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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한우에 대한 황교익의 오해

거시 생태 : 야생 동물과 가축 그중 소에 대해서 

한국역사연구회에 김동진 박사가 2014년 6월 30일 정리한 야생 동물과 가축중에서 소에 관한 내용만 다시 정리해 봤다. 

농사를 짓는데 필수적인지라 언제나 우리 가까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는 우직한 소는 세종대 무렵 3만 마리 전후에 지나지 않았다. 20세기 초에 이르러 110만 마리 가량으로 헤아려질 수 있었다. 전래의 한국 소들이 세조대 오키나와에서 도입된 물소의 후손들과 교배되면서 이전보다 덩치는 대략 2배쯤 커졌으며, 힘은 2배쯤 세졌고, 논과 밭을 가는 속도는 2∼4배쯤 빨라진 능력을 갖도록 개량되었다. 노동의 효율성 측면에서 15세기 기준으로 3만 우력(牛力 : 서양은 말의 힘을 기준으로 馬力이라 하였다)의 조선은 20세기 초에 이르러 220만∼440만 우력으로 농사짓게 되었다. 우력의 대폭발이었다.

소는 조선시기에 들어 그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한반도에서 소를 가축으로 사용한 것은 지금부터 4,000년 전의 유적에서 확인되고,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통해 소가 농사에 사용되거나 수레를 끌었으며, 청우와 같은 푸른색 소가 있었음은 잘 알려져 있다. 고려 성종대에 소의 사용법을 월령에 명시한 사실이 나타나 있고, 송나라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는 고려에서 소를 잘 키우며, 그 수가 많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비록 신라촌락문서를 통해 4개 촌락, 호수 43호, 인구 444명과 582결 95부 2속의 토지를 가진 곳에서 말 61두, 소 53두를 길렀다는 기록 이외에서 조선 이전에 사육하던 소와 말의 숫자를 추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지만 고대에서 고려에 이르는 시기에 다소의 넘나듬이 있었겠지만, 조선 초기의 상황에서 아주 크게(5배 이상)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소의 숫자를 어느 정도 추정할 만한 단서는 15세기 전반의 기록을 통해서이다. 세종 13년(1431) 명에서 1만 마리의 소를 무역할 것을 요구한 바 있다. 당시 세종은 우리나라 호구에서 소를 가진 것은 10분의 1 가량이었고, 그들도 대부분 한 마리씩을 사육했다고 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의 호구가 23만여 호인 점에서 15세기 초 조선에서 사육되는 소는 대략 2∼3만 마리 가량으로 추정할 수 있다.


조선 전기에 지속된 농우 중시 정책으로 소의 사육 두수는 급격히 늘어났다. 17세기 이후 말과 소의 사육이 널리 보급되었다. 북부 지역과 제주도에서 말을 논과 밭의 갈이용으로 사용하는 예가 있었지만, 전국적으로 대체로 소가 중시되었다. 특히 함경도ㆍ강원도ㆍ평안도에서는 농경지나 인구와 비교할 때 많은 소를 길렀는데, 영조대 비변사등록에는 함경도에서는 대부분 농가당 수십 마리 씩 길렀다고 한다.


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등의 연대기 기록을 살피면 현종 1년(1660)에는 소가 많이 번식되어 도리어 백성들이 폐해를 입을 정도라는 주장이 있었으며, 이후 창궐한 우역으로 전국에서 74,424마리(1663∼1671)의 소가 폐사한 것으로 기록될 정도였다. 소의 사육 두수가 늘어나면서 우역과 같은 가축 전염병이 주기적으로 만연하면서 토착화하였지만, 이후에도 소의 사육두수는 더욱 늘어났다. 20세기 초에 전국에서 사육된 소는 110만 마리 가량이었고, 함경도에서만 16만 마리 가량이었다(한국토지농산조사보고, 1906). 1930년 조선을 방문한 헤르만 라우텐자흐는 소를 “대개의 농가에서는 적어도 한 마리를 기르고 있다.”고 하였다.


국초에 3만여 마리로 추산되던 소의 사육 두수는 20세기 초에 이르러 110여 만 마리로 늘었다. 권태억ㆍ신용하가 추정한 연구를 원용하면 국초로부터 20세기 초까지 인구는 4∼5배가량 늘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국초에 비해 30∼40배에 이르는 소의 사육 두수 증가에 크게 미치지 못하는 수치이다. 따라서 조선 왕조의 500년 동안 소는 부와 권력의 상징에서 보편적 농업의 동반자가 되었다.


