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일본의 육식사 연구의 전망

근대 일본의 육식사 연구의 전망 ― 식생활사 연구 동향을 바탕으로 ―

近代日本の肉食史研究の展望 ―食生活史の研究動向を踏まえて―


서론

식(食)은 사람들의 폭넓은 관심을 끄는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무엇을, 어떠한 방식으로 먹어왔는가에 관한 역사적 연구, 즉 식생활사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져 왔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역사 연구의 대상으로서 식은 지나치게 일상적이며 변화가 적고, 또한 사소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오사카경제대학 일본경제사연구소가 작성한 「경제사문헌해제 데이터베이스」에서 ‘식(食)’을 키워드로 검색하면 429건의 저서와 논문이 검색된다. 이는 크게 다음 여섯 범주로 나눌 수 있다(표 1). 첫째, 「일본식생활전집」에 대표되는 바와 같이, 현재 행해지고 있는 식습관을 기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 둘째, 민속학적 연구와 같이 식습관을 기록하면서 그것이 상징하는 의미세계나 문화적 심층을 탐구하려는 것. 셋째, 사사(社史). 넷째, 발굴 자료·문헌 자료를 바탕으로 과거의 식을 재현하려는 것. 다섯째, 식의 변천과 사회 변동을 연관지어 논하는 것. 여섯째, 생산·공급에 주목하는 경제사적 연구이다.

이 여섯 범주는 전혀 독립적인 것이 아니며, 하나의 저작이 여러 범주에 걸친 내용을 갖는 경우도 많다. 최근 20년간의 저작 가운데 각 범주의 특성을 잘 드러낸다고 생각되는 사례를 각각 다섯 편씩 표 1에 제시하였다. 일본에서의 연구 상황을 살펴보면, 첫째 범주에 해당하는 것이 가장 많다. 지방자치단체사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해당 지역의 식에 관한 장이나 절이 마련되어 있으며, 개별 사례의 수집이 착실히 축적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범주를 포함하더라도, 수집된 사례들이 상호 연관이나 전체 속에서의 위치를 설명하지 않은 채 나열되어 있는 것이 현상이다. 이러한 기저에는, 식은 문화 유형의 하나로서 매우 안정된 것이라는 인식이 존재한다.

한편, 다섯째와 여섯째 범주에는 식을 사회적·경제적 맥락 속에서 변화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그 움직임을 규명하려는 경향이 인정된다. 식을 전체성·포괄성과 변화의 틀 속에서 파악하려는 연구는 최근 들어 활발해지고 있으나, 식생활사 연구 분야는 이전부터 이러한 방향을 지향해 왔다. 다음 장에서는 식생활사 연구의 방향을 보여주는 저작들을 재검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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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식생활사 연구의 방법과 과제 – 연구 동향에서

‘경제사문헌해제’ 데이터베이스에서 ‘식생활사’를 키워드로 검색하면, 앞서의 ‘식(食)’에 비해 크게 줄어 불과 7건만이 검색된다(표 2). 물론 모든 식생활사 연구가 ‘식생활사’라는 용어를 논제나 장제목에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개별 논문에서는 이를 포함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식생활사’라는 용어로 검색한 것은, 이러한 저작들이 식생활사 연구를 어떠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니노미야 히로유키의 「전체를 보는 눈과 역사학자들」에는 잡지 『음식사림』에 기고한 「사회사로서의 식생활사」라는 논고가 수록되어 있다.

인간을 ‘몸’과 ‘마음’이라는 두 관점에서 다시 파악하려 할 때, 식생활사는 당연히 그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몸’의 측면에서 보자면, 인간의 신체가 가장 직접적으로 음식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는 사실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며, 인간의 생활을 문제로 삼는다면 무엇보다도 식(食)의 양상에서부터 해명해 나갈 필요가 있다.

한편, ‘마음’의 관점에서 본다면, 음식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개인의 수준에서도 집단의 수준에서도 고유한 기호와 밀접히 결합되어 있으며, 그 의미에서 음식은 우수한 문화적 문제로 귀결된다. 이처럼 음식의 문제는 ‘마음’과 ‘몸’ 양측 모두와 깊게 관련되어 있지만, 사실 이 지점에야말로 식생활사 연구가 안고 있는 어려움의 한 단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식생활사 연구의 중요성과 어려움이 지적되고 있다. 앞서의 분류에서 제시한 ② ‘식’에 상징되는 의미세계와 문화적 심층을 탐구하려는 연구는 ‘마음’의 측면에서 식에 접근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영양학적 방법을 도입한 연구에서는 무엇이 얼마나 섭취되었으며, 그것이 사람들의 신체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라는 ‘몸’에 주목하는 경우가 나타난다.

이처럼 ‘마음’과 ‘몸’ 각각에 관한 연구는 존재하지만, 양자를 연결하는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니노미야의 지적 이후 30년 이상이 지난 지금도, ‘마음’과 ‘몸’ 모두와의 관계는 식생활사 연구의 과제로 남아 있다.

다음으로, 히구치 기요유키의 『일본식물사—식생활의 역사』를 살펴본다. 이 저작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를 다룬 통사적 연구이다. 서론 제3장에 ‘식생활사의 개념’을 두어 식생활사를 정의하고 있다.

