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장 전쟁과 생존의 축산
제 10장 전쟁과 생존의 축산
한국전쟁 전후 제주 지역 축산의 위기와 변화 개관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6·25 전쟁)은 제주도를 포함한 남한 전역의 축산업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한반도 최남단에 위치한 제주도는 직접적인 전장이 되지는 않았지만, 전란으로 인한 혼란과 인적·물적 피해의 여파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특히 일제강점기 말기와 광복 직후 발생한 제주4·3사건(1948~1954)과 연이어 터진 한국전쟁으로 제주 지역 사회 기반이 붕괴되면서, 소를 비롯한 가축 사육 기반도 심각한 침체를 겪었다. 전쟁 전까지 농경과 교통의 필수 동력이었던 소와 말은 전란 중에 무분별하게 도축되거나 약탈당하고, 일부는 군량과 물자 수송용으로 징발되는 등 크게 감소하였다.
전쟁 발발 직후 혼란을 틈탄 가축 약탈과 피난민 유입에 따른 식량 부족은 농가에 소중한 가축마저 생존을 위해 처분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한국전쟁 직후 남한에 남은 소의 두수는 40만 두 미만으로 급감하여, 해방 전 남북한 전체의 가축 규모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으로 축소되었다. 제주도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해방 직전까지 전통적인 방목 문화 속에서 번성하던 제주 산마(産馬)와 한우(제주흑우 포함)의 개체 수가 전쟁과 4·3사건의 직격탄을 맞고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는 지역 주민들의 생계와 농경 활동에 큰 어려움을 초래하며, 제주 축산업 전반을 위기로 몰아넣었다.
이러한 가축 부족 현상의 배경에는 전쟁 피해와 함께, 급작스러운 가축 반출과 수송으로 인한 지역 내 축산 기반 유출도 있었다. 6·25 전쟁 초기 북한군의 남침과 이후 전선 교착으로 한반도 본토에서 농경용 소의 수요가 폭증하자, 비교적 전쟁 피해가 적었던 제주도의 소와 말 일부가 본토로 긴급 수송되기도 했다. 실제로 1951년경에는 제주도에서 3천여 두에 이르는 마소(馬・牛)가 육지로 이동되어 전쟁 피해 지역의 농사지역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본토 농민들의 경작 재개를 돕는 조치였으나, 제주 입장에서는 지역 가축 자원이 빠져나가 축산 기반이 더욱 약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전쟁 기간 제주도는 피난민의 최후 보금자리 역할을 했고, 미군의 군사 기지화 등으로 섬 전체가 요새화되면서 주민들이 강제 노역과 물자 공출에 시달리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제주 전통 목축 공동체의 질서를 흔들고 지역 축산업을 쇠퇴 국면에 빠뜨렸다.
가축 약탈과 전후 축산 기반 붕괴
한국전쟁과 4·3사건 시기의 제주 축산업 붕괴는 단순한 자연 재해나 시장 논리가 아닌, 인위적인 약탈과 파괴 행위에 크게 기인했다. 일제강점기에도 제주산 가축은 수탈 대상이었는데, 특히 제주 흑우는 일제가 식량자원 확보 차원에서 공출하고 일본으로 반출한 전례가 있었다. 해방 후 혼란기와 4·3사건을 거치며 이러한 가축 수탈은 새로운 형태로 나타났다. 4·3사건 당시 무력충돌로 중산간 마을들이 소실되고 주민들이 집단 피신하거나 희생되면서, 마을공동목장에 방목되던 소와 말도 관리 주체를 잃고 방치되거나 군경에 의해 도살·소탕되었다.
증언에 따르면 4·3 토벌 작전 중 일부 군인들은 산간에 숨어든 주민들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가축을 몰살하거나 빼앗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설상가상으로, 6·25 전쟁 발발 이후 본토에서 몰려온 피난민들의 식량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제주의 가축이 무분별하게 도축되는 사례도 있었다. 주민들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산인 소를 헐값에 팔거나 잡아먹어야 했고, 심지어 전쟁터의 군량 공급을 명목으로 정부나 군이 가축 징발을 시행하면서 남은 가축마저 줄어들었다.
