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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의 또다른 시작! 도축의 역사

고기의 시작! 도축의 역사

     

원시시대 수렵 채집 생활을 하던 시대 사냥을 해서 잡아 온 짐승을 해체하고 나누어 주는 이는 부족에서 고마운 사람들이었을 거다. 아니 부족의 청년들이 사냥을 해서 잡아 온 짐승을 나누는 일은 부족의 원로만의 특권이었을지 모른다. 모닥불 앞에 모여서 고기가 익어가기를 기다리고 잘 익은 맛있는 고기 한 점은 나누어 먹는 일은 생존이고 행복이었다. 사냥을 잘하는 젊은이는 누구나 좋아했을 거구 공평하게 고기를 나누는 부족의 원로는 존경의 대상이었을 거다. 고기가 곧 생명이고 행복이었던 그 시대에는 짐승을 사냥하는 일은 부족 남자 모두의 일이었다.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에는 고조선의 유적지에서는 온갖 집짐승과 산짐승의 뼈가 나오고 있고 부여나 고구려 신라 벽제 사람들 모두 고기를 많이 먹었다. 가축을 초원이나 섬에서 대규모로 풀어서 길렀다. 중요한 먹거리인 고기를 제공해 주는 도축업자를 과연 천대를 받았을까? 또 가죽은 갑옷이나 보통옷, 모자, 가죽신을 만들 때 요진하게 쓰였기 때문에 짐승을 죽이고 해체하는 일을 하는 도축자들은 먹을 것과 자원을 대주는 고마운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 2, 384년 백제 침류왕 1, 527년 신라 법흥왕 14년 삼국에  불교가 들어오면서 이런 관념은 달라진다. 살생을 하지 말고, 동물을 제물로 바치지 말고, 고기를 먹지 말하고 가르치는 불교의 입장에서는 제사 때 가축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전통이나 도축을 하는 행위는 나쁜 일이었다.

석가모니 입멸 이후 대승불교의 수많은 경전에서 육식을 엄격히 금지하였고, 이러한 불살생(不殺生) 정신은 모든 불교국가의 근본계율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초기경전에는 출가와 재가를 막론하고 육식을 명확히 금하는 내용이 없었다. 오히려 병약한 출가자의 경우 ‘3가지 종류의 정육(淨肉)’이라 하여 보시된 고기가 자신 때문에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거나 듣거나 의심 가는 것이 아니라면 먹을 수 있다는 전제가 있을 뿐, 적극적인 금지규정은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생존과 직결된 재가자들의 살생은 묵인할 수밖에 없었고, 또한 탁발로 식사를 해결하였기에 신도들이 주는 음식을 그대로 먹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한국일본을 잇는 동남아 불교권에서는 오신주육(五辛酒肉)’이라 하여 육식과 술은 물론 오신채 역시 탐욕심을 부추기는 매운 채소를 금기시하고 있다. 선불교를 크게 일으킨 중국에서는 음식을 수행의 중요한 실천으로 다루어, 수행자의 정신을 산란하게 하고 성품을 거칠게 만드는 육식과 강한 자극을 주는 오신채를 철저히 금했던 것이다. 이는 한국불교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으며, 일본불교 역시 아시아 대부분 불교국가와는 달리 스님의 대처를 허용하면서도 메이지유신 전까지는 식생활에서 계율을 철저히 지킨 바 있다.”

이런 불교의 육식 금지는  고려시대인 1219년 몽고와 형제맹약을 체결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이 조약에서 고려는 몽고에 투배(投排)의 예()를 하며 매년 공물을 바칠 것을 약속하고 몽고가 매년 10명안으로 사신을 고려에 파견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 뒤부터 몽고는 빈번하게 대규모 사절단을 고려에 보내어 군량등 막대한 물자를 착취하였고 고려도 사절을 몽고에 파견하여 입공(入貢)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몽고와의 관계가 우리 육류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치는 계기가 되었다. 고기를 좋아하는 유목민족인 몽고의 사신이 왔으니 당연 고기를 대접해야 하는데 삼국시대 이후 육식이 금기시 되었던 고려의 고기 다루는 수준은 1123(인종1)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이 지은 고려도경 제23권 잡속(雜俗)을 보면

고려는 정치가 심히 어질어 부처를 좋아하고 살생을 경계하기 때문에 국왕이나 상신(相臣)아니면 , 양과 돼지의 고기를 먹지 못한다. 또한 도살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다만 사신이 이르면 미리 양과 돼지를 길렀다가 시기에 이르러 사용하는데. 이를 잡을 때는 네 발을 묶어 타는 불 속에 던져. 그 숨이 끊어지고 털이 없어지면 물로 씻는다. 만약 다시 살아나면 몽둥이로 쳐서, 죽인 뒤에 배를 갈라 내장을 베어내고, 똥과 더러운 것을 씻어낸다. 비록 국이나 구이를 만들더라도 고약한 냄새가 없어지지 아니하니, 그 서투름이 이와 같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도축의 기본을 하나도 모르는 무지함은 13세기 이후 몽고가 고려를 지배하게 되면서 다시 육식을 즐기게 되었는데 이때 맥적이 설야멱적(雪夜覓炙), 설야적(雪夜炙) 등으로 불리며 고기 요리가 다시 발달되기 시작했다.