역사 현상은 모두 인간의 생활 현상이며, 각각은 시간적·공간적으로 상호 관련을 맺음으로써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연구 주제를 세분하는 것은 가능하더라도, 역사학의 한 부문인 이상 다른 주제와도 상관적·유기적으로 파악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자각과 준비를 바탕으로 연구될 때에야 비로소 각종 풍속·습속학 및 그 분과는 존재의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요약하면, 저자는 인간의 생활 행위인 ‘음식 섭취 행위’를 중심에 두고, 이에 관련된 광범위한 생활양식의 변천을 유기적으로 연구하는 역사학의 한 부문을 ‘식물사’나 ‘식사사’라는 명칭 대신 임시로 ‘식생활사’ 혹은 ‘음식생활사’라 부르고자 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는 기존의 문화사학의 한 부문인 풍속사학의 하위 분과이지만, 그 방법과 목적은 생활사라고 본다.

히구치가 제시하는 식생활사 연구는 매우 폭넓게 파악되고 있다. 그러나 이 저작 자체는 고대부터 현대까지라는 매우 긴 시간을 다루고 있어, 문제의식이 충분히 반영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식생활사의 중요한 인접 영역에서는, 코완의 『엄마는 점점 바빠진다—가사노동과 테크놀로지의 사회사』, 후지하라 다쓰시의 『나치스의 주방』과 같은 저작이, 가사노동, 여성사, 기술사, 근대화론, 사상사 등 다양한 시각을 가지고 출현하고 있다. 가사노동이나 생활공간과 같은 일상의 ‘작은’ 장면이 ‘산업’이나 ‘통속 도덕’과 같은 ‘큰’ 문제를 재조명하는 데 얼마나 유효한지를 보여주는 연구이다. 이러한 점은 니노미야의 다음 지적에서 보더라도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근대 역사학의 주류를 형성한 것은 정치사, 외교사, 이념사였으며, 새로운 학문으로 부상한 경제사에서도 연구의 중점은 경제 정책과 경제 조직의 분석에 두어져 있었고, 그 근저에 있는 민중의 일상생활 그 자체를 본격적인 연구 대상으로 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더 나아가, 식생활사를 주안점으로 삼지 않은 연구 중에도 히구치가 말하는 폭넓음을 지닌 것이 있다. 브로델의 『일상성의 구조』, 엘리아스의 『문명화의 과정』에서는 수세기에 걸친 경제·사회 및 국가 형성과 같은 거대한 변화 속에 식생활의 변화를 관련짓고 있다. 다만, 식품은 어디까지나 도구적 요소 중 하나일 뿐이며, 식의 변화와 경제·사회 변화의 상호 연관성을 실증적으로 밝히는 것은 과제에서 벗어난다는 난점이 있다. 모든 역사 현상에 공통되는 것은, 단선적인 변화 속에 식생활을 끼워 넣는 것을 피해야 한다는 점이다. 식에는 고유한 굴곡이 존재하며, 그 결과가 경제·사회 변화와 호응하고 있는 것이다. 식의 변화를 고유한 다양한 벡터의 합성으로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식을 소비뿐 아니라 생산과 분배의 측면에서 분석하는 것은 식의 고유한 문제를 실증적으로 고찰하는 한 방법으로서 위치지을 수 있다.

경제사는 무엇을 어떻게 생산하고, 또 어떻게 분배하는가에 관한 역사 연구라고 할 수 있다. 생산과 공급 측면, 소비 측면의 연관 속에서 입체적인 식생활사상을 그려내는 것은 식생활사 연구에 있어 유효하며 필수적인 시각이다.

민츠의 『달콤함과 권력』, 하라다 노부오의 『역사 속의 쌀과 고기』는 각각 설탕과 식육, 그리고 쌀이라는 개별 식재료에 초점을 맞추어 권력의 생산 개입, 생산과 소비의 상호 연관의 역동성과 굴곡을 밝혀내고 있다. 이는 앞서의 분류로는 ⑥과 ⑤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히구치는 또한 식생활사의 방법론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식생활 현상은 다른 사회·경제·사상·신앙·예술·기술 등 생활 현상이나 시대 문화와 더불어, 기후·지형·지질·생물·체질·심성 경향 등 자연 현상과도 결합되어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필연성의 발견은 이러한 종합적 이해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앞서의 ①, ④ ‘식을 통해 문화적 심층을 탐구한다’, ② ‘고정적·개별적 성격이 강한 연구’가 중심이었으나, ⑤ ‘식의 변천과 사회 변화의 연관 고찰’, ⑥ ‘식의 형성 재료의 생산·공급에서 식의 양상을 밝히는 것’처럼, 식을 사회 현상의 한 측면으로서 다른 조건과의 관련 속에서 고찰하는 방법론에 입각한 연구가 나오고 있다. 식이라는 행위가 가진 사회성, 정치성, 권력성의 총체를 문제 삼는 브로델과 아날 학파의 자극을 받으면서, ‘마음’과 ‘몸’의 상관(니노미야)이 중시되는 등 흥미로운 논의가 축적되고 있다. 즉, 식을 독립된 대상으로가 아니라, 식생활로서 상호·유기적으로 고찰하려는 히구치의 시각이 구체화되기 시작한 단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연구사에 기초하여, 필자는 식생활 현상을 역사학적으로 파악하려 한다. 여기서 ‘역사학적’이란, 시대 속에서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것으로서 파악한다는 시간 축의 도입이며, 또한 경제·사회·문화와의 관련 속에서 종합적으로 조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방법을 히구치, 니노미야의 시각을 이어받아, 근대 일본에서의 육식 확대 과정을 고찰함으로써 구체화하고자 한다. 이하, 그 개요를 서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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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문명개화기에서의 육식 수용 특징

