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해방과 축산의 공백
제 4부 해방 이후 –기억에서 지워진 소의 역사
제9장 해방과 축산의 공백
광복 직후의 혼란과 제주 축산업의 공백
1945년 8월 15일 광복 직후, 제주도 사회는 극심한 행정·경제적 혼란 속에 빠져들었다. 일제의 패망과 함께 제주에 주둔했던 약 7만 명에 달하는 일본군이 서둘러 철수하고, 기존의 군사 시설과 행정 체계는 붕괴되었다. 일본인 관리와 기술자들도 대부분 본국으로 돌아가거나 축출되었으며, 한때 미군정의 요청으로 60여 명가량의 일본 관리들이 1946년 1월까지 남아 행정을 돕기도 했지만 이는 일시적 조치에 불과했다.
행정 공백 속에서 제주도민들은 자체적으로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여 치안을 유지하고 식량·산업 자원을 관리하고자 했다.
예컨대 1945년 9월 한림면에서는 청년회와 자위대를 중심으로 건준이 결성되었고, 곧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어 지역 행정을 담당하였다. 인민위원회 산업부는 일본인이 소유·경영하던 주요 공장, 학교, 관공서 등 이른바 적산(敵産)을 접수하여 임시로 관리하는 역할까지 맡았다. 그러나 10월 이후 한반도 남부를 점령한 미군정이 인민위원회를 공식 인정하지 않고 모든 통치권을 접수하면서, 제주도의 행정 주도권은 미군정으로 이관되었다. 미군정 제주도재산관리과는 인민위원회가 관리하던 적산 시설들을 회수하여 새로 지정한 관리자에게 넘겼고, 혼란기 제주 사회에 잠시나마 존재했던 자치적 관리 시도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러한 행정 권력 교체와 사회 혼란 속에서, 제주도의 축산업은 사실상 공백 상태를 맞이하였다. 일제강점기 동안 구축되었던 행정 체계와 조합 조직이 해체되고 담당 인력마저 사라지면서, 가축 사육과 관리에 대한 공식적 지도력과 지원이 단절되었다.
일본인들이 경영하던 목장, 도축장, 통조림 공장 등도 운영이 중단되거나 폐쇄되었다. 가축 사육을 관장하던 제주도축산동업조합이나 마을 공동목장 조합도 기능을 잃고 혼란에 빠졌다.
특히 소 사육 부문은 일제가 패망 직전까지 전쟁 물자로 활용하기 위해 가혹하게 동원한 탓에 광복 시점에 이미 피폐해져 있었다. 일본군이 철수하며 잔여 군마와 소 중 상당수를 도륙하거나 방치했고, 도민들도 식량난 속에 일부 소를 식용으로 잡아먹는 등 사육 기반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미군정은 쌀 등 식량 확보와 치안 유지에 주력하느라 초기에는 축산 진흥에까지 손길이 미치지 못하였다. 행정의 손이 닿지 않는 사이, 제주 축산업 전반에 걸쳐 일종의 공백기가 형성되었다.
이 공백기는 숫자로도 드러났다. 광복 직후인 1946년 당시 제주도의 소 사육 두수는 일제 말기의 전쟁 동원으로 급감하여 전년도 대비 큰 폭으로 줄어들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또한 일제강점기 구축되었던 제주도 내 72개에 달하던 각종 제조업 공장들 – 주정(무수알콜)공장, 통조림공장, 전분공장, 제빙공장 등 – 이 광복과 함께 상당수 가동을 멈추거나 파괴되었다. 이는 제주 지역 경제 전체의 침체를 가져왔을 뿐 아니라, 축산물을 가공·유통하던 산업 기반도 함께 정지되었음을 뜻한다. 즉, 해방과 함께 제주 축산업은 제도적 관리망과 산업 인프라가 한꺼번에 붕괴되어버린 셈이다.