맥적(貊炙)이란 말은 고구려 민족을 맥족이라 불렀고, 조미된 고기를 대나무 꼬챙이에 끼워 숯불에 구워 먹는다()는 데서 생긴 말이다. 3세기경 중국 진나라 때 쓴 수신기에는 맥적은 장과 마늘로 조리하여 불에 굽는다라는 기록과 함께 ()은 이미 양념이 되어 있어 일부러 장에 찍어 먹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당시 유목민들은 주식이 육식으로 고기의 조리 방법이 나름대로 발달되었다고 한다. 맥적이 고구려이후 현대에 까지 계속 이어져 내려오는 것을 보면 우리민족이 얼마나 고기에 대한 애정이 큰 지 잘 알 수 있다.   삼국시대 불교가 유입되기 이전에 고기를 즐기던 우리 민족은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문화가 국교가 된 후 육식을 금지해 왔으나 13세기 몽고의 지배 하에서 육식이 다시 즐기게 되었으면 유교국가인 조선의 건국이후는 육식에 대한 소비는 달라졌으나 고기를 다루는 이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유교의 농경중심 사상과 계급화로 더욱 천대받는 일이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도축하는 이들을 양수척이라고 하였는데 수척(水尺화척(禾尺무자리라고도 한다. 1425(세종 7) 이들을 양민화(良民化)하려는 정책에 따라 백정(白丁)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그 기원에 대해서 고려사에서는 태조가 후백제를 정벌할 때 굴복하지 않던 자들을 모아 압록강 밖으로 쫓아버린 무리라 하였으나, 그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고 대부분은 여진 또는 거란 계통의 북방 귀화인(歸化人)으로서, 일반 백성과 융합되지 못하고 수초(水草)를 따다가 고리[柳器]를 만들고 사냥을 하는 등 방랑생활을 하며 도살(屠殺육상(肉商창우(倡優:배우)를 업으로 삼아 특수부락을 형성하였다.

백정은 조선시대 도살업·유기제조업[柳器製造業육류판매업 등을 주로 하며 생활하던 천민층이다. 고려시대에 가장 광범위하게 존재한 농민층을 의미하던 고려의 백정은 고려 말과 조선 초를 거치면서 평민·양민(良民촌민(村民백성 등의 이름으로 불렸다. 대신에 백정이라는 용어는 주로 도살업·유기제조업·육류판매업 등에 종사하던 천민을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다.

이러한 조선시대의 백정을 고려시대의 백정과 구분하기 위해 신백정(新白丁)’이라는 말이 쓰이기도 하였다. 이들을 백정 또는 신백정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은 1423(세종 5)의 일인데, 이 때 이전까지의 재인(才人)과 화척(禾尺)을 백정으로 개칭하였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백정은 그 이전의 재인과 화척을 합해 통칭한 신분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문헌에 따라서는 조선시대 백정의 전신은 화척이고 재인은 백정 계열과는 다른 계층인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 그 이전의 화척을 화척또는 백정이라 하고 재인은 재인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또한 경국대전에서도 재인과 화척을 구분해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재인과 백정은 엄격히 구분되는 것이다. 따라서 재인과 백정이 모두 유목민족 출신으로 그 생활상에 차이가 없으며 직업에 있어서도 큰 차이가 없지만 조선시대의 백정은 재인과 구별되는 것이다. 즉 그 이전의 화척이 개명된 것이라 보아야 옳다.

이러한 조선시대 백정의 기원은 멀리는 삼국통일 때까지, 가까이는 신라 말 고려 초까지 소급된다. , 당시의 혼란한 상황에서 말갈인·거란인들이 우리나라에 흘러 들어와 양수척(楊水尺)이라는 이름으로 정착하였다. 이들이 그 뒤 화척으로 변모했다가 조선시대에 백정으로 개칭된 것이다.

이들 백정은 고려 이후에도 대내외적 혼란기를 틈타 계속적으로 한반도에 유입되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백정 또는 그 전신인 화척은 대개 유목민족 출신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들은 조선 사회에 정착하면서도 유목민족의 생활 습속을 버리지 못하였다.

, 그들의 일부는 이동 생활을 하면서 수렵·목축을 하기도 하고 유랑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한편 조선 사회에 정착한 이들 백정의 일부는 유목 생활의 연장으로서 유기 제조와 판매, 육류 판매 등의 상업에 종사해 그들이 제조한 유기(柳器: 고리. 긴 쇠붙이나 줄, 끈 따위를 구부리고 양 끝을 맞붙여 둥글거나 모나게 만든 물건)를 공납하기도 하였다. 또 그들은 수렵·목축 등의 생활에서 터득한 짐승 도살의 기술을 살려 우마(牛馬)의 도살업에도 진출하였다.

이 우마의 도살과 그 판매는 상업상 큰 이익을 남길 수 있었으므로 백정들은 생활의 적극적 방편으로 삼았고 독점성까지 띄게 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백정 이외에도 거골장(去骨匠)이라 하는 양인출신의 전문적 도살업자가 있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로 이들 거골장이 사라지면서 도살업은 백정들에 의하여 독점되었다. 그리하여 이 도살업은 백정들의 대표적인 직업으로 발전해 갔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의 백정들은 유랑·수렵·목축·절도·도살·이적행위·유기제조 등을 주된 생활 방편으로 삼았다. 반면 농경에는 별로 종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만의 집단을 형성해 주거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큰 혼란을 야기했다.

그러므로 조선왕조의 지배층들은 서울과 지방에 산재한 백정을 모두 찾아내어 각 방() 및 촌()에 나누어 보호하도록 하였다. 동시에, 장적을 만들어서 백정의 출생·사망·도망 등을 기록, 보고하도록 했으며, 도망하는 자는 도망례(逃亡例)에 의해 논죄하였다.

또한 이들을 농경 생활에 정착시키기 위해 토지를 지급하기도 하고 혼혈정책·행장제(行狀制), 군역에의 동원 등을 시행하였다. 즉 국가는 이들 백정을 농경에 종사시키기 위해 토지를 지급하고 호적에 편입시켰을 뿐 아니라 국역에도 편입시켰다. 그리고 능력 있는 자는 향학(鄕學)에 부시(赴試: 시험에 응시함)할 수 있게도 하였다.

