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제주 군용 소고기 통조림 공장
제8장 제주 군용 소고기 통조림 공장
일본군 군수 체계와 단백질 자원: 조선의 역할
1930년대 이후 침략전쟁을 확대해 가던 일본군은 단백질 공급원을 확보하는 것을 군수 체계의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메이지 유신 이전 오랫동안 육식이 금기시되었던 일본은 근대화와 함께 병사의 체력 향상을 위해 육류 공급을 늘리려 했고, 이를 위해 식민지 조선의 자원을 적극 활용했다. 특히 한반도는 풍부한 농축산 자원을 보유한 “대륙 병참기지”로 간주되었는데, 쌀과 같이 조선의 소와 가축도 본국과 전선의 식량으로 동원되었다. 1910년대부터 이미 조선산 소가 일본으로 수만 마리씩 반출되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조선 소의 대량 이동(이출)은 1930년대 이후 전시 동원 체제가 강화되면서 더욱 본격화되었다.
특히 중일전쟁(1937)과 태평양전쟁(1941) 발발 전후로 조선의 축산물은 일본군의 단백질 공급 기지로 조직적으로 전환되었다. 일례로 1910년부터 1941년까지 누적 약 146만 마리의 조선 소가 일본으로 공출(供出)되었고, 1939~41년 사이에는 매년 평균 10만 마리 이상의 소가 반출되었다. 해방 직전까지 총 160만~180만 마리의 조선 한우가 일본으로 끌려갔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쌀 수탈에 가려져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엄청난 규모의 축산물 수탈이었다. 일본군은 이렇게 반출한 조선 소를 전쟁 물자로 다양하게 활용했다. 소는 일선 부대의 역축(役畜), 즉 밭갈이와 수송용 동력으로 쓰였을 뿐만 아니라, 가죽은 피혁 자원으로, 고기는 식량으로 활용되었다. 1943년 조선총독부의 발표에 따르면, 그 해에만 조선 소 9만5천 두를 일본 본토 7만, 만주 2만5천의 비율로 보내기로 계획하였는데, 이는 “반도의 소가 결전하의 식량 증산과 수송 전선의 일꾼, 그리고 피혁용·식용으로서 커다란 책무를 완수케 하려는” 목적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조선의 한우는 일본군의 전쟁 수행을 위한 식량자원으로 조직적으로 동원되었으며, 식민지 조선은 쌀뿐만 아니라 육류 단백질 공급 면에서도 일본의 대외침략을 뒷받침하는 기반이 되었다.
이 단백질 조달 계획에서 남쪽 섬 제주도 또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제주도는 예로부터 말과 소의 방목이 발달하여 조선 왕실에 흑우(黑牛)를 진상하던 축산지였다. 《세종실록》 등에는 “제주 흑우는 고기 맛이 좋아 고려시대 이래 임금님 진상품으로 바쳤다”는 기록이 있고, 실제로 조선시대 제주는 국영 목장을 통해 관군의 군마와 진상품 소를 생산·공급한 바 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들어 이러한 제주 축산 자원 역시 군수 목적의 수탈 대상으로 전락하였다.
이러한 사정은 식민지 조선의 축산 자원이 현지 주민의 식량이나 농경 수단이 아닌 일본 제국의 전략물자로 재편성되었음을 보여준다. 전문가들은 “일본은 전통적으로 소 체구가 작고 밭갈이에 부적합했기 때문에, 오랜 세월 농경에 적응해 온 조선 소에 오래 전부터 주목해 왔다”면서, 조선 한우를 일본 내지의 농업과 군수에 활용하려는 의도가 일찍부터 준비되어 있었다고 지적한다.
결국 1938년 일제는 노골적으로 전시 동원을 선언하는 국가총동원법을 공포하며 조선의 인적·물적 자원을 전쟁에 총투입하기 시작했다. 중일전쟁의 확전과 함께 조선에서 생산되는 쌀, 쇠고기, 수산물 등은 군수품으로 공출되어 일본군에 공급되었고, 제주도의 축산물과 수산물도 예외가 아니었다. 태평양전쟁 시기 일본군의 식량사정 악화와 단백질 부족을 타개하기 위해 조선과 제주에서 어류 통조림, 육류 통조림 생산이 대폭 확대되었고, 이는 침략전쟁을 지속하기 위한 군량 확보의 중요한 축을 형성했다. 요컨대, 일제의 군수 체계에서 조선은 단백질 조달의 후방 기지로 기능하였으며, 제주도 역시 지역 내 방목 경제에서 벗어나 전쟁 식량 생산기지로 편입되는 운명을 맞게 되었다.
