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목초한우 6

제 5장 생활속의 소

제 5장 생활속의 소

제주도의 소, 생존 자산이 된 역사와 문화

제주 자연환경과 농경 조건의 특수성

제주도는 화산섬이라는 지리적 특성상 토양이 척박하고 물이 쉽게 스며들어 농경에 불리한 환경을 지니고 있었다. 높은 한라산과 거센 해풍으로 풍해(風害)와 한재(旱災)가 자주 겹쳤으며, 지형이 험해 늘 흉년이 들기 일쑤였다. 조선 시대 제주 출신 관리 고태필은 “섬의 지세는 산이 높아 바람 피해가 많고 골이 깊어 물난리가 많으며 토지가 메말라 가뭄이 잦다”고 상소했는데, 이는 제주 기후·지질 조건의 어려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열악한 농업 환경 때문에 제주에서는 논농사보다 보리·조 등의 밭농사가 주를 이뤘고, 돌로 쌓은 밭담과 풍해를 막는 방풍림 등 독특한 농법이 발달했다.

이처럼 농경지가 좁고 비옥하지 못하였기에, 제주의 농민들은 소를 이용한 농사에 있어 내륙과 다른 방식을 모색했다. 예컨대 가뭄 대응을 위해 씨 뿌린 밭을 소나 말을 이용해 밟아주는 “밧볼림(踏田)” 농법을 전통적으로 시행했는데, 조선 태종 11년(1411)에 제주목사가 이 방법을 조정에 보고한 기록이 있을 만큼 제주에 널리 정착한 기술이었다. 또한 제주 흑소는 체구는 작아도 지구력과 체력이 좋아 이런 척박한 밭농사에 유용하게 쓰였는데, 문화재청 자료에 따르면 제주흑우는 “일반 소보다 크기는 작지만 체력과 지구력이 좋아 제주지역 밭농사에 많이 이용됐다”고 한다. 이는 제주 환경에 맞춰 소가 농경의 동반자 역할을 한 사례이다. 다만 돌투성이 땅과 제한된 경작지 탓에 제주에서 소는 내륙처럼 광범위한 쟁기질에 활용되기보다는, 일부 지역의 밭갈이나 씨앗을 밟는 작업 등에 보조적으로 쓰였다. 그럼에도 힘센 가축의 존재는 거친 자연과 싸우는 제주 민중에게 큰 의지가 되었다.

한편 제주도는 중산간 지역을 중심으로 광활한 초지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비록 농사에는 어려움이 많았지만 온화한 기후와 풍부한 들풀 덕분에 예로부터 목축에는 유리한 조건을 갖추었다. 『탐라국』 건국 신화에서도 세 신인이 하늘의 옥황상제로부터 내려온 세 공주와 혼인하며 망아지와 송아지를 함께 가져와 기른 결과 “날로 부유하고 번창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제주의 자연초지가 가축 사육에 적합하여 농경 못지않게 목축이 생활 기반이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실제로 학계에서도 탐라(耽羅) 시대부터 제주 토착민들이 해안가 취락 주변에서 소 등을 사육해왔을 것으로 본다. 이렇듯 제주에서는 농경 한계를 목축 문화로 보완해왔으며, 소는 일찍부터 제주 사람들의 생존을 지탱해주는 중요한 가축으로 자리 잡았다.

농경 이상으로 가치 있었던 이동·교역 수단

제주도의 소는 단순히 밭을 가는 데만 쓰인 것이 아니라, 섬이라는 지리적 여건 속에서 교통·교역 및 생활 유지 수단으로서 가치가 컸다. 교통 인프라가 미약했던 옛 제주에서 소는 주요한 운송 수단이 되었다. 울퉁불퉁한 돌길이나 가파른 오름을 넘나들 때, 튼튼한 소는 사람이나 짐을 나르는 역할을 했다. 커다란 등짐을 진 소가 한라산 중산간 마을과 해안마을을 연결하여 곡물이나 땔감을 운반하는 모습은 제주 지역 생활의 한 단면이었다. “소달구지” 문화가 제주에 뿌리내린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인데, 바퀴가 아닌 나무로 만든 끌채에 짐을 싣고 소가 끄는 운반 수단은 비포장 길이 대부분이던 옛 제주에서 중요한 이동 수단이었다고 전한다. 특히 나무가 귀한 제주에서 소는 통나무 운반 등 사람 힘으로 어렵거나 해녀들이 해산물을 내륙으로 옮길 때도 요긴하게 활용되었다.