한편 그들만의 집단적 생활을 금지하고 일반 평민과 함께 섞여 살도록 했으며, 평민과의 혼인을 장려함으로써 그들의 거친 유목민적 기질을 순화시키고자 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가는 이들의 유랑을 막기 위해 그들이 이동할 때는 반드시 관에서 발급하는 행장을 소지하게 하였다. 또한, 그들의 민첩하고 강인한 기질과 유능한 마술(馬術궁술(弓術) 등을 이용하고자 군역에 편입시키고 내란·외란 등의 진압에 동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을 군역에 동원하는 정책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즉 유랑에 익숙했던 이들 백정들은 영농 생활에 쉽게 적응할 수 없었다. 일반 평민들은 천한 이들과 혼인하기를 꺼렸으며, 지방 수령들이 행장제 시행 과정에서 여러 가지 폐단을 야기했다. 따라서 이러한 국가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들 백정은 농경에 정착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부터는 이들의 집단적 유랑이나 사회적 작란 등은 거의 없어졌다. 그 대신 이전부터 행해 오던 직업인 유기제조·도살업·육류판매업 등에 활발히 진출하였다.

또한, 조선 중기 이후에 이들의 일부는 지방 토호들에게 점유되어 사노비(私奴婢)와 비슷한 처지로 변모하기도 하였다. 이 경우에도 그들은 주로 토호의 요구로 재살(宰殺)에 종사하였다.

이와 같은 조선시대의 백정은 신분적으로 천인이었으므로 기본적으로는 국가에 대한 각종의 부담이 없었다. 그러므로 일반 평민 중에서도 생활이 곤란해지면 백정으로 변신하는 자의 수가 매년 증가함으로써 백정의 수는 점점 증가하여 갔다.

천민으로서의 백정은 1894(고종 31)의 갑오경장으로 신분적으로 해방되었다. 법제적으로 1894년 이후에는 백정이라는 신분층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왕조 500년을 통해 지속되었던 일반민의 이들에 대한 차별 의식은 해소되지 않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에 있는 양수척과 백정에 대한 설명을 살펴보았다.

이는 백정에 대한 외민족유입설을 기초로 한 설명이다.

필자는 백정의 유래에 대해서 두문동 설을 이야기한다. 고려 왕건에게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던 이들이 양수척이 되었듯 고려가 멸망하고 이성계에게 끝까지 충성하지 않았던 고려의 충신들이 두문동에 들어가 생활하면서 지조를 지켰나 후손들이 조선 사회에 편입되면서 백정이 되었다는 설을 이야기한다. 지조가 있던 이들의 후손이라  냉장 냉동시설이 없던 시절 상한 고기의 유통을 철저히 배제하는 등  고기를 정직하게 다루었을 것이다.

     

한민족문화대백과를 길게 인용한 건 거골장(去骨匠)1894년의 백정의 신분해방이다.

거골장, 현방 그리고 1909년 근대식 도축장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마장동 도축장까지 어떤 모습이었을까?

성종 5(1474) 127(음력). 사헌부 이형원(李亨元)이 상소를 올린다. 내용이 대단하다. ‘동양정 이서(東陽正 李徐)가 소를 밀도살했다는 것이다. 실제 소를 도축한 사람은 기술자인 거골장(去骨匠) 김산이다. 현장을 관리하고 진행한 이는 종(·) 난동이다. 문제는 현장이다. 이서의 집이다. 이서는 태종의 증손자다. 왕족이다. 종친의 집이니 몰래 소를 도축할 수 있었을 것이다. 소 밀도살은 중죄다.”

왕실 종친이 소를 밀도살했다.  거골장은 소를 도축하는 기술자과 도축은 집에서 이루어졌다. 조선시대의 소 밀도살은 중죄였다는 걸 알 수 있다. 조선시대 도축서, 사축서, 전생서에서 소를 공식적으로 도축하였다. 한성 지금의 서울 백성들이 먹는 쇠고기의 공급은 반촌의 현방에서 재인들이 도축 공급하였다.

반촌은 반중(泮中)’·‘관동(館洞)’이라고도 한다.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 성균관대학교 앞의 일대이다. 성균관을 반궁(泮宮)’이라고도 하는데, 반촌은 여기에서 나온 말이며, 반궁은 중국 주대(周代)의 제후의 학궁(學宮)이었다.

1398(태조 7) 성균관건물이 처음으로 완성되었을 때에는 사역인들이 집단 거주하는 반촌은 형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태종 때에 전답 1,000여 묘()와 노비 300명이 성균관에 하사되었는데, 이 노비들은 이미 고려의 성균관에 소속되었던 자들로 보인다.

