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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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가축문화사는 축산인이라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이고 종합적인 교양 자료다. 한국에서 기르고 있는 가축 각각에 대해, 그 기원과 전래, 이용 방식, 사육 방법, 정책과 질병 대응의 역사, 그리고 신앙과 민속—금기, 민화, 우화 등에 이르기까지 정리하고 재구성한 연재물이다. 이 글은 학술적인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흥미롭게 읽히도록 구성되었고, 독자들이 교양은 물론이고 의미 있는 통찰을 얻을 수 있도록 쓰여졌다. 아울러 과거의 지혜를 바탕으로 현대 축산에 적용할 수 있는 지식을 제공하고자 하는 독특한 구성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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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의 순화와 전래

조선 초기에 정승이 된 황희가 아직 미천했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는 길을 가다가 밭 옆에서 잠시 쉬게 되었는데, 한 농부가 소 두 마리로 쟁기를 끌며 밭을 갈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황희는 농부에게 다가가 물었다.
“두 소 중에서 어느 소가 밭을 더 잘 갑니까?”
농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다가, 밭을 갈던 걸음을 멈추고 황희의 곁으로 다가와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이쪽 소가 더 잘 갑니다.”
황희는 농부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겨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농부는 이렇게 말했다.
“비록 짐승일지라도 마음은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쪽 소가 낫다고 하면 저쪽 소가 듣고 게으르게 일할지도 모르지요. 그러면 그 소가 불평을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 이야기는 흔히 황희 정승의 정치 철학을 상징하는 일화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는 점은, 한국인이 소를 대할 때 얼마나 인간적인 태도를 가졌는가 하는 점이다. 한국인의 가축에 대한 태도는 서양의 실용주의적인 접근과 달리 정서적 유대가 강했다.
서양 사람들은 가축을 먹거나 부리거나 타는 등 이용 가치 이상으로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지만, 한국인은 가축을 인간과 공존하는 존재로 여기고 감정과 공동의 운명을 나누는 가족처럼 생각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옛말에 가축을 통칭해 ‘생구(生口)’라 부르던 것이 이해된다. 생구란 오늘날의 식구(食口)처럼, 한집에서 함께 밥을 먹고 사는 존재를 뜻한다. 노비도 생구였고, 말이나 소도 생구였다.
이처럼 한국인에게 소는 단순한 가축이 아니라 사람처럼, 가족처럼 여겨졌다.
결국 한국에서 소가 이처럼 인간적인 대우를 받아왔다는 것은, 그만큼 오랜 세월 동안 소를 길러온 역사적 배경이 있다는 뜻이다.
기록이 남아 있는 유사 이래로, 소는 이미 한국에서 중요한 가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부여와 삼한의 소

부여 시대에는 가축을 다루는 관직이 있었으며, 마가(馬加), 우가(牛加), 구가(狗加) 등 육축을 이름으로 한 관명이 존재했다. 이 관명에 따라 마을 단위의 조직이 나뉘기도 했다.
또한 부여에서는 소를 단순히 기르는 가축으로만 보지 않고, 제천의식에서 희생 제물로 바치기도 했다. 전쟁을 일으킬 때에는 소를 제단에 올려 하늘에 제사를 지냈고, 제사 후에는 소의 발굽을 보고 길흉을 점쳤다. 발굽이 벌어져 있으면 흉한 징조로, 모여 있으면 길한 징조로 여겼다.

소를 제물로 삼을 정도라면, 목축이 고도로 발달해 있었고 농업뿐 아니라 식용 목적으로도 소가 활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지금의 함경도 일대였던 예국에서는 마을 간 분쟁이 발생하면 소나 말로 벌금을 물게 했는데, 이를 ‘책화(責禍)’라 불렀다.
삼한 중 마한 사람들은 소를 타지는 못했지만, 장례 때 시신을 운반하는 데 사용했다. 반면 변한 지역 사람들은 말과 소를 잘 다루었으며, 특히 제주도에서는 소와 돼지를 잘 기른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 삼국시대 초기에는 수렵 활동이 줄고, 목축이 체계적으로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다.

고대 문헌 속의 소

『삼국사기』에는 호족들이 소와 말을 약탈했다는 기록이 있고, 『구당서』 고구려전에는 우마를 죽인 자를 노예로 삼았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이는 소가 단순한 가축이 아니라, 당시 사회에서 재산의 척도로 여겨졌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고고학적으로도 이를 입증하는 유적이 있다.
기원전 1세기로 추정되는 김해패총에서는 멧돼지, 사슴 같은 야생동물 뼈와 함께 소와 닭의 뼈가 출토되었다. 이는 소가 이미 가축으로 사육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조선 소의 기원

이제 조선 소의 뿌리, 즉 유래를 찾아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조선 소는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에 분포된 소와 계통을 같이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체구나 뿔의 모양에서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동아시아 지역의 소는 공통적으로 중형 체구에 작은 뿔, 적갈색 털, 온순하고 영리한 성격을 지닌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조선 소의 계통에 대해서는 세 가지 주요 학설이 있다.