제주도 군용 통조림 공장의 설치 배경과 운영 주체
일제 강점기 제주도에는 이러한 전쟁 식량 생산을 위한 통조림 공장이 다수 세워졌는데, 그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이 한림읍 옹포리에 위치한 다케나카(竹中) 통조림 제조소 제주분공장이었다. 이 공장은 일본인 사업가 다케나카 신타로(竹中新太郎)가 세운 곳으로, 일본군의 식품을 공급하는 군수공장으로 기능하였다. 다케나카 가문은 원래 1904년 일본 교토 기온(祇園)에서 통조림 가공업을 시작한 기업으로, 1920년대에 이르러 조선으로 사업을 확장하였다. 다케나카 신타로는 1926년경 제주에 건너와 통조림 공장을 설립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차이가 있어 1926년 설, 1928년 설 등이 전한다. 확실한 것은 다케나카가 1920년대 후반에 제주에서 기존 쇠고기 통조림 공장을 인수하여 자체 분공장을 세웠으며, 이로써 제주도 내 최대 규모의 농수축산물 가공공장이 탄생했다. 다케나카 공장의 본점은 일본 교토에 있었고, 조선총독부의 지원 하에 경성(서울)과 부산에 사무소를 두었으며, 제주 외에도 나주, 마산, 청진, 울릉도 등지에 지공장이나 분공장을 설립하여 조선 전역에서 사업을 펼쳤다. 조선 최대의 통조림 업체로 성장한 다케나카 제조소는 일제가 지정한 “조선공장”의 하나로서 일본군에 식품을 납품하는 주요 군수업체가 되었다.
제주 옹포리의 다케나카 통조림 공장이 제주도에 들어서게 된 배경에는 몇 가지 전략적 이유가 있었다. 우선 지리적으로 제주도는 일본과 중국 대륙을 잇는 해상로의 요충으로, 일제는 제주를 침략전쟁의 전진기지로 삼고자 했다. 특히 제주도 북서부 지역은 일본 본토와 가장 가까운 위치이면서 동시에 중국 방면으로도 항해가 용이한 지점으로 인식되었는데, 일본 리츠메이칸대의 한 연구자는 다케나카 공장이 제주 북서부 해안에 입지한 것은 중국 침략을 염두에 둔 선택이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또한 옹포리가 속한 한림항은 1920년대에 제주 서북부의 중심 항구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1912년 제주 해안 도로가 개설되어 섬 북서쪽 교통이 편리해지고, 일제는 천혜의 포구였던 한림항을 현대식 항만 겸 경제교역 거점으로 확장하였다.
1923년 우체국, 1925년 근대식 병원이 들어서는 등 한림 일대가 도시화됨에 따라, 일제는 이곳을 식민지 공업 거점으로 개발할 충분한 입지 조건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실제로 일본인 자본가들은 1900년대 초부터 제주 남서부와 북서부의 주요 항구 근처에 수산 가공공장들을 세워왔다. 예컨대 성산포에는 일본인 잠수업자가 요드(아이오딘) 제조 공장을 세웠고, 모슬포에도 전분공장과 통조림공장(대해식품) 등이 들어서 일종의 산업벨트를 형성했다. 이처럼 풍부한 해산물과 방목 가축 자원, 그리고 항만 인프라를 갖춘 제주도는 일본 기업들의 군수용 식품 가공사업에 매력적인 거점이었다.
다케나카 통조림 제조소 제주분공장은 1929년경 본격 가동에 들어갔다. 공장 부지는 한림면 옹포리 일대 약 4,800평(약 1만6천㎡)에 이르렀고, 통조림 생산을 위한 공장 건물 386평, 부속 창고 및 사택 512평이 마련된 대규모 시설이었다. 설립 초창기 이 공장은 쇠고기와 어패류, 채소를 원료로 각종 통조림을 생산하였다. 당시 생산품으로는 쇠고기 통조림, 정어리·고등어 등을 이용한 어류 통조림, 완두콩 등 야채 통조림까지 다양했다. 제주산 통조림 제품 일부는 민간 시장에도 유통되었는데, 오사카 등 일본지방에 판매되어 호평을 받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생산된 통조림의 대부분은 군납용 군수품으로 판매되었다.