혼란상은 목축 현장 곳곳에서 나타났다. 일제가 운영하던 관립목장과 마을 공동목장은 관리 주체를 잃고 상당 부분 방치되었다. 방목지 울타리가 훼손되거나 목장 부지가 경작지로 무단 점유되기도 했으며, 일부 마을에선 공동목장 운영이 중단되어 가축 방목 전통이 단절될 위험에 처했다. 1948년 남한 정부 수립 전까지의 과도기 동안, 축산 정책의 공백으로 제주 농촌에서는 소나 말을 함부로 매매·도축하는 일이 늘어나고 가축 전염병 방역이나 개량 사업도 전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은 곧 제주 축산업의 생산성 저하와 인구 증가에 따른 식량부족 문제를 심화시켰다. 요컨대 광복 후 미군정기 제주도의 축산업은 행정적 지원과 통제가 모두 부재한 가운데 방치되어, ‘축산 공백’이라는 말 그대로의 암흑기를 보낸 것이다.
일제 전시 목축자원 동원의 체계와 그 붕괴
광복 직전까지 불과 몇 해 전만 하더라도, 제주도의 축산업은 일제가 추진한 전시 동원 체계 하에서 매우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관리를 받고 있었다. 1930년대 후반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거치며, 일본 제국은 제주도를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개발하고자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였다. 1937년 7월 일제가 확정한 「제주도개발계획」은 제주도의 자원과 인력을 10년간 전쟁물자 생산에 효율적으로 동원하기 위한 종합 청사진이었다.
이 계획에는 도로·항만 확충, 전력·용수 개발뿐만 아니라 농수축산 자원의 증산 방안까지 망라되었다. 특히 “소·양·돼지 등의 축산과 축산품의 가공, 수산품의 생산과 가공, 특용작물 재배 증산”이 명시되어 있었는데, 이는 모두 침략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제주도의 목축업은 전시체제 하에서 철저히 전쟁 자원으로서 개편·운영된 것이다.
1930년대 제주에서는 전통적인 마을공동목장이 일제 정책에 따라 재편되었다. 일제 당국은 한반도 내에서 군마(軍馬)와 군용 소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제주에 마을공동목장 조합들을 조직하게 했다. 제주도축산동업조합과 농회의 지도 아래 각 읍면 단위로 공동목장을 설치하고, 주민들에게 말을 기르고 소와 면양 등을 사육하도록 장려하였다. 이러한 공동목장들은 일견 전통 공동방목의 부활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국가 총동원 체제에 편입된 통제 기구로 기능했다.
조합을 통해 가축 두수와 사육 상황이 파악되고, 필요한 경우 군마와 우마(牛馬)가 공출 형식으로 징발되었다. 실제로 중일전쟁 발발 이후 제주도의 마을목장 조합들은 「조선마증식계획」에 따라 군용마 생산에 협조하도록 계획이 갱신되었으며, 상당수 말과 소가 강제 반출되거나 일본 본토 및 타 전선으로 이동되었다.
뿐만 아니라, 축산물 가공 산업 기반도 전시에 맞춰 확충·정비되었다. 1920년대까지 제주에는 소라·전복 같은 해산물 통조림 공장들이 주로 설립되었으나, 일제가 침략전쟁에 돌입하면서 축산물 가공시설도 전략적으로 증설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군용 쇠고기 통조림 공장의 설립과 운영이었다. 일제 강점기 말엽, 제주에는 일본 육군과 해군에 식량을 보급하기 위한 통조림 공장과 식품 가공공장이 다수 가동 중이었다. 1940년경 자료에 따르면 제주도 내 통조림 공장은 15곳에 이르렀고, 이 가운데에는 쇠고기, 말고기 등 육류 통조림을 생산하는 시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공장들은 최신 설비를 갖추고 식량을 대량 생산·비축함으로써, 제주도를 전쟁물자 공급 거점으로 삼으려는 일제의 전략에 부응하였다.