이 시기 가축 약탈과 산실의 한 예로, 제주도 남부의 어느 해안 마을에서는 마을공동목장 소들이 한밤중에 무장대나 폭도로 오인된 세력에 끌려가 사라진 일도 있었다는 구술이 전해진다. 또 다른 사례로, 전쟁 중 미군 부대 주둔지 근처의 주민들은 배고픈 병사들이 풀어놓은 소 한 마리를 무단으로 잡아가 군사재판에 회부될 뻔했다는 일화도 있다. 이렇듯 전시에 가축은 군사 식량과 약탈의 대상이 되어 버렸고, 제주 농가로서는 생계 수단과 농업 노동력을 한꺼번에 잃게 되는 비극을 맞았다. 1950년대 초반 제주 농촌의 실상을 묘사한 자료를 보면, “마을마다 소 울음소리가 끊기고, 밭을 갈던 소달구지가 자취를 감추었다”는 표현이 등장할 정도로 가축 부재가 심각했다. 결국 전쟁 전후 수년간 제주 지역 축산 기반은 사실상 붕괴 상태에 이르렀고, 농경사회였던 제주 주민들은 가축 없는 생업 환경에 내몰리게 되었다.
이러한 축산 기반 붕괴는 단순한 경제적 손실을 넘어 제주 공동체의 전통적인 삶의 방식에도 큰 균열을 일으켰다. 마을공동목장을 중심으로 유지되던 상호부조적 목축 질서는 전쟁기 폭력과 생존을 위한 개인주의적 행동 앞에 무너져 내렸다. 많은 마을에서 공동으로 키우던 방목 소떼는 전란 중 흩어지거나 도난당했고, 살아남은 가축을 둘러싸고 남은 주민 간 분쟁이 발생하기도 했다. 예컨대, 4·3사건 이후 재산을 거의 잃은 일부 주민이 공동목장의 소를 몰래 팔아 식량을 구하거나 유족들의 생계를 마련한 사례가 전해지는데, 이는 공동 자산인 가축에 대한 전통적인 규범을 깨뜨린 행동이었다. “소 한 마리는 온 마을의 금쪽같은 밭 갈이 연장”이라는 속담이 있었을 만큼 제주사회에서 소는 개인 재산을 넘어 공동체 자원이었지만, 극한의 궁핍 속에서는 그러한 인식마저 유지되기 어려웠던 것이다.
전후 식량난과 ‘먹기 위한 소’로의 인식 전환
전쟁 직후 제주도민이 직면한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는 극심한 식량난이었다. 농토는 황폐해지고 생산 인력도 부족하여 식량 생산이 턱없이 부족했으며, 본토로부터의 지원도 미미했다. 이런 상황에서 소에 대한 인식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전통사회에서 소와 말은 “그 고기를 먹기 위함이 아니라 노동력을 얻기 위함”으로 키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제주 농경문화 속에서 소를 잡아먹는 행위는 금기에 가까웠고, “소를 잡아먹으면 집안에 재앙이 온다”거나 “일소(日搔)를 함부로 도살하지 않는다”는 속신이 있을 정도로 소 도축은 드문 일이었다. 이는 소 한 마리가 제공하는 농업 노동력의 가치와, 불교·유교적 동물 살생 기피 문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그러나 전후 생존의 문제가 최우선 과제가 되자 이런 전통 금기도 급속히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6·25 직후 제주에서 ‘먹기 위한 소’ 개념이 확산된 배경에는 만성적 식량부족과 단백질 결핍 문제가 있었다. 공공 배급으로 지급되는 미곡이나 잡곡만으로는 영양을 충당하기 어려웠고, 바다를 끼고 있음에도 제주 어획물 생산은 전쟁 중 위축되어 어민들도 어려움을 겪었다. 이때 농가들이 눈을 돌린 것이 가축의 식육 자원으로서의 가치였다. 평소 같으면 논밭을 갈고 물레를 돌릴 소였지만, 굶주린 가족을 살리기 위해 울며 겨자먹기로 도축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특히 부녀자와 아이들의 영양실조가 심각하던 상황에서, “굶어 죽이느니 차라리 잡아먹자”는 절박함이 퍼지면서 소 도축이 급증했다는 구술 증언도 있다. 전쟁 전에 금기시되던 “소잡아 장만하는 국” (일명 소천국)을 끓이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졌고, 제주 방언으로 “쇠먹었다”는 말(소고기를 먹었다는 뜻)이 더 이상 부자가 아닌 평범한 집안에도 들리게 되었다고 한다.
