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목초 한우 8

제 7장 군수 물자로서의 제주 소

제 7장 군수 물자로서의 제주 소

일제강점기 말기에 제주도의 소는 ‘먹이는 소’에서 ‘빼앗는 소’로 운명이 뒤바뀌었다. 즉, 주민들의 생계와 농경을 지탱하던 가축이 전쟁 수행을 위한 군수 물자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1930~40년대 전시체제가 본격화되면서 조선총독부는 제주도의 풍부한 가축 자원을 체계적으로 수탈하여 전쟁 물자 공급에 활용하였고, 그 결과 제주 소의 두수와 지역 경제, 공동체에 큰 충격을 주었다. 아래에서는 전시 동원의 정책적 배경, 제주 소의 군수 동원 실태, 이에 따른 지역사회 변화, 그리고 광복 이후의 여파와 제주 흑우 복원 노력까지 차례로 살펴본다.

전시체제 속 축산물 동원의 정책적 배경

1930년대 후반 일본 제국은 중일전쟁(1937)과 태평양전쟁(1941)으로 총력전 체제에 돌입하면서, 한반도의 인적·물적 자원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법령과 정책을 속속 마련했다. 1938년 제정된 국가총동원법을 통해 식민지 조선에서도 행정당국이 인력과 물자를 강제 징발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전시 경제체제로의 전환에 따라 식량과 원료의 자체 확보를 추진했는데, 특히 1939년 대흉작 이후 식량 사정이 악화되자 1940년부터 미곡 공출제도를 시행하여 농산물을 강제로 거둬들이기 시작했다. 1943년에는 《식량관리법》을 공포하여 공출 대상을 보리·면화·마(麻)·고사리 등 40여 종으로 확대하고, 경찰력을 동원한 강제 공출로 전시 물자 확보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처럼 공출(供出)은 식민당국이 전쟁 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식량뿐 아니라 가축 등 농축산물까지 강압적으로 징발하는 제도로 자리잡았다.

제주도는 이러한 전시 동원 정책의 중요 거점으로 지목되었다. 일제는 제주도를 “미개의 보고(寶庫)”로 표현하며 자원 약탈 계획을 세웠는데,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직전 조선총독부가 승인한 제주도개발계획이 그 대표적 사례다. 이 계획은 1938년부터 10년간 제주도의 자원을 체계적으로 침탈하기 위한 것으로, 도로와 항만 건설, 농산물 증산, 축산 장려, 어업 진흥 등 모든 부문을 망라하였다.

예컨대 제주 전역에 도로와 항만을 확충하여 물자를 신속히 운반하고, 소·양·돼지 등 축산의 생산 및 축산품 가공을 늘려 전쟁 물자를 공급하려 한 것이었다. 총독부와 전라남도, 동양척식주식회사가 합작한 제주개발주식회사까지 설립되어 이 계획을 실행에 옮겼으며, 총독부 내무국·식산국·농림국 등이 협력하고 제주도 행정과 도농회(島農會) 조직을 통해 인력과 물자를 동원하는 구조가 짜였다. 다시 말해, 식민지 관청에서 마을 조직에 이르기까지 행정망 전체가 군수물자 동원 체제로 재편된 것이다.

축산 분야에서도 정책 기조가 변화하였다. 전시체제 이전까지 총독부는 조선의 축산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품종 개량과 축산 장려 정책을 추진해왔다. 제주도에서도 총독부 산하 제주도농회(濟州島農會)를 중심으로 종우(種牛) 개량과 공동목장 설립 등 축산 장려사업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중일전쟁 이후 상황이 급변하면서, 이러한 장려 정책은 곧 축산물 수탈 정책으로 방향을 틀게 된다. 일제 말기 제주도농회는 “군수품 확보”를 최우선 과제로 밭작물 증산과 축산 장려 정책을 집중 시행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축산 장려’는 실질적으로 가축 자원의 총동원을 의미했다. 행정 당국은 공출 할당량을 정해 농회나 경찰 조직을 통해 마을마다 소와 돼지, 말 등을 정해진 숫자만큼 내도록 강요하였고, 이를 독려·감시하기 위한 행정비용까지 책정하였다. 결국 제주도의 가축은 더 이상 마을 주민의 경제자산이 아니라 국가의 전쟁자원으로 간주되었고, 정책의 초점도 생산 장려에서 강제 수탈로 옮아갔다.