제주 북서부 한림읍 옹포리의 다케나카 통조림공장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교토 출신의 실업가 다케나카 신타로(竹中新太郞)가 1926년 제주에 진출해 세운 이 공장은 본래 어류 및 농산물 통조림을 만들던 곳이었으나, 1930년대 후반 전쟁체제가 강화되면서 쇠고기 통조림을 대량 생산하는 육군 군수공장으로 성격이 변화하였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은 이 공장을 군수용으로 확장·개조하여, 제주도내에서 사육되던 수많은 한우와 재래소를 도축해 통조림으로 만드는 작업에 돌입했다. 이는 일제가 패전을 눈앞에 두고서도 본토 결전을 대비해 제주를 “최후의 보루”로 요새화하며, 식량을 비축하려 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제주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말 육즙 통조림, 건우육(말린 고기) 가공 등 전시에 필요한 축산품 생산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해방 직전까지 제주도의 목축 기반은 일제의 전시 동원계획 아래 최대한 가동되고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제주산 가축 자원은 혹사당하고 고갈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시 동원체제는 1945년 8월 일본의 패망과 함께 급격히 붕괴되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인 경영자와 기술진이 떠나고 행정력의 이완으로 통제가 사라지면서, 전시체제를 유지하던 인프라는 기능을 상실했다. 일본군이 물러가며 폭파하거나 폐기한 시설도 많았고, 연합군의 공습으로 파괴된 기반도 있었다. 실제로 태평양전쟁 막바지인 1945년 2월과 7월, 미군은 제주 한림 일대를 폭격하여 일본군 함선과 함께 지상 군수 시설에도 큰 타격을 입혔는데, 이로 인해 당시 옹포리 통조림공장을 포함한 여러 전시 시설이 피해를 입었다. 전쟁 자원으로서 철저히 동원되었던 제주도의 목축 기반은 해방과 동시에 그 의의를 상실하고 폐허로 변해버린 것이다. 광복 직후 제주 축산업이 직면한 공백 상태는, 아이러니하게도 불과 몇 달 전까지 존재했던 일제의 체계적 통제와 자원수탈의 유산이기도 했다. 조직과 기록만 남았을 뿐 실제 생산활동은 정지되었고, 가축 자원은 고갈되었으며, 남은 것은 혼란과 빈 껍데기뿐인 시설들이었다. 이후 이 잔재들을 수습하여 평화산업으로 전환하는 일은 해방 후 제주 사회가 짊어진 과제로 남게 되었다.
군용 쇠고기 통조림 공장의 설치와 소멸
앞서 언급한 다케나카 통조림공장은 제주 전시기 축산자원 동원의 핵심 시설이었다. 이 공장은 일제가 제주도를 “식민지 교두보”로 삼아 각종 공장을 설립한 대표적 사례로 평가된다. 본사는 일본 교토의 기온(祇園)에서 1904년 창업한 竹中缶詰 제조소였고, 제주 옹포리 분공장은 1920년대에 건립되었다. 초창기에는 주로 어패류 통조림과 완두콩 통조림 등을 생산하여 일부는 오사카 등지로 민간 판매하였으나, 대부분은 군납용으로 납품되었다고 한다. 1929년 조선총독부 관리 젠쇼 에이스케(善生永助)가 펴낸 보고서에 따르면, 1926년 당시 제주도 내 통조림 공장 12곳 중 다케나카 공장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컸다. 자본금 4만원의 이 공장은 쇠고기 통조림 연간 2,100상자(4만2천 원 상당)를 생산하여 제주 총 생산량 8,655상자 중 1/4을 점유했고, 공장 노동자도 44명(일본인 8명)을 고용하여 제주에서는 유일하게 기계식 발동기로 가동되었다고 기록되었다. 이처럼 일찍부터 대규모 설비와 인력을 갖추었던 다케나카 공장은, 전쟁이 격화되자 그 역량을 육류 통조림의 대량생산에 집중하게 된다.