정부도 이러한 변화를 어느 정도 용인하거나 조장했다. 1950년대 중반에는 미군 원조 물자로 도축 장비와 통조림 공장이 도입되어, 가축을 식육 가공품으로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는 가축을 노동력으로 보존하기보다는 단백질 공급원으로 활용하려는 발상 전환이었다. 또한 제주도에서는 전후 관광산업의 태동과 함께 육고기 음식 문화가 부상하였다. 전쟁 직후 미군 부대가 주둔하면서 소고기 스튜나 스테이크 같은 서양식 조리법이 전파되어, 전통적으로 쇠고기 소비가 적던 제주 주민들에게 새로운 소비 형태를 보여주기도 했다. 1950년대 후반 제주읍의 재래시장인 동문시장 등에 소고기 국밥을 파는 식당들이 하나둘 생겨났고, 이것이 훗날 제주 고기국수나 몸국(돼지고기 국) 등의 향토 음식 발전에도 영향을 주었다는 평가가 있다.
물론 이러한 ‘식육 중심’ 축산으로의 급격한 전환에는 심각한 부작용도 있었다. 가축 번식과 후대를 고려하지 않은 무분별한 도축으로 번식용 암소와 종우(씨수소)까지 줄어드는 바람에, 한때는 “제주섬에 송아지 울음이 끊겼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가축 자원이 고갈 위기에 처했다. 1950년대 중반 통계에 따르면, 도내 송아지 생산 마릿수가 전쟁 전 대비 절반 이하로 뚝 떨어졌고, 젖을 짤 어미소도 부족해 아이들 영양 공급에 차질이 빚어졌다. 이렇듯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지만, 단기간에 축산업의 지속 가능성을 희생한 대가도 혹독했던 셈이다. 다행히도 곧이어 정부와 국제 원조기구의 지원으로 가축 복원 사업이 시작되면서 이 추세는 서서히 잡혀갔다.
정부의 축산 복구 정책과 제주에서의 전개
전쟁이 휴전으로 마무리된 1953년, 대한민국 정부는 피폐해진 농축산업을 일으키고 식량난을 해소하기 위해 종합적인 복구 계획을 수립하였다. 제1차 축산부흥 5개년계획(1953~1957)이 바로 그것으로, 가축 증식을 국가 차원의 의제로 설정하였다. 이 계획의 일환으로 정부는 긴급 조치로 「가축(축우)도살 제한법」을 공포하여 한우 등 소의 도살을 엄격히 통제했다.