육식은 쌀 소비와 더불어 일본의 식생활을 논함에 있어 중요한 요소이며, 고베규에 대표되는 고급육은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한편, 경제 수준에 비해 낮은 육류 소비량은 일본 식생활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그림 1은 1894년부터 1940년까지의 소·돼지 도체 중량을 나타낸 것이다. 약간의 변동은 있으나 근대 전반을 통해 꾸준한 증가세를 보인다. 이를 소고기와 돼지고기로 나누어 살펴보면 두 가지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근대 초기의 육식은 소고기가 중심이었다. 둘째, 1910년 무렵에는 소·돼지 도체 중량 증가가 둔화되었으며, 이후 증가세는 주로 돼지고기에 의해 견인되었다는 점이다. 1936년에는 단 한 해를 제외하고 소 도체 중량이 돼지 도체 중량을 웃돌았다.

육식 소비 형태에서도 양적 측면에서 소고기를 중심으로 한 근대 일본의 육식 확대 과정을 검증할 수 있다. 선행 연구로는 하라다 노부오의 『역사 속의 쌀과 고기』가 있다. 그는 고대부터 근세에 이르는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육식이 배제되어 간 경위를 분석하였다. 다이카 개신으로 성립한 중앙집권국가는 살생 금기를 국교 수호의 기둥으로 삼고, 반전수수법(班田収授法)을 근간으로 하는 조세 체제를 확립하여 벼농사를 국가 기반으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천황이 주재하는 성스러운 쌀’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육식이 배제되었다.

하라다는 이러한 배제 과정이 정치 질서, 사회 환경, 농업 생산력, 국가 영토 등의 변화와 얽혀 강화되었다고 분석한다. 그러나 그의 분석 중심은 중세와 근대의 육식에 관한 기존 통설, 즉 천황에 의한 서양식 육식 해금 모델에 의존하고 있다. 생활의 연속성과 식행동의 신체성을 고려할 때, 정치권력에 의한 갑작스러운 단절만으로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실제로 근세에는 ‘약식(藥喰)’이라는 예외적 관습이 존재했고, 하라다는 근세 육식을 분석하며 근세에서 근대로의 이행 과정에서 육식이 해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내면화된 육식 기피 감정이 축사육, 내장육, 조류육이라는 형태로 잔존했음을 지적하였다. 이는 중요한 지적이지만, 시각을 바꾸어 생산·공급 측면에서 보면 근세와 근대 사이에는 단절이 존재한다. 근세의 약식은 주로 사냥된 야생 짐승 고기였으나, 근대 이후의 육식은 사냥육이 아니라 가축육, 그중에서도 소고기를 중심으로 전환되었다.

근세 이전의 사냥육에서 근대의 가축육으로의 전환에는 새로운 가축육 생산·공급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따라서 생산·공급 면에서 근대의 육식을 고찰할 때 몇 가지 전환점이 존재한다. 첫 번째 전환점은 메이지 초기, 즉 문명개화기이다. 메이지 신정부는 서구 열강과의 문화적 동질성을 보여 불평등조약 개정을 실현하고자 외교적 목적에 따라 여러 변화를 정책적으로 도입하였다. 식생활에 있어서도 ‘육식 해금’이 이루어졌고, 약식 관습은 사라졌다. 그러나 실제로 문명개화의 상징으로 널리 소비된 것은 전통 조리법과 식사 형태에 새로운 식재료인 소고기를 더한 ‘규나베(牛鍋)’였다.

특히 규나베집에 모이는 사람들을 묘사한 『규나베라쿠(牛鍋楽部)』는 1872년(혹은 1873년)에 출판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전국적으로 ‘규나베 붐’이라 할 수 있는 상황이 나타났다. 이는 근대 일본의 육식이 단순히 서양식 문화 수용이나 ‘위로부터의 육식 도입’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복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전까지의 ‘소’ 육식 기피에서 벗어나 문명개화기의 규나베(牛鍋) 붐을 가능하게 한 요인은 ‘이성(理)’과 ‘미각(美味)’이었다. 서양 이미지와 결합한 ‘이성’에 의한 설명이 관념적이었다면, ‘미각’은 직접적으로 감각에 호소하는 것으로, 육식 수용 과정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했다고 할 수 있다.

