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목초 한우 7

제 6장 일제강점기 제주도 목축 체계의 변화와 수탈

제3부 식민지의 섬 – 제주 목축의 전환과 수탈

제 6장 일제강점기 제주도 목축 체계의 변화와 수탈

일제강점기 제주도의 목축 체계 변화와 수탈은 1910년대부터 1945년 광복까지 이어진 일본 식민통치 기간 동안 제주도의 전통적인 목축 환경과 제도가 어떻게 재편되고, 식민당국에 의해 가축 자원이 약탈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제주도 중산간 지역은 고려·조선시대 이래 국가 직영의 국영목장이 설치되어 말과 소를 기르던 곳으로 유명했으나, 20세기 초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을 계기로 이러한 전통 질서가 크게 변모하였다. 공유지였던 방대한 초지와 산림이 식민정부의 소유(국유지)로 편입되면서 주민들의 이용권이 박탈되고, 제주 고유의 목축 문화는 식민지 수탈경제에 종속되는 과정을 겪었다.

아래에서는 (1) 1910~20년대 토지조사사업이 제주 중산간 목초지와 목장에 미친 영향, 공유지의 국유화와 주민 이용권 박탈, (2) 1920~30년대 제주 목장 관리 체계의 재편 – 일본인·조선인 기업가의 진출, 관영·민영 목장 운영 방식 변화, 국유지 방목권 부여 및 축산정책의 변화, (3) 1930~40년대 관영 목장의 해체와 사유화 – 관청 목장의 민간 불하, 가축의 군수물자화, 제주산 소·말의 일본 반출과 개체수 감소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토지조사사업과 제주 목초지의 변화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한 직후 실시한 토지조사사업(1910∼1918)은 근대적 토지소유권 확립과 식민지 수탈기반 마련을 목표로 한 대규모 조사사업이었다. 제주도에서도 예외 없이 토지조사국에 의한 지적조사가 이루어졌고, 이에 따라 그동안 관습적으로 villages(마을) 공동으로 이용해오던 중산간 목초지와 임야가 대거 국유지로 편입되었다. 조선시대에 국가가 운영하던 제주 목장 부지와 관아 소유 토지는 물론, 19세기 말 공마(公馬) 제도 폐지 후에 각 마을 공유지로 전환되었던 광활한 중산간 초지 대부분이 식민정부 소유로 넘어간 것이다. 그 결과 많은 제주도민들은 자신들의 토지에 대한 전통적 경작권·방목권을 일순간에 상실하게 되었다. 특히 중산간 목장지대를 개간하여 사실상 영구 경작권을 누려오던 화전농민들은 토지 수탈에 따른 박탈감이 매우 컸다.

토지조사 과정에서 제주도 전체 면적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중산간 이상 고지대 초지·임야가 국유지로 귀속됨으로써, 제주 전통 목축 문화의 근간인 마을 공동목장에도 큰 변화가 찾아왔다. 조선 후기까지 제주도의 중산간 광지는 국가 소유로 인식되었으나, 1895년(고종 32년) 공식적으로 국영목장이 폐지된 후 각 마을이 공유 관리하던 토지였다. 일제는 이러한 공유 목장 부지들을 역둔토 등의 명목으로 관리 대상에 올려 식민정부 재산으로 편입하였고, 일부는 일본인이나 관변 기관에 불하(매각)하였다. 토지조사국의 조사에 신고되지 않았거나 소유권 증명이 불분명한 광범위한 초지와 임야는 자동적으로 총독부 소유지가 되었으며, 제주 주민들은 선대로부터 내려오던 공동 방목지에 대한 이용권을 법적으로 부정당하는 처지에 놓였다.