물론 20세기에도 소의 사육두수 증가는 계속되었다. 1933년에는 소가 1,663,136마리, 말이 52,924마리였다(조선총독부통계요람, 1935). 해방 이후 남한 지역에서 소의 사육은 더욱 늘었는데 1960년 101만 마리(소), 1980년 139만 마리(이후 한우), 1990년 161만 마리, 2010년 268만 마리 가량이 사육되었다(KOSIS). 20세기로 넘어서 100만 여 마리를 돌파한 소의 사육두수는 20세기 말까지 3∼5배가량 크게 늘어났다. 그렇지만 20세기에 이르러 소의 증가율과 인구 증가율에 별다른 차이가 없다. 이점에서 조선시대에 소 사육의 증가는 역사적으로 획기적인 것이며, 큰 의미를 갖는 현상이었다.


한반도에서 전통적으로 사육되던 말은 과하마로 불리던 품종이었고, 고대시기에 천마 혹은 한혈마로 불리는 아랍 계통의 말이 도입되었지만, 품종에 큰 변화가 있었던 것은 몽골과 강화한 이후 제주도에 목마장을 설치하여 몽골에서 도입한 조랑말을 사육하기 시작한 데 있으며, 이후 육종을 통해 품종 개량을 추구했으나 근본적인 변화는 확인하기 어렵다.


소의 경우도 지속적인 육종을 통한 개량과 몽골이나 중국 등지로부터 외래종이 도입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품종에서 극적인 개량이 이루어진 시기는 조선시대인 15∼19세기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소 역시 다양성을 기본적 특성으로 하고 있었음에도, 눈에 띌 정도로 중국이나 일본의 소와 외형상 그 형태를 달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조선시대를 넘어 최근까지 그들이 한국의 소를 수입하기 위해 애쓰는 원인이 되었다.


즉, 조선 시대에 이루어진 소의 품종 개량 사실과 결과는 1903년 대한제국을 방문한 러시아 학자 바츨라프 세로셰프스키의 증언을 통해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즉, 세로셰프스키는


한국의 소는 극동에서 제일로 치는 우량종이다. …한국의 소는 키가 146∼150cm에 이르고, 무게는 약 20푸드(330kg)까지 나간다. 건강하고 활동성이 큰 것이 특징으로, 달구지에 40푸드(660kg) 정도의 짐도 쉽게 나를 수 있으며, 산을 넘거나 물살 센 강을 건널 때는 그 어떤 가축과도 바꿀 수 없는 중요한 존재다. 말들이 쉽게 넘어지거나 발을 헛디디는 곳에서조차 소들은 쉽게 장애물을 피해 나간다. 발이 빠른 한국소들은 그 속도나, 장시간 사람을 태우고 갈 수 있는 능력에 있어 말에 뒤지지 않는다. … 한국소는 물소와 여러 차례 교배된 특징이 확실히 나타난다. 한국 소의 큰 키와 강인함, 큰 활동성은 바로 거기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라고 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19세기 후반∼20세기 초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사실이었다. 1885년 조선을 방문한 러시아의 다데슈칼리안 공후 역시 “조선산 황소와 암소들은 힘과 인내력이 뛰어난 데다 몸집도 세상에서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라고 하였다.



한국의 소가 갖는 이러한 특별한 외양과 능력은 오키나와에서 물소를 도입하여 교배한 결과로 보이며, 이에 관한 사실은 실록의 기사를 추적함으로써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은 국초부터 활을 만드는 데 가장 긴요한 재료로서 물소의 뿔을 생산하는 데 관심이 있었을 뿐 만 아니라 조선에서 기르고 있던 소에 비해 강한 힘과 빠른 속도를 이용하여 논과 밭을 가는데 사용하기 위해 노력했다.


세종조에 실록에는 물소는 힘이 세고, 밭을 가는 것이 보통 소의 두 배에 이를 정도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물소는 털이 얇고 추위를 견디지 못하는 특성이 있었다. 세종은 이러한 난점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으로 서울에서는 겨울철에 우리를 지어 잘 보살피고, 따뜻한 봄이 되면 살곶이에 내보내 길렀다.


