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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육용우의 역사


일본 육용우의 역사


肉用牛の歴史



메이지 이전, 원시 일본인은 야요이식 문화기(서기 기원전 100년)에 들어가기 전까지 사냥과 어로를 중심으로 생활하였다.


조몬 문화기 말기(서기 500년)에서 야요이식 문화기 초기에 이르러, 대륙으로부터 주로 남방계의 소가 한반도를 거쳐 전래되었으며, 북규슈에서 시작된 벼농사 문화의 전파와 함께 동쪽으로 이동하였다.


당시 소는 지방 호족이 권력을 과시하거나 농경에 활용하기 위해 사육되었으나 그 수는 적었으며, 도살이나 식육에 대해서는 고려조차 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각지의 『풍토기』, 『고사기』, 『일본서기』를 비롯하여 『만엽집』 등에도 역대 천황의 사냥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어 육식의 가능성을 시사하나, 소고기를 먹었다는 명확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스카·나라·헤이안으로 이어지는 시기는 불교가 전래·정착한 시대이며, 불교의 영향으로 수차례에 걸쳐 식육 금지령이 내려져 소고기 이용은 감소하였다. 특히 간무 천황(781~806)의 식육 금지령으로 표면적으로는 소고기 섭취가 금지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러한 금지령의 배경에는 불교적 영향뿐만 아니라, 귀중한 소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고 한다.



헤이안 시대에는 귀족과 사찰의 사유 영지인 장원이 확대되었고, 그 안에는 말을 방목


하는 마키(馬牧)와 소를 방목하는 마키(牧)가 조성되었다.


이곳에서 기른 소는 귀족이 타는 우차를 끄는 데 사용되었다. 또한 우유 이용도 성행하여, 우유를 정제하여 만든 라쿠(酪), 끓여서 농축한 농유(酥), 정제한 다이고(醍醐) 등이 귀족들 사이에서 소비되었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무가의 세력이 강화되고 영지를 기반으로 쌀 증산에 힘쓰게 되었다. 이로 인해 평탄한 토지의 목장은 개간되어 논밭이 되었고, 목장은 산속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소는 농경과 분뇨를 이용한 퇴비 생산을 위해 각지에서 널리 이용되었다.



논밭 개간은 전국 시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에도 시대에 이르기까지 더욱 활발해졌으며, 목장은 점점 깊은 산속으로 이동하였다. 평지에서는 농경과 퇴비 생산을 위해 소가 널리 사용되었다.



소고기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일본에 온 외국인들에 의해 소비되었으며, 히코네번에서는 도쿠가와 시대에 소 도살이 허용되어 소고기 된장절임을 막부에 보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소고기 섭취를 꺼렸으며, 은밀히 야외에서 구워 먹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에도 시대에는 주고쿠 지방에서 채취한 사철을 원료로 한 다타라 제철이 성행하였고, 사철과 목탄을 운반하기 위해 하체가 튼튼하고 체구가 낮은 소가 이용되었다.


도호쿠 지방에서는 산리쿠에서 채취한 소금을 내륙으로 운반하기 위해 소가 사용되는 등, 용도에 맞게 체형적 특징을 지닌 소들이 많아졌다.


메이지 이전의 소는 털빛이 다양하였으나, 주고쿠 지방에서는 도쿠가와 시대 말기에 이미 멘델의 법칙이 발견되기 이전임에도 근대 육종학에서 사용되는 계통 교배와 근친 교배를 통해 소 개량을 시행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몇몇 계통의 소가 만들어졌다. 이를 ‘쓰루우시(蔓牛)’라 불렀다.



메이지 이후, 쇼와 30년대 중기까지의 육용우는 ‘역·육용우’라 불렸다. 역·육용우는 농업 부산물과 야초 등을 사료로 하여 사육되었으며, 농경과 운반에 이용되었다. 그 분뇨는 퇴비로 활용되어 화학비료의 절약에 기여하였고, 사육 중 태어난 송아지나 부역을 마친 뒤 비육된 소는 농가에 귀중한 현금 수입원이 되었다. 이 시기 자급적 농업 경영에 있어 역·육용우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존재였다.