1931년 만주사변 무렵 일본군은 옹포리 공장의 군수적 가치를 인식하고 설비를 증설하였다. 이어 1941년 태평양전쟁 개전과 함께 군용 쇠고기 통조림 전용 시설로 전환되어, 일본군의 병참 식량을 생산하는 임무를 맡았다. 생산 품목은 쇠고기 통조림뿐 아니라 청어 통조림 등으로 다양화되었지만, 쇠고기 통조림이 핵심 제품이었다. 육지에서 항공로로 운송이 어려운 대량의 고기를 장기간 보존·공급하기 위해, 통조림 가공은 필수적이었다. 공장은 일제 말기에 “일본이 자랑하는 전시 국책사업장”으로 불릴 정도로 위상이 높아졌다.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나 조선주둔 일본군 사령관 등이 제주 시찰 시에 방문할 만큼 중요 시설로 대우받았고, 경영주 다케나카 신타로는 일본 산업협회로부터 표창을 받기도 했다.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45년에 이르러 다케나카 공장의 가동은 극한으로 치달았다. 일본군 1200여 명의 병력이 공장에 상주하여 24시간 주야 교대로 작업을 했으며, 심지어 하루에 소 400마리를 도살하여 통조림으로 만들기도 했다고 당시 공장직원인 장경직씨(79.한림읍옹포리334-8)는 증언했다.
출처: 제주일보(http://www.jejunews.com).
이는 제주 전역에서 가축을 쓸어모았음을 의미한다. 당시 공장에서 기술 보조원으로 일했던 장경직(당시 11세 입사) 씨의 구술에 따르면, 전쟁 말기 공장 직원 수는 일본인 감독을 포함해 800~900명에 달했고, 작업은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2교대로 쉬지 않고 진행되었다고 한다. 심지어 각 마을의 청년부 여자들까지 동원되어 통조림 용기 세척이나 포장 등의 작업에 투입되었을 정도로 인력 총동원이 이루어졌다. 당시 제주 곳곳에서 송아지, 번식우까지 닥치는 대로 징발되거나 도축되었고, 주민들은 식량난 속에서도 군용 식량 생산을 위해 가축을 빼앗겨야 했다. 인근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일제 말기 식량사정이 얼마나 어려웠던지 공장에 나가 일을 하고 고등어 대가리 하나 얻어와도 기뻐했다”는 일화까지 전해진다. 그나마 공장에서 일자리를 얻지 못한 사람들은 굶주림에 더 시달렸다고 하니, 전시기의 비참한 생활상이 잘 드러난다.
그러나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과 함께 이 거대한 군수 공장의 운명도 급변했다. 일본군은 패퇴하며 제주도를 떠났고, 다케나카 통조림공장은 더 이상 생산을 지속할 수 없게 되었다.
광복 직후 잠시동안은 공장의 일본인 잔류 인력과 조선인 직원들에 의해 명맥을 유지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실제로 해방 후에도 이 공장에 계속 근무했던 장경직 씨는 “주문이 없어서 견본만 만드는 날이 많았다”고 증언한다. 즉, 공장은 가동은 해보았으나 판로가 없어 사실상 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이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이 공장을 비롯한 주요 산업시설을 인수하여 관리하려 했다. 한때 인민위원회 사무실을 다케나카 공장 건물로 옮겨 걸기도 했을 정도로, 이곳은 지역 행정의 상징적 거점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미군정이 제주 행정을 접수함에 따라 공장은 곧 적산 처리 절차에 넘겨졌다.