조선은 국초부터 명의 남부에서 물소를 구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세조 7년(1461)에 이르러서야 오키나와에서 올린 암수 2마리의 물소를 도입할 수 있었다. 10월에 도착한 물소는 우선 경상도 웅천에서 겨울을 보내고, 서울로 가져와 창덕궁의 후원에서 사복시 관원들이 돌아가며 길렀다. 조선은 제반 의서에서 물소 기르는 법을 조사하고, 이를 의생 4명이 배우게 하는 등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이후 오키나와에서 들여온 물소는 잘 번식되었는데, 17년이 지난 성종 10년(1479)에 이르면 70여 마리로 불어났고, 이후에도 번식이 잘 되어 물소를 기르는 데 겪는 백성들의 고초를 줄이기 위한 다양한 방안이 논의될 정도였다. 그러자 국가에서는 대신들에게 물소 암수 한 마리씩을 나누어 주고 기르게 하였고, 그러고도 남는 소들은 여러 도의 군현에 나누어주고 기르게 하였다. 성종 24년(1493)에는 이전까지 방목하던 물소를 아침ㆍ저녁으로 훈련시켜 길들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크게 번식된 물소를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고 농사일에 쓰려는 시도가 본격화하였다. 이런 추세 속에서 물소에 대한 민간의 관심은 중국의 남부 지역까지 진출하여 물소를 약탈하는 일이 빈번해질 정도였다. 조선과 중국과의 외교적 분쟁이 발생할 것이 우려될 정도였다.


성종 25년(1494)에는 국가에서《안기집(安驥集)》에 실린《수우경(水牛經)》을 번역한 후 중외에 널리 반포하여 여항의 부로들도 물소 키우는 법을 모두 알게 하였다. 이는 물소 사육이 보편화하는 가운데 당시에 이를 더욱 촉진하는 정책이 본격화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몇 년 후 연산군은 기르는 제도 관찰사들에게 지시하는 가운데 물소가 많을 정도로 증가하였지만, 아직 밭갈이에 익숙해지지 못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1497).


연산군 8년(1502)에는 수효가 늘어난 물소를 각 고을에 나누어 주고 기르게 하였고, 특히 경상도와 전라도에서는 방목을 시작하였다. 각관에서 기르던 물소가 다시 크게 증식되자 중종 4년(1509)에는 병조의 책임 하에 각 관에서 기르던 물소를 백성들에게 나누어주고 기르게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중종 5년에 유순정은 인천의 농장에서 밭을 갈게 하였는데, 그 효과가 일반 소의 4배가량에 이르렀다고 했으며, 김해부사 이손은 물소로 밭을 가니 그 성과가 2배에 달했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이후 병자호란에서 패배한 조선은 청에 대해 세폐로서 물소 뿔 200부를 바쳤다. 물소 뿔이 왜관을 통한 교역으로 조달되었을 수 있겠지만, 조선에서도 자체적으로 상당한 수량의 물소가 사육되고 있었다. 민간에서 사육된 물소는 이전부터 사육되던 토종의 한우들과 교배가 이루어지면서 동아시아에서 독보적인 특성을 갖는 한우로 탄생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조선시대에 농본 혹은 권농 정책을 시행했으며, 이 과정 소를 중시하였다는 점은 밝혀졌다. 우금정책, 혹은 지역에 따른 우경 방식과 쟁기 날의 형태에 대한 설명은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그러나 아직 15세기와 19세기에 사육된 소의 마리 수에 대해 깊이 고민한 연구는 찾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한반도에 범과 표범이 오랫동안 살았고, 그로 인해 호환도 빈번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이 부분에 있어서도 한반도에 살았던 범과 표범이 어느 시기에 몇 마리 가량이 살았는지, 그리고 매년 몇 마리를 잡았는지에 대해 밝히려 하지 않았다. 비록 오랫동안 고구려 무용총의 수렵도를 국사 교과서의 표지를 장식했지만, 문화의 정수, 즉 엣센스를 밝히는 데 초점을 둔 그 동안의 연구 경향으로 인해 수치의 무게를 헤아린 적이 없다.