페리 내항 이후, 외국인 거류지에서 소고기 수요가 발생하였고, 도쿄 시바 시로카네에 도살장이 설치되어 소고기 공급이 이루어졌다. 이 소고기 납품업자가 ‘규나베야(소고기 전골집)’를 시작하였다고도 전해진다.


메이지기에 들어서면서, 폐역우를 이용한 규나베와 스키야키가 일반 대중에게도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메이지 6~8년에는 지방 도시에도 도살장이 세워졌으며, 메이지 17~18년에는 효고, 시가, 미에, 야마구치, 에히메에서 소 비육이 시작되었다. 또한 메이지 19년에는 소고기가 군대의 식량으로 채택되었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귀환한 병사들에 의해 일반 소비가 현저히 확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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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2년, 젖과 고기를 겸용으로 생산하는 쇼트혼종(Short-horn)이 수입되었다. 이 품종은 이후의 역·육용우(役肉用牛)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으나, 쇠고기 소비가 확대되면서 메이지 20년대에는 외래종과 재래 와규의 교배가 검토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심멘탈(Simmental), 브라운 스위스(Brown Swiss), 데번(Devon), 쇼트혼, 에어셔(Ayrshire), 홀스타인(Holstein) 등의 외래종이 도입되었다. 메이지 33년에는 종우 개량조사회에서 외래종을 통한 재래 와규 개량 방침이 정해져, 심멘탈과 에어셔의 교배가 추진되었다. 그 후 약 10년간 외래종 교배가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특히 청일·러일 전쟁으로 쇠고기 소비가 크게 증가하면서 잡종우 생산에 박차가 가해져 ‘잡종 전성시대’라 불리는 시기를 맞이하였다.


이렇게 탄생한 잡종우는 체중과 유량은 증가하였으나, 체형이 크고 둔중하여 농경 작업에는 부적합하였으며, 육질 또한 전반적으로 불량하고 일본의 사료 사정에도 맞지 않았다. 그 결과 메이지 말기에는 ‘잡종 공황시대’라 불리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메이지 45년, 임시산우조사회는 잡종의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보완하여 일본 농업에 적합한 소를 만들기 위한 기본 방침을 제시하였다.


다수의 잡종우는 ‘개량 와규’라 불렸으며, 다이쇼 원년부터는 각 현의 실정에 맞춘 개량 목표 설정이 장려되었다. 다이쇼 6년부터 4년간은 주로 주고쿠·규슈 지방에서 본격적인 소 개량이 이루어졌다. 메이지 중기까지는 역·육용우의 젖도 이용되었으나, 다이쇼 초기에 이르러 유용종과 육용종이 완전히 분리되었다. 다이쇼기에 접어들면서 도시 인구 유출, 징병, 군마 징발 등으로 농촌 노동력이 부족해져 역·육용우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으며, 간토·도호쿠 지역으로도 보급되었다.


청일·러일 전쟁을 거치며 쇠고기 소비는 급격히 늘었고, 다이쇼 시기에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의 호황으로 소비가 한층 확대되었다. 이로 인해 국산 쇠고기 부족이 문제로 대두되었고, 다이쇼 6~10년에는 연평균 6,400톤의 청도 쇠고기와 30,400두의 조선소가 수입되었으며, 다이쇼 7년부터는 이에 대한 면세 조치가 시행되었다. 역·육용우의 비육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볏짚·쌀겨·잡곡·간장박 등을 활용하였으며, 다이쇼 말기에는 만주 대두박 이용법이 연구·보급되었다.


