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장 조선시대 제주도의 관영 목장 운영 체계
제 4장 조선시대 제주도의 관영 목장 운영 체계
관영 목장 체계의 형성과 운영
고려 말~조선 초 국영 목장의 배경:
제주도의 말 사육은 통일신라 이래로 이어져 왔으며, 고려 시대에는 탐라(耽羅)산 마(馬)가 국가에 정기적으로 공납되는 중요한 자원이었다. 실제로 《고려사》 등의 기록에 따르면 탐라산에서 생산된 말이 정기적으로 고려 조정에 바쳐졌고, 품질이 우수한 말은 왕족과 고위 관료에게 하사되었다고 전한다. 13세기 후반 삼별초의 난 이후 제주가 원나라의 직할령이 되면서 이 섬은 말 생산지로서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원나라는 일본 원정을 준비하며 군마 확보를 위해 한라산 일대에 대규모 목장을 조성했고, 몽골계 말과 전문 목자(牧者)들이 제주에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이 시기 목축을 위해 산간 초지를 넓히고 관리하는 기술이 도입되었고, 제주 전역의 중산간 지역이 거대한 방목장으로 변모하였다. 고려 말까지 축적된 이러한 목축 기반은 조선 왕조에서도 적극 활용되었다. 새 왕조 조선은 제주를 “말의 섬”으로 중시하여 국가 직영의 목마장 체계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실제로 조선 개국 직후인 태조 7년(1398) 당시 제주의 등록 마필 수는 4,414마리에 달했는데, 이는 당시 조선 전국에서 필요한 말의 절반 이상을 제주에서 조달한 것으로 추정될 만큼 막대한 규모였다. 이처럼 국가 군사력과 교통에 필수인 말 자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조정은 제주에 관영 목장 제도를 정비하게 된다.
세종대의 10소장 설치와 잣성 축조:
조선 초기 대명(對明) 외교와 국방 수요로 말의 증산이 시급해지자, 효율적인 목장 운영 정책이 추진되었다. 애초에는 목장이 있는 지방 관아의 수령에게 겸직으로 목장 관리를 맡겼으나, 운영 미비로 문제점이 노출되었다. 이에 제주 출신 학자 고득종(高得宗, 1388~1452)이 근본 대책을 상소하였다.
그에 따르면 해안 마을 주변에 방목되던 말들이 농작물에 피해를 주니, 방목지를 산중턱 지역으로 옮겨 체계적으로 기를 것을 제안하였다. 세종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 세종 11년(1429) 제주 중산간 지역을 국영 목장 지대로 개편하기 시작했다. 이듬해 세종 12년(1430) 2월에는 도안무사 장우량에게 한라산 중턱을 따라 돌담을 쌓아 방대한 목장 경계를 구축하도록 명하였다. 《세종실록》 기록에 의하면 이때 축조된 한라산 목장의 둘레는 약 165리에 달하며, 이를 10개 구역으로 분할하여 이른바 “십소장(十所場)”이라 불리는 10개의 국영 목장이 설치되었다.
목장 경계가 설정됨에 따라 중산간 지대에 살던 주민 344호가 이주 조치되는 등, 국가 주도의 토지 재편도 이루어졌다. 새로 설치된 10소장은 행정구역별로 제주목 지역에 1소장부터 6소장, 대정현에 7·8소장, 정의현에 9·10소장이 각각 분포하여 섬 전역의 중산간을 망라하였다.
목장의 경계선 역할을 한 돌담은 제주 방언으로 “잣” 또는 “잣성(城)”이라 불리었는데, ‘잣’은 옛말로 성(城)을 뜻하며 돌을 겹으로 높이 쌓아 올린 담장을 일컫는다. 세종대에 해발 150~250m 일대에 섬을 한 바퀴 두르듯 쌓은 이 돌담(후에 “하잣”으로 불림)은 높이 약 1.2~1.5m의 이중 구조 석성으로, 말들이 경작지로 내려가는 것을 막는 하한선 역할을 하였다. 돌담 위쪽으로는 자연 초지가 펼쳐진 방대한 방목장이 형성되었고, 이로써 말들은 사람의 손을 많이 빌리지 않고도 산지 초원에서 자유롭게 번식·생육할 기반이 마련되었다. 이러한 10소장 제도의 확립으로 제주도 중산간 지역은 사실상 국가 소유의 거대한 목마장 지대로 편입되었다.