여기서부터 김동진박사는 계속해서 물소와 조선우의 교배가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의 다른 책 조선의 생태 환경사에서도 또다른 책 조선 소고기맛에 빠지다 에서도 같은 주장을 하는데 물소는 babulus속이고 소는 bos속입니다

종만 다른 말,당나귀와 사자,호랑이끼리 교배한 노새, 라이거는 생식기능이 없다.. 물소와 소는 속까지 다르니 아예 혼종이 나올 수 없다. 필자도 김동진 박사에게 조선의 생태 환경사를 읽고 아닌 것 같다라고 메일을 보냈는데 다음에 조선 소고기맛에 빠지다에도 같은 주장이 있었다, 필자가 축산대학 축신이지만 축산학과는 아니고 사실 학부때 공부를 안해서 처음 김동진 박사의 물소 교배설에 놀라서 숙성 고기의 가치를 높이는 기술에 인용했다. 출판사 편집장이 축산학과 출신이라 의문을 제기해 주어서 전공 교수에게 확인해 보니 아주 희박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물소가 수입된 기록은 조선시대부터 분명 있지만 그 물소와 조선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식품공학자 최낙언 선생과 식품 전문 PD 서득현 PD 의 편식방을 보면서 황교익과 서피디와의 제주도 한우 일화에서 황교익이 제주 한우는 물소 피가 흐른다고 했다는 일화를 들었다.

아마 황교익은 김동진 박사의 이 주장을 보고 제주도의 약간 다른 한우 (지금은 있는지 모르겠지만 )를 보고 물소 피가 흐른다고 했다. 그래서 제주 한우가 맛없는 거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이 옅은 지식은 제주 한우의 명예를 실추 시킬 수 있어서 설명을 하기로 하자.

제주도에 육우가 1958년부터 도입된 건 사실이다.

아마 1958년부터 한우라는 말이 처음 사용되는 것 같은데 도입된 육우와 차별화하기 위해서 였다. 

1973년 7월 4일자 매일 경제 신문에 기사를 보면 제주도에 이시돌 목장, 한진 목장등에서 수입 육우를 사육했다. 품종은 앵거스, 헤어포드, 브라만, 싼타, 소트호온이었다고 한다. 


유명한 육우들은 다 수입해서 사육했었다.


① 쇼트혼종(Shorthorn): 영국 잉글랜드 원산으로, 털빛깔은 붉은빛을 띤 갈색과 흰색이다. 몸은 넓고 통통하며, 특히 뒷몸이 충실하다. 자라는 속도가 빠르며, 살도 빨리 찌울 수 있고, 값이 비싼 부분의 고기량이 많다.


② 헤리퍼드종(Hereford): 영국 원산으로, 털빛깔은 얼굴, 등, 네 다리, 가슴이 흰색이며 다른 곳은 붉은빛을 띤 갈색이다. 고기소로서 가장 많이 사육되고 있으며, 방목에 적합하고, 체질이 튼튼하다. 


③ 애버딘 앵거스종(Aberdeen Angus): 영국 스코틀랜드 원산으로, 털빛깔은 모두 검은색이며, 뿔이 없고 성질이 사납다. 몸무게는 약 800㎏이다. 네 다리가 짧은 전형적인 고기소이다. 


④ 브라만종(Braman): 인도가 원산지이나 미국에서 고기소로 개량되었으며, 견봉(肩峰)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더위에 잘 견디며, 진드기·파리의 피해가 적다. 


⑤ 산타 거트루디스종(Santa Gertrudis): 미국에서 브라만종과 쇼트혼종을 교배하여 개량한 품종으로, 털빛깔은 붉은빛을 띤 갈색이다. 


⑥ 샤롤레이종(charolais): 프랑스 원산으로, 털빛깔은 크림색이고, 몸무게는 다 자란 수컷이 1,140㎏, 암컷이 730㎏ 정도로 대형이다. 발육이 가장 빠르고 고기도 많으나, 육질은 좋지 않다. 성질이 온순하고 한국 기후에 잘 적응되어 한우와의 교잡종 이용에 매우 중요한 품종이나 교잡종은 난산되는 수가 많다.

[네이버 지식백과] 소의 품종 (두산백과)

1973년 농림수산부의 이 육우 증산 계획이 성공했으면 지금 우리나라 한우도 한돈처럼 생산성이 좋은 수입육과의 교잡종을 키우고 있을 거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 농림수산부의 계획은 실패했지만 어느 시점까지는 이들 소들과 한우의 교잡종이 사육되고 있었던 것 사실이다. 아마 브라만종이 황교익의 눈에는 물소같아 보였을 거다.

