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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J Jun 17. 2020

여름에 지지 않으려면

우리가 한식 공모

나는 여름에 태어났다. 간혹 여름이 생일인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들을 것이다. 여름이 태어났으니 더위를 잘 견디지 않느냐고. 어린 시절, 나는 여름이 되면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 감기를 달고 살았고, 방학을 맞아 공기 좋은 곳에 놀러 가 1박이라도 하면, 알레르기 비염으로 눈물 콧물 흘리며 지쳐 잠이 들었다. 무더위의 정점에 태어난 나는 무더위에 힘을 쓰지 못하고 언제나 휙 꼬꾸라 졌다.


평소 홍대 서촌 같은 핫플레이스만 찾던 친구가 대뜸 복날 이라며 강남의 삼계탕집으로 나를 불러냈다. 내 생전 삼계탕을 돈 주고 사 먹은 건 처음이었다. 만 오천 원인가 했던 삼계탕은 묵직한 뚝배기에 맑은 국물을 띄고 있었다. 인삼, 황기, 찹쌀, 대추 등 몸에 좋다는 건 다 들어갔던 한방 삼계탕. 다음 달에는 말복이라며 경복궁역 근처에 있는 유명한 삼계탕집도 갔다. 지난번에 갔던 맑은 국물이 아닌 묵직하고 걸쭉하게 끓인 삼계탕이었다. 맛은 달랐지만 푹 삶아진 부드러운 닭을 뜯고, 뜨끈한 국물을 쭉 들이켜니 기력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나는 삼계탕보다는 백숙에 더 익숙하다. 내게 삼계탕은 사 먹는 음식이라면 백숙은 엄마의 음식처럼 들린다. 네발 달린 짐승은 못 먹고 두발 달린 짐승만 먹을 수 있다는 친할머니의 영향이었는지 우리 집은 두발 달린 짐승의 대표주자인 닭요리를 애정 했다. 우리 집은 초복, 중복 시기에 상관없이 주말이면 엄마는 시장에서 장닭을 사서 푹푹 삶아 꽃무늬 양은 쟁반에 내어왔다. 꽃상이라고 불리는, 내 보기엔 촌스러운 디자인의 꽃상은 아직도 오픈마켓에 전 찰리 판매 중어서 놀라웠다. 여하튼, 엄마는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푹 삶아진 닭 몸통을 딱 잡고 닭다리를 쭈욱 뜯어 내 접시에 먼저 건넸다. 나머지 한쪽 다리는 아빠에게 갔다. 내가 닭다리를 뜯고 있으면 엄마는 닭가슴살을 잘게 찢어 소금을 콕 찍어 내 입에 가져왔다. 닭으로 이미 배를 두둑이 채워 닭죽을 집에서 먹어본 기억이 없을 정도다. 부모님은 요식업을 했다. 장르도 다양해서 몇몇 음식은 질릴 정도로 먹었다. 다른 돈은 아껴도 먹는 거는 아끼지 말라던 엄마의 말, 요식업 딸내미로서 음식에 돈 아끼는 거 아니라는 걸 신조로 삼고 살았다.




서울에 올라와서 연극한다고, 그리고 취업을 준비한다고, 나는 언제나 숨이 찼다. 노오력에 목숨을 걸던 시절 성취를 향해 노력하는 것만큼 내 건강에는 무신경했다. 엄마가 안 챙겨주면 보양식 같은 걸 챙겨 먹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나는 몇 해 전 몹시 쇠약해졌다. 아무런 성취를 이루지 못한 서른 초입, 방황에 방황을 거듭하다 한 회사에 들어갔다. 오랜 기간의 방황을 매듭지을 줄 알았던 회사에 “퇴사하겠습니다.”라는 말을 꺼냈던 날은 공교롭게도 내 생일이었다.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액체를 흘리며 뜨거운 여름을 마주했다.


퇴사 후 경제적 곤궁을 시달리면서 가장 먼저 줄인 건 식비였다. 내 입에 음식 들어가는 게 가장 아까웠다. 나는 어느 회사에 계약직으로 들어갔다. 어떤 일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그 어떤 일을 하면 보냈다. 그리고 매일같이 몸이 아팠다. 툭하면 몸살이 거릴 것 같았다. 일찍 잠에 들어 수면시간을 늘려봐도 피로가 가시지 않았다. 하루 종일 서 있는 것도 아닌데 다리가 매번 저렸다.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다, 란 말이 이런 걸까. 병원에 가봤지만 다행히도 어디가 아픈 건 아니었다.


열대야로 잠 못 이루는 나날이었다. 회사 점심시간에 더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자연스럽게 초복 말복이라는 단어가 대화에 섞였다. 곧 있음 말복이라고 말하던 언니의 얘기가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나는 앞선 초복, 중복에도 딱히 보양식을 챙겨 먹지 않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복날이라고 삼계탕을 먹자던 친구는 서울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이제 아무도 나에게 몸보신하자고 닭을 먹으러 가자고 하는 사람이 없다. 내가 계속 아팠던 건, 잘 챙겨 먹지 않은 것도 있지만 단순히 나이가 들어서 쇠약해진 건지도 모른다. 엄마가 만들어준 백숙이 먹고 싶다. 자주 먹어서 굳이 해달라고 해 본 적 없던 우리 집 음식 백숙. 꽃무늬 양은 쟁반에 담긴 하얗고 뽀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백숙을. 이다음에 집에 내려가면 닭죽도 해달라고 해야겠다. 젊을 줄만 알았던 내 몸은 변화하고 있다. 나도 이제 몸에 좋은 음식을 알아서 챙겨 먹어야 한다는 것을. 여름에 지지 않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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