제주도 소의 개체 수 변화와 군수 동원 실태

제주도는 전통적으로 한반도 최대의 가축 사육지였다. 1930년대 통계에 따르면 제주도에는 소 약 4만 0924마리가 사육되고 있었다.같은 시기 말(馬)도 2만 2500마리 가량 길러져 전국 말 두수의 40%에 달할 정도였으며, 제주도는 일찍이 가축 방목에 유리한 자연환경 덕에 소와 말, 돼지를 대량으로 키워온 지역이었다. 제주도의 재래 소는 털빛에 따라 황갈색 한우(韓牛), 검은색 흑우(黑牛), 얼룩무늬 칡소(斑牛) 등 다양했으며, 몸집은 작지만 지구력이 좋고 맛이 뛰어나 예부터 임금의 진상품으로 올려질 만큼 명성이 있었다. 이러한 제주 소는 원래 밭갈이와 거름 등 농사에 필수적인 노동력 제공 및 식량 보조원 역할을 하여 제주 공동체를 먹여 살리는 자산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길어지면서 제주도의 소들은 하나둘 전쟁터로 실려 나가거나 도축되어 군량과 군수공장 원료로 바쳐지게 되었다. 총독부는 전시 동원의 일환으로 한반도 각지의 소를 일본 본토로 끊임없이 이출(移出)하였다. 공식 통계에 의하면 1910년부터 1941년까지 조선에서 일본으로 보내진 소가 무려 146만 마리에 달했다고 한다. 특히 태평양전쟁 시기인 1939~1941년 3년 동안에는 연평균 10만 마리씩 조선 소가 일본으로 공출되었을 정도였다. 1941년까지 누계 146만 마리라는 수치는 해방 직전까지 합산하면 총 160~180만 마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될 만큼 엄청난 규모이다. 제주도의 소들도 이러한 대규모 공출의 예외가 될 수 없었다. 1920년대부터 이미 일본은 제주 흑우에 주목하여 1924년 암소 125두와 수소 50두, 1925년에도 암소 25두와 수소 1두를 배편으로 일본에 반출한 기록이 있다. 본격적인 전시 동원기에는 제주산 소가 “마른나무에 물짜듯” 속속 육지로 실려 나갔다고 전해지는데, 당시 인천항 등에서 소를 대롱대롱 매달아 배에 선적하는 장면이 사진으로 남아있을 정도이다. 일제는 이렇게 이출한 제주 소를 군용 짐수레를 끄는 역축(役畜)으로 부리거나, 도축하여 고기와 가죽을 군수품으로 활용하였다. 1943년경 일본 내 한우 사육 현황을 보면 조선산 소가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고, 일본은 조선 소를 이용해 자국 와규의 개량까지 시도할 정도로 조선의 소를 집요하게 빼앗아 갔다. 일본이 조선소로 개량한 와규는 소수 사육되는 갈모화우다. 제주 흑소가 일본 와규 개량에 이용되었다는 건 일부 학자들의 잘못된 가설이다.

제주도 내에서의 소 공출 집행 방식도 구체적이고 강압적이었다. 당국은 마을별로 공출할 가축의 수량과 대상을 지정하고, 직원들이 가가호호 또는 목장마다 나가 대상 가축에 붉은 딱지를 붙여 표시하였다. 흥미롭게도 “황소(黃牛)”는 공출 대상에서 제외되고, 점박이소나 얼룩소, 흑갈색 칡소 등 털빛이 다른 소들에 우선적으로 붉은 공출 딱지가 붙었다고 한다.

이는 일제가 1938년 조선 소의 표준 모색을 적색(황갈색)으로 통일하면서 흑우와 칡소 등 다양한 색의 재래종 소를 의도적으로 도태시킨 정책과 맞닿아 있다. 즉 식민 당국은 필요 물자를 확보함과 동시에 조선의 토종 소 품종을 획일화하고자, 제주 흑우 같은 특산 품종을 집중적으로 공출해 간 것이다. 이렇게 선별된 소들은 지정된 날에 검사 후 헐값에 강제 매수되었는데, 주민들이 반발하지 못하도록 일부 금액을 지급하는 형식만 취했을 뿐 실질적으로는 강탈이나 다름없었다. 한편으로 농민들은 일손인 소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숨겨 두거나 색상을 바꾸려는 시도까지 했다고 전하지만, 식민권력의 조직적인 감시에 크게 효과를 보진 못했다. 결국 전쟁 말기로 갈수록 제주도의 소 개체수는 급격한 감소 추세를 보였다. 실제로 제주 지역 소 사육두수는 일제하 최고 3만8천여 두까지 올라갔던 것이 해방 무렵부터 줄어들기 시작했고, 1945년 광복 시점에는 전시 이전에 비해 현저히 줄어든 상태였다.