이들은 성균관에서 문묘수직·관원사환·관생식사제공 등 각종 사역을 담당하였으므로, 지리적으로 입역(入役)이 편한 성균관 주변에 모여 살게 되었던 것 같다.이들 가운데 재인(宰人)이라고 불린 백정들이 도살업에 종사하였다. 성균관의 제사에 소용되는 희생(犧牲)을 잡는 것이 이들의 임무였으며, 현방(懸房) 혹은 다림방이라고 하는 푸줏간을 독점적으로 경영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따라서 도살업이 조선 중기 이후 반인들의 가장 중요한 생업이 되었다. 반인들의 도움을 받은 성균관생이 관리로 출세하게 되면, 그 대가로 반인의 현방 영업을 지원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유본예의 한경지략을 살펴보면 현방은 쇠고기를 파는 푸줏간이다. 고기를 매달아서 팔기 때문에 현방이라고 한다. 도성안밖에 모두 스물세 곳이 있다. 모두 반민들로 하여금 고기를 팔아 생계를 삼게 하고 세로 내는 고기로 태학생들의 반찬을 이어가게 한다.” 현방은 쇠고기만을 전문적으로 파는 푸줏간이다. 현방의 현()은 원래 달아맨다는 뜻이다. 현방은 시전에 속하며 따라서 국가로부터 정식 인허가를 받은 공식적인 가게다. 도성 안팎에 스물세곳의 현방이 있다고 하였는데 서울 성곽 10리 안까지는 성저십리라 해서 한성부 관할에 속하므로 서울에 스물세곳의 정육점이 있었다고 보아야 관계없다. 아니 조선 시대는 도축과 판매가 동일장소에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사료됨으로 조선 시대 한성부에서는 공식적인 23개의 소 도축장이 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만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스물 네 곳이라 했는데 유본예는 스물세곳이라 하였으니 어떤 사정으로 한 곳이 줄어든 모양이다. 현방은 구한말까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 강점기에도 기억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다음은 일제 강점기의 자료다.

지금은 고기 파는 집을 수육 판매소 또는 관집이라 하지만 전일에는 다림방 이라고 하였다. 다림방은 한자로 현옥(懸屋) 이니 그때에는 소를 매달아서 잡는 까닭에 현옥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현옥도 제한이 있어서 경성에 전부 5현옥을 두었는데 수표교 다림방이 가장 큰 것으로 수십년 전까지도 있었다. 현방을 현옥이라 쓰기도 했고 이를 우리말로 다림방이라 불렀다고 하였다. 경성에 전부 다섯 곳의 현옥이 있었다는 것은 경성부의 근대식 도축장을 말하는 것 같다. 현대는 현방, 다림방, 현옥, 푸줏간이라는 정육점은 도축된 지육을 골발 정선 판매를 하거나 요즘은 골발도 하지 않고 박스육을 받아서 정선 판매만 하는 소매판매점이라 생각하면 안 된다. 조선 시대는 생축을 도축, 골발, 정선, 판매 등 고기 유통의 모든 것이 현방에서 일괄적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현방은 소만 전문적으로 도축, 골발, 정선 판매를 하였고 다른 육류들을 판매 하지 않은 점도 살펴봐야 할 점이다. 유본예가 한성의 인문지리지 (한경지략) 시전에 시전의 종류와 판매 물품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는 바, 서울 시내에서 판매되는 고기의 종류가 나온다. 쇠고기를 뺀 나머지를 들면 다음과 같다.

생치전.건치전. 생선전 병문(屛門)에 있다.  닭전 광통교에 있다. 계란전도 그 곁에 있다.

저육전 여러 곳에 있다.

생치는 산 꿩, 건치는 말린 꿩이다. 꿩고기, 닭고기, 돼지고기(저육)가 한성에서 팔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은 쇠고기를 외에 한성 시전에서 판매된 고기의 종류다. 꿩을 제외하면 지금과 다를 것이 없다. 다만 저육전이 여러 곳에 있다는 것으로 보아 꿩과 닭은 자급자족하여 유통량이 적었고 한성에서는 돼지는 제법 유통되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 이다.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한성의 쇠고기 소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통계를 내보면 우리나라에서는 날마다 소 5백마리를 도살하고 있다. 국가의 제사나 호궤(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풀어 위로함)에 쓰기 위해 도살하고, 성균관과 한양 5부안의 24개 푸줏간, 3백여 고을의 관아에서는 빠짐없이 소를 파는 고깃간을 열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관영 도축장이 도축서, 사축서, 전생서 3개에 한성에 24개 현방 그리고 각 300여 고을에서 한곳씩 있었다고 추정하면 약 327개소의 관영 소 도축장이 있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여기서 하루 500여두의 소가 도축되었다고 한다. 정확한 통계 수치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근현대의 계절별 소 도축 추세를 살펴보면 추석이후 3월 농번기 전까지 소의 도축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농번기에는 소의 도축이 급격히 줄어드는 것을 보았을 때 조선시대의 소 도축도 같은 패턴일 것으로 사료되나 단순히  하루 500두를 약 300일간 도축한다면 년간 150,000두를 도축 소비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요즘처럼 30개월 키워서 도축한다고 가정을 해 보면 상시 사육두수가 약 40만두 이상이고 역우였던 그 당시 조선의 역할을 감안 한 6년만에 도축을 한다고 가정을 하면 90만두 이상의 소가 사육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박제가가 북학의가 정조21778년도에 쓰여진 것을 감안하면 18세기 조선의 소 사육두수가 50만에서 90만두 내외 였을 것이라면 그 당시의 인구가 700만정도 였을 것을 감안한다면 지금인 1인당 0.06두 조선시대인 18세기에는 1인당 0.7두의 소가 사육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지금의 소는 거의 고깃소이지만 조선시대의 소는 중요한 노동력이었기에 사회 경제적으로의 위상이 지금과는 사뭇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한양에서의 쇠고기 판매를 독점할 수 있었던 곳은 반촌이고 그곳에 사는 이들이 반인이었다. 반인이 백정은 아니었지만 백정업을 하는 반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반촌에서 소를 도살하게 된 기원 역시 정확하지 않다. 조선전기에는 유관 기록을 찾기 어렵고 17세기말에 와서야 비로소 반촌과 소의 도살에 관한 자료가 보인다. 숙종실록14121일  조에 호조판서 이유가 2개월간 반인들의 도살을 금지할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 있으니 적어도 숙종 연간에 오면 반인이 국가의 공인을 얻어 소의 도살을 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반촌민들의 도살은 성균관 학생들의 식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중종실록 71030일조에 의하면 성균관 유생들에게 쇠고기를 반찬으로 제공한 것이 오랜 유래였는데 성균관에서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한다는 일부 학생들의 의견이 있어 회의를 열어 결정을 보았던 바 기숙사와 명륜당에서는 먹고 식당에서는 먹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이 사료로 보아 오래 전부터 성균관 유생들의 식사에 쇠고기를 제공하는 관습이 있었고 이 때문에 반촌민들에게 소의 도살을 허락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반촌민들이 한양의 쇠고기의 판매를 전담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순리일 듯하다. 유본예의 한경지략 현방에서 성균관의 노복들로 고기를 팔아 생계를 하게 하고 세로 바치는 고기로 태학생들의 반찬을 이어가게 한다는 것 역시 이런 내력에서 비롯된 듯 하기 때문이다.  