문명개화기의 육식으로는 그동안 규나베와 서양 요리만이 주로 거론되어 왔다. 그러나 여기에 더해, 노점에서 판매되는 ‘조림 규나베’나 서양 요리처럼 점포 내부가 아닌 노점에서 서서 먹는 ‘조린 고기’라는 형태도 존재했다. 노점 조림은 언제 만든 것인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개고기나 말고기가 섞여 있다는 말이 돌았으며, 규나베집에 갈 수 없는 빈민층이 먹는 음식으로 여겨졌다. 같은 육식이라 하더라도 규나베 붐기에는 개화 이미지와 결합하지 못한 채 하층민의 음식으로 인식되었다.

계층 차이를 지닌 채, 전통 조리법인 ‘나베(鍋)’를 중심으로 수용되었다는 점은 일본적 육식 수용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규나베 붐을 뒷받침한 것은 전국적으로 존재했던 역우(役牛)였다. 이들은 노동에 사용된 후 식용으로 전용되어 소고기 수요를 충당했다.

두 번째 전환점은 러일전쟁이었다. 군수 수요의 증가는 국내 역우에 기반한 소고기 공급 체계의 한계를 드러냈다. 이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새로운 공급원으로 조선과 제주도까지 소를 조달하게 되었다. 한편, 국내에서는 시가현을 중심으로 보다 지방질이 풍부하고 부드러운 육질을 얻기 위한 비육이 이루어져 질적 다양화가 나타났다.

다음 장에서는 조선산 소의 수입에 대해, 식생활적 측면에만 그치지 않고 농업, 식민지라는 맥락 속에 위치시켜, 식생활사 연구가 가질 수 있는 분석 범위를 제시한다.

소고기 소비의 확대는 인구 증가와 육식 습관의 보급에 따라 메이지 말기부터 다이쇼 초기까지 급속히 증가하였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 호황기였던 다이쇼 5년에는 소비량이 5만 2,140톤으로 늘어났다. 국내 생산만으로는 소고기 수요를 충족할 수 없게 되어 조선뿐 아니라 청도에서도 수입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를 양적 측면에서만 파악하는 것은 불충분하다. 이러한 육식 확대를 지탱한 소고기 공급 체계의 변화는 어떤 성격의 것이었는가, 또 그것은 어떠한 정치적·문화적·경제적 맥락 속에서 가능했던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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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러일전쟁 이후의 소고기 수요 확대와 조선 소

1900년대에 접어들어 경운기가 보급되기 전까지, 소는 전용 육우로 존재하지 않았다. 56년의 노동 기간을 거친 후 육용으로 전환되는 ‘노역 겸용우’로 사육되었다. 그러나 경제 소와 도축 소의 증가가 곧바로 노역우의 감소를 의미하였다. 실제로 러일전쟁 전 5년(1899~1903)의 연평균 도축 소 두수는 약 ○만 두였으나, 1904년에는 28만 두를 넘어 급증하였고, 이로 인해 소 사육 두수는 1903년의 25만 두에서 17만 두로 감소하였다.

당시 전선에 출정하는 군대에 공급할 통조림 제조용 소가 대량으로 필요했다. “아무리 소를 총동원해도 군대의 수요를 충족할 수 있을지언정, 그로 인해 경작에 사용할 소가 부족해지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인슈(因州)와 작슈(作州) 일대에서는 러일전쟁 개전 이후 식용 소의 거래가 더욱 빈번해졌고, 그로 인해 가격은 급등하였다. 기존에 한 마리 50엔 정도였던 소 값은 90엔에서 100엔에 이르렀다. 이러한 가격 상승은 농가에 심각한 부담이 되었고, 중하층 농가에서는 자가 사육이 불가능해 고용 소에 의존하게 되었다. 전시의 대량 도축 소는 농업에 위기적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었다.

가격 폭등의 주된 원인은 제2군의 군수품 수요였지만, 말 사용 지역에서 말 징발의 영향으로 인한 노역우 수요 증가, 러시아 포로 수용, 상인들의 투기적 매점 등 전쟁의 간접적 영향도 있었다.

이러한 대량 도축 소는 전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인구 증가와 경제 성장으로 인해 만성적인 공급 부족이 예상되었고, 국내 노역우 중심의 소고기 공급 체제로는 수요를 충족할 수 없다는 점이 명확해졌다. 이에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조선반도와 호주에서의 생우 및 소고기 수입이었다.

호주로부터는 냉동이라는 새로운 기술을 이용해 냉동육 수입이 시도되었으나, 기술적 한계와 기호 차이 등으로 당시로서는 소고기 공급 부족을 메우기에는 시기상조였다.

조선반도로부터의 생우 수입은 소역(牛疫)의 유입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었으나, 점차 일본 내 소고기 공급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다(그림 2).


(1) 생우(生牛) 수입과 우역(牛疫) 문제

조선 소 수입은 생체 상태로 이동하는 형태로 이루어진 점에서 중요한 특징이 있었다. 생체 이동은 방역상의 관점에서 문제가 될 소지가 있었다. 조선 소 수입이 본격화되기 이전인 1893년, 조선반도에서 유행하던 우역이 일본에 침입하여 큰 피해를 주었다. 조선반도는 ‘우역 상재지(常在地)’로 인식되었으며, 1893년 이후 러일전쟁 직전인 1903년까지 총 7차례에 걸쳐 우역이 침입해 피해를 끼쳤다.