첫째, 중앙아시아 단각우 기원설이다.
뿔이 작다는 점에 착안해 단각우종으로 분류하며, 중앙아시아에서 기원했다고 본다. 중앙아시아가 건조화되며 사람들이 이동하면서 일부는 동쪽으로 와 조선 소의 조상이 되었고, 일부는 서쪽으로 이동해 고대 이집트의 단각우가 되었다는 설명이다. (슈테그망 학설)

둘째는 시베리아 기원설이다.
가장 원형에 가까운 순수한 소가 시베리아 소이며, 조선 소는 이 시베리아 소와 골격, 생리, 발생 구조에서 매우 유사하다고 본다. 일본 학자들도 이 이론을 지지하고 있으며, 조선 소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소의 원형일 가능성도 제시한다. (오크리취 학설)

셋째는 남방 도래설이다.
남아시아 전역에 분포하는 혹 달린 흑소(瘤牛)가 중국 북부까지 전파되었고, 이 소가 조선에 들어왔다는 주장이다. (켈레르 학설)

어느 이론이 옳은지, 또는 이들이 복합된 것인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조선 소가 한반도에서 자생한 야생우가 길들여진 결과는 아니라는 점이다.
소는 북방이든 남방이든 중국 북부를 거쳐 한반도 북쪽을 통해 남하했으며, 이렇게 남쪽으로 내려온 소가 일본으로 전해져 일본 소의 조상이 된다.


일본 소와의 관계

일본의 고대 문헌에는 소에 대한 언급이 없다. 심지어 『위지』에는 왜국에 소와 말이 없었다고 명확하게 기록돼 있다.
일본에서 소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안한천황 2년(535년)이며, 신라 법흥왕 22년, 고구려 안원왕 5년, 백제 성왕 13년에 해당한다. 어디서 소를 들여왔는지는 명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방목한 지역이 한반도와 가까운 섭진(攝津)이었고, 이보다 40년 앞서 일본이 고구려에 가죽 장인을 보내달라고 청한 기록이 있어, 한국에서 소가 전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는 일본의 요청을 받아 ‘스루기’와 ‘누루기’라는 장인을 보내주었고, 이들이 일본 피혁 기술의 시초가 되었다.
또한 흠명천황 시기(540~570년)에도 백제로부터 소를 들여왔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 정종 시기에는 일본의 대마도 원평 등이 조공을 바쳤을 때, 왕이 소를 하사한 기록이 있다. 이는 일본에서 소가 얼마나 귀한 존재였는지를 보여주는 예다.

게다가 일본 소의 주요 산지인 근강, 출운, 장주 등은 역사적으로 한국과 교류가 깊었고, 한국에서 건너간 귀화인이 많이 정착한 지역이기도 하다. 이 또한 일본 소의 기원이 한국과 연결돼 있음을 시사한다.


물소의 전래와 사육

한반도에는 일반 가우(家牛)와는 다른, 남방에서 유래한 물소(수우, 水牛)도 오래전부터 전래되었다.
물소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구려 광개토대왕(391~412) 시대로, 일본에 가우가 전해진 것보다 훨씬 이르다.
광개토대왕이 남연(南燕)에 사신을 보내 말과 살아있는 곰 등을 공물로 바쳤을 때, 연왕은 크게 기뻐하며 물소와 말을 하는 앵무새를 답례로 보냈다는 사실이 『삼십육국춘추』에 기록되어 있다.
이후 고려 중기에는 송나라 상인이 물소 두 마리를 조공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태종 5년 5월, 현재의 태국(샴국) 사신인 진원상(陳元祥)이 다른 공물과 함께 물소를 싣고 오다가, 전라도 고군산열도 앞바다에서 일본 해적단 15척에게 습격을 받아 모두 약탈당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21명이 살해되고, 남녀 60명이 납치되었으며, 40명이 겨우 도망쳐 한국 땅에 상륙해 목숨을 건졌다.
조선 조정은 이들을 따뜻하게 구제해 배를 마련해 돌려보냈고, 이에 감사한 샴국 사신은 얼굴이 검은 인도인 두 명을 임금에게 선물로 바쳤다. 이들은 조선에 남아 왕궁의 위병으로 복무하게 된다.