이와 더불어 1918년 공포된 임야조사령에 근거하여 1919년부터는 임야 및 황무지에 대한 조사도 진행되어, 제주 중산간 지역의 산림과 곶자왈 지대까지 식민당국의 관리 아래 편입되었다. 결국 제주 전역의 방대한 초지·임야가 국가 소유화됨으로써, 전통적으로 마을 공동자산이던 목장 토지의 소유권이 주민 공동체에서 식민정부로 이관된 것이다. 일제 당국은 이러한 국유화 조치를 통해 제주 목장지대를 효율적으로 통제·이용하고, 장차 식민지 수탈경제의 기반으로 삼고자 했다. 제주도민들은 토지조사사업으로 작성된 지적도와 토지대장에 드러난 현실 – 중산간 광지가 대거 국유지로 표시됨 – 을 통해 자신들의 삶터가 식민권력에 넘어갔음을 깨달아야 했다.

다만 토지조사 후 바로 제주도의 목축활동이 중단된 것은 아니었다. 1919년경부터 총독부는 제주에 남아있던 옛 관영목장 부지들을 마을 단위로 재분배하여 관리하도록 하는 방식을 도입하였다. 즉 조선시대에 목마장(牧馬場)이 있던 지역 단위로 국유 초지를 나누어, 해당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이용하도록 묵인하거나 장려한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 주민들의 계속된 방목 활동을 현실적으로 인정한 조치였지만, 동시에 법적인 소유권은 여전히 총독부에 있음을 전제로 한 “조건부 사용”에 불과했다.

실제로 일제가 편성한 지적 기록상으로 제주 중산간 공유지는 대부분 국유지로 등재되었고, 마을에서 자체적으로 소유권 등기를 하지 못한 목장용지는 이후까지 법적 분쟁의 불씨로 남게 되었다. 결국 토지조사사업과 임야조사사업을 거치면서, 제주 전통 목초지의 소유·이용 체계는 식민지 국가권력에 예속되고 말았다. 이는 제주 목축 경제를 식민지 수탈체제에 편입시키는 출발점이 되었으며, 주민들은 고유한 공동자원을 상실한 채 식민당국의 눈치를 보며 방목을 이어가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목장 관리 체계의 재편: 목장조합과 축산정책의 변화

1920년대 이후 일제는 제주도의 목장 관리 체계를 새롭게 재편하면서, 관 주도의 통제와 기업 자본의 진출을 병행하였다. 먼저 식민당국은 “가축개량과 증산”을 명분으로 제주 전역에 마을 단위의 목장조합(共同牧場組合)을 설립하도록 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국유지로 편입된 중산간 초지를 활용하여 주민들이 공동으로 가축을 사육하되, 식민정부의 지도와 감시에 따라 운영되는 협동조합 형태였다.

사실 한반도 다른 지역에서는 1910년대부터 유사한 공동목장 조성이 이루어졌으나, 제주도에서는 준비가 늦어져 1930년경부터 본격화되었다. 제주 최초의 목장조합은 1931년 조직된 연동 공동목장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후 1930년대에 도 전역에 걸쳐 100여 개 이상의 목장조합이 설립되었다. 『제주도세요람』(1939)에 따르면 1930년대 말 제주도 내 마을공동목장은 총 116개, 면적 3만2,290ha에 달했다고 한다 (제주도 전체 면적의 약 18%에 해당). 다른 조사에서는 1930년대 형성된 제주 목장조합의 수가 142개에 이르렀다는 보고도 있다. 이는 일제가 제주 목축 자원을 보다 조직적으로 관리·동원하기 위해 마을단위로 촘촘한 조합망을 구축했음을 시사한다.

목장조합의 운영 방식은 다음과 같았다:

각 마을 또는 인접 몇 개 마을 주민들이 조합을 결성하여 초지 확보, 가축 방목, 생산물 처리를 협동으로 수행한다. 조합은 필요한 목장 부지를 다양한 형태로 확보했는데, 조합원들이 성금을 모아 개인 소유의 토지를 매입(매수지)한 경우가 많았고, 마을 공유지나 리(里) 단위 공동토지(면유지·리유지)를 제공받아 사용하는 경우, 토지 소유주가 토지를 기부(기부지)하는 경우도 있었다. 때로는 국유지나 타인의 토지를 일정 기간 차용(차수지)하여 쓰는 일도 있었다. 이렇게 확보된 목장용 토지에 조합원들은 공동으로 말·소 등을 방목하고, 목장 내에 급수시설, 울타리(돌담), 소금급여소, 축사 등을 갖추어 관리했다.

