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소와 일본식민지시대(1900–1945년)의 관리·이용에 관한 조사보고
朝鮮牛と日本植民地時代(1900–1945年)における管理・利用に関する調査報告
처음으로
1900년부터 1945년에 이르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하에서 조선반도에서 사육된 소, 이른바 ‘조선소’는 농업생산에서 군수물자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친 역할을 담당하였다. 본 보고는 당시의 정책 기록, 통계, 학술 연구 및 1차 사료를 토대로, 식민지기 조선에서의 조선소의 위상과 이용 실태를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특히 일본의 축산정책의 내용, 쇠고기와 우피의 수출입 실적, 도축 규제와 도축장의 운영, 그리고 조선소의 경제적·군수적 역할에 관하여 상세히 논한다.
일본의 축산정책과 조선소의 위상
일본의 조선 통치 개시와 함께 축산 진흥과 가축 위생 체제의 정비가 추진되었다. 1910년 한일 병합 직후 ‘권업모범장’이 설치되어 농업과 축산의 개량·장려가 도모되었고, 1915년에는 가축전염병 예방과 소의 수출입에 관한 검역 제도가 정비되어 조선에서 일본 본토로 소를 반출할 때 이중 검역을 거치도록 하는 체제가 확립되었다. 일본은 조선소를 ‘제국의 자원’으로 위치지우고 전략적으로 활용을 추진하였다. 일본 정부와 군부는 일찍이 조선소의 군사적 가치를 주목하였으며, 러일전쟁 중에는 군화·배낭 등 군수품 제조에 필요한 우피 부족을 보완하기 위해 검역법을 개정하여 조선에서의 소 수입을 확대하고 현지 조달도 실시하였다. 쇠고기는 병사의 군용 식량으로도 중요하여 전시 하에 조선소의 조달에 주력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식민지 지배의 심화와 더불어 한층 뚜렷해졌으며, 1927년 경성에서 열린 제11회 축산대회에서는 일본 측 대표가 “조선 축산의 진흥·발전은 일본의 식량문제와 군수품 생산을 목적으로 한다”고 발언하기도 하였다.
일본의 정책은 한편으로 조선 농가의 소 사육도 장려하였다. 당시 농촌에서 소는 농경과 운반에 필수적인 노동력이었으며, 가축 분뇨는 중요한 퇴비 자원이었고, 부수적으로 얻은 송아지나 노령우는 현금 수입원이 되었다. 1923년 기준으로 조선의 농가 100호당 사육 두수는 56두로 일본 본토의 24두를 크게 상회하였으며, 전체 사육 두수는 약 161만 두에 달하였다. 조선소는 일본 재래 와규보다 체격이 크고 번식력이 높다고 평가되었고, 일본인들은 이를 경쟁적으로 구입하여 농사에 이용하고, 사역 후 비육하여 고기로 판매하였다.
쇠고기·우피의 수출입과 통계
식민지기 조선소는 일본 및 기타 지역과의 교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1900년부터 1942년까지 조선에서 일본 본토로 반출된 생우는 누계 150만 두를 상회하였으며, 특히 제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30년대 전반에 걸쳐 반출 두수가 급증하여 연간 6만8만 두에 이르렀다. 1920~30년대에는 일본이 보유한 소의 약 15%가 조선산이었다. 우피 역시 중요한 수출품으로, 1892년부터 1942년까지 약 600만 두분이 일본에 공급되었으며, 그 수요의 대부분은 군화·군장 등 군수용이었다. 이 같은 대규모 반출로 인해 조선 내의 소 체격이 점차 소형화되었으며, 1930년에 평균 224kg이던 암소의 체중은 1942년에는 185kg으로, 수소는 377kg에서 277kg으로 감소하였다
도축 규제와 도축장 운영
조선총독부는 1909년 ‘도수규칙’을 공포하여 허가받은 도축장에서만 도축이 가능하도록 하였으며, 위반 시 엄격한 처벌을 가하였다. 1915년까지 약 5,110명이 무허가 도축 혐의로 처벌되었다. 식민지기에는 주요 도시마다 도축장이 정비되었으며, 위생 관리와 물자 통제를 이유로 점차 관영화·집중화가 이루어졌다. 경성부는 1925년 민간 도축장으로 통합 조치를 취하였고, 부산 등지에서도 공설 식육시장과 도축장이 설치되어 세수 확보에도 활용되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도축 후 내장이 시장으로 공급되어 특유의 식문화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조선소의 경제적 역할
조선소는 농업 생산 기반이자 농가의 중요한 자산이었다. 농경, 운반, 퇴비 생산 등 다방면에 이용되었으며, 농가당 사육 두수는 일본보다 높았다. 소는 ‘살아있는 자산’으로 농한기에 매각하여 현금화할 수 있었고, 도시의 쇠고기 수요 증대에 따라 시장 유통도 활발하였다. 경성·평양 등 대도시에는 식육시장이 형성되었고, 조선소는 일본인·외국인에게도 소비되었으며, 일부는 수출용 통조림으로 가공되었다. 그러나 지나친 반출은 농업 생산에 지장을 초래하였고, 총독부는 일정 수 이상의 암소 도축을 금지하는 등 농업·식육 수요의 균형을 꾀하였다.
군수적 역할
조선소는 군수 물자로서도 중대한 의미를 가졌다. 쇠고기는 군용 식량으로, 우피는 군화·군장·마구의 원료로 활용되었다. 러일전쟁과 만주사변, 중일전쟁기에는 부산 등지에서 도축된 쇠고기·돼지고기가 통조림으로 가공되어 만주 전선에 공급되었다. 전시에는 우피의 반출이 반강제적으로 이루어져, 조선인들이 자국 내에서조차 가죽제품을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였다. 또한 소는 운송수단으로도 동원되어 물자 수송과 토목 현장에 투입되었다.
결론
1900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소는 정치·경제·군사 모든 측면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였다. 일본의 축산정책 아래 농경의 주력으로 장려되는 동시에, 제국 경제와 군수 수요를 충족하기 위한 자원으로 수탈되었다. 도축 규제와 도축장 운영의 변천은 식민지 권력이 축산 유통을 장악하고 조선인 정육업자와 노동자까지 통제하였음을 보여준다. 경제적으로 조선소는 농촌 생계의 핵심이자 도시 식문화와 시장경제를 연결하는 상품이었으나, 군수 우선 정책으로 자원은 고갈되어 농민 생활과 영양 상태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군사적으로는 조선소 없이는 일본 제국의 전쟁 수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그 고기와 가죽은 병참을 지탱하였다. 조선소의 사례는 식민지 지배와 전쟁이 사람뿐 아니라 동물 자원에까지 미친 영향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