이는 남은 가축 마저 식용으로 소진되는 것을 막고, 향후 농경과 번식을 위한 씨가축을 지키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해당 법령에 따라 임신한 암소나 송아지 있는 어미소, 일정 연령 이하의 어린 가축은 도축이 금지되었고, 부득이 도축할 때는 관청의 허가를 받도록 했다. 제주도에서도 이 법이 즉각 시행되어, 경찰이 가축 거래 시장과 도살장을 단속하고 불법 도축 시 강력한 처벌을 가했다. 실제 1954년 제주읍에서 허가 없이 병든 소를 잡은 농민이 입건되어 주변 농가에 큰 경각심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강제적인 보호 정책 덕분에 1950년대 후반에 이르러 국내 한우 두수는 급속히 회복되어, 1959년경에는 남한 한우 마릿수가 102만 두에 달해 전쟁 전 수준을 뛰어넘었다고 한다. 제주도의 경우도 1950년대 말에 한우(제주 재래우 포함) 두수가 수천 두 단위에서 다시 수만 두 수준으로 증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때 초토화되었던 초지가 재차 소 울음으로 메워지며, “잃었던 마소를 도로 찾았다”는 제주 농민들의 안도 섞인 목소리가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종축(種畜) 장려 정책도 본격화되었다. 정부는 각 도에 종축장을 설치하거나 기존 목장을 국유화하여 우량 가축을 육성·보급하는 정책을 펼쳤다. 제주도에는 1957년 국비로 국립 제주도 송당목장이 조성되었는데, 이는 전후 제주 축산 정책의 획기적인 전기가 되었다.
특히 주한 미군사령관을 지낸 밴 플리트(Van Fleet) 장군이 자신의 미국 플로리다 농장에서 키우던 우수 품종의 소를 제주에 기증한 일화가 유명하다. 1957년 8월 미국의 제시라이크스 호 화물선 편으로 플리트 장군 소유의 순종 브라만 소 168마리가 부산항에 도착했고, 같은 해 12월에는 미국산 산타거트루디스 등 육우 200마리가 추가로 들여와 송당목장에 입식되었다.
이들 외래종 황소들은 제주 재래 한우 암소와 교배되어 새로운 잡종 송아지를 생산하는 데 활용되었다. 그 결과 탄생한 ‘코브라’(한우×브라만 교잡), ‘코산타’(한우×산타거트루디스 교잡) 등의 신품종 송아지들은 고기 생산성이 높고 성장 속도가 빨라 농가 소득 증대에 크게 기여하였다.
당시 제주 축산 관계자의 증언에 따르면 “브라만종과 한우 교잡 송아지가 인기여서 육지 비육업자들이 와서 거의 다 사 갔고, 농가 수입도 높아져 1950년대 말~60년대 초가 제주 한우산업의 전성기였다”고 회고한다. 이는 제주 소가 더 이상 밭갈이용 일소(役牛)가 아닌, 판매를 통한 현금 수입원으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정부의 종축 정책과 한우 개량사업이 제주에서 가시적 성과를 올린 것이다.
한편 한우 개량 정책도 1960년대를 전후하여 추진되었다. 1960년대에 들어 정부는 전국적으로 한우의 생산성 향상을 목표로 가축 등록제를 도입하고 인공수정 기술을 보급하였다. 1962년에는 한국종축개량협회가 설립되어 우량 한우의 선발과 혈통 등록을 체계화했으며, 각지에서 한우 품평회(챔피언 대회)를 개최하여 개량 의욕을 높였다.
이러한 흐름 속에 역용(役用) 위주였던 한우를 육용(肉用) 위주로 바꾸는 정책 방향이 분명해졌다. 제주도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과거 제주 특유의 왜소하지만 강건한 흑우 중심이던 한우 사육이 차츰 육지 품종과의 교잡종으로 대체되어 갔다.
제주도 송당목장에서 생산된 개선된 송아지들은 도내 농가에 분양되어 사육되었고, 일부는 본토로 반출되어 전국 한우 개량에도 기여하였다. 1950년대 말 제주에서 사육되던 흑우는 약 1만여 두 수준으로 회복되었으나, 이후 정부의 개량 정책에 따라 교잡이 진행되면서 순수 흑우 개체수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토종 품종 보존의 개념이 희박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체격이 작고 생산성이 낮은 제주 재래우(흑우)에 순종 한우 또는 외래 육우의 피를 섞어 키우는 것이 장려되었다.
이는 제주 전통 소 품종의 몰락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농가 수입 향상과 도축용 고급육 생산이라는 경제적 성과를 낳았다.