지역 공동체의 대응과 충격

소를 비롯한 가축 공출은 제주 지역사회에 깊은 경제적·사회적 충격을 주었다. 우선 농가 입장에서 소 한 마리를 잃는 것은 곧 밭 갈 힘을 잃는 것을 의미했다. 제주 농민들에게 소는 화전을 일구고 밭을 경작하는 유일한 동력이었는데, 공출로 인해 집집마다 부림소가 사라지자 농사에 막대한 지장이 발생했다. 일부 농민들은 겨우 남은 소를 한 마을이 공동 이용하거나, 인력에 의존해 농사를 지으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더구나 소는 농가의 비상한 현금수입원이기도 했는데, 소값은 헐값에 공출당하고 정작 식량 배급은 턱없이 부족하여 주민들의 생계는 직접적인 위협을 받았다. 일제 후반 제주에는 식량마저 지속적으로 외부로 공출되었는데, 특히 당시 제주 사람들이 주식처럼 먹던 고구마마저 도내 소비를 줄이고 거의 전량을 매입·반출해 주민들이 굶주림에 내몰렸다. 이러한 ‘절량(絶糧)의 공포’ 속에서 소와 말까지 빼앗기자, 제주 농촌 사회의 고통은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제주의 공동목장(共同牧場) 제도도 큰 변화를 겪었다. 전통적으로 제주도 각 마을에는 ‘목장’이라 불리는 공유 방목지가 있어 주민들이 마을단위로 소와 말을 방목해 왔다. 마을별로 선출된 테우리(방목 관리인)가 가축을 돌보고, 소유 세대들은 공동 목장 운영규칙을 지켜가며 방목질서를 유지하는 자치적 관리가 이뤄졌다. 그러나 일제가 들어서면서 이 공동목장을 통제하기 위해 마을공동목장조합을 조직하고 식민 관리체계에 편입시켰다. 총독부는 각 조합에 조합비와 세금을 부과하고, 조합원을 식민통치 협력 세력으로 포섭하여 축산물 생산을 관리했다. 특히 전시체제에서는 공동목장조합을 통해 생산된 축산물을 모두 파악하여 공출을 강요하였고, 가축 증식보다는 물자 징발에 초점이 맞춰졌다. 공출이 극에 달한 1940년대 초에는 마을 공동목장에 남은 가축이 거의 없을 지경이었고, 전통적인 방목 질서는 사실상 붕괴되었다. 공동으로 고기를 나누거나 소를 거래하던 마을장도 제대로 서지 못했고, 일부 목장조합은 유지비조차 감당하지 못해 해산 위기에 처했다. 일제 말 제주도의 공동목장이 총 126곳에 이르렀으나 그 대부분이 전쟁 전후로 기능을 상실하고, 이후 세월이 흐르며 50여 곳만 명맥을 이어가게 된 것은 이러한 전시기의 충격에 그 원인이 있다.

제주 사람들은 나름의 대응과 생존 전략을 모색했다. 소를 뺏긴 농민들은 남은 말이나 소를 은닉하거나, 공출 담당 관리들을 회유하여 할당량을 줄여보려 애쓰기도 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부녀자들이 앞장서서 “우리 소는 우리 식구가 먹일 것”이라 외치며 항의했다는 증언도 전해진다. 그러나 총독부의 식량·가축 동원은 경찰과 헌병에 의해 엄격히 집행되었고, 저항하는 이는 반역죄에 준해 처벌받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결국 대부분의 주민들은 속수무책으로 가축을 빼앗기고 생활 기반을 잃은 채 극심한 궁핍을 견뎌야 했다. 소를 잃은 농가는 논밭을 묵히거나 소작을 포기하기도 했고, 일부는 살길을 찾아 육지부나 일본으로 노무 동원에 응하기도 했다. 제주 공동체의 유지 기반이던 가축 경제가 무너지면서 전통 사회의 유대와 질서도 큰 상처를 입었다.