1893년 우역이 상륙하기까지의 경위를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에서는 1891년 7월부터 우역 유행이 보고되었고, 원산 및 인천 주재 영사로부터 보고가 이어졌다. 1893년 1월에는 일본 농상무성이 훈령을 내려, 인천에서 수출되는 소가죽의 70~80%가 우역에 감염된 소에서 나온 것이므로 해당 지역에서 수입되는 소가죽에 대해 철저히 경계할 것을 지시하였다. 생우에 대해서는 당시 수입 두수가 연간 100두 미만으로 적었기 때문에 주의가 충분히 기울여지지 않았다.

당시 우역조사소장을 맡았던 야마와키 케이지는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한심하고 우스운 일이라 할 수 있으나, 당시 조선은 독립국이었고 또한 청국의 영향권에 있었기에 상호 방역에 관한 협조는 기대할 수 없었으며, 결국 일본 국내에서의 방역 수준 이상으로는 손을 쓸 수 없었던 것은 불가피했다”고 회고하였다.

이러한 우역 유행을 계기로 1896년에 『우역예방법』이 제정되었고, 이듬해인 1897년에는 우역검역규칙이 공포되어 우역 유행지에서 수입되는 가축에 대해 검역을 실시하는 체제가 정비되었다.

러일전쟁 개전 이후인 1904년 5월, 우역검역규칙이 개정되면서 기존에 고베·나가사키항에 한정되어 있던 검역항에 요코하마·시모노세키·겐간(嚴原) 세 항이 추가되었다. 이미 1900년에는 산인철도가 시모노세키까지 개통되어, 시모노세키는 부산에서의 해로와 혼슈 본토 철로를 연결하는 결절점이자 조선 소의 국내 거래·유통 거점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게 되었다.

이처럼 수입항에서의 검역 체제가 정비되었으나, 1908년에는 조선을 경유해 다시 우역이 대유행하였다. 이에 따라 기존의 내지(內地)에서 30일간 실시하던 검역 일정을 부산항·출항항·수입항에서 각각 9일, 항해 3일을 합한 30일간으로 분산하는 방식으로 변경하였다.

이는 1909년에 ‘수출 소 검역법’으로 법제화되었으며, 부산에 검역소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이중검역제’는 한국 병합 이후인 1915년, ‘조선 수출 소 검역 규칙’에 따라 폐지되었다. 이후 부산에서 18일간 검역을 받은 뒤 내지에서의 검역 기간은 30일로 변경되었고, 1910년의 개정으로 부산에서는 시진(視診)만 실시하도록 하여 검역 기간이 단축되고 절차가 간소화되었다.

이러한 검역 제도의 정비는 조선 소 수입의 원활화를 촉진하였다. 1915년 조선 소 수입은 약 2만 두였으나, 이후 비약적으로 증가하여 1920년에는 6만 두에 달했다.

1935년에는 부산뿐만 아니라 인천·원산·진남포·성진에도 검역소가 설치되어, 조선에서의 수출 환경이 한층 정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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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우(役牛)로서의 조선 소

조선 소가 도축육이 아닌 생우 형태로 일본에 이입된 것은, 역우로서의 이용 가치가 높았기 때문이다. 조선 소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성질이 극히 온순하고 순응적이며 제어가 용이한 점.

둘째, 영리하여 명령을 잘 따르고 일에 능숙한 점.

셋째, 체격이 크고 체질이 강건하여 질병에 잘 걸리지 않는 점.

넷째, 혹서·혹한과 비바람에도 쉽게 영향을 받지 않는 점.

다섯째, 거친 사료에도 잘 견디고 사육 관리의 번거로움을 줄일 수 있는 점.

여섯째, 생산비가 적게 들고 소 가격이 매우 저렴한 점.

일곱째, 체력과 사지가 강인하고 특히 발굽이 단단하여 중노동에 장기간 견디는 점.

여덟째, 살찌는 성질이 뛰어나 경제적으로 비육하기에 적합한 점.

아홉째, 번식력이 왕성한 점.

열째, 하중과 전쟁 시의 운반 능력이 강하고 보행 속도가 비교적 빠른 점.

열한째, 젖소 품종 개량의 기초로 적합한 점이다.

이 가운데 특히 역우로서 가장 적합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첫째, 둘째, 셋째, 넷째, 일곱째, 열 번째이며, 경제성에서 우수한 것은 다섯째, 여섯째, 여덟 번째이다. 이러한 역우로서의 장점을 가진 조선 소는 일본 내 농가에서 크게 환영받았다. 수입된 소는 곧바로 육우로 쓰이지 않고, 먼저 내지 농가에서 역우로 활용된 후 육우로 전환되었다.

1924년에는 일본 내에서 사육된 조선 소가 20만 두를 넘어섰다. 총 사육 두수는 142만 두가 넘었으며, 젖소를 제외한 133만 두 중 조선 소의 비중은 15.7%로, 약 6두 중 1두가 조선 소였다. 이 수치는 부현별 사육 소 품종별 두수 조사(도표 3)에서 확인된다.

