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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중년여자 Mar 31. 2016

일하고 싶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본업이 만화 편집자고, 부업이 일본 만화 번역자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회사 중 하나였지만 입사 후 2년만에 때려치우고 나와서 다른 회사를 반년 더 다니다가, 완전히 직종 전환을 했다. 앞에서 다닌 두 회사가 모두 대기업이었기 때문에, 출판사 중에서는 제법 큰 편에 속하는 회사지만 여러 가지로 다른 새로운 회사에 입사하면서 문화충격도 많이 받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완전한 신입도 아니었던 내가 어떻게 견딜 수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때까지 밤을 샌 적이 일생을 통틀어 단 한 번이었던 내가 이 회사에 다니면서는 한 달에 세네 번 밤을 샜다. 모범택시는 나의 친구였고, 내가 누울 수 있는 라꾸라꾸만 있으면 세상을 가진 것 같을 것 같았다. 버거킹의 크로와상 모닝 메뉴가 존맛이라는 것도 알게 됐고 신문지가 따뜻하다는 것도 배웠다. 선배들은 쓸데있는 노하우도 가르쳐주고 어처구니 없는 갈굼도 같이 주었다. 이미 사회생활이라는 게 참 뭣 같다는 것을 학습하고 왔기 때문에 버텼는지도 모르겠고.


부업을 시작하게 된 것은 순전히 돈이 없어서였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데 돈이 겁나 많이 들었다. 이미 넣고 있는 보험을 해지하려고 했더니 시가와 관련해서 (이혼할 뻔했네...) 나 모르는 대출이 있어 해지할 수가 없었고, 애는 아토피를 앓고 있어서(그때는 내게 생사가 달린 문제처럼 절박했음) 유기농 음식만 먹이며 한방치료를 하는 중이었다. 쥐꼬리만한 액수이긴 해도 아이를 봐주는 친정어머니에게 용돈도 드려야 했다. 남편은 좋은 사람이지만 나만 돌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어서 전혀 도움이 안 됐다. 회사 근무를 하면서 틈틈이 만화 번역을 했는데, 이 번역이 놀랄 만큼 가격이 싸서 번역을 한다기보단 인형 눈을 붙인다는 느낌이 들었다. 근무가 끝나고 집에 온 다음에 졸면서 눈깔 붙이기를 했다. 다행이라면 다행한 일이 일이 많지는 않았는데 (ㅋㅋ) 마감을 절대 어기지 않는다는 신조가 있다 보니 본업과 마감이 겹치면 정말 빡셌다.


유기농 먹이기와 한방 치료가 끝나고 나서도(아토피는 낫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뜻) 맡겨주면 계속 부업을 했다. 프리랜서는 한번 일을 거절하고 나면 다시 일을 따기가 힘들기 때문에, 일종의 보험으로 계속 진행해야 했다. 그리고 슬프게도 나는 앞으로도 분명 돈이 필요한 일이 있을 인간이었다. 그 예감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고, 나는 본업을 8년을 채 못 채우고 그만두었다. 내 정신이 모두 닳아져서 너덜너덜해진 시점이었다. 업계에서 완전히 떠날 생각으로 나왔지만 막상 휴식 후에 다시 취직을 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애도 어린 데다가 모두 보수가 심하게 박했다. 실업자가 되고 나니 당연히 부업이 주업이 되었다. 알음알음 알던 사람들이 맡겨주는 일은 절대 거절하지 않고 모두 열심히 달려들어서 했다. 실력이 뛰어난 번역자가 아니기 때문에 내 트레이드 마크는 '절대 마감을 어기지 않습니다'였달까.