     

의정부(議政府)에서, ‘탁지부(度支部)에서 청의(請議)한 것으로 인하여 한성부(漢城府)에 잡비로 줄 증가액 456(), 외교 고문(外交顧問) 스티븐스須集雲 : Stevens, D.W.〕 【수집운의 관사 증축(官舍增築)과 수리비 11,822, 전라남도 관찰부(觀察府)의 경무 고문(警務顧問), 보좌원(補佐員), 통역원(通譯員)의 거처소(居處所) 수리비 10017, 관청에서 설치하는 도살장(屠殺場) 설비비(設備費) 13686을 예비금 중에서 지출하는 사안에 대하여 의논을 거쳐 상주(上奏)합니다.’라고 아뢰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재가(裁可)한다." 하였다.(출처: 고종실록47권 고종 434201906년 대한 광무 10)

조선왕조 실록에 관청에서 설치하는 도살장 설비비 13686전을 예비비중에서 지출하는 사안을 고종이 재가한다는 구절이 나온다. 또한 창경궁이 창경원으로 개칭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동물원이며 동양의 4번째 동물원이 개원되는 해인 1909년 최초의 현대식 도축장이 금화초등학교 자리인 천연동 13번지 설립 운영되었다.

“ 1917년 경성부는 서울 각지에 흩어져 있던 도축장들을 현저동 도축장 하나로 통합해  경성부영 도축장을 설립했다. 현저동 도살장을 수리하고 설비를 확장해서 관영 도살장을 개설한 것이다. 이에 따라 그때까지 사용해 왔던 부영府營 신설리와 아현리의 도살장은 폐사되었다. 또한 이와 동시에 이태원 도살장과 부 내 각 곳에  산재되었던 5개소의 사설 도살장을 매수 폐사하고 부영의 현저동 도살장 1개소와  합병하였다. 또 약 12,000원의 경비를 들여 도축장 건물을 증축했다. 근대 도축장이 중앙행정의 관리 아래 놓이게 된 것은 위생담론의 확산과 동시기에 이루어졌다. 이 시기 도축장은 도심 부적격시설로 평가될 수 없는  필수시설이자 중요한 수익시설이었다.  물론 도축장이 위생적인 관리를 필요로 했던 것은 사실이다.  이를 역설하는 논리를 통감부 시기 도수장규칙뿐만 아니라  주민들의 반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그러나 현재와 같은 운송 및 수도 시스템이 부재했던 당시에  도축장은 주민의 수요와 위생을 위해서 도시 내부 혹은 근교에 위치해야 했던  시설이었다. 또한 도축장을 관리하는 단체에 수익이 발생했기 때문에 당시  지방에서는 도축장과 우시장을 주민이 시가지 내에  설치해 달라고 청원하는 경우도 많이 나타났다위생관리의 필요 및 주민의 수요 그리고 거대한 경영 수익이라는 이유로  서울에서 도축장 그리고 가축시장은 일찍부터 행정관리 하에 들어가 일제시기 부영의 형태로 유지되었던 것이다.”

경성부는 앞서 살핀 신설동과 아현동의 두 도축장을 폐쇄하는 동시에 부내  각 곳의 사설 도축장을 폐쇄해 1917, 현저동 103번지에 현저동 도축장을 개장했다.  서대문형무소 남쪽에 위치한 현저동 도축장은 1925년에 숭인동으로 이전 신축할 때까지 운영되었다.

1922년 경성지도를 보면 현저동의 서대문 감옥 남쪽에 도수소라는 표시를 확인할 수 있다. 독립문 거리를 따라 흐르는 하천에 걸린 다리를 건너면  벽으로 둘러싸인 넓은 부지 안에 T형 평면을 한 큰 건물 한 채와 부속 건물로 보이는 11채가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부지 상황과 건물의 내용에 대해서는 앞서 소개한 도축규칙시행세칙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도살실 주위에는 14.4이상의 부지를  확보하는 규칙이 있음을 고려하면 T형의 커다란 건물이 주위의 건물에서 특별히 떨어져  있기 때문에 도살실로 생각된다.

이 도살실의 바닥은 콘크리트나 두꺼운 판재로 마감되고 적당한 경사를 줘서  오수배설구로 흐를 수 있도록 배려되어 있다. 또 내벽의 허리벽은 1.2m 이상까지  돌이나 벽돌 또는 금속판으로 마감되어 있을 것이다.“

아래 지도는 서울시 역사 박물관에서 주장하는 1917년 현저동 103번지의 현저동 도축장의 위치다.  

     

     

        

     

필자가 조사한 결과 1909년 최초의 현대식 도축장은 지금의 금화초등학교자리인 천연동 13번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울시 역사박물관의 주장과 필자의 주장이 다르다.

     

    

     

1917년도의 도축장보다 1909년의 도축장이 더 도심 가까운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앞으로 일제 강점기의 경성부 해방이후의 서울시의 부영 시영 도축장의 위치를 계속 추적해 보면 도시의 팽창으로 인해 점점 도시 외곽으로 도축장이 이전되어 감을 알 수 있다.