세종 대 《지리지》 “제주목” 조에는 당시 제주에 목장이 설치되어 국마(國馬) 3,352필을 사육 중이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십소장 체제 아래 말 생산량이 크게 늘었음을 보여준다.
감목관 제도의 운영:
조선 조정은 제주 목장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감목관(監牧官) 제도를 운용하였다. 감목관은 각 지방 목장 업무를 관장하는 종6품 외관직으로서, 말의 번식·조달·관리 및 목자 감독을 담당했다. 태종 8년(1408)에 제주에 처음 감목관 직을 설치한 이후, 세종 8년(1426)에는 주요 목장 소재지마다 전임 감목관을 두기도 했으나, 곧 각 지방 수령이 겸임하도록 제도가 변경되었다. 제주도의 경우에는 특별히 고려시대 이래 내려온 목마 관리 조직을 계승하여, 1416년 행정구역을 제주목·대정현·정의현의 3읍 체제로 개편한 뒤 각 읍에 감목관을 두었다.
제주목에는 목사 바로 아래 계급인 판관이, 대정현과 정의현에는 현감이 각각 감목관 직을 겸임하여 총 3인이 제주 전체 목장 업무를 감독하였다. 이처럼 감목관은 별도 파견이 아닌 지방관 겸임 형태로 운영되어, 중앙의 지침에 따라 제주 목장의 말 번식 상황을 점검하고 목자들을 지휘·통제하였다.
감목관의 임무는 말 사육 장부인 우마적(牛馬籍)을 정기적으로 갱신하는 일, 목장 울타리와 방목 구역을 순회하며 말의 상태와 수량을 조사하는 일 등이었다. 《경국대전》에도 “목장이 있는 지역의 수령은 모두 감목관을 겸임하고, 말 점고(點考)에 오류가 있거나 낙인을 속일 경우 감목관과 목자를 중형에 처한다”는 규정이 명문화되어 있다. 이는 국가가 말 관리를 통치의 핵심 업무로 삼고, 감목관 제도를 통해 말 한 필까지 엄격히 국가 자산으로 통제하였음을 보여준다.
공납·조달 체계와 헌마공신의 등장:
조선시대 제주 목장의 말들은 국가에 다양하게 활용되었다. 우선 대외적으로는 명나라 등에 대한 진상(進上) 품목으로 활용되어, 15세기 초반까지 제주에서 대량의 말이 조공으로 반출되었다. 실제로 조선 조정이 명에 바친 마필의 총수는 약 10만 필에 달한다는 추산도 있으며, 이 중 상당수가 제주산 말로 채워졌다.
내치적으로는 군마(軍馬)와 역참 교통, 농경용 등에 공급되어 국가 경제와 국방에 기여하였다. 예컨대 태종 9년(1409)에는 제주에서 바친 말 20필을 선별하여 대신들과 근신들에게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세종 연간에도 제주마를 각지 병참과 궁정 교통수단으로 배정하였다.
16세기 말 임진왜란 시기에는 제주마가 국가 전력의 중추로 떠올랐다. 제주 출신의 토호 김만일(金萬一, 1550~1632)은 자신이 운영하던 대규모 사설 목장에서 말 1만 여 필을 길렀는데, 전란 기간 중 네 차례에 걸쳐 총 1,300여 필의 준마를 선조 및 광해군조에 헌납하여 왜군 격퇴에 공을 세웠다.
조정은 그를 “헌마공신(獻馬功臣)”에 책록하고 종1품까지 승진시켜 예우하였으며, 그의 공로로 국가가 긴급히 군마를 충당할 수 있었다고 평가하였다. 김만일이 기르던 사목장은 이후 국가에 귀속되어 산마장(山馬場)으로 전환되었고, 특별직으로 산마 감목관 제도가 신설되어 그의 후손이 대대로 그 직책을 세습하였다.
이는 민간의 목축 능력이 국가 제도로 편입된 사례로서, 제주 목장 운영 체계가 기본적으로는 관영이었으나 필요에 따라 민관 협력 방식도 활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조선 후기까지 제주에서는 국영 10소장 이외에도 일부 사목장과 산마장이 병존하였고, 이들에서 길러진 말은 필요 시 국가에 공출되거나 진상되었다. 1702년(숙종 28) 제주목사 이형상이 직접 산마장 가운데 하나였던 녹산장(鹿山場)에 행차하여 대규모 마필 몰이인 “공마 봉진(貢馬捧進)” 행사를 연 기록은, 제주 목장에서 선발된 진상마(進上馬)들을 관덕정에 집결시켜 최종 검수하던 광경을 생생히 전한다.