조합 내부에는 조합장·부조합장, 평의원회, 간사, 목축감독(목감) 등의 직책을 두어 체계적으로 운영하였고, 상부적으로는 제주도지사, 제주도농회(농업회) 회장, 읍·면장 등 관의 지도를 받는 구조였다. 즉 명목상으로는 주민 공동체의 자치적 협동목장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총독부 지방행정과 농회 등의 통제 하에 움직이는 반관반민 조직이었다. 이를 통해 일제는 제주도 방방곡곡의 목축 상황을 파악·지도하면서, 필요시 생산물이나 가축을 동원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춘 셈이다.

이 시기 축산정책의 변화도 두드러졌다. 일제는 조선총독부 산하에 축산시험장을 설치하고 품종 개량, 가축 전염병 방제 등에 힘쓰는 한편, 1932년부터 농촌진흥운동을 전개하여 축산 장려를 독려했다. 제주도는 전통적으로 우량한 말과 소의 산지였으므로, 총독부는 이를 더욱 개량·증식시켜 본토(일본) 시장과 군용 물자 조달에 활용하고자 했다.

실제 1930년대 제주에서는 한우 개량을 위해 일본인들이 가져온 황소와 제주 암소를 교배하는 시도, 제주마와 외지마의 교잡 실험 등이 이루어졌다. 제주도 당국은 “제주 지역 축산 진흥”을 명분으로 목장조합을 적극 설립하고, 조합원들에게 개량종 수소 분양, 수의처치 기술 보급 등을 시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 이면에는 조합을 식민 통치에 활용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학계 연구에 따르면 1930년대 제주 목장조합 운영에는 제주도농회(농업회)가 깊숙이 개입하여 실질적인 지휘·감독 역할을 했으며, 조합의 의사결정도 관의 영향 아래 이루어졌다. 다시 말해, 목장조합은 표면적으로는 주민들의 자발적 협동조직이었지만 실제로는 식민당국이 제주 목축업을 통제·수탈하기 위한 하부 구조였던 것이다.

식민정부는 목장조합을 통해 제주 목축업에 경제적 부담도 전가했다. 예를 들어, 모든 목장조합으로부터 조합비 명목의 기금을 거두고 국유지 이용에 대한 임야세(산림세)를 부과하여, 이를 식민통치의 지방재정으로 활용했다.

《제주일보》 등의 기록에 따르면, 일제는 마을공동목장 조합을 대상으로 조합비와 임야세를 징수하여 지방재정 확충에 이용했고, 나아가 일본 본국의 축산물 수요 증가에 대응해 제주에서 더 많은 육류·가죽 등을 조달하기 위해 이러한 목장조합 제도를 활용하였다. 다시 말해 제주 목장조합의 설치 목적은 표면상의 “개량·증산” 구호와 달리, 실제로는 제주도의 풍부한 목축자원을 효율적으로 수탈하려는 것이었다. 제주 흑우·흑돼지·제주마 등 우수한 향토 품종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면서 한편으로는 본토로 반출하거나 군용품으로 이용하는 계획이 추진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일본인 기업 혹은 조선인 기업가들의 제주 축산 분야 진출도 나타났다.

일제강점기 동안 일부 일본인 및 재력 있는 조선인들은 제주도의 목장 경영에 관심을 가지고 투자하거나 진출했다. 식민당국은 조선시대부터 목장 부지로 쓰이던 국유 초지를 민간에 임대하거나 불하(매각)함으로써 수익을 창출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제주 밖 자본이 유입되었다. 예컨대 일본인은 아니지만 조선인 기업가 박흥식(화신백화점 사장)이 일제 말기에 제주 중산간 대규모 목장지인 녹산장 토지를 불하받아 소유하고 있었던 사례가 있다.