이렇게 정부 주도의 축산 부흥 정책이 전개되면서 제주도의 축산업은 서서히 전란의 상흔에서 벗어나 안정을 찾아갔다. 1957년 UN한국재건단(UNKRA)의 지원으로 제주에 현대식 도축장과 냉장시설이 들어서 유통 인프라도 개선되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1960년대 초 제주도의 소 사육 두수는 전쟁 직후보다 몇 배 증가하였고, 돼지·면양 등 기타 가축도 원조 및 정부 보급으로 마릿수가 크게 늘었다고 한다. 이러한 정책 효과로 1950년대 후반~1960년대에 제주 축산업은 부업적·자급적 형태에서 점차 전업적·상업적 형태로 전환되어 갔다.
예컨대, 예전에는 논밭을 가진 농가라면 한 마리쯤 키우던 소를 이제는 여러 마리 사육하여 일부는 시장에 팔고 일부는 비육하는 소위 ‘축산농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는 제주 사회경제 구조의 변화와 맞물려 진행된 것으로, 이후 1960년대 말 감귤 산업의 부상과 함께 제주 농업의 상업화·전문화 추세를 보여주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방목 전통과 생존 중심 목축 문화의 충돌
제주도에는 고려시대 이래 이어져 온 방목 중심의 공동목장 문화가 있다. 마을공동목장은 마을 주민들이 공유하는 초지에서 소와 말을 함께 풀어 기르는 공동체적 자산으로서, 제주 목축 문화의 상징이었다. 주민들은 “테우리”라 불리는 방목 관리자와 자체 규약을 통해 목장을 운영하며, 가축의 방목 시기, 조합원별 방목 두수, 송아지 분배 등을 결정했다. 또한 “수눌음”이라는 상부상조의 미덕 아래, 소가 없는 가구에는 있는 집에서 소를 빌려 경작을 돕고 그 대가로 송아지를 나누는 맴쇠(갈음쇠) 풍습도 널리 행해졌다. 봄부터 가을까지 몇 집이 돌아가며 한데 모아 소를 먹이는 둔쇠 제도도 있어, 일손을 절약하며 공동 방목의 효과를 높였다. 요컨대, 전통 제주 사회에서 목축은 단순히 개인 경제활동이 아니라 공동체 생활의 일부였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생계 방식이었다.
그러나 4·3사건과 한국전쟁의 격동 속에서 이러한 공동체 기반 목축 질서는 심대한 충돌과 변화를 겪게 된다. 앞서 서술했듯 4·3사건은 중산간 마을 공동체 자체를 파괴하거나 와해시켰다. 주민들의 학살과 이산으로 공동목장을 관리하던 조직이 붕괴되고, 살아남은 이들도 서로를 불신하게 되면서 공동 작업과 분배의 전통이 흔들렸다. 1950년대 제주 사회는 표면적으로는 공동목장이 존속하였으나, 내적으로는 전과 같지 않았다. 전쟁 전까지만 해도 공동목장에서 방목한 소를 함부로 팔거나 잡으면 마을에서 큰 벌을 받았지만, 전후에는 개인 형편에 따라 몰래 가축을 처분하는 일이 드물지 않게 발생했다. 공동체 전체의 생존보다는 각 가족의 생존이 더 절박한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훗날 한 학자는 “공동체의 비극”이라고 표현했는데, 전쟁과 국가폭력, 근대화 과정을 거치며 외부 압력에 의해 공동체 협력이 붕괴된 한국 커먼즈(Commons)의 전형적인 사례로 제주 마을공동목장의 변질을 들기도 한다.
