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탐라국과 소
제 2부 제주 소의 기원과 전통 목축
제 3장 탐라국과 소
옛 제주를 가리키는 탐라국은 일찍이 풍부한 초지를 바탕으로 소를 비롯한 가축 사육 문화를 발전시켰다. 탐라 개국 신화에 따르면 세 신인이 한라산 북쪽 모흥혈에서 솟아난 뒤 하늘에서 온 세 공주와 혼인하여 정착하였는데, 이때 공주들이 가져온 망아지와 송아지, 오곡의 씨앗이 탐라에 전해졌다.
신화에서는 세 신인이 처음에는 짐승을 사냥해 가죽옷을 입고 살았으나, 혼인 후 “비로소 오곡을 심고 또 망아지와 송아지를 길러 날로 부유하고 번창해갔다”고 전한다. 이는 탐라에서 목축이 농경과 함께 생활 기반으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일화다. 실제로 학자들은 탐라국 지배층 등장 이전부터 제주 토착민들이 해안가 취락 주변에서 소 등을 사육해 왔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제주도의 온화한 기후와 광활한 초지는 예로부터 목축에 적합했고, 이러한 환경적 조건 덕분에 탐라는 삼국 시대부터 인근 한반도 왕국들과 교류하며 가축을 산물로 제공할 수 있었다.
중앙 사료에서도 탐라의 가축 사육에 대한 단서를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 등에 따르면 탐라는 5세기 후반 백제 동성왕대에 토산물을 바쳐 속국이 되었고, 통일신라 문무왕 2년(662)에는 탐라 왕족이 신라에 조공하여 신라로부터 성주·왕자 등의 작호를 받는 등 일찍부터 한반도 왕조에 예물을 바쳐왔다.
이때 구체적으로 어떤 공물이 있었는지 정확히 나오지는 않지만, 제주도의 자연환경상 말을 비롯한 가축과 해산물 등이 주요 토산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탐라는 “말이 많이 나는 섬”으로 인식되어 왔으며, 소 역시 제주 지역에 자생해온 토종 가축으로서 중요 자원이었다.
고려 시대 편찬된 《고려사》 지리지에도 탐라(제주)가 여러 이름으로 불렸고 신라 이후 고려에 귀속되었다는 기록이 전하는데, 이는 탐라가 삼국시대 이래로 중앙 왕조의 영향권에 들며 그 산물(産物) 또한 국가에 인식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고려 말기에 이르러 제주는 본격적인 목축 기지로 주목받게 된다. 13세기 후반 몽골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제주에서는 대규모 국영 목장이 설치되었다. 원 종묘(元宗廟)에 따르면, 몽골 원(元) 황제가 탐라를 직할지로 삼은 뒤 1276년 탐라에 군마 생산을 위한 목장을 세웠는데, 이는 제주의 기록상 최초의 관영 목장이었다. 동년 제주 동부 수산평에 동쪽 목장이, 이듬해 서부 차귀평에 서쪽 목장이 설치되어 섬 전역을 동·서 두 개 아막(阿幕) 체제로 나누어 관리하였다고 한다.
몽골은 목축 전문가인 하치(몽골인 목자)들을 파견하고 160필의 말을 투입하여 제주 목장을 운영하였으며, 이후 한동안 말을 외부로 반출하지 않고 번식에 힘썼다. 이 시기 제주에서는 게르와 성채가 있는 몽골인 부락까지 형성되는 등 몽골식 목축 문화가 깊이 뿌리내렸고, 제주 토착 목축 방식에도 몽골의 영향이 미치게 되었다.
탐라국 시기의 자생적 소 사육 문화는 이러한 대규모 국영 목장의 도입과 결합되며, 이후 제주 목축의 기반으로 계승되었다. 다시 말해 탐라 시절부터 이어진 소 사육 전통은 고려 말 몽골의 체계적 목장 운영과 만나 한층 발전했고, 제주 소는 일찍부터 생산력과 교역 가치 면에서 국가의 관심을 받는 존재가 되었다.
