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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J Oct 30. 2023

섬유근육통인가

병명이 뭐든 상관 없어졌다

통증으로 여러 종류의 병원에 다녔다. 신경외과, 마취통증의학과 내과. 병원 전전을 하다 보니 이곳에서 치료할 수 있는 통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5개월 정도 치료를 받았지만 니아 지지 않았다. 검색을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진단을 내릴 수 없는 통증이 이렇게나 많다니, 그리고 나처럼 여러 병원을 전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걸. 일자목이지만 이렇게 아플 정도는 아닌데…라고 말을 흐리는 의사도 있었고, 검사 결과 디스크 소견이 없어 운동을 하면 나아질 거라고 말하는 의사도 있었다. 통증이 오던 시기가 삼십 대 후반이어서 사람들이 말하는 몸이 훅 가는 게 느껴진다고 했는데 그게 이런 건가 싶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람이 살 수 있는 건가? 아무리 40대라도. 너무한 거 아닌가. 조선시대 평균수명이 40대라더니 환경이 변했지만 인간의 몸은 500년 전과 다르지 않다.


선생님에게 잠을 못 잔다고 말해 진통제를 처방받은 적이 있다. 내가 너무 아파하니까 일터 동료언니가 근이완제를 처방받으라고 알려줬다. 신기하게도 그 약을 먹으면 통증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받은 진통제 검색을 해봤다. 근이완제, 위장약 그리고 진통제였는데 중증도 만성통증 환자에게 투약하는 강력한 진통제였다. 효과는 좋았지만 계속 복용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실제로 약을 중단했을 때 물에 흠뻑 적신 솜처럼 온몸이 무거웠다. 병원에 갈 때마다 효과가 없는 주사를 맞아야 하는 게 곤욕이었다. 선생님은 약처방은 추천하지 않았다. 주사치료에 지쳐가면서 다른 방도를 생각해 냈다. 쉬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곧 일터 계약이 끝나기 때문이었다.


쉬면서 하루 종일 모니터 앞에 앉아 있지 않아도 돼서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하지만 책을 읽거나 펜을 쥐고 쓰거나 하면 무리가 왔다. 누워 있는 날이 많아졌다. 몸도 머리도 무거워졌다. 슬슬 겁이 나기 시작했다.


사지 멀쩡한 사람이 매일 아프다고 하니 가족들도 슬슬 나를 지겨워했다. 나 역시 아프다는 말이 지겨워졌다. 병원에 가면 효과 없는 주사를 맞고. 검사를 하면 아무 이상 없다고 하고. 그냥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가. 나는 혼밥을 했다. 일 터에서 만난 사람들 중 누군가는 혼밥 하는 내가 부럽다고 했다. 본인도 처음에 나와 같은 이미지를 굳혔어야 했다고. 나는 소화가 잘 되지 않아 아주 천천히 먹어야 했다. 이래저래 사람을 신경 쓰면 그 에너지도 품이 드는 것처럼 힘들었다. 움직이면 통증이 덜 해서 점심을 먹고 다리가 아파도 회사 근처를 빙빙 돌다가 점심시간 10분을 남겨두고 사무실에 들어갔다.


섬유근육통 키워드로 검색을 관련 영상을 봤는데 통증에 악 소리까지 내는 걸 봤다. 아, 나는 저 정도는 아니니까. 섬유근육통은 아니겠지.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도 통증은 나아지지 않았다. 올 9월에 나는 단기 아르바이트를 했다. 1년 만에 하는 밖깥일이다. 추석선물배송 안내 연락을 하는 일이었는데 등이 화끈거리는 걸 견디는 게 더 힘들었다. 한 시간에 한 번씩 눈치를 보며 칸막이 화장실로 들어가 등을 주물러댔다.


퇴근할 때 약국에 들러 이지엔파워 구입했다. 출근 전 한알, 점심 먹고 한 알. 다행히도 통증 60%가 잡혔고 11일간의 아르바이트를 결근 없이 마쳤다. 밖에 나와서 일을 해보니 깨달았다. 정신력으로 버틸 수 있는 게 아닌 란 걸.


그렇게 나는 통증 시작 3년 만에  류마티스 내과에 가게 됐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섬유근육통이든 뭐든 아무 거라도 좋으니 하루라도 통증 없이 살고 싶었다. 속사포처럼 통증에 대해 말씀드렸고 묻지도 않았는데 개인사를 말했다. 병원을 나오면서 그 얘기를 왜 한 걸까. 후회가 됐다. 내 통증 시작이 그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오랫동안 생각했다. 그걸 입 밖으로 아무렇지 않게 꺼내다니. 통증이 무섭긴 무서운가 보다. 한때 나는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그런 영화와 드라마에 심취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내가 독립운동가였다면 나는 고문 시작하자마자 줄줄이 불었을 것이다. 20세기 후반에 태어난 걸 감사하자. 여하튼, 섬유근육통 의심 소견으로 진통제와 항우울제를 처방했다.


나는 중독을 경계하는 편이었다. 20대에 여러 운동을 배웠다. 새로운 동작을 배우면 으레 근육통이 잇따랐다. 근육통이 있으면 아픈 부위 운동을 더 해주면 낫는다며 무리를 하기도 했다. 젊고 건강했기 때문에 그 무식한 방법이 통했다. 그 짧은 경험은 해괴한 신념으로 자리 잡았다. 감기 같은 것을 제외하고 진통제는 되도록 먹지 않았다. 최대한 약을 먹지 않고 운동으로 회복할 수 있다고 자만했던 것 같다. 통증은 내가 인식했던 것보다 오래전에 시작됐을 것이다. 등 근육이 아프기 시작한 것도 꽤 오래됐기 때문이다. 어깨와 등이 언제나 아팠다. 내가 그렇게 힘을 주고 사는지도 몰랐다.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을 정도로 아파서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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