앞에서 현방을 증언한 자료에 보면 1929년 이전 서울에 현방이 5대 있었다는 것과 도축장 개수가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1909년과 1917년 사이 24개의 현방은 5개의 근현대식 도축장화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방은 앞에서도 설명한 봐야 같이 현방에서 도축, 골발, 정선, 판매가 동시에 이루어졌지만 도축장은 아마도 도축 이용만이 가능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미 1917년 이후 확립된 서울의 도축 체계는 가락동 도매시장이 폐쇄될 때까지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부터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의 서울의 도축장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한다.

1921년에는 경성부에서 소고기 한 근에 45전이고 돼지고기(저육) 한 근에 60전에 이었다. 아마도 일제 강점기에는 돼지고기가 소고기 보다 더 비싼 고기였던 것 같다. 1921년 경성부 30만 인구가 소 25318두 도지를 6416두 도축 소비했다고 한다. 연간 1인당 소비량이 소고기는 380량 중 돼지고기는 190량 중이다. 소고기 380량은 14.25kg 이다.  돼지고기 190량은 7.125kg 이다.

소고기는 2016년 대한민국 전체 국민들보다도 경성부 사람들이 더 많이 먹었다고 하면 놀랄거다. 30만 명의 경성인구 중 일본인은 약 7만 정도였다고 하니 그 시절 쇠고기에 대한 경성부민의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또한 이 자료는 1921년에는 우리가 그렇게 돼지고기를 많이 먹기 않았다는 거다. 가격이 쇠고기 보다 비쌌으니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쇠고기 값이 내려가면 우리는 쇠고기를 더 소비할 수도 있다는 가설이 설립된다.  

일제강점기는 소비지 도축장 옆 가축시장으로 산지에서 생축이 올라와서 거래되어 이용 도축되는 경우가 주 유통 경로 였고 교통과 냉장 시설 등의 문제로 타지에서 육류가 유입 유출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봐야 할 것임으로 경성부 내 도축장의 도축 두수가 곧 경성부의 소비량으로 봐야 한다.

1923년에는 경성부영 도축장 개선 작업으로 전기 도살을 실행하였다.

1923년에는 서대문 형무소와 도축장 사이에 약 500평의 연못이 있었는데 그것에 도축 폐수가 방류되어 심한 악취와 파리등이 가득했다고 한다. 아마도 서대문 형무소안의 독립투사들은 더위 보다 더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1923년 경성부 도축장에서 소는 연간 22260두 돼지는 8330두 도축하였다. 전국의 도축두수는 소 275872두 돼지 139026두로 경성의 소 도축두수는 전국 도축 두수의 8% 돼지는 6% 였다. 그 당시 경성인구는 30만 명 전국 인구는 1700만 명으로 전국의 1.7%가 경성에 살았다. 소비측면에서 쇠고기의 경우 전국 평균의 4.7배  돼지고기 역시 약 3.5배의 소비를 한 것으로 나타난다.

1924년 조사에 의하면 전국의 도축장은 1,321개로 그 중 관설 도축장은 1개소 공설 도축장이 1,275개소 사설 도축장이 45개소 였다. 경기도내 도축장은 128개소였다.

이 해의 전국 도축 두수는 소가 286,711두 돼지가 210,773두로 1923년에 비해 3.9% 증가 하였고 돼지는 51.6% 증가 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돼지의 도축 두수가 급증한 이유는 이 시대에는 돼지의 경우 자가 도축이 성행하여 통계수치가 부정확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1930년 전국의 가축 통계를 살펴보면 소는 1611585두를 사육하고 있었으면 돼지는 1386891두 중 조선종이 59.6% 버크샤 35.4%, 요크샤 0.9%, 중국종이 3.9%였다고 한다. 소의 전국 사육두수가 160만두 이상이었다는 것도 놀라운 통계지만 돼지의 경우 조선종이 60%정도 였고 다음으로 인기가 있었던 품종이 버크샤종으로 35.4%가 사육되고 있었다는 것이 아마도 조선의 돼지는 흑돼지가 주류를 이루었던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1925년 현저동 도축장은 숭인동242번지로 이전해 간다. 거기에는 기관고(보일러)를 설치 열탕 공급이 가능했다고 한다.

1931년 경성부 회의 안건으로 도수장터 현저동 102번지 3322평을 서대문 형무소에 매각하는 안건이 협의된 것으로 보아 1917년 현저동으로 이전되었던 경성부 도축장은 1925년 이미 숭인동으로 이전되었다는 걸 알 수 있고 도축장 부지의 평수가 3322평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1932년 부산부영 도축장 월별 도축 두수로 추정해 본 도축 계절 지수

 돼지소계절지수돼지계절지수133022111%74%232332108%108%32412781%91%42082570%84%51982566%84%62101470%47%72651589%50%830325102%84%935234118%114%1030834103%114%1139354132%182%1245050151%168%

     

1932년도 부산 부영 도축장의 월별 도축두수를 소와 돼지의 도축 계절 지수를 살펴보았다.

소의 경우 농한기 농번기의 도축 지수의 변화가 큼을 알 수 있고 돼지의 경우 여름철의 수요가 감소했음을 알 수 있다. 역시 소는 1930년대는 확실히 역우로의 기능이 컸던 것을 알 수 있는 지표다. 돼지고기의 경우 냉장 냉동시설이 열악하여 부패의 위험도가 높은 여름철에는 소비가 급격히 감소했음을 알 수 있다. 이래서 돼지고기는 잘 먹어야 본전이라는 말이 있는 것 같다.