다케나카 제주 공장은 초창기부터 자본금 4만 원을 투입한 최신식 대공장으로서, 1926년 말 기준 연간 쇠고기 통조림 2,100상자(4만2천 원)의 생산고를 올렸다. 이는 당시 제주도 내 통조림공장 12곳의 총생산량 8,655상자 중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규모로서, 단일 공장으로 도내 생산량의 25%를 차지한 것이다. 조선총독부 촉탁으로 제주 조사를 담당했던 젠쇼 에이스케(善生永助)의 보고서(『제주도 생활상태조사』, 1929)에 따르면, 당시 제주 통조림 공장들 중 유일하게 원동기(발동기)를 가동하여 자동화 생산을 한 곳도 다케나카 공장이었다.
석유기관 19마력 3대와 증기기관 2대를 갖춘 현대식 설비를 바탕으로, 일본인 기술자 8명을 포함한 44명의 노동자가 공장에 근무하고 있었다. 이는 제주 내 다른 공장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뛰어난 설비와 인력을 갖춘, 제주의 근대 공업을 대표하는 기업이었다. 일본인 경영진과 기술진이 운영을 이끌고 다수의 제주인 노동자가 생산에 투입되었으며, 조선총독부로부터 조선공장 지정을 받아 각종 혜택과 감독을 받으면서 일본군을 위한 식료품을 대량 생산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제주에서 가축 공출과 통조림 생산 과정
중일전쟁 발발 이후 제주도의 가축들은 체계적인 공출 대상이 되었다. 일제는 1930년대 후반부터 조선 전역에 식량 및 가축 공출 제도를 강제하여, 각 지방 행정조직을 통해 할당량만큼 소와 말 등을 징발했다. 제주도도 예외가 아니어서, 전쟁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마을 공동목장 체계가 식민 당국의 통제에 편입되었다.
일제는 조선시대 국영목장이 있던 제주 각 지역에 목장조합을 설립하여 방목 가축을 관리하게 했는데, 이 조합은 실질적으로 총독부의 지시에 따라 소와 말을 조직적으로 수탈하는 통로로 기능했다. 마을 공동으로 키우던 소도 이제는 함부로 도살하거나 매매할 수 없었고, 식민 권력은 가축의 증식, 사육, 도축까지 전 과정을 법령으로 통제했다.
1939년 미곡배급통제법 제정 등 전시 식량 통제가 시작되자 곡물뿐 아니라 축산물도 시장에서 유통이 금지되고 정부 지정 경로로만 유통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전쟁 막바지인 1943년 “총후 농촌에서 175만 여 두의 소를 철저히 증식 지도”했다고 선전했지만, 정작 증식된 소들은 대부분 일본군을 위한 공출 대상이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제주도의 경우 농가에서 기르던 소들이 공출 명령에 따라 대량으로 반출되었고, 공출되지 않은 소들도 상당수가 군용 통조림 원료로 도축되었다. 일제는 제주섬 주민들에게 가축 사육 장려를 독려하면서도 한편으로 일정 두수 이상의 소는 강제로 신고·헌납하도록 압박했다. 각 마을의 청년회와 경찰이 중심이 되어 가구별 가축 보유 현황을 조사하고, 할당된 두수의 소를 지정된 시일 내에 조합이나 공출소로 내도록 강제했다.
제주도민들은 농사일에 필수인 소를 빼앗기는 것을 막기 위해 교미를 늦추거나 송아지가 태어나면 숨기기도 했지만, 발각될 경우 가혹한 처벌을 받아야 했다. 결국 다수의 제주산 소들이 생후 1년 남짓 성장하면 식용으로 공출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이러한 가축 공출 정책으로 1940년대 초 제주도의 소 사육 두수는 급격히 감소하였고, 남은 소들도 공출 대상이 되어 농가에서 자유롭게 도살하거나 판매할 수 없게 되었다. 전통적으로 제주에서는 마소를 중요한 재산으로 여겨 마을 공동으로 방목해왔으나, 일제의 통제하에 이런 공동방목 질서는 크게 위축되었다.
