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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돼지

조선시대의 돼지 

17세기 이후 양돈에서 특징적인 것은 돼지고르기를 한 것이고 돼지우리 구조를 

합리화하였으며 사양방법을 현저히 발전시킨 것이다. 1) 돼지고르기『고사신서』 목양문 양저조에는 어미돼지를 주둥이가 짧고 부드러운 털이 없는 것을 고른다고 하였다. 그 당시 돼지고르기에서는 주둥이가 짧고 콧구멍이 크고 입이 넓은 것을 골라 종자돼지로 이용하였다. 이 돼지고르기 지표들은 지금도 돼지고르기에 적용되고 있다. 2) 돼지사양관리『산림경제』 목양편 양저조에는 "새끼 때에는 구유를 길게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구유의 길이를 적당히 하여 먹이 낭비를 없애자는 것이었다.돼지우리는 작게 만들었으며 지붕도 조그마하게 덮어 주어 비눈물이나 막게 하였다.『고사신서』 목양문 양저조에는 "봄과 여름에 풀이 날 때 때때로 놓아 먹이면 겨나 다른 먹이는 하루에 한 번만 주어도 된다. 8∼9월에는 놓아 먹이고 사료는 조금씩 준다"고 하였다.잡식성 동물인 돼지는 풀을 매우 좋아할 뿐 아니라 그것을 잘 소화시킨다. 여름철에 돼지를 풀밭에 놓아 먹이면 건먹이를 절약하면서도 살을 더 많이 찌울 수 있다.그 당시 양돈에서 돼지가 좋아하고 영양가가 높은 풀과 미량원소, 광물질원소들을 먹었으며 살찌우는 돼지를 컴컴한 데서 기르는 방법을 적용하였다.『산림경제』에서는 "비름 같은 것을 삶아서 국물째로 먹이며 뜨물이나 찌꺼기물에 흙을 타서 먹여도 좋다“고 하였다.비름은 돼지풀이라고도 할 만치 돼지가 즐겨 먹는다. 흙을 돼지에 먹이라는 것은 거기에 광물질원소, 미량원소들이 들어 있기 때문이었다.진흙에는 철분이 5∼10% 포함되어 있고 동, 아연, 망간 등 돼지에게 필요한 6가지 

미량원소가 다 포함되어 있다. 진흙을 돼지가 먹으면 미량원소 첨가제를 먹인 만큼 더 잘 큰다. 미량원소를 돼지에 먹이면 115∼117% 정도 더 크는데 진흙을 먹였을 때에도 이런 정도의 성장률을 보장한다.조선시대에 이러한 방법이 그 당시에 광범히 적용된 것은 조선시대 양돈방법이 일정한 수준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젖먹이는 어미돼지는 하루 4∼5㎏의 젖을 새끼에 먹여야 하므로 젖생산을 위한 고단백, 고에네르기 먹이를 먹어야 한다. 그러므로 『산림경제』 목양편 양저조에는 "새끼를 갓 낳은 어미돼지에게는 곡식으로 죽을 쑤어 먹일 것이다"라고 하였다.새끼돼지 불치기도 하였는데 『산림경제』에서는 "60일 만에는 새끼의 불을 치줄 것이니 불을 치면 뼈는 가늘고 살이 많아진다"고 하였다.종자 수퇘지로 쓰지 않을 새끼돼지를 60날 나이를 전후하여 불을 치면 동화작용이 우세하여 기름축적 능력이 강화된다. 이러한 원리에 기초하여 조선시대 양돈에서는 돼지 불치기가 이미 오래 전부터 적용되어 왔으며 그 원리까지 해설하였다.    

[태종실록] 17년(1417년) 윤 5월 80일조에는 “명나라 황제가 조선인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니, 조선 사신에게 쇠고기와 양고기를 공급하라고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조선에서는 돼지를 많이 기르지도 않았다.1488년 조선을 방문했던 명나라 사신 동월(董越)이 쓴 [조선부(朝鮮賦)]에는 “조선에서는 집에서 돼지를 기르지 않으며, 목축에는 염소를 볼 수 없다고 했다. 또 말을 부리는 사람은 있으나, 소를 부리는 사람은 적다.”고 할 정도였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돼지는 소, 양과 함께 3대 희생(犧牲) 제물이었기에, 전국에서 길러졌다. 돼지고기는 종묘(宗廟)와 사직(社稷) 등 여러 제사에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신 접대를 위해서도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 유일의 여성 실학자인 빙허각 이씨(憑虛閣 李氏, 1759〜1824)가 쓴 생활 경제 백과사전인 [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돼지고기에 대해 다음과 같은 야박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돼지고기는 본디 힘줄이 없으니 몹시 차고 풍병(風病)을 일으키며 회충(蛔蟲)의 해를 끼치니, 풍병(風病)이 있는 사람과 어린아이는 많이 먹으면 안 된다. 쇠고기와 같이 먹으면 뱃속에 벌레가 생기고, 생강과 같이 음식을 만드는 것은 삼가할 것이며, 붕어, 양의 간 등과는 같이 먹지 말라.”    