1946년 2월, 미군정은 다케나카 통조림공장을 적산으로 공식 불하하였다. 당시 서울의 미군정청 재산처리국은 제주도 내 일본인 소유 산업시설들을 조선인 기업에 매각하기 시작했는데, 다케나카 공장은 ‘대동식품공업사’라는 회사에 불하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제주신문 1947년 보도에 따르면 대동식품공업사의 대표는 김영규라는 인물로, 해방 후 제주뿐 아니라 전국의 적산 식품 공장들을 통괄 관리하려는 구상이 있었다고 한다. 초기에는 이 회사의 본사가 서울에 있었고 제주 공장은 그 지사로 편입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제주 공장이 분리되어 고종석 씨에게 관리가 위임되었다고 전해진다. 고종석은 해방 직후 한림면 인민위원회 산업부장을 지내며 이 공장의 접수를 주도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대동식품공업사 체제 하에서 공장은 한동안 명목상 운영되었으나, 전시만큼의 생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본인들이 남긴 기계 설비와 넓은 건물은 여전히 건재했지만, 재료 조달과 판매망 부재로 인해 통조림 생산은 극히 소규모로 이루어졌을 뿐이었다.
1947~48년 무렵부터 제주에서는 정치적 정세 불안과 4·3사건의 발발로 치안이 악화되었고, 공장 운영은 더욱 어려워졌다. 1948년 남로당 주도의 제주도 무장봉기와 그에 따른 유혈진압 국면에서 제주 곳곳의 마을이 소실되고 주민들이 피난길에 올랐다. 1949년 초, 한림 옹포리의 이 통조림공장 부지는 4·3 사건으로 집을 잃은 주민 수천 명의 피난소로 활용되었다. 명월리, 금악리, 상명리 등 서부지역 피해마을 주민들이 이곳 공장 건물로 집단 소개(疏開)되어 몇 달 간 지냈는데, 판잣조각과 가마니로 겨우 막아 만든 임시 숙소에서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렸다고 한다. 위생 상태도 열악해 홍역 등이 돌아 어린아이들이 집단으로 목숨을 잃는 비극이 벌어졌다. 한때 제주 최대의 산업시설이던 통조림공장은 이렇듯 참혹한 난민수용소로 변모해버렸다.
한편, 1948년 남한 정부 수립 후 제주도에도 대한민국 군경이 주둔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옹포리 통조림공장이 잠시 군수물자 제조 기지로 재활용되기도 했다. 1949년 무렵 주둔한 국방경비대 2연대와 모슬포의 국군 제1훈련소는 공장 시설 일부를 이용하여 병력에게 지급할 식료품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장경직 씨의 증언에 따르면 한국전쟁 발발 후인 1950년, 모슬포 훈련소에 있던 군인들이 옹포리 공장에 와서 김치 등 군용식품을 생산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제주도에 대거 투입된 해병대 및 국군 병력의 보급품을 현지에서 조달하려는 시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군용 활용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대 초반, 공장은 사실상 가동을 멈추고 창고처럼 쓰이거나 방치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1950년대 중반 들어 정부 차원의 축산업 부흥 정책이 본격화되면서 비로소 옹포리 공장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1957년 4월, 대동식품공업(주)이라는 이름으로 통조림공장이 재가동을 선언하며 재창립되었다. 이는 정부의 식량증산 정책과 맞물려 제주산 수산물·축산물의 상품화에 다시 도전한 시도였다. 그러나 경영 여건은 녹록지 않았다. 기술 인력과 설비는 있었지만 원료 확보와 판매망 개척에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공장은 1960년대 후반까지 명맥을 잇다가 1970년경 완전히 폐업하고 말았다. 이후 한동안 공장 부지는 제주축산업협동조합의 축산물 공판장(도축장 겸 정육시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가, 1980년대에 이르러 민간에 매각되었다. 1982년부터는 ‘대원자동차정비공장’이라는 이름의 자동차 정비업체가 이 부지에 들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공장터에는 몇몇 옛 건물이 용도만 바뀐 채 남아 있고, 일제강점기 세워졌던 높이 27~29미터의 거대한 굴뚝은 2000년대 초까지 존치되었다가 안전상의 이유로 철거되어 이제는 자취를 찾기 어렵다. 쇠고기 통조림을 생산하던 원동기와 기계들도 대부분 고철로 처분되었고, 몇 가지 부품만 박물관 등에 기증되었을 뿐이다. 한때 하루 400마리의 소 울음으로 가득찼던 제주 옹포리의 통조림 공장은 이렇게 사라져갔다.