불황이 심해지면서 일감이 거의 바닥을 치고, 본업을 가지고 있을 때의 소득에 비교해서 거의 4분의 1 정도밖에 벌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초조해졌다. 빌어먹을 건강보험료와 국민연금이 내가 버는 돈보다 커지는 게 아닌가 싶어질 무렵 다니던 회사에서 콜이 왔다. 출산휴가 대타로 석 달 알바해달라고. 원래 하던 일을 알바로 하는 게 진짜 상콤했다. '책임감' 없이 그냥 '성실'하기만 하면 되니까 으찌나 좋던지. 회사에서 떠나 있던 5년 동안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이 대거 잘리고 나간 후라 업무환경도 개운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다가 석 달이 끝났는데 그 사람이 회사로 복귀를 안 하는 바람에 내가 복귀를 하게 됐다. 이 업계로 다시는 발을 들이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게 쪽팔리지만, 회사가 내 복귀를 더 원하는 (아주 특수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애 키워야 해서 칼퇴하겠다는 내 의견을 받아주었다. 그 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면 나는 아쉽지만 안녕... 하고 집으로 다시 돌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반전이 일어났다. 난 이곳으로 오기 직전까지 마치 뭐에 씌운 것처럼 정열을 쏟아서 일했다. 내게 이 일에 대한 열정은 다 써서 없을 거라고 단정지었고, 그런 걸 다시 쏟다가 전처럼 다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복직을 했는데도 다시 그런 게 솟아났다. 야근을 전혀 안 하기 때문에 그렇게 안 보였을 수도 있지만, 정시 퇴근을 하기 위해서 나는 내가 가진 능력을 근무시간에 다 발휘했다. 정열을 쏟는다고 일이 다 잘 되진 않는 거지만 운이 좋아 성과가 나쁘지 않게 나왔기 때문에 다시 사의를 표명했을 때 회사에서 휴직을 권했고, 나는 아직 그 회사에 속해 있다.


월급은 여전히 짜고, 나는 실제 나와 첫 직장 생활을 함께 시작했던 동기들 연봉의 반 토막 정도를 받고 있다. (연봉이 내 세 배쯤 되는 동기도 있음 ㅋ) 그리고 나는 여전히 부업을 한다. 언제 내 효용이 떨어져서 잘릴지 모르기 때문에 보험을 들어놓은 것이다. 정열은 부활할 수 있었지만 회사에 대한 신뢰는 부활하지 않았다. 미국에 온 후에 이미 작업해서 넘긴 책의 출간이 늦어져서 두 번 애프터서비스 연락을 받았는데, 그때마다 역시 미친 성실함으로 재빠르게 답변을 보냈다.


사실은 이곳에서 완전한 전업주부 생활을 생전 처음 경험하면서 알았는데 나는 바깥 세상과 연결되어 돈을 받는 일을 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노예근성을 못 벗은 여자라는 생각도 들어 괴롭다. 집안일을 돌보는 것도 분명히 훌륭한 업무이건만, 지금 이 상황... 내 월급이나 내 수입이 없어서 남편과의 공동계좌에서 돈을 쓰며 생활하는 것이 힘들어 죽겠다. 나는 항상 내 통장에서 돈을 썼다. 그래서 그 돈으로 과로하고 있는 나를 위로할 때에도 떳떳했다. 그런데 여기선 통장에서 나를 위한 소비를 위해 돈을 꺼내는 것이 너무나 힘들다. 어젠 너무나 마음에 드는 수영복을 보고 정말 힘들게 샀는데, 생각해 보니 미국에 와서 내 옷을 딱 두 번 샀다. 백화점에서 클리어런스에 나온 로렌 원피스(한화 4만원짜리)와 이번에 산 수영복(한화 3만 5천원). 밖에서 혼자서 햄버거 하나 먹는 것도 마음에 걸린다. 회사 생활을 할 때에는 주저없이 매일 뭔가 사먹고, 기분 내서 자주 후식도 먹었는데 말이다.  


나는 내 것이 필요하다. 나의 일, 그리고 나의 일이 주는 대가. 내 친구, 내 유흥이 필요하다. 내가 원하는 곳으로 언제든지 이동할 수 있는 환경도 필요하다. 남편과 아들과 분리된 나만의 것이 필요하다. 슬프지만 여기에선 그것이 불가능하고, 그래서 헬조선으로 나는 돌아가고 싶다. 싱글맘으로 사는 거지 같은 삶이 그곳에 있을지언정, 거기서 나는 아주 한정된 내 것이라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휴식이 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이곳에 왔지만 이 생활은 내게 완전한 휴식이 아니다. 미국에 데려와줬다고 어깨에 힘들어간 남편아, 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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