또한 제주의 소는 일찍부터 교역의 매개이자 상품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3세기경 중국 사서)에 “주호(州胡, 제주도)에는 소와 돼지를 길러 배를 타고 중국과 한반도에 교역하였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고대부터 탐라는 축산물을 대외 교역품으로 활용했다는 증거가 있다. 이는 내륙 왕조들이 탐라를 경제적으로 주목한 배경이기도 하다. 실제로 탐라는 “말이 많이 나는 섬”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소 역시 토산물의 하나로 중시되었다. 5세기 후반 백제 동성왕 때 탐라가 바친 공물이나 통일신라 시기 탐라가 신라에 조공한 품목에도 자세한 내역은 남지 않았으나, 제주의 환경으로 볼 때 말·소 같은 가축과 해산물이 주요 품목이었으리라고 추정된다. 이처럼 제주 소는 단순한 지방 가축이 아니라 섬을 벗어나 외부로 가치가 인정되는 교역 자산이었다.

조선 시대에 들어서도 제주의 소는 전국 시장과 나라 재정에 일정한 몫을 담당했다. 고려 말 몽골 지배 이후 제주가 대규모 국영 목장 지대로 변모하면서, 조선 조정은 제주산 말·소를 국가 경제와 군사의 뒷받침 자원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개국 초 태조는 제주에 해마다 소와 말을 바치게 제도화하여 국가의 가축 공급지로 삼았는데, 이후 정기 소 공납은 중단되었어도 제주 소 자체는 여전히 중앙의 눈길을 끌었다.

그 결과 제주에서 사육된 소는 필요에 따라 육지로 이송되어 거래되거나 조정에 바쳐졌고, 반대로 식량이 부족한 해에는 소 한 마리를 팔아 곡식을 구해 올 정도로 제주 민중의 생계에 긴요한 교환 수단이 되었다. “제주 사람이 소 한 마리 키우면 천 섬의 식량을 얻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소는 재산 축적과 비상시 생활 방편으로 각별한 의미를 가졌다.

실제로 흉년이 들면 제주 백성들이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몰래 소를 도살해 먹는 사례가 빈발하였는데, 이는 소 한 마리가 굶주린 가족과 이웃의 목숨을 이어줄 만큼 소중한 식량원이었음을 방증한다. 소의 가죽과 뿔, 뼈 등은 농기구 제작이나 땔감, 의복 등에까지 이용되어 “버릴 것 하나 없는 귀중한 재산”이라는 인식도 퍼져 있었다. 이처럼 제주 사회에서 소는 농사짓는 일꾼일 뿐 아니라 유사시 식량과 교환가치를 지닌 만능 생활자산으로 대접받았다.

희소한 국가 자원으로서의 제주 소 (조선시대 관리와 법적 지위)

조선 시대에 제주산 소는 희소성으로 인해 지방의 재산을 넘어 국가의 전략적 자원으로서 관리되었다. 고려 후기 몽골이 제주에 설치한 목장 체제를 조선 왕조가 그대로 계승·강화하면서, 제주도의 말과 소는 공적인 통제 아래 놓였다. 『태조실록』에는 개국 후 제주로부터 매년 소와 말을 공납받았다는 기록이 보이며, 이후 말을 제외한 소의 정기 공납은 왜구의 침탈과 잦은 기근으로 소 부족이 심화되어 중지되었다고 한다.

세종 20년(1438) 세종대왕이 “제주에 소가 많이 난다는데 근래에 말만 바치고 소는 바치지 않는다”며 소 공납 폐지 경위를 물은 적이 있는데, 신하들의 조사 결과 고려 말 제주에 왜구 침입과 흉년이 겹쳐 소 수가 크게 줄어 부득이 공납을 면제한 것이 시초였다고 보고되었다. 이는 제주 소가 그만큼 귀한 자원으로 중시되었으나, 현실적으로 개체 수 감소로 과도한 수취를 완화할 수밖에 없었던 조정의 고충을 보여준다. 이후로 정기 공납은 없었지만, 그 희귀하고 맛이 좋은 제주 흑우는 여전히 국가의 특별 관리 대상이었다.

세종실록 지리지(地理志)에 따르면 15세기 초 제주에는 목축을 담당하는 관원인 감목관(監牧官)이 배치되어 있었다. 제주목의 판관이 겸임 감목관을 맡고, 정의현감과 대정현감도 각 지역에서 감목 업무를 겸하도록 규정되었는데, 이는 제주 행정관료들이 곧 국가 목장의 관리자 역할을 했음을 의미한다.