일단 공출된 소들은 두 갈래의 경로를 거쳤다. 일부 우량 개체는 산 채로 선적되어 일본이나 만주 등지로 옮겨져 군마나 노무에 쓰였고, 그 외 다수의 소들은 제주 현지에서 즉시 도축되어 군용 식품 원료가 되었다. 한림읍 옹포리의 다케나카 통조림공장은 이렇듯 제주 각지에서 공출·징발된 소들을 받아 대량 도축하는 시설이었다. 공장 부지에는 자체 도축장이 설치되어 매일 산 송장으로 실려오는 제주산 한우들을 도살·해체한 후 통조림 가공 공정에 투입했다.
통조림 제조 과정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우선 도축된 쇠고기를 절단·정선하여 큰 솥에서 삶거나 조리하고, 살코기와 약간의 야채 또는 소스를 섞어 주석 도금한 철제 깡통에 채웠다. 그런 다음 자동화된 밀봉 기계로 뚜껑을 봉하고, 고온의 증기 멸균 솥에서 열처리를 가해 살균하였다. 최종적으로 완성된 쇠고기 통조림은 규격 상자에 담겨 창고에 보관되었다가 출하되었다. 이 공장은 쇠고기뿐만 아니라 청어·고등어 등 어류와 톳 등 해조류도 통조림으로 만들 수 있는 설비를 갖추고 있어, 수급 상황에 따라 다양한 원료를 가공하였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시기에는 쇠고기 통조림이 가장 중요한 제품이었고, 어류 통조림 및 채소 통조림은 부차적인 비중을 차지했다.
다케나카 제주 공장의 전시 생산능력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는 일본군 병력 1,200명이 공장에 상주하며 주야 교대근무를 하여, 최대 생산시에는 하루에 무려 소 400마리까지 도살한 것으로 전해진다.(일제 강점기 제주도의 조선우 사육두수가 4만두선이였으니 하루 400마리도축은 무리한 추측이다.) 1931년 만주사변 무렵 일제가 시설을 확충하여 쇠고기·청어 통조림 생산을 크게 늘린 이후, 전쟁 말기로 갈수록 공장은 풀가동되었다. 현지 증언에 따르면 공장 직원 수가 800~900명에 달해,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2교대로 쉴 새 없이 돌아갔다고 한다. 생산량이 급증하면서 한때는 인근 마을의 여자 청년단까지 동원되어 통조림 용기 세척이나 포장 작업을 거들 정도로 노동력이 총동원되었다고 한다. 이 공장은 자체 중유 엔진과 증기 보일러로 동력을 생산하여 기계를 돌렸는데, 30마력급 원동기 2대가 쉼없이 돌아가 통조림 캔 밀봉기, 절단기 등을 움직였다. 공장에서 일했던 기술자의 증언에 따르면, 11살 나이에 입소한 그는 매일 수백 개의 깡통 뚜껑을 기계에 일일이 끼워 넣어 밀봉하는 작업을 맡았고, “팡팡팡” 하는 기계음이 하루 종일 끊이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그만큼 전시 하의 통조림 생산은 24시간 체제로 돌아가는 중노동의 현장이었으며, 제주인 노동자들과 일본군인·기술자들이 합작하여 엄청난 양의 군용 식량을 쏟아냈다.
생산된 통조림 제품은 곧바로 전선으로 보내기 위해 포장·운송되었다. 다케나카 통조림공장은 자체 운송망을 갖추고 있었는데, 일본의 해운회사인 “마루사(◯◯)”를 통해 전용 선박(建着船)을 운영하며 제품을 실어 날랐다. 공장 부근 한림항에는 통조림 상자들을 부두까지 운반하기 위한 인부들과 트럭이 대기했고, 포장된 쇠고기 통조림 상자들은 곧장 선박의 화물창고에 적재되었다. 이처럼 제주에서 생산된 군용 통조림은 현지에서 곧바로 해상을 통해 출하됨으로써, 신속하게 일본군 보급망에 편입될 수 있었다.
통조림 군용식량의 수송과 전선 보급
옹포리 통조림 공장에서 만들어진 쇠고기 통조림은 주로 바다를 건너 일본 본토의 군수물자 집결지로 운송되었다. 완제품의 상당량은 일본 오사카 등지의 항만을 통해 반출되었는데, 《동아일보》 1934년 4월 29일 자 보도에 따르면 제주산 채소 통조림이 오사카 지방에 판매되어 호평을 받았다는 언급이 있다. 이는 제주 통조림 제품이 일본 내 민간 시장에도 일부 유통되었음을 시사하지만, 보다 중요한 사실은 그 대부분이 일본군의 배급품으로서 소비되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오사카로 반출된 물량도 최종적으로는 일본 군수당국에 납품되어 군용 비상식이나 병사들의 식량으로 지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일본군의 병참 기지는 주로 후쿠오카, 오사카, 히로시마 등지에 위치했는데, 제주에서 생산된 통조림들은 해로를 통해 규슈나 혼슈 서부 항구로 운송된 뒤 일본 육군 군량창 또는 해군 군수기지에 적재되었다고 추정된다. 일단 일본 본토의 보급창에 집결된 통조림들은 다시 분류·포장되어 각 전선으로 발송되었다.
