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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중년여자 Mar 25. 2016

농구의 고장에서

160센티미터도 안 되는 소년의 악전고투

이 동네는 '파란 잔디'와 '좀 나가면 보이는 말'밖에는 내세울 게 없는 가난한 주의 작은 도시지만, 사람들이 단 하나 매우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동네에서는) 명문인 UK 대학과 그 대학의 농구팀이다. 농구팀의 마스코트는 와일드캣, 팀 컬러는 파란색(약 20년 전 SS패션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 새로 부임한 브랜드 매니저가 매우 사랑하셨던 그 색깔 로열블루), 거짓말 안 보태고 길거리 다니는 사람들의 티셔츠 중 20% 정도는 이 농구팀을 응원하는 티셔츠다. 그렇다 보니 쇼핑몰마다 이 와일드캣의 파란 티셔츠를 판다. 우리 식구들은 모두 이월제품으로 구입했다. 나하고 개는 빼고. 그런데 곧 1년에 한 번 찍는 가족사진 촬영이 있어서 나하고 개도 사입어야 할 상황이다. (개 것도 있다.... 당연히 이월 세일 제품이 없어 사람 것보다 비싸게 줘야 사게 생겼다)

운전 중에 발견한 응원 번호판을 단 차들. 아, 사랑이여...


어쨌든 모두가 한 마음으로 응원하고 있는 팀이 농구팀이니까 어린이들도 농구에 대한 애정이 뻐렁친다. 학교 체육에서도 농구 정말 열심히 시키는 듯, 아들은 1월말의 어느 날 코가 석 자는 빠진 모습으로 하교했다. 제대로 농구공을 만져본 적도 거의 없는 놈이 미국 애들 사이에서 수업을 받고 나서는 쇼크를 먹은 듯;; 그 이후로 날씨만 허락하면 오직 농구! 거의 매일 뛰어나가서 농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아이들을 모아서 가르치고 시합 시키는 지역 아마추어 클럽에 등록하겠다고 전단지도 가져왔다. 나이대에 따라 세세하게 나누어진 구성이 마음에 들어서, 가격은 좀 빡세지만 시합도 있으니 애가 즐겁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조기등록으로 175불을 내고 등록을 했다.


등록은 한참 전에 했지만 다음 주가 되어야 봄 텀이 시작된다. 어제 팀 결정을 위한 실력 테스트가 있다고 해서 찾아가봤는데, 아마추어 클럽이라고 해도 농구장이 매우 본격적이라서 깜짝 놀랐다. 실내 시설인데, 메인 코트가 중앙에 하나, 연습용 코트가 그 옆쪽으로 네 개나 있다. 농구장도 크고 본격적이었지만 모여든 사람들이 많은 것에도 깜짝 놀랐다. 솔직히 몇 명이나 하겠어~ 청소년회관의 강좌 하나쯤을 생각하고 갔는데 우리 아들 나이(만12~14세)대 인원만 해도 줄잡아 120명 정도 되는 듯했다. 연령대에 따라 테스트 시간이 따로 배정되어 있어서, 바로 밑 나이대 아이들의 테스트가 끝날 때쯤 도착해서 번호표를 받고 나중에 지급받을 유니폼 사이즈를 체크했다. 진짜 농구 못해서 안달난 애들만 모인 듯, 테스트가 진행되지 않는 농구대에서는 미친 농구의 열기가 피어오르고, 아들은 이 동네 팀컬러만큼 파랗게 질려 있었다. 긴장한 게 뻔히 보이는데도 자기 농구공이 없어서 몸을 풀 수가 없다며 그 긴장을 괜히 나한테 화풀이로 발산하는 걸 보니 내 새끼한테서틴에이저의 향기가 물씬 난다. 네 흑염룡은 어디 사냐?


아이들 모아서 유료로 가르치는 거니까 그냥 태권도장처럼 '운동 하는 척'하는 단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테스트를 하는 심사위원들이 꽤나 진지했다. 숫자도 6~7명 정도가 명단을 꼭 쥐고 매의 눈으로 관찰하더라. 세워놓은 표시에 따라 지그재그 드리블을 한 후에 드리블하며 달려가서 레이업, 그 후에 또 드리블하며 달려가서 3점슛, 혹은 그 안쪽 금(뭔지 모름...)에서 중거리슛을 날리는 것이 테스트 내용인데, 정말 각양각색의 체격을 가진 아이들이 각양각색의 실력을 뽐내며 진지하게 임했다. 여학생들도 서너 명이 있었는데, 그 중 조금 통통하고 몸집이 큰 여자아이는 긴장해서 드리블을 하다가 크게 넘어졌다. 감수성이 제일 예민한 나이라서 한참 일어나지 못하는(정신적 충격으로) 그 아이를 보면서 걱정했는데 다행히 다시 테스트를 재개하는 걸 보고 박수를 보냈다.


아들은 금방 긴장을 풀고 같이 기다리던 생판 남인 애랑 놀다가 113번 순서가 오자 테스트를 받았다. 빈말로라도 농구천재는 아닌 녀석이지만, 욕심이 앞서고 긴장한 나머지 실수를 연발한 아이들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느긋하게 자기 실력만큼 해낸 모습이 참 대견했다. 진짜 딱 자기만큼 했지만 자기 실력의 100%를 했다는 점에서 멋졌다. 보니까 자기 실력을 다 발휘한 애들은 거의 없는 것 같더라고. 오바하다가..;;


아들이 침착하게 테스트를 받은 것도 기뻤지만, 시간 맞춰 귀가해서 그레이 아나토미 본방 시청을 놓치지 않은 것이 사실은 더 기뻤다. 테스트 결과는 내일 안으로 나온다고 한다. 우리 앞집에 사는 한국인 친구도 등록하고 테스트를 받았는데, 부디 둘이 같은 시간대의 팀으로 편성되어 그 집 엄마랑 나랑 번갈아 운전기사를 하는 행운만 마지막으로 따라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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