[규합총서]에는 돼지고기로 만든 요리로 찜과 굽기, 돼지가죽 요리 정도만 소개되어 있으며, 돼지 키우기는 아예 언급조차 되어 있지 않다. 돼지를 키우는 농가도 적었고, 돼지고기 소비도 많지 않았기에 요리도 그다지 발전하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돼지 키우기가 보편화되지 않았던 것은 그것이 비경제적이었기 때문이다. 돼지를 1kg 찌우는 데는 4.4kg 정도의 사료가 필요하다. 소는 1kg 찌우는데 7.5kg 정도의 사료가 필요하지만, 소는 고기보다는 농사에 필요한 일꾼이었기 때문에 돼지보다 키우는데 경제적이었다. 고기를 먹기 위해서는 차라리 닭이 나았다.    

해동역사에 조선시대 고기값이 나오는데 소고기 한근에 7-8푼, 돼지고기는 1전2푼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돼지고기가 소고기보다 70% 이상 비쌌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18년(1418년) 8월1일(음력)의 기록이다. 제목은 '원단 보사제를 행하다'이다. "(전략)이것이 하늘(天)에 제사지내는 것이니, 그 예(禮)가 작지 않습니다. (중략) 돼지(豚)가 살찌지 않으니, 거의 하늘을 섬기는 뜻이 없습니다."

태종실록에도 명나라황제가'조선 사람들은 돼지고기를 즐기지 않는다고 말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정부인 안동 장씨가 쓴 조리서<음식디미방>에는 돼지고기요리법이 나온다. '가제육(家豬肉)' '야제육(野豬肉)'이라고 표현했다. '저'가 멧돼지라면 '가제육'은 멧돼지 새끼를 집에서 길렀다는 뜻인지 아니면 지금처럼 집돼지, 사육돼지가 따로 있었다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어쨌든 야생과 집에서 기른 고기와 조리법도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음식디미방>에는 개고기(狗肉, 구육)에 관해서는 10여 종류의 요리법이 나온다. 돼지고기 요리법은 2∼3가지에 불과하다. 돼지보다는 개고기가 보편적인, 상식(常食)의 음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구이에 관한 기록은 조선 중기 대제학을 지닌 서유구가 전원생활의 지식과 기술에 대해 정리한 '임원경제지(임원십육지)'에 비계가 없는 돼지고기를 화로에 양념에 발라 구워먹는 법에 대해설명하고 있다. 

서유구의 처형이면서여성 실학자였던빙허각 이씨가 정리한 규합총서 에는 기름장을 바른 돼지고기를 구워 먹었다. 빙허각은 이를 중국식 돼지고기 구이라 했다. 서민들은 국으로 끓여서 여러 사람이 나누어 먹었다.     

돼지는 물을 많이 소비하는 동물이다. 피부에 물기가 있어야 하고 습한 곳을 즐긴다. 한반도 역시 건조한 기후 때문에 돼지 사육이 자유롭지 않았다. 더하여 돼지는 개, 소와는 달리 별도의 효용가치가 없다. 개는 집을 지키고 소는 논밭에서 일을 한다. 그러나 돼지는 오직 먹는 일만 한다. 굳이 돼지를 고집할 이유가 없다.    

돼지고기는 ‘낮춰 보는’ 식재료였다. 조선시대 내내 자기 자식을 부르는 호칭은 ‘돈아(豚兒)’였다. ‘돼지같이 미욱한 내 자식’이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도 “돼지 같다”고 했다. 좋은 뜻이 널리 퍼졌다고 표현할 때 “돈어(豚魚)도 알아들었다”고 했다. 돼지와 물고기를 가장 미욱한 생물로 여겼다.제사에서도 돼지고기는 천시했다. 중국에서도 돼지고기는 천대받는 제사 음식이었다. “흉년이 들면 제사 음식에 하생(下牲)을 쓴다”고 했다. ‘하생’은 제사 음식의 등급을 낮추는 것이다. “소, 양, 돼지 대신 양과 돼지를, 양, 돼지 대신 송아지를 쓴다. 평소 송아지를 쓰던 이는 새끼돼지를 쓴다”고 했다. 숙종 12년(1686년) 11월 궁중에 올라온 상소문이다. 흉년으로 기근이 들었다. ‘하생’이다. 돼지는 늘 제일 뒤차지다.