아래 그림은 《탐라순력도》에 묘사된 당시 공마 봉진 장면으로, 수천 필의 말이 목장 울타리 밖으로 몰려 내려와 관아 마당에 집합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처럼 제주 관영 목장은 국가의 부름에 따라 대규모 말 징발이 가능한 체제로 운영되었으며, 평시에는 자연 방목으로 말들을 키우다가 유사시에는 일거에 말들을 모아 국가에 공급하는 조달 시스템이 확립되어 있었다.
제주 목사 이형상의 탐라순력도에 묘사된 “공마봉진(貢馬捧進)” 장면이다. 1702년 가을, 각 목장에서 선발한 진상마를 제주성 관덕정 마당에 집결시키고 최종 심사를 진행하는 광경으로, 수많은 말을 제주 목동들과 군병들이 한데 몰고 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기록화는 조선후기까지도 제주 관영 목장 체계가 유지되어 국가의 말 조달에 긴밀히 기여하였음을 보여준다.
중산간 방목 시스템의 구조와 생태 기반
한라산 중산간 초지의 자연환경:
제주도의 관영 목장 운영은 전적으로 한라산 중산간 지역의 독특한 생태환경을 기반으로 한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해발 약 200~600m에 이르는 완만한 경사의 지대는 아열대와 온대가 공존하는 온화한 기후에 풍부한 강수량을 보이는 곳으로, 예로부터 양질의 초지가 발달해 있었다.
제주 섬은 겨울에도 해안 주변 기온이 비교적 온난하여 눈이 잘 쌓이지 않고, 여름엔 산정으로 갈수록 시원하며 물이 풍부하다. 이러한 자연 조건 덕분에 풀이 자라는 기간이 한반도 내륙보다 훨씬 길고, 특별한 사육용 작물을 경작하지 않아도 연중 자연 방목이 가능한 환경이 갖추어졌다. 실제로 제주의 초지는 해발 고도에 따라 순차적으로 식생 변화를 보이는데, 이른 봄에는 해안 저지대부터 풀이 돋아나기 시작하여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발아 시기가 점차 산 정상 방향으로 올라간다.
여름철 고지대 초원이 가장 무성해지며, 가을이 되면 다시 높은 곳부터 풀이 마르고 내려오므로 풀이 시드는 순서가 해안 쪽을 향하게 된다. 이에 따라 방목 중인 말들은 자연스럽게 계절에 맞춰 더 좋은 풀을 찾아 고지대와 저지대를 오가며 이동했다. 특별한 인위적 유도가 없어도, 봄·여름에는 보다 시원하고 풀이 풍부한 중산간 상부로 올라갔다가 늦가을·겨울에는 비교적 온난한 하부 초지와 마을 근처로 내려오는 식이다. 섬 자체가 말들에게 하나의 거대한 순환 목장이었던 셈이며, 사람은 이 자연스러운 이동 경로를 존중하면서 최소한의 경계만 설정해 두었다. 제주에서는 “말을 기르는 데 자연을 바꿀 필요가 없었다. 섬 자체가 거대한 목장”이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중산간 초원과 완만한 지형이 이상적인 방목 환경을 제공하였다.
중산간 초지의 식생과 형성:
오늘날 제주 중산간 지대의 상당 부분은 초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목초 환경은 역사적으로 자연 발생과 인위적 관리가 복합된 결과물이다. 본래 제주 섬의 자연 식생은 해발고도에 따라 상록활엽수림, 온대림, 아고산 침엽수림 등이 분포하지만, 중산간의 경우 수세기 전부터 목축에 유리한 초지로 변화가 가속되었다.