주요 보급 경로는 전쟁 시기 변화하였으나, 대체로 중국 대륙전선과 남방 태평양 전선의 두 방향이었다. 우선 중국·만주 방면으로는 한반도와 가장 인접한 보급선이었기 때문에, 조선에서 생산된 군수품이 만주 관동군과 중국 주둔 일본군에게 대량 보내졌다. 1943년 총독부 발표 기사에 따르면, 그 해 조선 소 9만5천 두 중 2만5천 두가 만주 방면으로 “수이출”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만주 및 중국 전선에 대한 식량 보급 요구가 매우 높았음을 보여주며, 이와 함께 쇠고기 통조림 같은 가공식량도 그쪽으로 집중 배정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남양 방면(남태평양 일대)으로도 조선의 축산 가공품이 상당량 보내어졌다. “해마다 내지(本土)는 물론 만주, 남양 방면으로 대량 수이출되어…”라는 당시 신문의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조선산 소와 축산식품은 남태평양 전쟁터의 일본군 부대들에도 공급되었다. 특히 섬이 많은 남양 전선에서는 신선육을 확보하기 어려웠으므로, 장기 보존이 가능한 통조림 식량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다. 영양가를 보충하기 위해 육류 통조림은 미군과 영국군도 애용하던 전투식량이었는데, 일본군도 마찬가지로 조선에서 생산한 쇠고기 통조림과 어류 통조림을 함정이나 수송기를 통해 태평양의 섬 주둔지로 운송하였다. 이를 통해 개전 초기에는 일본군 병사들에게 제주산 통조림이 “일본의 맛”이라며 사기 진작용으로 지급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전쟁 후반부로 갈수록 연합군의 해상 봉쇄가 심해지면서, 통조림 식량의 전선 수송도 차질을 빚었다. 1944년경부터 미국 잠수함이 일본 해상 수송로를 위협하면서, 제주를 출발한 보급선이 격침되는 사례도 발생했다. 실제로 1945년 4월 14일 미군 폭격기와 잠수함의 공격으로 일본 해군 함정 3척이 한림항 부근 해상에서 침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함정들은 일본 본토로 철수하던 군함이었지만, 제주 인근 해역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제주 공장에서 생산된 통조림들이 종전 직전에는 적재된 채 운송 도중 바다에 수장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1945년 여름 일본 본토에 대한 미 공군의 공습으로 오사카와 고베 등지의 군수창이 피해를 입으면서, 제주산 통조림 상당수가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 채 창고에 남아있었다는 증언도 있다. 8·15 해방 당시 옹포리 통조림 공장 창고에는 일본으로 보내지 못한 통조림 상자들이 일부 남아 있었고, 이를 이후 미군정이 접수하여 미군 부대의 군량으로 쓰거나 일부를 긴급 구호용으로 제주 주민들에게 풀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해방 이후 옹포리 통조림 공장은 일본인 소유 재산으로서 적산(敵産) 처리되었다. 1946년 2월 미군정은 이 공장을 대동식품공업사라는 민간 기업에 불하하여 가동을 재개하도록 했다. 대동식품은 한때 전국의 통조림 공장을 총괄하는 기업으로 성장했으나, 제주 공장은 분리되어 고종석씨 등의 관리인에게 맡겨졌다가 한국전쟁 전후로 문을 닫았다. 한때 제주 경제를 지탱하던 거대 군수공장은 이렇게 막을 내렸지만, 전쟁물자 생산 거점으로서 제주가 겪은 영향은 장기간 지역 사회에 남게 되었다.