일본인들도 제주에 소 사육업이나 양모 채취 등을 시도하며 목장업에 간여하였는데, 애월리 등지는 “일본에 제주우(濟州牛)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우량한 소 산지”로 주목받아 일본 축산업자들이 접근하기도 했다. 이처럼 민영 목장이 등장하고 기업 차원의 축산 경영이 시도된 점은, 조선시대 관영 목장 일변도의 구조에서 크게 달라진 모습이었다. 다만 제주도의 경우 대토지 소유가 흔치 않고 지리적 고립성 때문에, 만주나 한반도 내지처럼 대규모 일본인 경작지·회사농장이 들어서지는 못했다. 그 대신 제주도 출신 실업가나 재일 제주인 자본 등이 광복 직전까지 일부 목장 토지를 매입·경영하는 형태가 나타났다.

정리하면, 1920~30년대 일제의 제주 목장 관리체계 재편은 (가) 마을공동목장조합 설립을 통한 협동조합 방식의 통제, (나) 국유 목장지의 임대·매각을 통한 민간자본 유입, (다) 축산 정책 변화를 통한 생산량 증대와 수탈 극대화로 요약된다. 전통 공동목장의 모습은 형식적으로 이어졌으나, 그 실질은 식민지 당국의 계획 하에 움직이는 구조로 탈바꿈되었다. 제주도민들은 여전히 공동으로 마소를 방목하며 목축을 이어갔지만, 그 산출물의 처분권과 목장 경영의 주도권은 더 이상 온전히 그들의 것이 아니었고 식민 권력과 시장 논리에 예속되었다. 이는 훗날 광복과 한국전쟁을 거치는 과정에서 제주 목축업 기반이 급격히 붕괴되는 배경이 되었다.

관영 목장의 해체와 가축 수탈: 민간 불하와 제주 가축의 반출

일제강점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제주도의 관영 목장은 사실상 대부분 해체되어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남은 목장 부지와 가축 자원은 민간에 불하되거나 전쟁 물자로 수탈되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조선시대 제주에는 10곳의 국영목장(십소장)이 운영되었으나 이는 1895년에 공식 폐지되었고, 일제강점기 동안 부활하지 않았다. 다만 식민당국이 제주도 내에 직영하는 형태의 목장을 전혀 두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1920~30년대에 제주도에는 총독부가 예산을 투입해 운영한 시험 목장 혹은 종축 목장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송당목장으로, 일본인 기술자를 두어 축산 실험을 하고 우량 가축을 증식시키려 했으나 막대한 국고만 낭비한 채 운영되었다는 평가가 남아 있다. 결국 식민지 말기에 이르러 이러한 관주도의 목장들도 경제성이 낮다고 판단되어 정리 대상이 되었다.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인 1940년대 초, 제주 관영목장의 잔존 시설이나 초지들은 대부분 민간이나 군부에 불하·징발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일제가 토지조사와 임야조사 등을 거쳐 수익 창출을 위해 조선시대 국영 목장으로 쓰던 곳을 임대하거나 매각한 것”이 제주 마을공동목장의 시초라고 분석하고 있다.

이는 곧 식민당국이 제주도의 옛 목장 부지를 최종적으로 민간 자본에 넘겨주거나 처분함으로써 관영 체제를 완전히 청산했음을 의미한다. 그 결과 광복 무렵 제주도의 목장 토지 중 국가 소유로 남은 부분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고, 상당 면적이 기업이나 개인 명의로 넘어갔다가 해방 이후 귀속 재산으로 처리되기도 했다.

이와 병행하여, 제2차 세계대전기(태평양전쟁기)에 들어서면서 제주도의 말과 소는 대규모로 일본군의 군수물자로 동원되었다. 일제강점기 제주의 목축자원은 수탈의 대상이었으며, 일제는 식량뿐만 아니라 가축까지 체계적으로 공출해갔다고 평가된다. 특히 제주산 소와 말은 품종과 체력이 우수하여 일찍부터 주목받았는데, 1930년대까지 제주도는 한반도 말 사육 두수의 40% (2만 2,500마리)를 차지할 정도로, 전국 최대의 축산 기지였다.