쇼와 초 농촌공황은 농업 경영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역·육용우는 경작 노동력 제공, 퇴비 생산에 따른 화학비료 절감, 노인·여성 노동력 활용, 야초·잡곡·쌀겨 등 부산물 이용, 송아지 생산과 사역 후 비육을 통한 현금 수입 등 자급적 농업에서 높은 가치를 인정받았고, 유축농업이 장려되었다. 이후 역·육용우 두수는 증가하여 쇼와 15년에는 206만 두에 달했다.


역·육용우 개량은 각 현이 ‘역6·육4’ 또는 ‘역5·육5’와 같은 목표를 세워 진행했으며, 쇼와 10년에는 심사 기준의 지역별 차이가 미미하다는 점이 확인되어, 쇼와 12년부터 흑모화우·갈모화우·무각화우로 구분한 전국 통일 등록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와규 3품종의 원형이 되었다.



쇼와 7~8년경에는 수소 거세 비육시험이 각지에서 실시되었으며, 쇼와 13년의 쇠고기 생산 비율은 암소 7, 수소 2, 거세 1이었다. 비육 개시 연령도 낮아져, 메이지 중기에는 6~8세였으나, 다이쇼 시기에는 수소 35세, 암소 5~6세로 단축되었고, 10세를 넘는 개체는 사라졌다. 다이쇼·쇼와기의 비육은 단방식(1두 단위 사육)과 깊은 깔짚을 쌓는 심마야식 축사에서 1가구 1~2두의 소규모 사육 형태로 이루어졌다. 비육 기간은 약 반년이었으나, 노쇠우는 12개월만 비육 후 출하하였다.



사료는 쌀겨·잡곡·대두박에 볏짚을 혼합하였고, 비육이 진행되면 보리를 첨가하였다. 3세 또는 5~6세까지 야초를 주로 먹은 소의 지방은 카로틴 함량이 높아 진한 황색을 띠었기에, 이를 희게 만들기 위해 카로틴 함량이 적은 볏짚이 좋은 조사료로 여겨졌다. 보리 급여는 지방을 부드럽고 점성이 있는 양질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귀중한 사료를 절약하기 위해 반죽사료·액상사료·가열사료 등 다양한 급여법이 활용되었다.


그러나 쇼와 12년 중일전쟁, 쇼와 16년 태평양전쟁 발발로 전시 체제가 강화되면서 사료 사정이 악화되어 비육은 급감하였고, 쇼와 19년에는 완전히 중단되었다. 청도 쇠고기 수입은 중단되었으며, 소는 군용 식량으로 대량 도축되었다.



종전 1년 후인 쇼와 21년, 육우 두수는 181만 두로 줄었으나, 대량 도축에 따른 도태가 진행되어 쇼와 19년에 와규 3품종은 고정 품종이 되었고, 일본 단각종은 쇼와 32년에 고정종이 되었다. 전후 식량 증산기(쇼와 24~25년)에는 농지개혁과 자작농 창설로 생산 의욕이 고조되었고, 쇼와 26년부터는 통제경제에서 자유경제로 전환이 시작되었다. 쇼와 27년에는 맥류 통제가 폐지되었고, 화학비료 사용이 증가하였으며, 쇼와 29년 MSA 협정 체결로 미국산 수입 곡물이 사료에 보급되었다. 같은 시기부터 경운기 보급이 시작되었다.



역·육용우는 식량 증산기에 큰 역할을 했으며, 쇼와 32년에는 사상 최고인 272만 두를 기록했다. 자유경제 이행과 함께 쇼와 25년경부터 비육이 부활하였고, 한국전쟁 특수로 쇠고기 소비가 계속 증가하였다. 그러나 쇼와 31년 이후 산업 호황과 농촌·도시 간 소득 격차 확대로 농업 현대화 모색이 본격화되었고, 역·비육 기능은 경운기와 화학비료에 대체되어 대량의 소가 시장에 방출되었다. 이 값싸고 풍부한 송아지와 수입 곡물로 인해 쇼와 34~35년에는 사상 최대의 비육 붐이 일었고, 현대적 대규모 전업 비육 경영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다만, 무분별한 자원 소모로 장래 쇠고기 자원 고갈 우려가 제기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쇼와 36년, 적지적작·규모 확대·전업화를 기둥으로 한 농업기본법이 제정되었으며, 쇼와 37년에는 농업근대화자금과 농업법인 창설이 이루어져 이를 기반으로 비육 경영이 확대·전문화되었다.