제주 전통 목축 질서의 해체와 지역사회에 미친 영향
일제에 의해 제주도의 오랜 방목 문화와 전통적인 소 사육·소비 방식은 커다란 단절을 겪었다.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제주 목축문화의 핵심은 마을 단위로 공유지에 말을 놓아 기르는 마을공동목장 제도였다.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초지(草地)를 관리하면서 소와 말을 방목하고, 필요 시 공동 규약에 따라 가축을 처분하거나 이용하는 협동적 목축 방식은 제주에만 존재하는 고유한 전통이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이러한 공동목장들은 앞서 언급한 목장조합 체제로 흡수·재편되었다. 총독부는 법령을 통해 마을 공유 목장을 관 주도의 조합 소유로 바꾸고, 그 운영권을 식민지 행정망 속에 편입시켰다. 표면상으로는 기존의 마을 공동체 조직이 조합으로 전환된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조합장 임명, 가축 처분 등 중요한 의사결정에 식민 당국이 깊숙이 개입하였다. 이는 전통적인 자치적 목축 질서의 해체를 뜻했다. 마을 주민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결정만으로 공동목장의 소를 거래하거나 도살할 수 없었고, 식민 권력의 지시에 따라 가축을 관리하는 하부 조직원이 되어갔다. 공동체의 가축은 더 이상 공동체의 축제가 아닌 제국의 전쟁 기계에 바치는 자원이 되었고, 목축 문화에 담긴 자율성과 풍습도 크게 위축되었다.
특히 제주 흑우를 비롯한 토종 소의 씨족(씨암소) 체계가 붕괴된 것은 문화적·생태적으로 큰 손실이었다. 앞서 본 대로 일제는 우수 개체의 흑우를 선발하여 일본으로 가져가 일본 소 품종 개량에 이용하였고, 나머지 제주 흑우는 한우 적색화 정책 속에서 점차 사라졌다. 1938년 일제가 제정한 한우 심사표준에서는 “한우의 모색(毛色)은 적색으로 한다”고 규정하여, 전통적인 흑우나 칡소(얼룩소) 등의 번식을 사실상 금지하였다. 이에 따라 제주에서도 검은 소를 키우는 농가는 급감했고, 기존 흑우는 일본에서 들여온 적갈색 소와 교잡되거나 도태되어 버렸다. 수백 년 이어져 온 제주 고유의 가축 유전자원과 다양성이 일거에 상실된 것이다. 흑우는 일제 말기에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해방 이후에도 복원되지 못하다가 1990년대에 들어와서야 극적으로 몇 마리를 찾아내 복원 사업이 시작되었을 정도였다. 이는 식민지 수탈과 전쟁 동원이 단순한 경제적 피해를 넘어 생태계와 생물다양성의 파괴를 초래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지역 경제와 농경 구조에도 심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전통적으로 제주 농가는 소를 농경의 필수 노동력이자 비상시의 가계 자산으로 여겼다. 소 한 마리가 있어야 밭을 갈고 운송을 할 수 있었고, 또 소를 팔아 자녀 교육비나 혼례비용을 마련하는 등 경제적 안전판 구실을 했다. 그러나 일제의 가축 공출로 많은 농가가 노동력을 잃고 생계에 타격을 받았다. 논밭을 갈 소가 부족해지자 농사 생산력이 떨어지고, 일부 지역에서는 소 대신 사람이 직접 쟁기를 끄는 지경에 이르렀다. 비료 확보에도 차질이 생겼다. 제주 농업은 마소의 분뇨를 밭거름으로 쓰는 유기순환 농법이 발달했는데, 가축 수가 줄어들면서 거름 확보가 어려워지고 토지 생산성이 약화되었다. 이로 인해 식량 생산량 감소와 농민 경제 악화가 초래되었으며, 이는 전쟁 말기 제주도민의 피폐한 생활상의 한 요인이 되었다. 또한 일제의 통제로 소값이 헐값으로 통제되면서, 남은 소를 팔아도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했고, 축산업의 상업적 기반도 붕괴되었다. 결국 제주 지역 경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던 가축 자산의 축적과 거래가 전시에 거의 마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지역 사회 공동체
역시 전쟁기 목축 질서의 해체로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전통적인 공동목장은 단순한 방목장소가 아니라 마을 공동체 결속의 장이었다. 마을 주민들은 매년 마소에 관련된 제의(祭儀)를 지내고, 방애(放厓)불 놓기 같은 의식을 통해 해충을 구제하며 초지를 관리했다. 이러한 목축신앙과 공동 노동은 제주 공동체 문화의 중요한 부분이었는데,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거치며 이런 행사들은 점차 중단되거나 축소되었다. 가축이 공출되고 공동목장이 조합 소유로 바뀌면서, 마을 사람들이 함께 소 돌볼 일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공동체 구성원 간의 유대감도 약화되었다.