부현별로 보면 조선 소의 절대 수는 야마구치, 효고, 오사카, 가가와 등 전통적인 소 역우지대에서 많았다. 그러나 비율로 보면, 서일본보다 오히려 동일본이 높았다. 예를 들어 도치기현은 총 사육 두수 중 81%가 조선 소였고, 젖소를 제외하면 그 비율은 98.7%에 달했다. 원래 말 농경지였던 이 지역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물가와 말값이 급등하면서 중산 이상 농가마저도 말 구입이 어려워졌다. 이에 대체 수단으로 도입된 것이 조선 소였다. 도치기현에서는 러일전쟁 이후인 1907년, 현축회(県畜会)의 공동구매 보조사업을 통해 조선 소 도입이 시작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시기인 1916~1917년경부터는 민간 상사에 의한 조선 소 수입도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조선 소 두수는 급속히 증가하였고, 앞서 언급했듯 젖소를 제외한 소의 대부분이 조선 소가 되었다.

서일본은 소 역우지대가 많았고, 지역마다 독자적인 소 품종 선호가 있었으며, 중국 산지의 소 생산지대에서 공급되는 유통 경로가 확립되어 있었다. 한편 시가현과 효고현 등에서는 지방 교잡 비육 기술이 발달해 있었으나, 조선 소는 적육형 소로 여겨져 상대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육우로서의 평가는 상승하였다.

수입 초기 조선 소는 과도한 부역으로 인해 근력이 크게 소모되어, 육우로서의 가치는 낮다고 평가되었다. 그러나 내지에서 사육하면서 영양 상태가 회복되고 체력이 증진되면, 도축 시에는 양질의 고기를 얻을 수 있음이 확인되었다. 실제로 당시 농가에서 사육된 조선 소는 수입 직후에는 뼈마디가 드러날 정도로 수척하였으나, 일정 기간 사육 후에는 훌륭한 고기를 생산할 수 있었다.

전시 이전의 일본 소 비육 과정에서는 ‘역우로서의 사용’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고, 비육 기술 수준은 낮아 단기 비육이 주류였다. 따라서 ‘역우와 비육’을 대립적으로 보는 평가는 현대적 관점에 치우친 것이다. 생우로의 이입은, 그 전에는 소 사육 경험이 없었던 지역이나 농가가 새롭게 소 경작을 시작할 수 있게 하였고, 사용 기간은 도축 전 비육의 전단계로서 가치가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역우 겸용이라는 당시 소의 이용 형태에 조선 소 수입은 잘 부합하였다.


③ 축우 개량·증식 방침

1932년, 축우의 개량 및 증식에 관한 통첩 등이 잇따라 발표되었다.

이 방침에서는 소가 농업 경영에 필수불가결한 존재이며, 동시에 중요한 수출입 품목이라는 두 가지 점에서 개량·증식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내지에서는 서양 품종을 도입하여 대형화를 도모하였지만, 조선에서 선택된 방법은 재래종을 활용한 개량이었다. 종모우의 선발 기준은 ‘북부산, 체격이 건전하고 성질이 양호하며, 뒷다리 발육이 충분한 조선 소’였다. 북부산 소는 남부산 소보다 대체로 체격이 크며, 성질이 양호하다는 조건은 역우로 사용할 때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발육은 역우에서 육우로 전환될 때 중요한 요건이었다. 1930년 약 70만 두였던 조선의 소 사육 두수는, 내지로의 대량 이출에도 불구하고 1935년 135만 두, 1936년 149만 두로 순조롭게 증가하였다. 이러한 수치에서 보듯, 1932년의 축우 개량·증식 정책은 성공을 거두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같은 해 중앙축산시장의 시장장 등은 조선 소 개량에 관한 청원서를 국회 의장에게 연명으로 제출하였다.

당시 일본 국내의 축우 상황은 수요에 비해 공급이 항상 부족했으며, 최근에는 조선에서 연간 5만 두, 청나라에서 연간 5만 두 이상의 생우와 육우를 합쳐 수입하여 부족분을 보충하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방치할 경우, 가까운 장래에 축우 자급자족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조선산 소는 본래 노동력에 뛰어나고, 체격이 건전하며, 노동에 견디고, 거친 사료에도 적응하며, 육질이 맛있어 농가에서 기르기에 가장 유리한 소였다. 그러나 조선 농가의 사육 상태가 불완전하여, 이입 직후에는 곧바로 육우로 사용할 수 없었고, 내지로 반입한 뒤 2~3년간 비육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육우로 출하할 수 있었다. 특히 조선에서는 거세를 하지 않는 관행 때문에 고기의 발달이 불충분하고 육질이 떨어지는 문제가 있었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도축 및 축산업을 민간에 장려하고, 비육 방법을 홍보·지도하며, 종우에 대한 거세를 철저히 실시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조치로 필요한 두수를 확보할 수 있었고, 조선 소는 개량·발달하여 육질에서도 내지로 반입되던 기타 산지 소의 수입을 억제할 수 있게 되었다. 나아가 축우 자급자족이라는 목표 달성 가능성도 기대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일독전쟁을 통해 일본은 교주만 조차지를 획득하였고, 중국 산동성으로부터의 생우·육우 수입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소고기 공급을 수입에 의존하는 구조였기에 장기적으로 위험하다고 인식하였다. 따라서 조선 소의 개량·번식·비육을 통해 자급을 달성하고, 제국권 내 식량 자급 구상을 실현하려 하였다. 조선을 식민지로 둠으로써 방역 체제 하에서 축우 개량이 가능해졌고, 내지로의 생우 이출을 보장하기 위한 두수 증식도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식량 자급이라는 궁극적 목적 달성에도 연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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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음말