같은 해, 역·육용우 관계자는 일본 독자적 육전용종 창출을 목표로 ‘와규 유신’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 기본 사상은, 전통적으로 농경에 적합한 소형·경량우를 선호했지만, 메이지기에 도입된 대형 외래종의 증체력과 재래 와규의 육질을 겸비한 개체가 여전히 남아 있어, 적절한 선발·교배로 비교적 단기간에 일본 특유의 육전용종을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심사 기준이 체적 중심으로 개정되었고, 새로운 집단육종사업이 시작되었다. 종모우의 산육능력 검정사업이 발족했으며, 도체 거래 규격이 제정되어 개량 목표와 비육 기술 향상에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일본 사양 표준도 마련되었으며, 이후 개정·확대되어 현재 다수 사업의 기반이 되었다.



비육은 사역 후의 성우 비육에서 성장기 미경산 거세우를 18개월령 450kg에 출하하는 ‘거세우 조기 비육’이 주로 장려되었다. 일부 고급육 수요 대응을 위해 혈통이 우수한 거세우를 24개월령 600kg에 출하하는 ‘거세우 이상 비육’이 권장되었으며, 2~3세의 육질이 뛰어난 미경산 암우 비육은 자원 보호 차원에서 억제되었다. 이러한 비육방식은 쇼와 28년경부터 우에사카 쇼지 등에 의해 시험·준비된 것이며, 빠르게 확산되어 비육의 중심이 되었다. 암송아지 비육은 자원 보호를 위해 지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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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규 유신의 성과는 1967년 개최된 제1회 전국 와규 산육능력 경진대회에서 집약되었다. 당시 와규의 산육능력은 현저히 향상되었다고 평가되었으며, 이에 따라 젊은 개체의 비육 목표체중은 18개월령에 500kg에서 550kg으로 상향되었다. 또한 이상적 비육은 24개월령에 650kg에서 700kg으로 조정되었으며, 현재는 670kg이 표준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 시기 육우 개량은 육질을 유지하면서 증체량을 대폭 개선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1960년대 후반, 일본 경제가 고도성장기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쇠고기 수요는 지속적으로 증가하였다. 육전용종의 두수는 1964년 155만두를 저점으로 1970년 163만두까지 증가했으나, 이후 점차 감소세를 보였다. 1972년 오일 쇼크로 쇠고기 소비가 일시적으로 둔화되었으나 곧 회복되어 1974년에는 137만두를 기록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육전용종만으로는 장래 쇠고기 수요를 충족할 수 없다는 판단이 제기되었다.


그 결과, 1960년대 중반부터 시험적으로 도입된 젖소 수컷 송아지 비육이 급속히 보급되었고, 1973년에는 국내 쇠고기의 3분의 2 이상을 젖소육이 차지하게 되었으며 이후 70% 이상 비중이 지속되었다. 초기에는 거세하지 않은 상태로 15~16개월령에 출하되었으나, 관리 용이성과 육질 향상을 위해 거세 후 18개월령까지 비육하는 방식이 자리잡았다. 이 과정에서 육전용종의 ‘젊은 비육’ 개념은 젖소 비육에 밀려 이상적 비육으로 전환되었으며, 점차 용어 자체가 모호해지고 사라졌다. ‘이상적 비육’ 또한 마쓰자카 소와 같이 장기간 사육하여 육질을 개선하는 의미로 축소되었다.