1937년에는 경성부에서 숭인동에 있는 가축시장과 도살장을 마장동 이전 추진 계획을 세우지만 2차 세계 대전으로 무산되고 해방이 된다.

1948년 서울시 인구는 160만 명이었는데 서울시에는 시설동과 영등포 제 1,2도수장을 시설 미비로 폐쇄하게 된다.

이 시대에는 집에서도 도축이 이루어지는 등 도축이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개념이었다. 1957년 서울시내 5개 도축장에서 소 65816두 돼지 18411두 도축하였으면 서울시내 하루 밀도살되는 소가 20두 돼지도 약 20두였다고 한다. 이는 소는 약 10% 돼지는 30%가 밀도살 물량이 유통되고 있는 실정으로 추정된다.

195915천만 환과 ICA 원조자재 72000달러를 투자하여 지상 343평 지하 14평 시간당 소 75두 돼지 70두 도축이 가능한 마장동 시립도축장이 착공되었다.

1961920일 마장동 제1동장이 개장하였는데 운영은 삼일축산 주식회사가 맡았으면 1961년 전국 도축장중 유일하게 냉동설비를 갖추고 있었다.

1966년 미아리, 종암, 음암동 도축장에 시설 개선 명령이 떨어졌다.

1966년 전국에는 770여개 도축장이 있었으면 일부 도시의 10여개소 도축장을 제외하면 박피도가 아닌 재래식 농기구를 사용 박피를 했을 정도로 시설이 작업 수준이 낮았다고 한다.  1967년 서울시내는 650여개의 정육점이 있었다. 이는 18세기 조선시대 한양인구 17만 명일 때 24개소의 현방이 1개소 당 약 7000명의 한양사람들에게 쇠고기를 공급했다면 650여개의 정육점은 1개소 당 서울시민 2461명에게 쇠고기를 공급했다.

1968년 조사에 의하면 서울시민의 육류 소비 비율은 쇠고기 56% 돼지고기 24% 닭고기 15% 였다.

     

1968년 소한마리가 소비자에게 공급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은 다음과 같았다.

     

우시장입장료       120 법정중개료1,500 비법정중개료3,000 교통비및 잡비2,700 중간이윤2,400 체중감모비1,680 도축세  500 검사수수료    50 도장사용료  200 영업세1,900 운반비  500 포장비  100 인건비  650 동력수도료  300 점포세  500 기타잡비  500 16,600

     

1968년에는 서울시내 800여 정육점중 400여곳이 밀도살 소고기 취급하였으면 연간 소고기 공급 물량의 약 40% 선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서울시내의 밀도축은 마장동, 하왕십리, 답십리, 성수동, 신사동등 그 당시 서울 변두리에서 성황하였다고 한다.

1969년에는 마장동 시립도축장에 별도로 육류도매시장을 개장하고 운영은 성풍산업 김남형사장이 했는데 곧이어 시립도축장 업무를 성풍산업에 넘기고 사설 도축장을 폐쇄 조치하게 된다. 이에 서울성북도축장(대표 송휘림) 서대문도축장(이영근) 영등포 도축장(이영근)은 도축장 시설 사용 정지처분취소, 동행정처분가처분 신청을 서울 고법에 낸다.

1969년 당시 서울에는 시립 마장 도축장, 한국축산가공 송휘림이 경영하는 미아리 도축장, 재단법인 현대방 이영근이 경영하는 응암동 도축장. 서울축산기업조합이 경영하는 신림동 도축장 그리고 영등포 도축장 5개의 도축장에서 서울시 894개 정육점에 고기를 공급하고 있었다.

1971년 전국의 도축장은 750개 있었으며 성동구 천호동에 현대설비의 도축장을 농협중앙회 소요사업비 1억 투입 대지 만여평 철근 콘크리트 지상 2층 연건평 8백여평 기계설비는 외국에서 도입 설치할 계획을 세운다. 1972년에는 돼지의 밀도살이 심했다. 남대문 시장의 경우 하루에 돼지고기 40여마리가 영등포구 신림동, 봉천동등 변두리 지역에서 밀도살되어 반입되어 판매되고 있는가하면 매일 새벽열차편으로  영호남에서 밀도살된 돼지고기가 반입돼 들어오고 있는데 즘전북익산,김제군등지방에는돼지콜레라가번지고있어 병든돼지고기가 반입되어 들어올 가능성이 많다는 것 이다.  

1974년 성동구 마장동 우시장, 영등포구 독산동 139 성풍산업, 협진식품이 서울시의 주요 도축장이었으며 서울시의 정육점수는 1769개소로 1969년에 비해 2배가 늘어나게 된다.

1975년 전국의 도축장 수는 656개소 1966770개소에서 114개 감소하게 된다.

1979년에는 돼지가격 폭락으로 도서지구 및 오지로만 한정되어 있던 자가 도살 지구 허가권을 도지사에게 이양 1700개소에서 9073개소로 대폭 늘렸다. 또한 돈육 가공소비 확대를 위해 롯데 축산, 한국냉장, 제일제당 등의 육가공장을 신설하기로 한다. 1979년이 어떤 의미에서는 한국 축산업의 새로운 전환점이 시작이라고 봐야 할지도 모른다.  롯데와 삼성 그룹의 육가공 산업 참여는 이후 한국 육가고의 상당한 변화를 주도하게 된다.

1983년에는 천호 농협도축장, 성동 우성농력도축장, 영등포 협진식품 도축장등 서울 3대 도축장 체제가 정립되었다.

서울시의 정육점수는 19803520개에서 19845478개로 56% 증가하였는데 이는 서울의 인구 팽창과 육류 소비의 증대도 원인이 되었지만 힘없고 영세한 자영업자들이 초기 자본이 적게 드는 정육점을 운영하는 면도 없지 않았다.

