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목초 한우 3

제2장 바람·풀·중산간

제2장 바람·풀·중산간

강풍과 초지 생태

제주는 예로부터 ‘삼다도(三多島)’라 불릴 정도로 바람이 많기로 유명한 섬이다. 특히 한라산의 중산간 지역에는 광활한 초지가 펼쳐져 있는데, 이는 강한 바람과 독특한 지형이 만들어낸 제주의 대표적 경관이다. 제주 중산간의 넓고 평평한 초원 지대를 가리키는 제주 방언으로 ‘벵듸’라는 말이 있다. 오름과 곶자왈이 화산이 빚어낸 산과 숲이라면 벵듸는 화산 활동으로 형성된 초원 지형으로서 제주도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자연환경 자원이다. 실제로 제주도는 국토 면적의 1.8%에 불과하지만 초지 면적은 전국 초지의 약 46.6%를 차지할 만큼 초지가 발달해 있다. 그만큼 중산간 일대에 펼쳐진 드넓은 풀밭은 한라산 생태계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제주의 강풍은 이러한 초지 생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강한 바람은 키 큰 나무의 성장을 어렵게 하고 수분 증발을 촉진하여, 중산간 지역에 숲 대신 풀밭이 유지되기 쉬운 환경을 조성한다. 바람을 잘 견디는 억새와 띠와 같은 여러 다년생 풀들은 뿌리를 깊게 내려 토양을 단단히 붙들고, 유연한 잎과 줄기로 거센 바람에도 몸을 낮춰 흐름에 순응한다. 바람은 또 풀들의 종자를 멀리 퍼뜨려 초원의 범위를 확대하고 다양성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이처럼 강풍에 적응한 풀들은 서로 촘촘한 군락을 이루어 땅을 덮고 있으며, 이러한 초지 생태계는 제주의 독특한 기후와 지형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중산간 초지는 제주 환경에서 여러 가지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 초지는 축산업의 기반이 되는 풀사료를 생산하는 것은 물론, 청정 환경을 유지하는 데에도 기여하는 생태자원이다. 예를 들어 조밀한 초지는 비나 태풍 시에 빗물을 흡수하고 토양 침식을 막아준다. 또 풀뿌리가 토양을 잡아주어 산사태와 홍수를 완화하고, 초지에 스며든 빗물은 지하수 함양에 도움이 된다. 한편 방목 가축의 분뇨도 넓은 풀밭에 자연스럽게 분해·흡수되어 환경 오염을 줄이는 데 일조한다. 풀잎은 광합성을 통해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배출하여 대기 정화에도 기여한다. 이처럼 중산간 초원은 경관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토양과 물, 대기를 보호하는 다기능적인 녹색 기반시설이라 할 만하다.

강풍과 광대한 풀밭이 만들어낸 제주의 초지 풍경은 문화적으로도 큰 의미를 지닌다. 한라산 중턱의 드넓은 들판에서 말과 소가 한가로이 풀을 뜯는 모습은 과거 영주십경(瀛州十景)의 하나인 “고수목마(古藪牧馬)”로 꼽힐 만큼 제주를 대표하는 장관이었다. 거센 바람에 일렁이는 억새밭 사이로 방목된 소와 말들이 어우러진 광경은 제주 자연과 인간의 삶이 교감해온 오랜 역사를 보여준다. 이러한 자연미와 목가적 풍경은 많은 이들에게 제주의 정체성을 환기시키며, 풍광 이상의 생태 문화유산으로서 가치를 지닌다.