육전용종의 비육기간이 연장된 주요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송아지 가격 상승으로 투자비를 회수하기 위해 육질을 더욱 향상시킬 필요가 있었고, 젖소육이 증가하면서 육전용종은 차별화된 고급육 생산이 요구되었다. 둘째, 급격한 사육 규모 확대에 따라 양질 조사료 생산이 부족해지고 값싼 볏짚 위주의 급여가 보편화되었으나, 볏짚 기호성이 낮아 농후사료 과급이 이루어져 소화기 질병이 빈발하였다. 이에 농후사료 급여를 줄이고 볏짚 섭취를 늘리면서 증체 속도가 둔화되어 비육기간이 길어졌다.


1970년대 일본은 쇠고기 자원 확보를 위해 외국산 육우 도입, 외래종 교배, 외국산 비육우 도입 등을 검토하였다. 아버딘앵거스, 헤리퍼드가 홋카이도와 동북 북부에 도입되었고, 외래종과 육전용종 교배 실험이 있었으나 실용화는 제한적이었다. 젖소에 샤롤레를 교배하는 시도도 있었지만, 큰 송아지로 인한 난산 문제가 심각하여 중단되었다. 외국산 송아지 도입은 1972년부터 관세 면제 조치와 함께 활발히 진행되었다.


1980년대 안정성장기에도 쇠고기 수요는 강세를 보였다. 축산물 전반에서 수요 증가가 둔화되고 유생산 조절이 시작되었으나, 쇠고기는 유일하게 성장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되었다. 송아지 가격은 급등했고, 젖소에 흑모와종을 교배한 F1 송아지 생산이 확대되었으며, 일부 비육농가도 육전용종에서 F1으로 전환하였다. 번식·비육 일관 경영도 확산되었으나, 고가 송아지의 반동으로 1981~1982년 가격 폭락이 장기간 지속되었다.


국산 쇠고기는 가격이 높다는 이유로 소비자와 언론의 비판을 받았고, 미국·호주로부터 수입자유화 요구가 거세졌다. 1982년 미국과 수입쿼터 확대 합의가 이뤄졌으며, 1988년에는 완전 자유화를 3년 후 시행하는 방침이 결정되었다. 이 시기 도축우 평가기준은 BMS(지방교잡도), BCS(육색), BFS(지방색) 등 구체적 수치 기반의 객관적 기준으로 전환되었다.


국산 쇠고기의 목표는 안전·고품질 쇠고기를 저비용으로 생산하는 것이었으며, 젖소는 B-3 이상, 육전용종은 A-4 이상을 목표로 하고 생산비를 20~30% 절감하는 방안이 추진되었다. 이는 수입육이 C-2 등급의 냉동육이 많다는 점을 고려하여, 국산육은 가정용, 수입육은 외식·가공용으로 시장을 분리하려는 전략이었다.


버블경제기(1988~1990년)에는 고급육 수요 증가로 흑모와종 가격이 상승했으나, 1991년 이후 젖소육과 갈색와규 가격은 하락하고 흑모와종만 상승하는 품종별 가격 양극화가 나타났다. 1993년에는 흑모와종 내에서도 등급별 가격 격차가 심화되었고, 전체적인 가격 하락은 버블 붕괴, 급격한 엔고, 금융 불황 등 사회경제적 요인의 영향이었다. 이에 소비자 가격 감각에 맞춘 도체 생산이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비육농가들은 젖소 비육에서 F1, 또는 흑모와종 비육으로 전환하는 추세를 보였고, 흑모와종 내에서도 계통별 가격 차이가 커졌다. 좋은 도체를 생산하더라도 반드시 높은 수익을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으며, 종모우 능력 평가에 육종가 개념이 도입되어 향후 개량 효과가 기대되었다. 수입자유화 이후 생산자들의 육질 지향은 강화되었으나, 앞으로는 육질 개선뿐만 아니라 생산비 절감과 안전성 확보가 병행된 쇠고기 생산이 요구되는 상황이 되었다.


肉用牛の歴史(明治以前)|肉用牛の豆知識|一般社団法人 全国肉用牛振興基金協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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