전후 제주에서 생존 중심의 목축 문화가 등장한 구체적인 양상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공동목장의 소유권과 이용권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예전에는 명목상 마을 공동 소유였던 목장 토지와 가축이었지만, 1950년대 후반 들어 일부 주민들이 “내 소는 내가 마음대로 한다”며 독자적으로 가축을 매매하거나 방목지를 무단 경작하는 사례가 늘었다. 이는 공동체 규약에 어긋나는 행위였으나, 법적으로 마땅한 제재 수단이 없었다. 1960년대 초 군사정부가 시행한 지방자치 임시조치법과 임야소유권 이전등기특별법 등으로 인해 마을 공동체의 토지 소유가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면서, 공동목장의 법적 지위가 불안정해진 점도 혼란을 부추겼다. 결국 일부 목장은 조합원 간 분쟁 끝에 공동 경영을 포기하고 구획을 나누어 각자 사육하는 방식으로 변질되었다.
둘째, 방목 방식의 변화이다.
전통적으로 한라산 중산간 초지에 풀어놓고 키우던 방식에서, 점차 외양간 사육과 제한 방목이 늘어났다. 1950년대 후반부터 정부가 수입한 호밀, 클로버 종자를 보급하면서 일정 구역에 목초를 파종하고 울타리를 두르는 현대식 목장 기법이 도입되었는데, 이는 자연방목과 충돌을 일으켰다. 일부 공동목장은 정부 시범사업에 따라 울타리를 설치했지만, 이에 반발한 주민들이 울타리를 끊어버리는 소동도 벌어졌다. 방목지에 울타리를 두르면 전처럼 자유롭게 소를 방목하지 못하고 수용 두수도 제한되기 때문에, 가축을 많이 가진 조합원과 적게 가진 조합원 사이에 이해 대립이 생긴 것이다. 또한 비료와 사료곡물의 사용이 확대되면서, 부유한 농가는 소를 우리에 가둬놓고 사료를 집중 급여하여 빨리 살찌우는 비육 사육을 시도하게 되었는데, 이는 전통 공동목장 방식과 양립하기 어려웠다.
결국 점차 형편이 되는 집은 ‘내 가축은 내가 먹인다’는 식으로 독립 경영을 선호하고, 형편이 어려운 집만 공동목장에 의존하는 양극화가 진행되었다.
셋째, 전통 규범과의 충돌이다.
과거 제주에는 “마소는 슬플 때 울고 사람은 배고플 때 운다”는 속담이 있었다. 이는 가축도 사람과 같이 감정을 지닌 생명체로 여기며 함부로 해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전쟁 후 많은 주민들이 가축을 재산 혹은 상품으로 인식하게 되면서, 이러한 정서적 유대도 약해졌다. 생계가 걸린 상황에서 가축은 더 이상 가족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아니라 언제든 현금화하거나 음식화할 수 있는 자산이 된 것이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농가에서 소가 병들면 정성껏 민간 요법으로 치료했지만, 1960년대 들어서는 가축 시장에 바로 내다 파는 경우가 흔해졌다. 또 공동 작업의 관행도 사라져, 소 방목 터를 돌보는 일이나 여물 마련도 각자도생으로 변했다. 이는 제주 목축 문화의 공동체적 성격이 약화되고, 시장 경제 논리에 편입되는 과정의 단면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방목 전통과 생존 중심 목축의 충돌은 1960년대 이후 제주 축산업의 구조 변화로 귀결되었다. 1960년대 중·후반 두 차례 발생한 ‘소값 파동’(한우 가격 폭락 사태)은 그 변화를 결정적으로 가속화하였다. 정부의 수입 개방과 과잉 공급 등의 영향으로 1960년대 중반 소고기 값이 급락하자, 소를 1~2마리 키우던 제주 농가들이 대거 축산을 포기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는 공동목장 위주의 전통 목축산업에 괴멸적인 타격을 주었고, 소 몇 마리 나누어 키우던 공동 방목 체제가 무너지고 말았다. 그 결과 제주 마을공동목장은 143곳(일제시대 기준)에서 1970년대에 절반 이하로 줄었고, 남은 곳들도 점차 유지가 어려워져 갔다. 공동목장이 사라진 자리에 들어선 것은 기업형 사육장이나 새로운 토지 이용(감귤 과수원, 골프장 개발 등)이었다. 이는 전후 제주 축산업이 전통 사회의 공동목장 기반에서 현대적 산업경제 논리에 기반한 개별 경영으로 구조 전환했음을 의미한다.