국가 재산으로서의 소
고려 말 최영 장군이 이끄는 군대가 1374년 제주에 잔존하던 몽골 목호(牧胡) 세력을 몰아내면서, 제주도 내 말·소를 포함한 방목 자원은 고려 왕조의 직접 관할로 돌아왔다. 원 간섭기 동안 축적된 막대한 가축 자원은 고려왕조에게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실제로 명(明) 황실이 고려에 제주마 2,000필을 요구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에 몽골 출신 목자들이 집단 반발하여 소요가 일어난 것이 바로 목호의 난(牧胡의 亂)이었다고 전한다. 이는 제주 말(馬)과 소(牛)가 단순 지역 자산이 아니라 국제 외교와 군사 공급면에서 국가 재산으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몽골 세력 축출 후 고려 조정은 제주 목장을 접수하여 국유화하고 가축 관리를 강화하였는데, 이러한 기조는 새 왕조인 조선에서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조선 왕조는 건국 초부터 제주도를 말·소의 공급지로 중요시했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개국 후 제주에서는 해마다 소와 말을 조정에 공납하도록 제도가 마련되었는데, 이는 제주산 말·소를 국가 재산으로 공식적으로 다루었음을 의미한다.
이후 말은 지속적으로 공납되었으나 소의 정기 공납은 어느 시점에서 중단되었다. 세종 20년(1438) 세종대왕은 경연에서 “내가 듣기에 제주에 소가 많이 난다는데, 오늘날 말만 바치고 소는 바치지 않는다. 근래 태조실록을 보니 ‘제주에서 해마다 소와 말을 공납하였다’는 말이 있다. 어느 때부터 소 공납을 폐하였는가?”라고 물으며 그 연유를 밝힐 것을 지시하였다. 세종은 한때 소 공납을 부활시키려 했으나 신하들의 만류로 보류한 바 있고, 이처럼 소를 국가에 바치는 제도의 폐지 경위를 궁금해하였다. 신하들이 조사한 결과를 《세종실록》 후속 기사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에 따르면 고려 말 왜구의 침탈과 제주 기근으로 소 감소가 심각하여 공납을 면제한 것이 시초였다고 한다 (실록 내용 종합). 이는 소가 국가 재산으로 중시되었으나 제주 사회 사정상 과도한 수탈을 조정에서 완화해 준 조치로 해석된다.
비록 정기적인 소 공납은 중지되었어도, 제주산 소는 계속해서 국가의 특별 자산으로 다루어졌다. 제주에는 토종 흑우(검은 소)가 서식했는데, 이 소는 고기 맛이 좋고 희소하여 고려시대 이래 임금 생일이나 나라 제사 때 쓰이는 진상품 겸 제향품으로 지정되었다고 전한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 곳곳에 제주 흑우 관련 기록이 등장한다. 인조 16년(1638) 예조의 보고에 따르면 “제주를 통틀어 검은 소가 단지 세 마리밖에 없고, 전생서(典牲署)에도 다섯 마리만 남아 앞으로 제향에 쓸 길이 없다”고 하였다. 임금 제사에 바칠 제주 흑우가 부족해지자, 예조는 흉년에는 제물을 낮추어 쓴다는 예법을 들어 대신들과 상의하여 대책을 구했고, 당시 영의정 이홍주 등은 “이처럼 소가 다 없어졌으니 부득이하면 양(羊)으로라도 소를 대신하자”고 아뢰었다.
인조가 “양으로 소를 대신하는 것은 매우 미안하다”며 난색을 표하자 최종적으로 “농경용 누런 소를 잡아 제사용으로 쓰는 것이라도 양보다는 낫다”는 타협이 제시되어 임금이 따랐다. 이 일화는 제주 흑우가 국가 제례에 얼마나 필수적이었는지, 또 그 부족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조정이 고심했던 과정을 잘 보여준다. 제주 흑우는 이처럼 왕실 제사 전용 가축으로서 관리되었으며, 생산량을 유지하기 위해 제주 목장과 한양 전생서에서 특별히 사육·비축되었다.
조선 정부는 제주도의 말·소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행정·법령적 장치도 마련했다. 세종 때 편찬된 지리지를 보면 제주에는 감목관(監牧官)이라는 목축 담당 관리가 배치되어 있었는데, 제주목 판관이 겸임 감목관을 맡고 정의현감·대정현감도 각 고을에서 감목 업무를 겸하도록 규정되었다. 이는 제주도의 행정관들이 곧 국가 목장 관리자의 역할을 겸했음을 뜻한다. 또한 도내 주민들의 무분별한 가축 도살을 금지하는 엄벌 정책도 시행되었다. 세종 18년(1436)에는 “제주 땅이 좁고 민가가 조밀하여 도둑질로 남의 소와 말을 잡아 먹고 사는 자가 많아 말이 번식하지 않는다”는 보고에 따라 대대적인 단속이 이루어졌다. 세종은 우범자 약 800명을 색출해 그 가족까지 육지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산골에 숨어 소와 말을 잡아먹던 무리가 예상보다 많아 유배 길에 노약자들이 속출하는 등 부작용이 생겼다. 결국 세종은 “제주 백성들은 예의도 모르고 안정된 마음도 없어 몰래 산림에 숨어 소나 말을 도둑질해 잡아먹는 것이 예사이니, 이것은 오랜 더러운 풍속에 물든 것”이라 한탄하며 일부를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등 정책을 수정해야 했다. 이 사건은 국가의 가축 보호 정책과 제주민 생계 현실이 충돌한 사례로, 국가 재산인 말·소를 지키려는 조정의 의지와 그로 인한 사회적 파장을 잘 보여준다.