세종 7년(1425년) 4월, 호조의 상소에는. “전구서에 암퇘지 508마리가 있는데 그 숫자가 너무 많으니 300마리만 남기고 나머지 200마리는 시세대로 팔아서 민가에서 두루 번식하게 하자”는 내용이 있다.단종 1년(1453년) 4월에는 ‘돼지 사육을 잘하는 탐관오리’의 처벌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별좌 이흥덕이 부패 혐의로 체포되었다. 사헌부에서 정한 벌은 곤장 100대에 3000리 밖 유배, 벼슬길 금지다. 의정부는 ‘곤장 80대, 벌금, 파직하되 벼슬길은 열어준다’는 걸로 강도가 무르다. 이유가 재미있다. “이흥덕은 중국을 드나들면서 양돈을 배웠고 세종대왕이 예빈시에서 일하도록 했다. 돼지 기르는 일에 힘썼고 공적도 있다”는 것이다.세조 8년(1462년) 6월에도 돼지 사육을 권장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는 닭, 돼지, 개 기르는 일을 잘하지 못한다. 하여 손님 접대와 제사가 늘 넉넉하지 못하다. 한양 도성은 한성부, 지방은 관찰사, 수령이 직접 관리하라. 매년 그 숫자를 보고하고 양돈 성적에 따라 상벌을 적용하라”는 내용이다.

19세기부터 돼지고기는 비교적 흔해진다. 순조가 궁궐에서 냉면을 ‘테이크아웃’할 때도 돼지고기는 등장한다. 조선 후기 실학자 영재 유득공의 ‘서경잡절’에도 “냉면과 돼지수육 값이 올라간다”는 표현이 나타난다. 돼지고기가 흔해지고 저잣거리로 나온 것이다.    

“서울에 살 때도 일찍이 맛있는 음식(美品)을 찾아 먹었는데 침교(沈橋·현 서울 종로구 재동)에서 파는 돼지고기가 가장 맛이 좋아 서경(평양)의 오수집 돼지국과 같았다. 서경에서는 기름진 비계가 손바닥처럼 두꺼운데 설편(雪片)처럼 얇게 잘라 입에 넣으면 얼음이 녹듯 했고, 불에 구워도 천하일미라고 할 만했다. 궁지에 있는 사람이라 음식 생각이 가장 많아서 이렇게 두루 말하거니와 우스운 일이다….”조선후기 문인이자 관리였던 효전 심노숭(1762~1837)이 자신의 문집 ‘효전산고(孝田散稿)’에 쓴 음식 품평이다. 유배지에서 고을의 제사음식인 돼지고기를 먹고 서울과 평양의 유명한 돼지국밥 맛을 떠올리며 찬탄하고 있다. 조리 방식을 설편(눈송이)에 빗대 묘사한 대목은 미식가답게 섬세하기 그지없다.효전은 조선의 대표적인 미식가였다. 

탐식의 시대 조선에는 유명한 식당, 이른바 ‘맛집’도 즐비했다. 그중에서도 서울 사대문 안에 있는 개장국 전문점 ‘군칠(君七)이집’이 가장 유명했다. 군칠이집의 인기가 얼마나 좋았던지 ‘여군칠이집’ ‘남군칠이집’으로 분점을 냈다는 기록이 있는가하면, 심지어는 춘향전에도 군칠이집에 술을 받으러 간다는 내용이 나온다.조선 시대 맛집은 18세기 후반에 우후죽순 생겨났다. 여기에는 정조의 정책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 정조는 오랫동안 독점 영업을 이어오던 육의전 상인들에 대항해 난전을 허용하면서, 난전 상인들이 작은 음식점을 낼 수 있도록(술을 팔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러자 서울 종로 피맛골 주변에는 선술집, 국밥집, 색주가 같은 음식점 수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음식점이 얼마나 많았던지 ‘서울 시내 상점 절반이 술집이고, 서울에서 잡는 가축의 고기 대부분이 술안주로 쓰인다’는 기록도 있을 정도였다

단종 1년(1453년) 4월(음력), 5품 별좌 이흥덕이 부패 혐의로 체포되었다. 사헌부에서 처음 내린 판결은 ‘곤장 100대, 3천리 밖 유배, 벼슬길 금지’다. 의정부에서는 이 벌을 가볍게 한다. 벌을 낮춘 이유가 있다. “이흥덕이 중국을 드나들며 양돈(養豚)을 배웠고, 돼지 기르는 일에 힘썼고, 공적이 있다”고 했다.    