전후 축산업 구조 전환의 영향과 의미
한국전쟁 전후의 혼란기와 그 극복 과정에서, 제주도를 비롯한 남한의 축산업은 크고 작은 구조적 전환을 겪었다.
첫째는 가축 사육 목적의 변화이다.
농경사회의 노동력 저장고였던 소는 이제 식량과 상품 가치를 지닌 고기 생산 동물로 재인식되었다. 이는 단순한 인식 변화에 그치지 않고, 정책과 산업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정부 통계에 따르면 1960년대 이후 한우 사육 마릿수는 증감을 거듭하면서도 전반적으로 증가세를 이어갔고, 특히 1970년대 이후에는 한우고기가 돼지고기보다도 비싼 귀한 식품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제주 한우 또한 이러한 ‘고급 육류’로서의 가치가 부각되어, 1970년대에 접어들면 제주산 비육우를 서울 등지로 출하하는 전용 수송선과 육운로가 마련된다.
즉, 전쟁 전의 “먹이지 않고 부려쓰는 소”에서 전쟁 후 “먹기 위해 기르는 소”로의 전환은 궁극적으로 축산업의 상업화·산업화를 촉진한 셈이다.
둘째는 소유·경영 형태의 변화이다.
전통적인 마을 공동 소유, 공동 방목은 해체되고, 대신 개별 농가 단위 사육과 기업형 목장 경영이 등장했다. 제주도의 경우 1980년대 이후 대규모 관광 개발과 맞물려 여러 마을공동목장이 외부 자본에 매각되면서 대기업 소유의 목장이나 골프장 부지로 바뀌었다. 2020년대 현재 제주에 남은 마을공동목장은 70여 곳에 불과하며, 그마저 상당수가 임대를 주거나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는 1950년대의 격변이 촉발한 공동체 해체의 장기적 후유증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전쟁 후 육성된 송당목장 등 국공립 목장과 그에서 파생된 기술들은 훗날 민간 기업 목장의 발달로 이어졌다. 1960년대 후반 이후 제주에 한진그룹, 농협 등에서 운영하는 대규모 목장 사업이 시도되었는데, 이는 국가 주도의 축산 부흥 정책에서 민간 주도의 산업육성 정책으로 옮아간 단계였다. 이러한 변화는 제주 축산업을 전근대 농촌경제의 부속물에서 현대 산업경제의 한 축으로 편입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셋째는 품종과 생물자원의 변화이다.
전후 한우 개량 정책으로 전국적으로 재래 한우의 체격과 육질이 향상되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그 이면에는 제주흑우와 같이 토종 유전자의 위축 문제가 발생했다. 제주흑우는 1980년대에 한때 개체수가 300두 남짓까지 떨어져 멸종 위기에 처했고, 정부와 학계가 뒤늦게 보존 사업에 나서 1993년부터 증식을 시작해야 했다. 이는 전후 개발 논리 속에서 경제성이 낮은 토종 가축이 도태된 사례로, 전쟁과 빈곤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토착 자원의 중요성을 환기시켜준다. 현재 제주흑우는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그 유전자원을 활용한 부가가치 창출(예컨대 흑한우 브랜드육 개발)이 진행 중인데, 역설적으로 이러한 노력은 전쟁 후 무분별한 개량과 교잡에 대한 반성적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넷째는 지역 사회문화에 미친 영향이다.
전쟁 전후의 축산 구조 전환은 제주 사람들의 생활양식과 공동체 의식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가령, 예전에는 마을 단위로 가축을 돌보며 자연과 인간이 공생하는 전통 지식이 축적되었지만, 공동체 해체 이후 그 지식과 관행이 상당 부분 단절되었다. 대신 근대적 수의학, 사료학 등 과학 지식이 도입되어 생산성은 향상되었으나, 전통생태지식(TEK)의 상실을 아쉬워하는 목소리도 있다.