국가 재산으로서 제주 말·소의 중요성은 지속적으로 확인된다. 숙종 12년(1686) 기록에는 혹한으로 제주도에서 기르던 소와 말 2,890마리가 동사(凍死)했다고 보고되었는데, 이는 단일 재해로 수천 마리의 가축 손실이 발생할 만큼 당시 제주 목장이 대규모로 운영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숙종 9년(1683)에는 제주에 우역(牛疫)이 돌아 수만 두의 소가 폐사하였다고 한다. ‘수만(數萬)’이라는 표현대로라면 수십 thousands에 이르는 엄청난 피해로, 국가적으로 큰 타격이었다.
이러한 재난이 발생하면 조정에서는 즉각 보고를 받고 대책을 논의하였으며, 이처럼 제주 목장의 흥망은 곧 국가의 군마(軍馬) 확보와 제향용 가축 조달에 직결되는 문제였다. 정리하면, 고려 말부터 조선에 이르는 기간 동안 제주도의 소는 단순한 향토 경제 자산을 넘어 국가의 전략적 자원으로 관리되었다. 공납 제도와 목장 관리를 통해 국가 재산으로 다루어진 제주 소는 왕실의 의례를 뒷받침하고 군용·농경용 가축을 공급함으로써 조선 사회에 기여하였다.
말·소 목장의 섬
제주도는 역사적으로 말과 소의 거대한 목장 섬으로 기능해왔다. 고려 시대 몽골의 탐라목장 설치는 제주의 지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은 전환점이었다. 원 세력은 삼별초 평정 후 제주 전역의 초지를 장악하여 동서 이분된 국영 목장 체계를 구축하였다. 동아막과 서아막이라 불린 두 행정구역을 통해 조직적으로 목장을 운영하고, 몽골인 관리와 목자들을 상주시켜 말과 소를 사육·번식시켰다. 목장 내에는 몽골식 가옥인 게르가 즐비하고, 말 우리 및 성책(城柵)이 세워지는 등 제주 풍광은 대초원 유목지대를 방불케 했다. 특히 수산목장과 차귀목장에서는 대군마가 사육되었으며, 목자들은 가축에 낙인 찍기, 거세, 방목지 교대 등 전문적인 기법을 도입했다. 원이 일본 원정을 준비하던 시기에는 제주마를 전략 비축물자로 여겨 한동안 외부로 반출하지 않았고, 이후 1290년대에 이르러서야 말을 조달해 갔다고 한다. 몽골 지배기 약 한 세기 동안 제주도는 사실상 원 제국의 목장섬으로 기능하며, 대외적으로는 군마 공급기지이자 대내적으로는 유목 문화가 이식된 특별한 지역사회로 변화했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고려 말기에 형성된 목장 기반 위에 보다 정교한 국영 목장 제도가 확립되었다. 조선 조정은 탐라목장의 유산을 활용하면서도 자체적인 관리를 강화하여, 한층 촘촘한 제주 목장 운영망을 구축했다. 세종 때 《세종실록 지리지》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15세기 초 제주에는 공식 목장이 설치되어 말 3,352필을 방목하고 있었다. 당시 제주목 서쪽 판포악과 차귀산 일대가 주요 목장 지대로, 정의현과 대정현 등지에도 부속 목장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고려~원대의 동·서 목장 구역을 계승하면서도 세부적으로 목장 수를 늘려 관리했음을 시사한다. 실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조선 전기 전국에 설치된 목장의 수는 59개소였는데, 그 중 상당수가 제주에 집중되었다고 전해진다.