식민당국은 이처럼 풍부한 제주 가축을 본토로 반출하거나 전쟁에 투입하는 조치를 단계적으로 시행하였다. 예컨대 제주흑우(토종 검은 소)는 쌀·콩 다음으로 중요한 수탈품으로 지목되어, 1920년대부터 일본으로의 반출이 이루어졌다. 1924년에는 흑우 암소 125마리·수소 50마리, 1925년에는 암소 25마리·수소 1마리가 일본으로 실려가 2년간 총 201마리의 제주흑우가 일본에 공출되었다. 이는 공식 통계에 남은 수치만 그러하며, 실제로는 더 많은 소가 중개상을 통해 일본으로 팔려나갔을 가능성이 높다.

제주마(濟州馬) 역시 일제가 수탈해 간 주요 자원이다. 조선시대부터 군마(軍馬) 조달을 위해 길러졌던 제주마는 작은 체구지만 강인한 품종으로 유명했다. 일제는 한편으로 제주마의 개량을 시도(왜성과 교잡 등)했으나, 전쟁 막바지에는 숫자를 늘리기보다 필요한 말과 노력을 직접 징발하는 길을 택했다. 태평양전쟁 시기 일본군은 조선 각지에서 말과 마차를 대거 징발했으며, 제주도에서도 말과 말 주인까지 함께 강제로 징용하여 군용 수송대에 편입시키는 일까지 벌어졌다. 1943~45년 사이 제주도에 주둔한 일본군은 말 사육을 위한 사료가 부족해지자 상당수의 군마를 도축하거나 버리는 일도 있었고, 아예 제주도민에게 사육을 맡겼던 말들을 회수하여 본토로 이동시키기도 했다. 이렇듯 전쟁 동원으로 제주 말 개체수는 급감하였다. 해방 직전 정확한 통계는 부족하지만, 광복 후 제주도의 말 두수가 수천 필 수준으로 크게 줄었다고 증언된다. 실제 1960년대 통계에 따르면 제주마를 포함한 도내 말이 약 1만 2천 두였는데, 이는 1930년대의 절반 수준이고 이후 1980년경 2천여 두까지 감소하여 식민수탈과 4·3사건, 산업화 영향이 누적된 결과를 보여준다.

한편 군사기지 건설 등으로 인한 초지 수탈도 진행되었다. 일본군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시기에 제주도를 “최후 보루”로 삼아 각종 군사시설을 구축했는데, 이 과정에서 목장 부지가 제공되거나 강탈되었다.

예를 들어 1930년대 후반 일본 해군은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알뜨르(알토르) 평야 일대에 대규모 비행장을 건설하였다. 이 알뜨르 비행장 터는 원래 주민들이 방목과 농사를 짓던 들판이었으나, 1930년대 일본 군부가 헐값에 강제 매입한 토지로서 제주 최초의 해안 지대 대규모 토지수탈 사례가 되었다.

이로써 알뜨르 목장으로 이어져 오던 공동목장 터가 군용지로 바뀌고 주민들은 쫓겨났으며, 그 곳에서 생산되던 목축물도 중단되었다. 또한 일제 말기 제주 동부 구좌읍 일대 중산간에 비밀 비행장이 건설되었는데, 그 부지 녹산장은 앞서 언급한 박흥식 등이 소유하고 있던 거대 목장지였다.

박흥식은 해당 토지를 목장 용도로 활용하다가 전쟁 막판 일본군 특공기지로 제공하였는데, 이는 관변 인사에게 불하된 목장 토지가 다시 군수 목적으로 전용된 사례라 하겠다. 이처럼 일제강점기 말 제주도의 관·민영 목장들은 필요에 따라 해체되고, 민간에 팔리고, 때로는 전시동원으로 수용되면서 그 본래의 공동목장적 성격을 상실해갔다.