잊혀진 통조림 공장 – 기록과 기억의 부재
놀랍게도, 이렇듯 제주 산업사와 전쟁사의 비극을 간직한 통조림 공장에 대한 기록은 공식 문헌에서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일제강점기 말기의 극비 군수시설이었던 탓에 관련 문서들이 체계적으로 남지 않았고, 광복 후 혼란기에 행정문서도 누락·유실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다케나카 공장의 존재와 운영 실태는 해방 후 오랫동안 대중에게 잊힌 채로 있었다. 1920~30년대의 총독부 통계서나 《제주도세요람》(1938) 등 일부 자료에 공장 설립 연도와 생산량 등이 언급되지만, 광복 전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공식 기록이 거의 공백 상태다. 미군정 시대에 작성된 적산 처리 관련 문서에도 “제주 모 통조림 공장 불하”라는 간략한 행정기록만 남아 있을 뿐, 설비의 처분 경위나 공장 운영 실태에 관한 상세 보고는 없다. 4·3사건으로 행정기능이 마비된 1948~49년에는 기록 생산 자체가 제한적이었고, 이후 한국전쟁까지 겹치면서 제주 지역의 산업 관련 자료 수집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결국 이 공장에 얽힌 많은 이야기들은 공식 기록에 남지 못하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갔다.
문헌상의 부재와 함께, 구술 기록도 드물다. 제주 4·3의 와중에 희생되거나 피난 간 주민들이 많아, 전쟁 전후 공장에서 일했던 증인도 극히 적었다. 다행히도 몇몇 생존자와 지역 원로들의 증언이 뒤늦게라도 채록되어 오늘날 전해진다. 앞서 소개한 장경직 옹의 구술이나, 옹포리 주민들이 전하던 “고등어 대가리” 일화 등이 그 예이다. 하지만 이러한 증언들은 2000년대에 이르러 지역 언론과 연구자를 통해 겨우 발굴된 것이다. 1940년대 후반~50년대 초반 당시에는 공장과 관련한 기억을 되새길 여유조차 도민들에게 없었다. 4·3의 상흔과 한국전쟁이라는 연이은 격동 속에서, 제주 사람들의 관심사는 생존과 가족의 안위였다. 산업유산에 대한 향수나 기록 의식은 자리잡기 어려웠다. 더구나 이 통조림 공장은 일제가 세운 군수공장이라는 부정적 이미지 때문에 광복 후 새 사회에서 기념되거나 긍정적으로 회상되기 힘든 대상이었다. 오히려 제주도민들에게는 일제 수탈과 전쟁 동원의 아픈 상처를 떠올리게 하는 장소였기에, 적극적으로 기억되기보다는 잊혀지거나 외면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의도적인 은폐
또한 일부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 시기에는 친일 청산이나 일제잔재 정리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있었지만 동시에 급박한 국제정세로 인해 충분한 청산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대신 많은 일제기 시설과 기술이 새 정부에 인계되어 활용되었는데, 옹포리 통조림공장의 경우도 그 설비 일부가 국군 및 축협 등에 의해 전용되었다. 이 과정에서 과거의 쓰임(일본군용 식량 생산)보다는 현재의 활용성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굳이 역사적 맥락을 강조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있었을 수 있다. 정책 입안자들이 이 공장을 전쟁의 유산이라 규정하고 정리하는 대신, 경제 인프라로 재활용하거나 방치해둔 것도 그런 이유로 해석된다. 결과적으로 제주 전시기 통조림 공장과 그 설비에 관한 구체적 정보는 세월 속에 묻혀버렸다. 지역 향토지나 사료집에서도 간헐적으로 언급될 뿐, 자세한 전말은 빠져 있다. 