16세기 중엽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 전국 목장 수가 87개소로 증가하며 제주도 내 목장도 추가되었는데, 이는 국가의 군용 마필 수요 증대에 대응한 것이다. 제주에서는 한라산 중산간 초지와 섬 주변의 오름 지대 곳곳이 말·소 방목지로 지정되었고, 각 목장에는 국왕이 임명한 목관(土牧官) 또는 감목관이 파견되어 가축의 번식, 질병 방지, 징발 등을 관리했다.
조선 후기에는 산마장(山馬場)과 평지 목장으로 세분되어, 여름철에는 시원한 산지 풀밭에 방목하고 겨울에는 낮은 지대로 내려 기르는 식으로 계절 이동 방목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목장 체계 덕분에 제주마는 조선군 기병의 핵심 자원으로 지속 공급될 수 있었고, 제주소 역시 필요 시 조정에 상납하거나 각지 농경지에 풀려 경작을 돕는 등 활용되었다.
조선시대 제주 목장의 실상을 잘 보여주는 자료로 1702년의 탐라순력도를 들 수 있다. 제주 목사 이형상이 그린 이 기록화첩에는 당대 제주 목축의 구체적 장면들이 묘사되어 있다. 화첩 첫머리의 「한라장촉」 지도에는 한라산을 중심으로 제주도 내 산·오름·목장·마을 위치가 상세히 기재되어 있어 당시 국영 목장의 분포를 한눈에 알 수 있다.
또 순력도 그림 중 「공마봉진」 장면에서는 각 목장에서 선발된 말들을 제주 목사가 친히 모아 임금께 진상(進上)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는 제주가 해마다 우수한 말을 골라 조정에 바쳤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실제 기록에도 “제주는 중국에 자주 지칭되나 해로가 험해 왕래 어려우므로, 차라리 강화 등지에 목장을 만들어도 제주만 못할 것”이라는 세종대왕의 탄식이 전해질 만큼 제주마의 중요성이 컸다.
탐라순력도에는 말뿐만 아니라 제주 흑우를 기르는 장면도 등장하는데, 검은 소 떼를 몰아 우리로 들이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어 당시 제주흑우 사육 실태를 생생히 보여준다. 이처럼 제주도 전체가 거대한 말·소 목장으로 기능하던 시대였기에 “제주에는 큰 흉년이 들면 백성들이 모두 소와 말을 잡아먹었다”는 실록의 탄식 어린 기록도 등장한다. 척박한 재지 경제 속에서 가축은 곧 부의 원천이자 식량 비축 수단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행위는 국가 재산 손실로 이어지기에 엄금되었지만, 그만큼 제주 사회에서 말·소가 차지하는 비중이 생활 전반에 스며 있었다.
역사적으로 “말과 소의 섬” 제주는 단순한 변경의 고립지가 아니라, 왕조의 경제·군사에 필수 불가결한 전략 자원 공급지였다. 고려와 조선 왕조는 제주에 국영 목장을 설치하고 법령을 정비하여 철저히 말과 소를 관리함으로써, 국가 기틀을 유지하고 국방력을 강화하였다. 한편 제주 사람들은 오랜 세월 이러한 국가 목장 체제와 공생하면서 자체적인 목축 문화도 발전시켰다. 넓은 초원에서 테우리라 불린 목동들이 말과 소를 방목하고, 잣성이라 불린 가축 울타리를 세워 떼를 몰이했으며, 해마다 마조제(馬祖祭)로 말의 영험함에 제사를 지냈다는 민속 기록도 전해진다. 비록 중앙의 관리 아래 힘든 부역과 공출이 따랐지만, 제주 민초들은 말과 소와 더불어 살아가며 고유의 삶의 방식을 이루어갔다.
이러한 제주도의 목축 풍경은 근대 이전까지도 지속되어, 19세기에도 “한라산 기슭엔 풀 뜯는 말과 소가 지천”이라는 여행객의 기록이 남아 있다. 제주 목장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급속히 축소·해체되었으나, 오늘날에도 제주 조랑말과 제주 흑우로 그 명맥을 잇고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제주 조랑말과 제주 흑우는 바로 이 긴 역사 속에서 살아남은 산증인이라 할 수 있다. 제주의 광풍(狂風)과 용암대지, 그리고 거친 풀을 뜯는 말과 소는 예로부터 하나의 풍경이었다. 탐라국 시절부터 조선왕조에 이르기까지, 제주도는 말과 소의 고장으로서 한국사의 특별한 장을 차지해왔다. 목장 섬 제주의 역사는 곧 가축과 인간, 지역과 국가가 빚어낸 생생한 역사이며, 그 유산은 오늘날에도 제주 문화와 경제의 밑바탕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