특히 몽골 지배기 이후 방목지를 확대하기 위해 화입(火入), 즉 산에 불을 놓아 나무를 제거하고 풀밭을 조성하는 방법이 동원되었다. 화분(花粉) 분석 등의 과학적 연구에 의하면 12~13세기 이후 한라산 중산간 지역에서 초지 식생의 비중이 현저히 높아졌고, 오늘날 당연하게 보이는 광대한 초원이 이 시기부터 본격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조성된 초지에는 키 큰 새(grass)과 목초류가 번성하였다. 대표적으로 억새풀과 띠, 솔새 등 건생 초지 군락이 넓게 퍼져 있어서, 가을이면 한라산 기슭이 온통 은빛 억새로 물드는 장관이 펼쳐지곤 했다. 또한 중산간 토양은 화산 회토로 배수가 잘되는 특징이 있어 비가 많이 내려도 쉽게 질퍽해지지 않고, 초지 유지에 유리하였다. 초원 곳곳에는 자연 용천수와 계곡이 분포하여 방목 동물들이 자유롭게 식수원을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자연환경 덕분에 제주 목장에서는 별도의 인공 목초 재배나 건초 비축 없이도 수천 필의 말을 자연 상태로 생육시킬 수 있었다.
방목장 경계와 이동 체계:
조선시대 제주 관영 목장에서는 방목의 편의를 높이면서도 가축이 무질서하게 흩어지지 않도록 최소한의 인공 경계를 구축하였다. 그것이 바로 앞서 언급한 돌담 잣성이다. 세종대에 해발 150~250m 부근에 완공된 “하잣성”은 섬 둘레를 에워싸는 하한선 경계로서, 말을 저지대로 내려가지 못하게 차단하여 농경지와 마을을 보호했다. 하잣성 위쪽으로는 사람의 경작이 금지되고 전적으로 국유 방목장으로 활용되었는데, 그 범위는 해발 약 400~500m 선까지였다. 그러나 말들은 능동적으로 더 높은 곳까지도 올라가는 습성이 있어, 때로는 한라산의 울창한 숲지대로 들어가 조난을 당하거나 겨울철 폭설에 동사하는 일도 있었다. 이에 조선 후기인 18세기 초(숙종 연간)에 방목 한계를 명확히 하고자 해발 450~600m 부근에 상한선 돌담인 “상잣”을 추가로 축조하였다.
웃잣이라고도 불린 이 상잣성 덕분에 말들이 한라산 깊은 산림지대로 진입하는 것을 막을 수 있게 되었고, 방목 구역은 하잣성과 상잣 사이의 중산간 지대로 한정되었다.
요컨대 중산간의 완경사를 따라 둘러진 둘레 600리에 달하는 거대한 띠 모양의 방목 지대가 조성된 것이다. 이 내부에서는 말들이 비교적 자유로이 먹이를 찾아 이동하였다. 자연지형 자체가 울타리 역할을 하는 부분도 많아, 바다를 향해 깊이 패인 천연의 하천과 계곡들은 별도 담장을 치지 않아도 말들의 이동 한계를 형성하였다.
방목 기간 동안 말들은 계절과 지형에 따라 넓은 영역을 돌아다녔지만, 잣성의 안쪽이라는 전제가 있었기에 섬 밖이나 농경지로 이탈하는 일은 드물었다. 한편, 방목지 내에서도 환경 변화에 따라 임시로 경계를 조정하는 일도 있었다. 18세기 후반에는 잦아지는 인구 증가와 식량 수요로 인해 주민들이 방목지 일부를 경작지로 전환해 달라고 건의하였고, 그 결과 해발 350~400m 선에 “중잣”을 쌓아 방목 구역을 상·하로 분리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중잣성 아래쪽의 중산간 일부를 일정 기간 농경지로 이용하다가, 다시 그 위쪽 지역과 교대로 쉬게 함으로써 토지 이용을 조절한 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방목 위주의 토지 이용과 농업 사이의 균형을 찾기 위한 노력으로 해석된다. 결국 조선시대 제주 중산간 방목 시스템은 자연 생태를 최대한 활용하되, 돌담과 지형지물을 이용한 탄력적인 경계 설정으로 말 사육과 주민 생활공간을 조화롭게 공존시키고자 한 구조였다고 할 수 있다. 광대한 초지를 돌담으로 구획하고 계절에 따른 이동을 허용한 이 시스템은, 인공 방목장이 아닌 “자연 방목장”으로서 세계적으로도 독특한 생태 기반의 목축 형태였다.
“기르지 않고 맡긴다” – 제주식 목축 문화의 특성
내륙 사육 방식과의 차이:
“기르지 않고 맡긴다”는 말은 제주 전통 목축 문화를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는 가축을 사람의 손으로 세세히 보살피고 먹이를 주어 ‘기르는’ 것이 아니라, 넓은 자연 속에 ‘맡겨’ 두어 자율적으로 크도록 한다는 뜻이다.