광복(1945년) 당시를 전후하여 제주도의 전통 목축 기반은 황폐해졌다. 수천 년 간 이어져온 제주말과 제주흑우 등의 개체 수는 식민지 수탈과 전쟁을 거치며 크게 줄었고, 방목지의 상당 부분은 폐허가 되거나 소유 관계가 혼란에 빠졌다. 다행히도 일제가 조직한 목장조합들 가운데 살아남은 것들은 광복 후 마을공동목장으로 명맥을 이어갔다. 식민당국이 물러간 뒤에도 제주도민들은 기존 목장조합을 자체적으로 운영하며 공동방목을 지속했고, 이것이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제주 마을목장의 뿌리가 되었다. 현재 제주에 남아 있는 70여 곳의 마을공동목장은 일제시대의 143곳에서 절반 이상 감소한 것이지만, 그래도 공동체가 공유지 초지를 함께 이용하는 독특한 목축문화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

이는 일제 강점기에 제주 사람들이 수탈에 맞서 어떻게든 목장 공동체를 지켜왔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땅의 소유권과 이용권 면에서 보면, 광복 이후에도 곧바로 주민들에게 권리가 환원된 것은 아니었다.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을 거치며 일본인 명의 토지는 국유화되었지만 행정상 혼란이 있어 일부 지역에서는 여전히 주민들이 법적 소유 없이 임대 사용하는 형태가 계속되었다. 1961년 박정희 정권의 「임시조치법」으로 마을 공유 목장용지들이 모두 시·군(지방자치단체) 소유로 귀속되면서 제주 공동목장은 또 한번 큰 전환점을 맞게 된다. 이 법으로 주민들은 자신들이 지켜온 목장 땅을 행정으로부터 임대하여 써야 하는 처지가 되어 공동체의 박탈감이 심화되었으며, 훗날 개발 압력에 따라 많은 공동목장이 사라지는 단초가 되었다.

요컨대 일제강점기 제주도의 목축 체계 변화와 수탈의 역사는, 제주도의 광활한 중산간 초지와 우수한 가축자원이 식민지배 구조 속에서 어떻게 재편되고 이용되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1910년대 토지·임야 조사사업으로 제주도의 전통적인 공유 목장 토지가 국유지로 강탈되었고, 주민들의 세세한 생활터전마저 식민 권력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다.

1920~30년대에는 목장조합 조직과 축산정책을 통해 표면적으로는 개량과 진흥이 강조되었지만, 실상은 경제적 착취와 자원 수탈의 수단으로 목장 체계가 재편되었다. 관영목장은 완전히 해체되어 제주도민의 자치적 목축 기반은 무력화되었고, 일본인·조선인 자본이 그 빈자리를 채워 목초지의 사유화와 상품화가 진행되었다. 1930년대 이후 총력전 체제로 들어서면서 제주도의 말과 소는 대거 본토로 반출되거나 군용으로 징발되는 등 최후의 수탈 대상이 되었고, 그로 인해 제주 고유 품종들은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도민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공동목장의 전통을 완전히 잃지 않았다. 식민지배 하에서 조직된 목장조합들은 광복 후 주민 주도의 마을공동목장으로 변모하여 수십 년 간 운영되었고, 오늘날까지 제주 자연경관과 생태, 그리고 공동체 문화를 지탱하는 밑바탕이 되고 있다. 물론 개발과 제도 변화로 상당수 공동목장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남은 목장들은 제주 역사의 산 증인이라 할 만하다. “소와 말은 제주도로, 사람은 서울로”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제주도는 예로부터 가축의 섬으로 불렸고, 이는 일제강점기에도 마찬가지여서 일본은 제주를 조선 최대의 축산기지로 활용했다.

그러나 식민 지배 35년의 결과는 제주 목축업의 근간을 흔들어놓았고, 제주 사회경제에 깊은 상흔을 남겼다. 일제강점기 제주도의 목축 체계 변동사는 식민권력이 한 지역의 전통자원과 경제를 어떻게 재구성하고 수탈하는지, 그리고 이에 맞서 지역 공동체가 어떻게 버텨왔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것이다.

참고자료: 조선총독부 관보, 통계연보; 국립제주박물관 『일제강점기 제주자료집』;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탐라신보 및 매일신보 등 당시 신문; 제주도 행정자료; 박찬식, 「제주도 땅의 변천사」 한라일보 2011.01.06; 강만익, 「1930년대 제주도 공동목장 설치과정 연구」(『탐라문화』 32, 2008) 등.上述 내용 중 인용은 해당 출처를 표기했다. 제주 공동목장과 목축 역사에 대한 심층 연구와 사료 발굴이 앞으로도 계속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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