이상과 같이, 근대에 있어서의 쇠고기 식용 확대 과정은 정치, 경제, 생활문화, 농업, 운송기술, 수의학 등 다양한 분야와 복합적으로 얽히면서 전개되었다. 구체적으로는, 소 전염병 문제는 소라는 가축의 이동이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문제였으며, 식민지라는 정치적 상황과 수의학·역학의 발달과 연계되어 일응의 해결을 보게 되었다. 냉장·냉동이라는 새로운 기술과 철도 건설이라는 운송기술의 발전은 조선 소 수입 확대를 가능하게 하였다. 이 시기 농업 생산수단으로서의 소의 성질은 중요한 요소였으며, 소를 단순히 식육 공급원으로만 파악해서는 충분치 않다는 점을, 역우로서의 조선 소 평가를 통해 밝힐 수 있었다.

축우 개량·증식 방침은 식민지 지배를 통해 조선 소가 지닌 생산력과 역우로서의 경제성 등 생물학적 조건을 다시 발견하게 하였으며, 군대의 소고기를 통해 소비와 관련된 육질의 차이, 소비 형태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나아가 영양학이라는 새로운 학문과 국가의 식량 개입이라는 측면에서도 축우를 바라봄으로써, 쇠고기 식용을 둘러싼 다양한 양상이 드러났다.

물론 이러한 조건과 상황을 상호 유기적으로 서술하는 데 한계가 있었으나, 근대의 쇠고기 식용은 결코 단선적인 확대 경로를 걸은 것이 아니었으며, 앞서 언급한 여러 조건과 상황이 복잡하게 얽히는 가운데 가능해졌음을 알 수 있다.

앞으로는 식문화가 지닌 복합성을 더욱 깊이 파고들 필요가 있다. 이러한 복합성이란, 예를 들어 계층 차이, 지역성, 그리고 성별 차이를 포함한다. 특히 지역성은 중요한 과제로, 종래의 식문화 연구가 사례 나열에 머무르는 경향을 넘어, 시간과 장소가 지닌 고유성을 밝히는 동시에 전체상과의 상호 참조를 행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1 http://kaidais.aska.ac.jp/kaidais/index2.php — 1951년 이후 발표된 경제사·역사학 관련 연구 저작을 검색할 수 있다. 2022년 8월 현재, 논문 85,680건, 도서 74,400건이 수록되어 있다.


2 『일본의 식생활 전집』, 농산어촌문화협회, 19841993년, 전 50권.


3 니노미야 히로유키, 『전체를 보는 눈과 역사학자들』, 목탁사, 1986년, 277278쪽. 초출은 『음식사림』 제2호, 1980년.


4 히구치 기요유키, 『일본 식물사—식생활의 역사』, 시바타서점, 1966년, 3334쪽.


5 루스 슈워츠 코언, 『어머니는 점점 바빠진다—가사노동과 기술의 사회사』, 호세이대학출판국, 2001년.


6 후지하라 다쓰시, 『나치스의 부엌—"먹는 것"의 환경사』, 스이세이사, 2012년.


7 앞의 책, 니노미야 『전체를 보는 눈과 역사학자들』, 278쪽.


8 페르낭 브로델, 『일상성의 구조』(물질문명·경제·자본주의 1518세기), 미스즈서방, 1995년.


9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문명화의 과정』, 호세이대학출판국, 2004년.


10 시드니 민츠, 『단맛과 권력: 설탕이 말하는 근대사』, 헤이본샤, 1988년.


11 하라다 노부오, 『역사 속의 쌀과 고기—음식과 천황, 차별』, 헤이본샤, 2005년.


12 앞의 책, 히구치 『일본 식물사—식생활의 역사』, 3334쪽.


13 필자, 「근대 일본에 있어서의 육식 수용 과정 분석」, 쓰지 료이치 『냄비 요리와 서양 요리』, 『농업사연구』 제44호, 2006년.


14 1904년 부록 『신문잡지』,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육식을 금지하였고, 황제가 친히 이를 허락하여 이제부터 육식을 한다는 뜻을 궁내성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알렸다”는 기사. 『신문집성 메이지 편년사 제1권—유신 대변혁기』, 나카야마 야스마사 편, 혼포쇼세키, 1982년, 45쪽.


15 필자, 「시가현에 있어서의 소 비육 형성 과정—전전기 역용·육용 겸용 시대의 비육 논리」, 『농림업문제연구』 제46권 제1호, 2010년. 역우 단계 자체를 비육 준비 기간으로 적극적으로 위치시키며, 육용우로서의 활용을 전제로 한 사육 방식이 모색되었다.