아마도 1970년대 초반 경제성장으로 쇠고기의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서 농림수산부는 생산성이 좋은 육우를 도입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1970년대는 한우가 역우의 기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축되는 한우의 가격이 비육을 전문으로 한 육우보다 생산비가 저렴했을 거다.

아니 일하고 능력이 떨어지는 역우 한우를 도축해서 고기로 먹는 거니 고기만을 위해 비육한 소와는 생산비 자체를 비교 할 수 없었을거다. 

그 덕분인지 더 연구해 봐야겠지만 부족한 쇠고기의 자리는 돼지고기가 차지하게 되고 수입육이 들어오고 1990년대 한우는 마블링 중심의 고급육 정책을 펼쳐서 지금 한우의 위치에 와 있다.

제주 한우는 과거 이런 오명이 아직도 남아 있지만 지금은 완전히 고품질 한우만을 사육하고 있고 환경 탓인지 같은 한우고기중에서도 더 깊고 짠맛이 강한 맛있는 한우고기를 생산하고 있다. 

제주한우는 한우 수출의 거점 기지화를 꿈꾸고 있으면 한돈 중심의 제주 축산업의 구조를 한우의 제주형 비육시스템으로 전환 한우 목장의 관광사업화를 기대하고 있다.

이런 시기에 저명한 맛 칼럼니스트의 오해를 깨우쳐 주고 싶다.


말로 맛없다고 하면 맛없는 건데

제주한우의 참 맛을 말로 설명해 봤다.

김동진 박사의 글을  거의 원문을 인용한 건 그가 참 좋은 역사학자라고 믿기 때문이다. 축산이나 식육학쪽의 부족함을 상호 보완하면 참 많은 역사속의 고기와 고기를 다루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인용한 내용들 물소와 조선우의 교배만 수정된다면 참 좋은 자료다.











참고문헌


ㆍ 국가통계포털 KOSIS

ㆍ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ㆍ『한국토지농산조사보고』(함경도, 1905)

ㆍ『2010 호랑이를 만나다, 어흥 우리 호랑이』(국립제주박물관)


ㆍ 김동진, 2009,『조선전기 포호정책 연구』, 선인

ㆍ 장국종, 1989,『조선농업사』I, 백산자료원

ㆍ 주경철, 2009,『바다에서 이루어진 근대 문명과 바다』, 산처럼


ㆍ 바츨라프 세로셰프스키(김진영 외 역), 2006,『코레야 1903년, 러시아 학자 세로셰프스키의 대한제국 견문록』, 개마고원

ㆍ 야마모토 타다사부로(이은옥 역), 2014,『일제강점기 한 일본인의 한국 호랑이 사냥기 ‘정호기’』, 에이도스

ㆍ 엔도기미오(이은옥ㆍ정유진 역), 2014,『한국의 마지막 표범』, 이담

ㆍ 카르네프 외(A. 이르계바예프, 김정화 역), 2003,『러시아 장교 조선 여행기 내가 본 조선, 조선인』, 가야넷

ㆍ 페르낭 브로델(주경철 역), 1995,『물질문명과 자본주의 I – 1 일상생활의 구조 上』, 까치

ㆍ 헤르만 라우텐자흐(김종규 외 역), 1998,『코레아 I – 답사와 문헌에 기초한 1930년대의 한국 지리ㆍ지지ㆍ지형』, 민음사


ㆍ 김동진, 2013,「17세기 호속목제 시행의 생태경제사적 요인」,『역사와현실』90

ㆍ 김동진, 2014,「16∼17세기 안동과 예안지방의 농업 개발과 토산물 변동」,『역사와현실』92

ㆍ 김동진ㆍ유한상ㆍ이항, 2014,「17세기 후반 우역의 주기적 유행이 기근ㆍ전염병ㆍ호환에 미친 영향」,『의사학』23-1

ㆍ 김동진ㆍ이항, 2012,「19세기 한국 범을 바라보는 세 시각 : 한국 범, 조선인, 서구인의 눈으로 그린 모습」,『역사와문화』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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