예컨대 1950년대 간행된 《제주도지》 초기 판본에서는 일제강점기 산업사 부분에 옹포리 통조림공장이 언급되나, 해방 이후의 폐업 경위나 시설 처리에 대해서는 일절 다루지 않고 있다<sup>3</sup>. 이는 당시 사회가 과거보다는 새로운 국가 건설과 경제 개발에 집중하느라, 이런 “불행한 산업유산”의 기억을 직시할 여유가 없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우리가 이 통조림 공장의 역사를 더듬을 수 있는 것은, 주로 학계와 지역언론의 노력 덕분이다. 2000년대 이후 제주학 연구자들과 향토사학자들이 일제강점기 제주 산업화와 전쟁 동원에 관한 조사를 수행하면서, 비로소 옹포리 다케나카 공장의 실체가 구체적으로 밝혀지기 시작했다. 일본 리쓰메이칸대학의 가와하라 노리후미 교수 등이 제주도 내 통조림공장 분포와 생산을 연구하여 논문으로 발표하였고, 제주4·3평화재단과 제주학연구센터 등에서도 구술 자료를 채록하여 4·3 당시 소개민 수용소로서의 공장 모습을 복원하였다. 제주일보와 제주의소리 등 지역 언론은 향토문화 재발견 시리즈를 통해 관련 자료와 증언을 기사화하였다. 이러한 노력들로 겨우 과거의 퍼즐 조각들이 맞춰지고 있지만, 아직도 남은 자료와 증언은 제한적이다. 결국 이 공장의 역사는 상당 부분이 “기억에서 지워진” 상태로 남아 있으며, 완전한 전모를 알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사료 발굴과 연구가 더 필요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지워진 산업유산’의 의미와 복원 가능성
옹포리 쇠고기 통조림공장을 비롯한 제주 전시기 목축시설들은, 기억에서 거의 사라진 산업유산이라 할 수 있다. 물리적으로는 시설의 흔적이 희미해졌고, 사회적으로도 그 존재와 의미가 대중에게 널리 인식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유산들이 담고 있는 역사적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첫째, 이들 시설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과 전쟁 동원의 생생한 증거이다.
제주 다케나카 공장은 일제가 제주도를 식량·물자 수탈의 전초기지로 삼았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소였다. “조선 최대의 통조림 공장”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 공장은 제주도민의 가축과 노동력을 동원하여 제국의 전쟁을 뒷받침한 식민지 수탈의 증표였다. 이러한 산업유산을 제대로 기억하는 것은, 제주도가 겪은 고통과 희생을 되새기고 식민 지배의 실상을 후세에 알리는 데 중요하다.
둘째, 이 유산은 제주 근대화와 산업 발전의 이면을 보여준다.
겉보기에는 근대적 공장과 기술 도입으로 비춰질 수 있으나, 그 이면에는 군국주의 목적의 왜곡된 산업화가 있었다. 제주도의 초기 산업화가 자발적·내생적 발전이 아니라 외세의 요구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알려주는 사례인 것이다. 이는 현재 제주가 추구하는 지속가능한 발전에 시사점을 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이들 유산의 원형 복원은 상당히 어려운 과제다. 옹포리 통조림공장의 경우, 건물과 구조물 대부분이 철거 또는 개조되었고, 부지에는 다른 민간 사업체가 입주해 있다. 29미터 높이의 옛 굴뚝은 2000년 이전까지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져 더 이상 현존하지 않는다. 즉, 원래 모습을 복구하려 해도 남은 실물이 거의 없는 상태다. 더욱이 사유지에 해당하는 부지를 공공 목적으로 수복하는 데에는 법적·경제적 제약이 따른다. 이러한 이유들로, 현재로서는 완전한 물리적 복원보다는 “기억의 복원”, 즉 역사적 의미를 재발견하고 기념하는 방향이 논의되고 있다.
