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언제 되돌아 갈까를 생각하면서 나아갔다.


햇빛도 강렬하게 내리 쬐는데다 산길이 넓어 가끔 차량도 지나가면서 먼지를 내는 바람에 슬슬 짜증나기 시작했다. 이제 자작나무도 봤으니 그만 돌아가자고 제안해 보았지만 원래 산행을 잘 못하는 아내는 못 들은 척 계속 걸었다. 그렇게 해서 3키로 쯤 가니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산에서 흘러내린 물가에서 쉬고 있는 곳이 나왔다. 그 사람들의 얘기를 들으니 거기서부터 이제 1.1키로를 산속으로 가면 자작나무숲이 나타나고 그 자작나무숲이 바로 '속삭이는 자작나무숲'이고 그 숲을 한 바퀴 도는데 0.9키로 된다는 얘기였다. 결과적으로 0.9키로 산행이 9키로 산행이 되어버린 셈이었다.


지금까지도 힘들게 와서 막막하긴 했지만 이제부터는 우리들이 원했던 산행이 시작되었다. 가파르기는 했지만 완전히 숲 속 그늘에서 흙냄새를 맡으며 힐링산행을 하게 된 것이다. 아내는 흙의 감촉을 몸으로 느끼겠다며 아예 신발을 벗고 맨발로 산행을 시작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슬쩍 슬쩍 한마디씩 하는 소리도 들린다. "맨발로 가네..."

이렇게 해서 가파른 산길을 30여 분 오르니 드디어 자작나무 숲 군집이 나타났다. 산 전체가 하얀색 껍질의 쭉쭉 뻗은 자작나무로 둘러싸여 있었다. 신비감 마저 들 정도였다. 이런 곳을 보지 않고 아래에서 비포장 도로와 같은 산길을 걸으며 멀리서 뵈던 자작나무숲을 '원대리 자작나무숲'으로 오인하고 갈 뻔 한 것이다.


여러 번 기분좋은 증거를 남긴 뒤 하산하기 시작하면서 아내랑 얘기했다. 하마터면 아래 쪽에서 멀리 뵈던 자작나무군을 보고서는 그게 '원대리 속삭이는 자작나무'로 알고 갈 뻔 했다며 우리들도 살아가면서 그런 경우가 참 많을 거라고 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수준이 넓은 산길에서 본 멀리뵈는 자작나무 수준에 머물고 있으면서 실제 '속삭이는 자작나무숲'을 다 아는 양 하면서 함부로 얘기하고 잘난 척하는 경우가 많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어떤 때는 아예 입구 조차도 가보지 않은채 상상 속의 자작나무를 얘기하고 있을 때도 많았을 것이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 중에는 아마도 수 많은 '속삭이는 자작나무'를 가슴에 안고 있는 경지에 있으면서도 꺼내어 내 보임으로써 상대를 부끄럽게 하기 보다는 편안하고도 쉽게 그 자작나무에 다가 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겸손한 분들도 많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앞으로 더 많은 '속삭이는 자작나무'를 보고서도 기다릴 줄 아는 더 성숙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해준 '속삭이는 자작나무숲'과의 만남이었다. 


맹자 진심편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고 한다.

' 관어해자 난위수觀於海者 難爲水'

큰 바다를 본 사람은 웬만한 물은 바다에 비할 바 못되기에 물이라고 하기 어렵다(하지 않는다) 라는 뜻이다. 


'속삭이는 자작나무 숲'을 보지 않고서, 섣불리 자작나무를 얘기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결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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