광복 이후의 여파와 향토 자원 복원 노력

1945년 광복으로 일제의 수탈은 끝났지만, 제주도에 남겨진 것은 피폐해진 농촌과 극도로 축소된 가축 자원이었다. 미군정이 들어선 직후 공출제와 배급제는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으나, 이미 소를 잃을 대로 잃은 제주 농가가 이를 복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1948년 발생한 제주 4·3사건과 한국전쟁기까지 이어진 혼란은 제주 사회 기반을 더욱 파괴하였다. 4·3사건 당시 수많은 초가촌락이 불에 타고 주민들이 희생되면서, 남아 있던 가축들마저 도난·유실되거나 군경에 의해 도살되는 등 추가 피해가 발생했다. 이러한 여파로 광복 후 한동안 제주도의 소 개체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전쟁 전 수준으로 회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일제강점기 말 약 3만8천 두에 달했던 제주 소는 해방 후 급감하여 1950년대에는 그보다 훨씬 적은 규모로 떨어졌으며, 농가당 소를 한 마리도 갖지 못한 곳이 태반이었다.

한편 광복 이후 남한 정부의 축산 정책도 제주 토종 소에게 또 다른 시련이 되었다. 정부는 1960년대 이후 한우 개량 사업을 추진하면서 생산성과 체격이 큰 황색 한우 한 품종만을 육성하는 방침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전통적으로 존재하던 칡소·흑우·백우 등 다양한 토종 계통은 점차 사라져갔다.

특히 1960년대 제정된 이른바 한우표준법에 따라 한우 품종을 누렁소 한 가지로 공식화하면서, 제주 흑우를 비롯한 재래 흑색 소와 얼룩소는 더 이상 별도의 품종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게다가 축산 장려를 명분으로 1950년대 중반 이후 제주에 브라만·샤롤레 같은 외래 대형 종축이 도입되어 교잡이 이뤄지자, 남아 있던 제주 토종소의 유전자풀이 희석되고 순종 개체 수가 급감했다. 결국 1980년대에 이르러 제주 흑우는 몇십 마리만 남을 정도로 멸종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뒤늦게 이러한 상황을 우려한 학계와 지역사회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제주도 축산당국과 연구자들은 흩어져 있는 흑우를 수소문하여 혈통 보존에 나섰고, 문화재청도 그 역사성과 희소가치를 인정해 2013년 제주흑우를 천연기념물 제546호로 지정하였다. 이후 제주축산진흥원과 제주대학교 등에 흑우 보존·연구센터가 설치되어 체계적인 복원 사업이 시작되었다. 농촌진흥청 국립축산과학원은 한편으로 첨단 생명공학 기법으로 흑우의 유전자를 보존하고 순수 혈통 증식을 도모하고 있다. 다행히 이러한 노력 덕분에 제주흑우 개체 수는 점차 늘어나 2020년대 초 현재 1천 마리 안팎까지 회복되었고, 2030년까지 2천 마리 이상으로 증식시키는 것이 목표로 설정되어 있다. 제주도 차원에서도 흑우 농가에 사료비와 수정란 이식 등을 지원하며 향토 자원 복원에 힘쓰고 있다.

이처럼 제주 소의 역사는 일제강점기의 수탈과 그 후유증을 뚜렷이 각인시키고 있다. 전쟁 기간 군국주의는 제주도의 소를 산 채로 실어가 군마(軍馬)·군량으로 소모시켰고, 해방 후에도 토종 자원에 대한 몰이해 속에 제주 흑우는 자취를 감출 뻔했다. 다행히 근래에 와서야 제주 흑우의 가치가 재조명되고 지역 사회의 보존 의지가 모아져 조금씩 옛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다. ‘먹이는 소’에서 ‘빼앗는 소’로 변했던 제주 소는 이제 겨우 ‘지켜야 할 우리 소’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날 전쟁터에 희생당한 수많은 제주 소들은 우리에게 자원 주권과 생태계 보전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며, 아울러 오늘날 제주 흑우 복원을 향한 노력이 단순한 가축 복원 이상의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는 교훈을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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