조정에서는 제주의 말·소를 체계적으로 증식시키고 보호하기 위해 이러한 행정적 장치를 마련하는 한편, 관련 법령으로 엄격히 통제했다. 대표적인 것이 “제주민 가축 도살 금지” 정책으로, 함부로 소를 잡는 행위를 엄벌에 처했다. 세종 18년(1436) 제주목사의 보고에 따르면 “제주 땅이 좁고 민가가 조밀하여 도둑질로 남의 소와 말을 잡아먹고 사는 자가 많아 말이 번식하지 않는다”고 하였고, 이에 세종은 크게 노하여 무려 800명에 달하는 범법자와 그 가족을 색출해 육지로 강제 이주시켰다. 그만큼 제주에서 소·말 도살 풍습이 만연했음을 보여주는데, 세종은 “제주 백성들은 예의도 모르고 산림에 숨어 소나 말을 잡아먹는 것이 예사”라 한탄하며 강경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유배 길에 노약자가 속출하는 등 부작용이 크자 일부를 다시 고향에 돌려보내기도 했다. 이 사건은 국가가 제주 소를 보호하려는 의지와, 빈궁한 제주민이 생존을 위해 소를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던 현실이 충돌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즉 법적으로는 제주 소가 국가의 허락 없이 손댈 수 없는 ‘금수(禁獸)’에 가까운 지위였으나, 사회 현실에서는 그것이 생계를 위한 최후 보루였던 셈이다.

제주 흑우는 특히 희소가치로 인해 국가 의례에 빠져서는 안 될 제물로 인정받았다. 고려 시대부터 임금께 올리는 진상품이자 나라 제사에 바치는 제향품으로 지정되어 엄격히 사육·관리되었는데, 그 맛과 품질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세종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제주흑우는 고기 맛이 좋아 고려시대 이래 삼명일(임금 생일·동지·정월 초하루)의 진상품 및 국가 제향품으로 공출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전통은 조선 내내 이어져 왕실에서 제주 흑우를 각별히 취급하였다. 조선 숙종 28년(1702)에 제주목사 이형상이 제주를 순회하며 그린 『탐라순력도』에도 당시 제주 흑우 763마리를 사육 중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처럼 제주산 소, 특히 흑색 털을 지닌 토종 흑우는 조정의 관심 속에 별도 관리되었고, 제주 현지 목장 뿐 아니라 한양의 전생서(典牲署)에도 예비로 사육·비축될 정도였다.

국가의 보호 아래 제주도의 가축 자원은 점차 증식되었다. 15세기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제주에 공식 목장이 설치되어 말 3,352필이 방목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소 역시 상당수 길러졌음을 짐작케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지리서에 따르면 조선 전기 전국 목장 수 59개소 중 상당수가 제주에 집중되었고, 16세기 중엽 편찬된 지리지에는 전국 목장이 87개로 증가하며 제주 목장도 더욱 늘어났다.

한라산 중산간 초지와 부속 도서의 오름 지대 곳곳이 말·소 방목장으로 지정되었고, 국왕이 임명한 목관(牧官)들이 상주하며 가축 번식과 징발을 감독하였다. 그 결과 대규모 목축 체제가 굳어져 숙종 12년(1686) 혹한으로 제주도 가축 2,890마리가 동사했다는 보고나, 숙종 9년(1683) 제주에 우역(牛疫)이 돌아 “수만 마리”의 소가 폐사했다는 기록까지 등장한다. 수천~수만 마리 단위의 피해 보고는 당시 제주 목장에서 사육되던 말·소의 규모를 잘 보여준다. 중앙 조정은 이런 재난 보고를 즉각 접수하고 대책을 논의했을 만큼, 제주 목장의 흥망은 곧 국가의 군마(軍馬) 확보와 제향용 가축 조달에 직결된 문제였다. 요컨대 고려 말부터 조선 시대를 통틀어 제주도의 소는 단순 향토경제 자산을 넘어 국가가 전략적으로 관리한 희소 자원이었던 것이다. 제주 소는 공납과 목장제도를 통해 국가 재산으로 다루어지며 왕실의 제례를 뒷받침하고, 군용·농용 가축을 공급함으로써 조선 사회에 기여한 셈이다.

지역 공동체와 신앙 속의 제주 소

국가의 엄격한 통제 속에서도, 제주 지역 공동체의 생활문화와 신앙에는 소에 얽힌 다양한 모습이 배어 있었다. 제주 사람들에게 소는 단순한 가축이 아니라 집안의 큰 재산으로 여겨져 “소 잃으면 집안 기둥 뽑힌다”는 식의 속담이 전해질 정도였다. 소 한 마리를 장만하기 위해 온 가족이 몇 해씩 돈을 모으거나, 친척 간에 품앗이로 송아지를 길러주기도 했다.