제주 이외의 내륙 지역에서는 가축 사육 시 여물과 물을 챙겨 먹이고 우리나 외양간에 가둬 기르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추운 겨울에는 외부 방목을 중단하고 헛간에 들여보내 보온을 하거나, 비가 오면 지붕 있는 외양간에서 먹이를 주는 등의 인위적 관리가 필수였다.
그러나 제주에서는 기후가 온화하고 풀과 물이 사시사철 구하기 쉬웠기에, 가축을 굳이 가둬 기를 필요성이 크지 않았다. 특히 말을 기르는 데 있어 제주 섬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목장 역할을 했으므로, 말 스스로 계절에 따라 적절한 곳을 찾아다니며 살아가도록 두는 편이 효율적이었다. 사람은 최소한의 관리와 보조만 할 뿐, 대부분의 생장 과정은 자연에 ‘위임’된 형태였던 것이다. 물론 완전한 방임은 아니어서 주기적인 점검과 통제는 있었지만, 일상적인 먹이 급여나 운동 조절 등은 자연환경이 대신해 주었다. “사람은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로 보내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제주의 말은 인간이 길들인다기보다 자연 속에서 야생성을 유지한 채 성장한 후 필요할 때 활용되는 독특한 방식을 띠었다. 이러한 목축 방식의 차이는 인간과 가축의 관계뿐 아니라 경관과 생활문화 전반에도 영향을 주어, 제주 고유의 목축 문화를 형성하였다.
돌담 잣성과 테우리(목동)의 역할:
제주 목축 문화의 상징적 유산인 잣성(돌담)은 단순한 경계 시설을 넘어 “기르지 않고 맡기는” 문화의 토대를 이루었다. 잣성은 한편으로는 국가 소유 방목지의 뚜렷한 경계를 표시하여 “여기 안의 가축은 국가에 맡겨진 것”임을 공간적으로 각인시켰다. 돌담 밖으로는 가축이 나가지 않음으로써 주민들도 안심하고 농사를 지을 수 있었고, 돌담 안에서는 말들이 인간의 간섭 없이 뛰놀며 풀을 뜯도록 허용되었다.
말들은 담장 너머 자기들만의 광대한 세계에서 무리지어 번식하고 자라다가, 일정 기간마다 사람에 의해 추렴되어 선별·활용되었는데, 이는 일종의 반(半)야생 상태의 방목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방목된 말들을 돌보는 임무는 “테우리”라 불린 제주 목동들에게 맡겨졌다.
제주 방언으로 테우리는 말이나 소 등을 돌보는 목자(牧者)를 가리키는데, 어원적으로는 마소를 몰 때 사용하는 길다란 채찍이나 끈을 뜻하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테우리들은 대체로 인가를 떠나 중산간 목장 지대에서 생활하면서, 방목 중인 말들의 상태를 수시로 살피고 이상 여부를 보고하는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 기록에 따르면 국영 목장 한 곳(一所場)에 보통 5~7개의 자목장(字牧場)이 있었고, 자목장마다 말 100필 안팎을 맡아 기르는 테우리 4명이 배치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상급 관리자격인 군두(群頭)·군부(群副) 등의 지휘를 받으며 말들의 번식 상황을 관리하고, 정해진 시기에 말들을 몰아 모으는 임무 등을 수행했다.
평소 테우리의 삶은 새벽부터 들판을 누비고 야영을 하는 고된 노동의 연속이었다. 폭설이나 폭우 같은 자연 재해 시에는 말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지형지물을 이용해 안전한 곳으로 유도해야 했고, 맹수가 없던 제주에서는 크게 위협이 될 맹수는 없었지만 간혹 들개나 이상 개체를 쫓아내는 일도 필요했다.