진원상이 먼 길을 마다않고 물소를 공물로 가져온 데에는 사연이 있다.
그는 태종 3년에 부사로 조선을 방문했을 당시, 조정에서 "다시 조선에 올 기회가 있다면 물소를 꼭 가져다 달라"는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조정에서 물소를 간절히 원했던 사실은, 명나라에 물소를 하사해달라는 요청을 수차례 논의했지만, 황제의 심기를 해칠 수 있다는 이유로 실행되지 못했다는 기록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조정이 물소를 필요로 했던 까닭은, 그것을 번식시켜 뿔을 무기—특히 활의 부품—제작에 활용하려는 군사적 목적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명나라에서는 물소 뿔이 군수물자로 분류되어 수출이 금지된 품목이었고, 의주 통관에서도 까다로운 품목이었기에 황제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조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문종 시기, 명나라 사신이 한양에 도착하자 조정은 물소 두 쌍을 넘겨받아 섬에 방목하고 싶다고 비공식적으로 요청했으나 실현되지는 않았다.
그 후 일본 사신 대내다다(大內多多)가 조선을 방문했을 때에도, 조정은 같은 요청을 했고, 세조 8년 10월, 대내의 사승(使僧)인 능현(能縣)이라는 승려가 류큐(琉球)에서 물소 한 쌍을 구해 웅천포에 도착한다.
세조는 오랜 소원이 이뤄진 것을 기뻐하며, 다음 해 4월까지 따뜻한 웅천에서 물소를 잘 사육하도록 지시하고, 의관에게 명하여 중국의 물소 관련 서적을 연구하도록 했다.
이듬해, 물소를 서울로 옮기게 하여 창덕궁 비원의 연못에 풀어놓았는데, 당시 기록에는 “물소는 더위를 무서워하고 물을 즐긴다”고 되어 있다.

이 물소는 사복사(司僕寺)에서 관리했으며, 겨울철에는 외양간에 불을 지피는 등 난방에도 세심한 배려를 했다고 한다.
그 결과 성종 때에는 어느 정도 번식에 성공해 각 지방의 대신들에게 물소를 하사하기도 하고, 전국 각 도에 분양하여 번식시키려는 정책이 시행된다.
흥미로운 것은 물소를 헌상했던 일본인 대내가, 본인도 물소를 사육했으나 모두 폐사했다며 다시 한 쌍을 하사해달라고 요청한 사실이다.

이처럼 물소 번식에 성공하자, 연산군 시기에는 이를 농사에 활용하려는 명령이 내려진다.
백성들이 물소로 밭을 갈아보았는데, 물소의 발이 너무 빨라서 사람이 따라가기 힘들었고, 논에서는 물을 보자 눕고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물소는 본래 물을 좋아하는 동물이므로, 논에서 눕는 것은 자연스러운 행동이었을 것이다.
또한 대신에게 하사된 물소로 수레를 끌게 했더니, 지나치게 요란하게 움직여 수레 위 짐이 모두 튕겨 나갔다고 한다.

연산군 3년, 조정은 사복사에 물소 네 쌍을 보내라는 명을 내렸는데, 이를 통해 당시 서울 지역에는 물소가 존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추운 기후 때문에 물소는 경상도와 전라도 남부에서만 사육되었고, 조정은 어떻게든 농경에 활용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종 3년에는 백성들이 원할 경우 물소를 나누어 주고, 각 관청 소유의 논밭을 물소로 갈도록 하는 명령이 내려진다.
이 시점까지 물소를 농사에 활용할 수 있도록 순화시켰거나, 남방처럼 특수 쟁기를 제작하여 쟁기 위에 사람이 올라타 물소의 속도를 조절하는 방식이 도입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중종 3년 이후 물소에 관한 기록이 사라진 것으로 보아, 물소 사육에 비해 실제 활용도가 떨어졌기 때문에 점차 사육이 중단되었고, 결국 한반도에서 물소 정착은 실패로 돌아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럼에도 열대성 동물을 북방에 데려와 약 60여 년간 사육했다는 사실은 조상들의 지혜를 보여주는 동시에, 열대 동물도 한국에서 사육 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한 사례로 평가받을 만하다.
이제 우리는 물소 이전의 역사로 더 거슬러 올라가, 인류가 야생우(野生牛)를 어떻게 가우(家牛)로 순화시켰는지에 대해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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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 시절 수렵민들은 짐승을 사냥해 고기를 얻고, 야생 식물의 뿌리나 열매를 채집해 먹으며 생계를 이어갔다. 하지만 이들은 언제나 식량 부족의 위협 속에서 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각박한 환경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야생 동물을 길들일 만큼의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생기기 어려웠을 것이다.
산양이나 양처럼 비교적 작고 다루기 쉬운 동물이라면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가축화할 수 있었겠지만, 소처럼 크고 강한 동물은 그렇게 쉽게 길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지금도 아프리카 원주민들에게 야생 물소는 사자보다 더 두려운 존재로 여겨진다.
이처럼 거칠고 뚝심 있는 야생 소를 길들이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으며, 그러한 작업은 인간의 생활에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긴 이후에나 가능했을 것이다.
이러한 조건을 고려할 때, 소가 가축화된 시점은 사람들이 일정 지역에 정착해 작은 규모로나마 수작업으로 땅을 일구며 농사를 짓던 시기와 맞물린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원시인들은 어떻게 야생 소와 마주하게 되었고, 이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았을까?
우선, 원시인들이 야생우를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본래 원시인은 합리적인 사고를 기반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즉, 소를 길들이면 노동력으로 쓸 수 있다거나 가죽을 이용할 수 있다는 식의 경제적 동기에서 가축화를 시도한 것이 아니었다.
가축학자 E. 하안(E. Hahn)에 따르면, 오히려 야생 소를 길들이게 된 동기는 비합리적이고 종교적인 것이었다고 한다.