제주특별자치도와 문화재 당국은 산재한 일제 침탈의 흔적들을 조사하고 보존하는 사업을 추진 중인데, 태평양전쟁 유적에 대한 종합정비 계획 수립 용역도 그 일환이다. 2010년대 들어 제주도는 전쟁 동굴진지, 비행장, 탄약고 등과 함께 산업유산인 공장터에 대한 근대문화유산 등재 가능성을 검토하였다. 다만 지방자치단체 차원의 예산과 우선순위 문제로 아직 가시적 성과는 미흡하여, 많은 전쟁유적이 여전히 방치되고 있는 실정이다.
학계와 지역사회에서는 산업유산의 교육자원화를 제안하고 있다. 예컨대 옹포리 통조림공장터 인근에 간단한 안내 표지판이나 기념비를 설치하여 관광객과 주민들에게 역사적 사실을 알리는 방법이 논의된다. 실제로 제주 한림지역 주민들과 향토사 연구자들은 공장터에 대한 설명판을 세워 줄 것을 청원한 바 있으며, 현재 공장 부지 입구에는 작은 안내 표지가 설치되어 있다. 이 안내판에는 공장의 규모와 전쟁 당시 역할 등이 적혀 있어, 지나가는 이들이 잠시나마 그 역사를 접할 수 있게 하고 있다. 더 나아가 제주4·3평화공원이나 제주근현대사박물관 등 기존 전시공간에서 이 통조림공장 관련 자료를 상설 전시하여 대중의 인식을 높이자는 의견도 있다. 예컨대 당시 생산되었던 쇠고기 통조림 견본이나 공장 노동자들의 사진, 증언 영상 등을 모아 전시하면, 제주가 겪은 전시 동원의 실상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복원을 꼭 물리적 재건으로 한정하지 않는다면, 할 수 있는 일들은 많다. 지금도 남아있는 공장 부지의 공간 활용 방안을 창의적으로 모색할 수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옹포리 일대를 역사 공원으로 조성하여, 일제강점기 유산과 4·3사건 유적을 함께 아우르는 교육의 장으로 만들자고 제언한다. 그렇게 한다면 공장 건물을 그대로 복원하지는 않더라도, 그 터전에서 일어난 일들을 기억하고 체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VR/AR 복원도 가능하다. 옛 공장의 도면과 사진 자료가 발굴된다면, 3D 모델링을 통해 당시 모습을 가상으로 재현하여 관람객이 스마트폰이나 VR기기로 볼 수 있게 할 수 있다. 이는 공간적 제약 없이 산업유산을 ‘복원’하는 현대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 관심과 공감의 복원이다. 제주도민과 국민들이 이 잊힌 공장의 역사적 의미를 인식하고, 그 가치를 공유할 때 비로소 유산은 되살아난다. 다행히 최근 들어 일제강점기 제주도의 병참기지화 정책과 4·3사건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이러한 산업유산에도 관심이 확대되고 있다. 2020년대에 들어 제주 출신 국회의원과 문화유산청이 협력하여 제주도의 근대 산업유산 보존 대책을 논의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2023년에는 옹포리 통조림공장 터를 포함한 몇몇 장소를 문화유산으로 등록하는 방안을 검토한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물론 구체적인 실현까지는 갈 길이 멀지만, “기억에서 지워진 소의 역사”를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조금씩 일어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결론적으로, 제주 옹포리의 전시기 통조림공장과 목축시설의 역사는 비록 한때 잊혀졌으나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될 우리의 과거다. 해방과 함께 찾아온 축산의 공백은 단순한 산업 침체의 문제가 아니라, 식민 지배와 전쟁이 남긴 상처의 발로였다. 그리고 그 공백을 메우기까지 제주 공동체가 겪어야 했던 혼란과 고통은 우리의 집단기억 속에 제대로 새겨져야 할 것이다. 비록 녹슨 기계와 부서진 벽돌더미는 사라졌어도, 기록을 통해, 그리고 우리의 관심과 노력 through을 통해, 잃어버린 소의 역사를 되살려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언젠가 제주도의 푸른 초원 위에 이 산업유산을 기리는 작은 비석 하나 세워진다면, 소의 울음소리와 함께 아픈 역사도 영원히 기억될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