마을 단위로는 부유한 집 소를 농번기에 공유하여 밭을 갈고, 소유주에게는 품값이나 소금·곡식 등을 보상으로 주는 상부상조 풍습도 있었다. 온 마을에 소가 한 두 마리뿐이던 시절, 귀한 소를 다 함께 보살피는 공동체 의식이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다. 집집마다 울타리가 없던 전통 초가 마을에서는 방목하는 소와 말이 남의 집 뜰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정낭’(叉木으로 만든 제주식 대문)을 걸쳐 놓았는데, 정낭은 “소와 말이 집안에 함부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주는” 생활지혜이기도 했다. 이는 그만큼 소·말이 마을 어디든 풀어놓고 키우던 제주 생활상을 보여준다.

제주의 세시풍속과 의례에서도 소는 간접적으로나마 존재감을 드러냈다. 제주 민간신앙은 농경사회답게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데, 소의 이미지는 풍요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다. 정월 초하루에 마을 수호신에게 제주산 흑우의 머리를 바치는 의식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지만, 전국적으로 볼 때 흑우는 오랫동안 제사의 상등급 제물로 쳤다. 대신 제주에서는 중요한 집안 의례나 마을 잔치에 돼지나 말고기를 주로 사용했고, 소고기는 구하기 어려워 약용이나 특별한 경우에만 맛볼 수 있었다.

그렇기에 누군가 소를 잡는 일이 생기면 온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 함께 고기를 나눠 먹으며 축복과 위로를 건넸다고 한다. 이러한 풍습은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소의 희생을 감사히 여기고 그 가치를 공유했음을 말해준다. 심지어 19세기 제주 목사 이원조의 보고에 따르면 “혹은 신당에서 소를 잡아먹는다”고 한 바 있어, 일부 주민들이 비밀리에 소를 제물로 바치는 주술적 행위를 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관찰사 노정이 이를 단속하며 “촌민들이 미혹되어 소를 잡아먹는다”고 개탄한 기록도 있는데, 이는 극심한 가뭄이나 역병 시기에 제주민들이 마지막 수단으로 신에게 소를 바치고 재앙을 면하기 기원했던 흔적으로 해석된다. 비록 유교적 규범에서는 금지되었던 행위지만, 그만큼 소가 지닌 영험과 희생의 의미를 제주 사람들은 체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밖에 제주 방언과 속담에도 소가 등장한다. 제주어로 소를 가리켜 “쉐”라고 부르는데, “쉐 잡아먹을 간세 핀다”는 속담은 “소 잡아먹을 게으름을 피운다”는 뜻으로, 큰 이익만 바라고 성실히 일하지 않음을 빗댄 말이다. 또 “돌 멍청(멍텅구리)은 담이나 쌓고, 나무 멍청은 불 때고, 쉐 멍청(소 멍텅구리)은 잠이나 자고, 사람 멍청은 쓸 데가 없다”는 재밌는 속담도 있다. 이는 각기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존재들을 풍자한 것인데, 그중에서도 한가로이 누워 되새김질하는 소의 모습이 멍청함의 대명사로 쓰였다. 이처럼 제주 민속에서는 때로 소를 친근하고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그 밑바탕에는 생활 속에 깊이 스며든 소에 대한 애정과 익살이 담겨 있다. 근면하게 밭을 갈고도 여름 그늘에 늘어진 소의 모습에서 제주 사람들은 삶의 고단함과 여유를 함께 떠올렸고, 소의 인내심과 힘을 존중하면서도 “일 안 하고 누워 있으니 좋겠다”는 농담 섞인 부러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결국 제주 공동체에서 소는 생업의 동반자이자 신성한 제물이고, 동시에 인간적인 감정과 이야기가 투영된 생활 문화의 일부였다.

근현대의 제주 소: 희소성에 대한 인식과 문화유산적 가치

근대에 들어서면서 제주 소의 운명은 큰 전환점을 맞았다.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은 한반도의 토종 가축 자원을 체계적으로 수탈하고 품종 개량을 강요했다. 1930년대 일본은 “조선 소는 적갈색을 표준으로 한다”는 한우품종 표준을 정하고 흑우의 존재를 부정하였으며, 제주흑우는 우수한 고기용 품종임에도 불구하고 그 기준에서 배제되었다.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통해 제주 흑우를 잡아 일본으로 반출했는데, 1924년 한 해에만 암소 125마리와 황소 50마리를 가져갔고 이듬해에도 수십 마리를 추가로 빼앗아갔다고 전한다. 이렇게 토종 흑우는 일제 시기 급격히 개체 수가 줄고 고유 지위를 잃었다. 해방 후에도 근대화와 산업논리가 우선하면서, 제주흑우처럼 덩치가 작고 성장 속도가 늦은 재래종은 경제성이 낮다는 이유로 도태 위기에 놓였다. 1960년대 이후 한우 개량 사업과 육류 증산 정책 속에서 제주흑우는 점차 잊혀져 갔고, 1990년대까지 남은 개체가 수십 마리에 불과할 정도로 멸종 직전에 이르렀다.