16 本고에서 말하는 ‘조선 소’는 당시 조선반도에 서식하던 재래종 소를 가리킨다. 오늘날 말하는 ‘와규’처럼 품종이 고정된 것은 아니며, 지역·개체별 차이가 큰 소의 집합이었다. 조선 소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으며, 암컷은 아직 일정한 개량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조우’ 계통의 품종에 속했다. 체격은 지역에 따라 크고 작음의 차이가 있으며, 골격과 능력은 비슷해 거의 동일하다고 한다(고즈카 마사미, 『조선의 산소』, 유린도서점, 1921년, 90쪽). 대체로 북부·서부의 소는 체격이 크고, 남부의 소는 작다. 북부 수소는 4.334.5척, 암소는 2.784.0척, 남부 수소는 4.2척, 암소는 4척 미만이라는 수치가 있다.


17 『소고기의 역사』 편집위원회 사무국 편, 『소고기의 역사』, 축산진흥사업단, 1998년, 36쪽.


18 교토부 기술자·수의학사 야마모토 다케이치, 『축산학 각서—혼돈의 기록』(교토부 임시축산회 축회於후루카와 소기술자 강의, 『일본우잡지』 제3호, 1905년 2월), 19쪽.


19 무기명, 「소의 매입과 마블링」, 『일본우잡지』 제7호, 1906년 1월, 5쪽.


20 무기명, 「수입우의 유랑 조짐」, 『일본우잡지』 제9호, 1906년 6월, 5쪽.


21 무기명, 「축력 보충—노동력 보충」, 『일본우잡지』 제9호, 1906년 9월, 38쪽.


22 후키우라 다다마사, 『일본가축방역사』, 분에이도서점, 1985년, 249쪽. 특별한 언급이 없는 한 방역 관련 사항은 이 책에 따른다.


23 조선에서의 우역은 항상 전염성 있는 질병은 아니며, 다만 조선에서의 우역류 발증은 함경북도, 이른바 시베리아 및 만주와 접하는 지역에서 발생한다는 지적이 있다.


24 앞의 책, 고즈카 『조선의 산소』, 45쪽. 효고현 내무부, 『효고현 우역예방 시말』(18931888년)의 5년간 기록. 1888년의 27,377두가 최소, 26,751두가 최대. 1888년의 52,988두가 최고.


25 오쿠야마 다미오, 『메이지·다이쇼기에 있어서 조선 소의 수입·이입·거래의 전개』, 『역사지리학기요』 제33호, 1990년, 148쪽.


26 앞의 책, 고즈카 『조선의 산소』, 26쪽.


27 농림성 축산국, 『축산심의회 답신』, 1977년, 15쪽.


28 농정조사위원회 편, 『개정 일본농업기초통계』, 농림통계협회, 1977년, 258쪽.


29 농림성 축산국, 『축산심의회 답신』, 1977년, 158쪽.


30 무기명, 「본토 내지에서의 조선 소 매입 및 역우의 실태」, 『일본우잡지』, 1927년 1월호, 3쪽.


31 무기명, 「조선 소에 관한 시게루 박사의 단편」, 『일본우잡지』, 1932년 2월호, 3쪽.


32 무기명, 「조선 소 해설」, 『일본우잡지』, 1935년 9월호, 7쪽.


33 전국육용우협회, 『일본 육용우 변천사』, 전국육용우협회, 2000년, 258쪽.


34 1978년, 「축우 개량·증식에 관한 건」(내무총리대신에 대한 지시) 2월, 「축우 개량·증식에 관한 건」(총훈 제9호, 4월), 「축우 개량·증식에 관한 건」(각 도도부현 장관에 대한 지시), 12월 「축우 개량·증식에 관한 건」(도 농업기술관에 대한 지시), 「축산에 관한 건」(도 농업기술관에 대한 지시), 「축우 개량·증식에 관한 건」(총훈 제9호).


35 「축산에 관한 건」(도 농업기술관에 대한 지시).


36 조선총독부 통계연보.


37 니이노 요시카즈, 「식민지 조선에 있어서의 ‘축우 개량·증식 정책’의 수량적 검증」, 『동양연구』 제35권 제3호, 2000년. 두수 증가는 있었으나, 가구당 경지 면적과 농가당 사육두수는 식민지 시기에 거의 변동이 없었기 때문에, 농업 생산 기반 확충이라는 정책 목표는 달성되지 못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38 무기명, 「조선산 소의 개량·발전에 관한 청원」, 『일본우잡지』 제30호, 1929년 5월, 4쪽.


39 하라다 다카시, 『소스로 읽는 일본 근현대사 ③—청일·러일전쟁』, 이와나미쇼텐, 2007년, 35쪽.


40 무기명, 「축산 일람」, 『일본우잡지』 제266호, 1926년 1월, 4849쪽.


41 무기명, 「축산 일람」, 『일본우잡지』 제266호, 1926년 1월, 4849쪽.


42 무기명, 「소고기 직하」, 『일본우잡지』 제68호, 1905년 5월, 3쪽.


43 이시게 나오미치, 에하라 아야코 편, 『근현대의 식문화』, 고분도, 2003년, 64~65쪽.


(노마 마리코, 교토대학 대학원 농학연구과 연구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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