예전에는 마을의 부락 단위로 소를 방목하면서 서로 두레와 품앗이를 했지만, 전쟁 시기에는 오히려 서로의 가축을 감시해야 하는 상황도 벌어졌다. 누구네 집 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신고를 누락했다는 밀고가 들어가면, 경찰이 들이닥쳐 가축을 빼앗아가는 식이었다. 이렇게 총독부의 통제에 협조하는 주민과 저항하는 주민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생기기도 했다. 일제 말기의 극심한 통제로 인해 제주 전통사회에 내재했던 상부상조의 공동체 정신이 훼손되고, 불신과 긴장이 싹튼 것이다.
해방 후 제주도민들은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면서 공동목장을 다시 살리려 애썼다. 미군정은 일제가 만든 목장조합을 해체하고 토지를 원 소유주인 마을에 돌려주었고, 제주 각지에서는 다시 마을공동목장을 조직하여 방치된 초지와 남은 가축을 정비했다. 광복 당시 제주에 남아 있던 소는 일제 강점기 이전에 비해 극히 적은 수였지만, 마을 단위로 협력하여 다시 사육을 늘려나갔다. 제주인들은 “이제는 우리 소를 마음껏 키워보자”며 한때 자취를 감췄던 축산 문화를 부흥시키고자 했다. 실제로 1950년대 들어 제주 흑우는 거의 남아있지 않았지만, 대신 한우 종자가 도입되어 사육두수가 점차 회복되었다. 또한 공동목장 부지는 다시 마을 사람들이 공유지로 사용하게 되었고, 과거 목장조합이 차지했던 토지도 상당 부분 반환되었다. 하지만 일제가 남긴 상흔과 단절의 영향은 완전히 복구되기 어려웠다.
제주도의 마을공동목장은 일제시대에 143곳에 달했지만, 현대화와 산업화의 파고 속에 점차 줄어들어 2023년에는 77곳만 남았다. 해방 후에도 축산업의 쇠퇴, 세금 부담, 관광개발 압력 등으로 많은 공동목장이 해체·전용되었는데, 이러한 구조적 취약성의 뿌리에는 식민지 시기의 전통 파괴가 자리잡고 있다. 한 예로 서귀포시 신천·신풍목장은 최근까지 귤 껍질을 말리는 전통을 유지했으나, 중국산 제품에 밀려 기업에 매각되고 대규모 리조트로 개발되는 실정이다. 이는 과거 일제 수탈로 약화된 목축 기반이 끝내 현대 자본 논리에 잠식되는 현실을 보여준다.
지역 공동체 구조
역시 일제가 남긴 상처를 완전히 치유하지 못했다. 1948년 남로당 주도의 제주4·3사건으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되고 마을이 소실될 때, 옹포리 통조림 공장 부지는 아이러니하게도 피난민 수용소로 이용되었다. 일제시대 제주인들의 피와 땀이 배어 있던 군수공장이 해방 후에는 같은 제주인들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몰려드는 비극의 공간으로 돌변한 것이다. 1949년 초 옹포리 공장 지대에는 4·3 사건으로 고향을 잃은 명월리·금악리·상명리 주민 등이 집단 수용되어 춥고 굶주린 겨울을 나야 했다고 증언한다. 이는 일제가 빼앗아간 제주 공동체의 평화가 해방 후까지도 회복되지 못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정리하면, 일본군 군수 체계 속에서 제주도의 소와 목축 문화가 지역 고유의 맥락에서 이탈하여 군량 공급체계로 전환된 역사적 단절은 제주 사회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경제적으로는 축산 기반이 와해되고 농민 생활이 피폐해졌으며, 생태적으로는 토종 가축과 초지가 훼손되었다. 문화적으로는 공동체의 전통과 삶의 방식이 균열을 일으켰다. 비록 오늘날 제주 축산업이 다시 발전하고 흑우도 복원되었지만, 한때 “흑우의 고장”이었던 제주가 겪은 이 단절의 경험은 지역 정체성에 지울 수 없는 상처와 교훈을 남기고 있다. 제주 군용 소고기 통조림 공장의 역사는 이러한 역사적 단절점의 극적인 상징으로서, 제주도가 걸어온 근현대사의 굴곡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