또한 목축업의 상업화로 인해 농촌 사회의 계층 분화도 촉진되었다. 전쟁 직후 모두가 가난했을 때는 상부상조했지만, 1960년대 이후 축산으로 부를 축적한 농가와 그렇지 못한 농가 사이에 경제적 격차가 벌어졌다. 이는 마을 공동체의 단합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제주 사회가 간직한 환경 공동체적 유산(예: 곶자왈 보전 운동 등)에는 과거 마을공동목장 문화의 기억과 지혜가 밑바탕에 있다고 평가되며, 이를 현대에 되살려 지속가능한 발전에 활용하자는 제언도 이루어지고 있다.
전쟁이 남긴 교훈과 축산의 미래
제주도를 포함한 남한의 축산업은 한국전쟁이라는 격동의 시기를 거치며 “산업으로서의 축산”으로 재편되었다. 가축 부족의 위기 속에서 부득이하게 시작된 식육 중심 축산과 정부의 강력한 증식·개량 정책은 단기간에 성과를 내어 전후 식량난 극복과 경제 재건에 기여했다. 실제로 1957년까지 남한의 가축 수는 광복 전 한반도 전체의 수준을 회복했고, 1958년 이후 축산은 부업이 아닌 유축농업(有畜農業)의 형태로 농촌 경제의 한 축을 형성하게 되었다. 제주 한우 또한 이 시기 개량과 집중 육성을 통해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고, 훗날 “청정 제주 한우”라는 브랜드로 발전하는 초석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 이면에는 공동체 해체와 전통의 상실이라는 대가가 따랐다. 전쟁과 분단, 근대화의 압력 속에서 제주 마을공동목장은 대부분 해체되었고, 그토록 오랜 세월 자연과 호흡을 같이했던 목축경관과 삶의 방식도 자취를 많이 감추었다. 오늘날 제주 목장 문화의 위기는 단순한 산업 구조조정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적 커먼즈가 파괴된 역사와 맞닿아 있다.
그런 점에서 1950년대 제주 축산사가 주는 교훈은, 인위적 충격에 대한 농촌 공동체의 회복탄력성과 전통 지식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전후 제주 사람들은 폐허 속에서도 가축을 증식시키고 새로운 품종을 받아들이는 놀라운 적응력을 보였지만, 동시에 그 과정에서 잃은 것도 있었던 것이다.
21세기 들어 제주도는 친환경 동물복지 축산을 지향하며 다시 한 번 전환점을 모색하고 있다. 이는 어떤 면에서 “지속가능한 생존의 축산”을 향한 새로운 도전이라 할 수 있다.
기후위기와 세계화의 시대에, 제주가 옛 공동목장의 생태적 지혜와 현대 과학기술을 접목하여 사람과 자연이 함께 번영하는 축산 모델을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은 전쟁과 궁핍의 시대를 이겨낸 제주 축산의 역사가 궁극적으로 완성되는 순간일 것이다. 과거 전쟁의 폐허 위에서 싹튼 변화의 경험을 발판 삼아, 제주 축산업이 생명 존중과 공동체적 운영이라는 두 축을 회복하기를 기대해 본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남아 오늘의 기반을 일궈낸 제주 축산인들의 역사는, 앞으로의 축산 정책과 지역 발전에 소중한 이정표로 남을 것이다.
참고문헌 및 자료: 농림부 전후 축산 복구 관련 문서, 통계청 「통계연보」, 제주특별자치도지, 제주4·3평화재단 구술자료, 윤순진 (2006) 「제주도 마을공동목장의 해체과정과 사회·생태적 함의」, 좌동철 (2023) 「제주 목장 수난사」, KBS 제주 취재파일 등. 또한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및 제주학연구센터의 관련 연구를 참조하였다. 필요한 경우 본문 각주에 표시된 자료 출처를 통해 상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