21세기에 접어들며 제주 소의 희소성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했다. 사라질 뻔했던 제주흑우를 복원하려는 노력이 지방자치단체와 학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 결실로 2004년 유엔 식량농업기구(FAO)는 제주흑우를 한우, 칡소, 내륙 흑우와 함께 대한민국 토종소의 한 갈래로 공식 등록하여 국제적 지위를 인정했다. 이어 2013년 7월 문화재청은 “기원·역사·혈통의 고유성”을 근거로 제주흑우를 국가 천연기념물 제546호로 지정하였다. 문화재청은 지정 사유로 조선왕조실록, 탐라순력도, 탐라기년 등의 옛 문헌에 제주흑우가 나라 제사 및 임금 진상품으로 엄격히 관리되어온 점을 들어 역사·문화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였다.

천연기념물 지정 당시 밝혀진 제주흑우의 남은 개체 수는 130여 마리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에 따라 정부와 제주도는 이 희귀한 유전자원을 체계적으로 보존·증식하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2015년 말 제주대학교에 ‘제주흑우연구센터’가 설립되어 학제간 연구와 복원 프로그램이 가속화되었고, 농촌진흥청 국립축산과학원 난지축산연구센터에서도 흑우 유전자 보존과 번식기술 개발에 착수하였다.

제주도 중산간 초원에서 방목되는 제주흑우. 제주흑우는 한우의 갈래 중 하나로 독자적 혈통을 지닌 귀한 자원이며,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오늘날 제주흑우는 도내 약 90여 농가에서 1,000여 마리가 사육되고 있을 만큼 개체 수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으나, 여전히 전체 한우 가운데 차지하는 비중은 극미하다. 이는 제주 소가 여전히 ‘귀하신 몸’으로 남아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희소성은 이제 경제적 가치뿐 아니라 문화유산적 의미로 인식되고 있다.

즉, 제주흑우는 단순한 육류 생산자원을 넘어 제주 고유의 자연과 역사, 사람들의 삶이 빚어낸 살아있는 유산으로 평가받는다. 2010년대 이후 제주흑우를 지역 브랜드로 육성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해졌다. “검은 보물”이라는 애칭과 함께 최고급 친환경 한우로서 홍보되고, 제주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한편으로 학술 연구를 통해 제주흑우의 유전적 특성이 규명되었는데, 다른 한우에 비해 올레인산 등 맛을 좌우하는 성분 함량이 높고 혈통 또한 뚜렷이 구별된다는 결과가 나와 관심을 모았다. 이는 과학적으로도 제주 소의 우수성과 고유성을 입증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과거 제주 사람들에게 소는 농경을 돕고 삶을 지탱하는 생명 자산이었고, 한때는 그 수가 적어 전례를 잇기 어려울 만큼 희귀해 조정에서 대안을 논할 정도로 귀했다. 역사의 풍파 속에 거의 사라질 뻔했던 제주 소는 이제 복원과 보존을 통해 명맥을 이어가고 있으며, 그 존재 자체가 제주도의 역사와 문화적 정체성을 대변하고 있다. 생존을 위한 자산에서 시작해 문화유산으로 거듭난 제주 소의 이야기는, 인간과 자연이 맺어온 깊은 관계와 지역 공동체의 지혜를 잘 보여준다. 제주도가 품은 검은 소 한 마리에는 척박한 땅과 거친 바람을 이겨낸 섬 사람들의 애환과, 그것을 특별한 가치로 승화시킨 오늘날의 노력이 함께 담겨 있다. 제주 흑우가 들판을 거니는 모습은 단순한 목축 풍경을 넘어, 시대를 관통하는 생명 자산의 의미와 문화적 가치를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참고 문헌 및 사료: 세종실록 지리지 전라도 제주목 편, 신증동국여지승람 제주편, 탐라순력도(1702), 탐라기년, 조선왕조실록 인조·숙종조 기록,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문화재청 보도자료, 농촌진흥청 축산자료 등. (본문 각주 및 인용문 출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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