1984젖소중에는 비육용  숫소도 있지만 젖을 짜다 늙어서 도태된 소들도 많이 섞여 있다.서울시내 공급용으로 서울의 3개 도축장에서 경락되는 소 마리 수는 최근 하루 465마리 이중 순수한 한우는 25%115마리 수입 육우 및 교잡우가 151마리 32% 차지 젖소고기는 질에서도 차이가 있어 도축장의 경락가격도  일반한우보다 kg500~1000원정도 낮은데도 시중 소매점이나 갈비집 등에서는 한우고기와 똑같은 값으로 팔리고 있어 사실상 중간상인들이 폭리 일반적으로 순수한 한우는 색깔이 진하고 윤기가 있는  반면 젖소는 색깔이 다소 옅으며 늙어서 도태된 소의 경우 기름기가 많고 윤기가 없으며 근육이 질겨 보인다는 것이다. 또 검붉은 색을 많이 내는 것은 수입소일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같이 서울에서 판매되는 쇠고기 중 43%가 젖소였다고 한다.  

1986년에는 성내동 축산물 도매시장 도축장이 2월 가락시장으로 이전하였다. 대지 4198평 건평 2288평 지하 1층 지상1증 건물가격이 133억 처리능력은 소 350두 돼지 1000(8시간기준) 저장 능력은 소 800두 돼지 1200두 여기에 소 100, 돼지 200두의 포장육 생산 설비를 완비했었다고 한다.

19881/4분기에는 서울의 3개 도축장이 서울 전체 쇠고기 공급물량의 56.5% 41355두를 공급했다.

점점 소비지 도축이 감소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는 통계이고 3개 도축장 중에서도 축협 비율이 높아주는 것도 주목해야 할 일이다.  

     축협우성농역협진식품198817,95214,1049,29941,355     43.4%34.1%22.5%100%198736.7%38.7%24.7%     

     

 도축장수소 도축능력서울 4 1,156 부산 3   600 대구 1   160 인천 1300 광주 2 300 경기291,767 강원22 800 충북7 475 충남19 886 전북18 940 전남25 921 경북29 810 경남 21 1,705 제주  3 25    184 10,845

1989년 전국 도축장 현황

     

1991년 전국에는 군마다 1개소씩 총 171개소의 도축장이 산재해 있는데 이들 도축장의 가동율은 소의 경우 평균 27% 군마다 도축세를 걷기 위해 통폐합을 꺼리고  무리한 운영을 강한하고 있었다. 85185개소  89179개소 90년 말 171개소였다. 89년 말  179개소 시군 등 행정기관에서 운영하는 곳이 77개소 이들 중 냉장, 냉동시설을 갖춘 특급 도축장은 1곳에  불과 도축세 수입 목적 도축세가 지방세 총수입에 차지하는 비중800.6% 890.3%에 불과 89년에는 소의 27% 돼지 57% 대도시 공판장과 도매시장에 딸린 도축장 9개소 제외 170개 도축장은 소 16.1%, 돼지 53.8% 가동율로 저조했다.

199462일 협진식품이 10층 건물을 짓다가 자금압박으로 부도가 났다. 19941117일 토왕건설이 협진을 인수하였다. 이때 협진은 서울시 소고기의 1% 돼지고기의 12% 정도를 공급하고 있었다.

1993년 소 돼지 등급판정제가 시범 운영되고 1995년 전국 도축장으로 확대되었다.

1995년 마장동 도축장 부지에 아파트 건설이 시작되고 983월 이전에 도축장은 서울시 밖으로 이전하기로 했었다.

1995년부터 현대식 축산물 종합 처리장인 LPC들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1995년 축산진흥공사 설립 안성군 민간과 공동 투자 안성축산공사 설립 군이 70% 민간업체인 안성축협, 신양양돈, 제일곡산이 각각 10% 총 사업 118억원 일죽면 금산리 금산공단 내 부지 8천평 하루 소 110두 돼지 2200두 처리 규모로 건설 되었다. 이것이 지금은 도드람 LPC.

1998331일 마장동 도축장 폐업하였다. 개장 35년만이었다.

20109월 서울 가락동 축산물 공판장이 충북 음성군 삼성면으로 이전하면서 600년 서울의 도축장의 역사도 끝을 보게 되었다.

도축업의 역사를 찾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여러 문헌 속에 나오는 도축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게 된다.

역사는 오늘을 사는 이의 무기다.

1909년부터 근현대의 도축장의 설립과 운영 과정이 단순히 수익만을 위한 것이었을까? 도축장은 고기 유통과 소비의 시작이고 위생문제에서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이미 일제강점기에도 도축장은 정부에 의해서 공공재적 성격으로 관리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해방이후 서울시 도축장 변천사를 살펴보면 우리가 얼마나 도축이라는 공공재에 대해서 무관심해 왔는가를 알 수 있다. 앞으로는 조금 더 공공재로써의 도축 산업과 서비스 산업으로의 도축 산업에 대한 관심 그리고 여기서 고기 위생이 시작되는 점임을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너무 거칠게 부분적으로 정리된 글이다.

앞으로 더욱더 관심과 연구가 필요한 분야가 식육문화사인 듯하다.

끝으로 이야기 하나를 할까 한다.

     

프러시아 대위 : 폐하처럼 훌륭한 전략가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프리드리히 2: 전쟁사를 열심히 공부하라.
 프러시아 대위 : 이론보다 실전 경험이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프리드리히 2: 우리 부대에 전투를 60회나 치른 노새가 두 마리 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노새일뿐이다.

나폴레옹도, 2차 대전의 영웅인 몽고메리 장군도 똑같은 질문을 받고 "전쟁사를 공부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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