하안의 이론에 따르면, 정착해 농경을 시작한 인간은 식물이 싹트고 자라 열매를 맺고 다시 시들며, 또다시 씨앗에서 싹이 트는 순환의 과정을 알게 되었다.
또한 농사가 사계절의 흐름이나 달의 변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이집트, 바빌론, 중국, 남미의 잉카 등 고대 농경 문명에서 달력을 만들고 별자리를 관측했던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위도가 높은 북방 지역에서는 햇빛이 부족하기 때문에 태양이 인간 생활에 중요한 요소로 인식되었고,
반대로 위도가 낮은 남방 지역에서는 태양보다 달이 인간의 삶에 더 깊은 영향을 끼친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북유럽 신화에서는 태양이 신으로 숭배된 반면, 이집트, 바빌론, 인도, 중국 등의 농경문화권에서는 달이 주요 숭배 대상이었다.
이들 문화에서는 달이 식물의 성장과 여성의 임신, 생명과 죽음을 관장하는 초자연적인 힘을 지닌 존재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처럼 원시 농경민들은 자신이 재배하는 식물의 생장에 달이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고 믿었고,
동시에 달이 점점 작아지는 현상—즉 초승달이 줄어드는 모습을 보며, 달이 악령에 침범당하거나 병들고 있다고 여겼다.
따라서 이 달을 다시 만월로 회복시키기 위해 달에게 희생을 바쳐야 한다는 인식이 생기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희생 제물로 선택된 것이 바로 야생우였다.
그 이유는 고대 서아시아에 살던 야생 소의 뿔 모양이 초승달이나 반달과 비슷하게 생겨, 달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이 소는 달의 여신과 관련된 신성한 동물로 여겨지게 되었고, 그 자체가 신에게 바치는 희생물이 되었던 것이다.

신은 언제나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을 희생으로 바치기를 원한다고 여겨졌다.
초승달에 소를 희생하는 풍습은 고대 농경사회 전반에 공통적으로 존재했고,
이러한 풍습은 훗날 중국을 거쳐 한국의 제사 문화에까지 계승되며 중심적인 의례로 자리잡았다.

초승달은 주기적으로 나타나므로 야생우를 잡아 희생물로 준비할 시간이 있었지만,
월식처럼 갑작스럽게 달이 사라지는 경우에는 희생 제물을 준비할 시간이 없어 당황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불시에 대비하기 위해 야생 소를 미리 잡아 가둬두고 길러야 할 필요가 생겼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제단이나 신전 가까운 곳에 야생우를 가둬놓는 우리를 만들었고, 이를 ‘신원(神苑)’이라고 불렀다.
고대 바빌론의 유적에서 발굴된 토기 표면에도 신원 안에 가둬진 야생 소의 모습이 새겨져 있으며,
페르시아의 ‘파라다이스’라는 개념도 이와 유사한 형태였다고 한다.

이처럼 신원 안에 가둬 기르던 야생 소는 점차 교미를 하게 되고, 송아지를 낳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송아지들이 사람이 주는 먹이를 거부했지만, 닫힌 공간에 계속 머무는 동안 점차 사람의 존재에 익숙해지고,
인간의 손길과 냄새에 적응하게 되면서 순화가 시작된다.

이렇게 처음에는 종교적인 희생 목적에서 사육되던 야생우가 점차 경제적인 목적—즉 노동력, 가죽, 식량 등으로도 활용되기 시작하면서 진정한 의미의 ‘가축 소’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안의 ‘소의 가축화 기원설’이며, 현재까지도 널리 받아들여지는 정설로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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