테우리들은 최소한의 장구와 식량만 지닌 채 광활한 초원을 순찰하며 지냈는데, 이러한 생활을 반영하듯 제주 민요나 속담에는 “말 테우리의 삶은 모질고 힘든 것이라네”와 같은 구절이 전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우리들은 자신들의 역할에 큰 자부심을 가졌으며, 매년 백중(음력 7월 보름) 무렵에는 “테우리 코사” 또는 “마조제(馬祖祭)”라 불리는 목축 신에게 제사를 올리며 가축의 번성과 자기 안위를 기원하는 의례도 거행하였다. 이는 목축업을 신성한 천직으로 여긴 제주 사람들의 인식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자율 방목과 인간 개입 최소화의 구조:
제주식 목축 문화에서 인간의 개입은 어디까지나 보조적이고 간헐적인 것이었다. 말들은 방목지에서 풀과 물을 스스로 구했고, 따로 우리에 가두지 않아 운동량도 자유로웠다. 때문에 튼튼한 체질과 강인한 생존력을 갖추게 되었는데, 오늘날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제주마의 특유의 낮은 체구와 강건한 체질은 이러한 자연 방목의 산물이다. 사람의 개입은 주로 계절 점검과 필요 시 개체 선별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예컨대 매년 마필 점고 때가 되면 감목관과 테우리들이 합동으로 방목중인 말들을 한 곳으로 몰아 집계하고, 어린 망아지에 관인은 불로 낙인하여 국가 소유임을 표시하였다. 또한 3년마다 실시된 대마점검(大馬點檢)에서는 방목 중인 준마들 가운데 군사용 “갑마(甲馬)”로 쓸 우수한 말들을 골라내 별도의 갑마장에 집결시켜 특별 관리하기도 했다.
이처럼 일정 주기에 이루어지는 행사들을 제외하면, 일상적으로는 말들을 풀어놓은 채 자연 번식과 성장에 맡겨 두는 것이 제주 목장의 기본 운영 방식이었다. 이는 곧 가축을 “국가의 자산”으로 여기면서도 “자연의 산물”로 존중하는 태도와 맞닿아 있었다.
조정에서는 제주목사에게 “목장을 엄히 단속하여 한 필의 말이라도 손실 없도록 하라”는 지침을 내리고, 말의 증감을 엄격히 파악하도록 했다. 그러나 동시에 제주민들이 오랜 경험으로 체득한 자연순응적 사육 방식에 신뢰를 보이며, 굳이 내륙식의 인위적 사육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국가의 통제는 주로 말의 소유권과 최종 활용 단계에 집중되었고, 그 이전까지의 사육 과정은 지역 생태와 주민의 관행에 위임된 셈이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제주 지역민과 국가 사이에는 독특한 공생 관계가 나타났다. 주민들은 국가 소유 가축을 돌보는 노동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감 면세 혜택이나 생계 지원을 일부 받았으며, 유사시 목장 운영의 공로로 포상을 받거나 벼슬에 천거되기도 했다. 반면 국가 권력은 제주 주민들의 삶 일부를 제약하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방목지 확보를 위해 중산간 경작을 제한하고 수백 호를 이주시킨 일은 제주민들에게 큰 희생을 요구한 조치였다. 또한 관영 말 한 필이 죽거나 분실되면 관련 책임자와 목자는 중벌을 받을 정도로 책임이 막중했다. 그럼에도 제주 사람들은 말과 더불어 사는 삶을 문화로 승화시켰다. 마을마다 목장담을 쌓고 공동 방목하는 전통이 이어졌고, 말이 생활 깊숙이 스며들어 교통·농경·의례 어디에나 말과 목축의 흔적이 배어 있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중앙의 말 정책이 약화되고 국영 목장이 일부 폐지된 이후에도, 제주 지역에서는 자체적으로 마을 공동목장을 만들어 방목 문화를 계승하였다. 이는 “길들이지 않은 자연의 말”에 대한 제주 사람들의 애정과 존중이 얼마나 뿌리 깊은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조선시대 제주도의 관영 목장 운영 체계는 이처럼 국가와 지역, 인간과 자연이 복합적으로 빚어낸 결과물이었다. 고려 말 몽골의 목장 유산을 이어받아 세종대에 확립된 십소장 제도는, 한라산 중산간 초원을 배경으로 국가적 목축의 전성기를 열었다. 자연 방목을 기본으로 하는 제주식 목축 문화는 “기르지 않고 맡긴다”는 말처럼 인간의 간섭을 최소화하면서도 효율적인 말 생산을 달성하였다. 광활한 억새밭 사이로 흐르는 돌담 잣성과 들판을 달리는 제주마의 모습은 단순한 지역 풍경을 넘어, 조선 왕조 국가경영의 한 축이었던 말 산업의 역사와 그 속에 깃든 제주 사람들의 삶의 철학을 오늘날까지 전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