제주 자생 초종과 소의 관계

중산간 초지는 단순한 자연 경관이 아니라 수세기 동안 이어져온 제주 목축 문화의 무대이기도 하다. 실제로 기록에 따르면 고려 말기부터 제주에서는 초지를 활용한 목축이 본격화되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목마장인 탐라목장이 바로 이 벵듸 중 한 곳인 수산평에서 시작되었다고 전한다. 이는 제주 초원이 약 700년에 걸친 목축문화의 산실이었음을 의미한다. 오랜 세월 제주의 소들은 이 땅에 자생하는 풀을 뜯고 자라왔고, 사람들은 이러한 풀밭을 지켜가며 가축을 길렀다. 제주 중산간 초지에 자생하는 주요 초종(草種)은 억새, 띠, 새풀 등 바람과 척박한 토양에 잘 견디는 풀들로, 특별한 경작 없이도 스스로 번식하며 매해 가축의 먹이를 제공해왔다. 사람과 소와 풀이 만들어온 이 지속 가능한 관계는 제주 농경문화의 한 축을 이루어 왔다.

제주의 자생 풀들은 강인한 생명력으로 계절마다 돋아나 가축에게 먹이를 공급한다. 봄이 되면 겨우내 마른 억새와 띠의 그루터기 옆으로 신선한 새 순이 돋아나기 시작하고, 방목된 소들은 영양가 높은 이 연한 풀들을 골라 먹는다. 소들은 주로 맛이 좋고 소화가 쉬운 어린 풀잎을 선호하기에, 초지에는 소가 먹지 않은 거친 풀들도 함께 남게 된다. 예를 들어 억새처럼 질긴 풀이나 가시가 있는 식물들은 소들이 기피하여 더 많이 자랄 수 있다. 그 결과 적절한 방목 하에서는 연한 풀과 질긴 풀의 균형이 유지되지만, 과도한 방목이 이루어지면 소들이 좋아하는 부드러운 풀들은 감소하고 억새류와 같은 강인한 종만 남아 초지의 생물다양성이 줄어들 수 있다. 반대로 방목이 너무 이루어지지 않아 풀밭이 방치되면, 풀들이 지나치게 자라거나 키 큰 덤불과 어린 나무들이 올라와 초지 생태가 사라질 위험도 있다. 따라서 풀과 소의 상호작용은 초지의 종조성과 구조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다.

소와 풀은 서로에게 이익을 주는 공생적 관계이기도 하다. 소들은 풀을 먹고 생존과 성장에 필요한 영양분을 얻는다. 풀은 소의 섭식 압력을 받으면서도 이에 적응하여 도리어 건강한 생장주기를 유지한다. 방목으로 풀들이 주기적으로 먹히면 햇빛을 더 잘 받기 위해 빠르게 새싹을 틔우고, 이렇게 새로 난 어린 풀잎은 다시 소의 훌륭한 먹이가 된다. 또한 방목 가축이 다니며 밟는 행위는 땅 속 종자은행(seed bank)을 자극하여 휴면 상태의 풀씨가 발아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소의 배설물은 풀밭에 자연 비료가 되어 토양을 비옥하게 함으로써 풀의 성장을 돕는다. 이처럼 오랜 세월 이어진 저강도 방목 환경에서 제주 자생 초지의 풀들은 소와 주고받는 관계를 통해 번성해 온 것이다.

제주의 중산간 초지에서 형성된 풀과 소의 관계는 단순한 먹이 사슬을 넘어, 자연과 인간이 맺은 전통적인 생태 계약이라고 할 수 있다. 초지 생태계는 강풍, 화산토양, 그리고 인간의 방목 활동이 어우러져 유지된 결과물이며, 그 속에서 자생한 풀들과 길러진 소들은 함께 적응하고 공진화해 왔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 제주에서도 축산 방식의 변화와 개발 압력 등으로 중산간 초지와 방목 문화가 축소되어 가고 있다. 초지가 줄어들고 방목이 감소하면 풀과 소의 오랜 상호작용도 단절될 수밖에 없다. 이는 곧 제주의 전통 생태문화가 위협받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제주 고유의 풀밭을 보존하고 소를 건강하게 방목하는 일은 단순히 목축업의 유지를 넘어서, 제주의 자연생태와 문화적 정체성을 지키는 길이라 하겠다. 강풍과 풀, 그리고 소가 어우러진 중산간 초지는 제주가 간직한 소중한 유산이며, 미래 세대를 위해서도 꾸준히 지켜나가야 할 자산이다

매거진의 이전글제주목초 한우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