조선의 이념적 통치기반은 유교다. 유교는 인간이 6가지 가축을 먹도록 했다. 육축(六畜), 소, 말, 돼지, 개, 양, 닭이다. 우리는 가축 기르는 솜씨가 부족했다. 건조하고 추운 한반도에서 돼지는 잘 자라지 않았다. 세조 8년(1462년) 6월의 기록에는 “(양돈은) 한양 도성은 한성부, 지방은 관찰사, 수령이 직접 관리하라. 매년 그 숫자를 보고하고 양돈 성적에 따라 상벌을 적용하라”고 했다. 돼지 관리책임자를 정하고 일일이 보고하라는 것이다. 양돈 성적에 따라 관리들의 상벌을 정하겠다고 했다.

이토록 귀한 돼지고기의 특정 부위를 안 먹었을 리는 없다. 뼈와 내장도 먹는 판이다. 삼겹살로 특정한 이름이 없었고 먹는 방법이 달랐을 뿐이다. 냉장, 냉동이 불가능하던 시절이다. 날고기로 짧게 보관하다가 수육(熟肉)으로 만들어 보관하고 먹었다.    

1828년(순조 28년)에 진하겸사은사(進賀兼謝恩使) 정사 이구(李球)의 의관겸비장(醫官兼裨將)으로 청나라 북경에 갔던 의관 김노상(金老商)의 연행기록 부연일기에 “서융(西戎)에서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라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 후기 몽골의 영향을 받아 육식의 중심은 소고기였고, 돼지고기가 아니었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돼지는 소, 양과 함께 3대 희생(犧牲) 제물이었기에, 전국에서 길러졌다. 돼지고기는 종묘(宗廟)와 사직(社稷) 등 여러 제사에 사용됐을 뿐만 아니라, 사신 접대를 위해서도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왕조실록과 학자들의 문집의 기록을 보면, 돼지고기에 관련된 기록들이 참으로 많다. 조선시대에 돼지고기는 제사 등에 두루 쓰였으며 또 산림경제, 동의보감에서는 돼지고기가 약용(藥用)으로 두루 쓰였다.‘조선왕조실록’ 태종(太宗) 17년(1417년) 윤 5월 8일 조선 사신단이 명나라에 도착했는데, 황제가 내시를 불러 “조선인들은 원래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니 소고기와 양고기를 공급하도록 하라”고 명령했다. 조선 사람들이 돼지고기를 즐기지 않는 다는 것을 명나라 황제도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세종 25년 계해(1443, 정통 8년) 3월 4일(기미)의 기록에서 “도승지 조서강(趙瑞康)이 호가(扈駕)한 대신들과 함께 의논해 아뢰기를, 우리나라 사람이 돼지고기를 즐기지 않사오니, 보통 사람도 그러하온데 어찌 궐내에서 쓸 수가 있겠습니까. 먼 도는 진상하는 것을 우선 정지시키되 가까운 도는 정지시킬 수 없사옵니다”고 한 기록을 통해 조선인이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단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아마도 실록에서 조선인이 돼지고기를 즐기지 않는다고 말한 도승지 조서강(趙瑞康)은 조선의 서역(西域) 출신 관료로 볼 수 있다. 자기가 사는 지역을 중심으로 말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는 이유는 실록에 돼지고기와 관련된 기록이 매우 많기 때문이다.    

출처 : 한국과학사 김일성대학 역사학부 

신라 왕조실록 한국인물사 연구원 지음 

식생활과 문화 이성우

한국의 생활사 : 우리 역사 속 돼지 김용만 |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http://www.bettertomorrow.or.kr/official.php/home/info/1938

이야기가 있는 맛집 황광해 2015.4.4. 데일리 한국

http://daily.hankooki.com/lpage/life/201504/dh20150404070152138910.htm

돼지의 맛 뉴스Q2017.7.13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7/03/2017070302172.html

한국사콘텐츠 고려도경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R0006

한우마당(http://www.ihanwoo.kr)

[네이버 지식백과]방자구이(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황광해의 역사속 한식]돼지고기  황광해 donga.com 

http://news.donga.com/more22/3/all/20151222/75508108/1

탐식의 시작 : 처음 밝혀진 조선시대 미슐랭 가이드 이영혜 기자

과학동아 2015년 08호

http://mdl.dongascience.com/article/view/S201508N012/2941    

삼겹살구이에 대한 코미디 같은 ‘전설’ 삼겹살  황광해 월간 문화재사랑

http://www.cha.go.kr/cop/bbs/selectBoardArticle.do?&&&&&searchcont=&searchkey=&searchwriter=&searchdept=&searchWrd=&searchCnd=&ctgryLrcls=&ctgryMdcls=&ctgrySmcls=&ntcStartDt=&ntcEndDt=&

_01_09_01    

별미산책] 돼지고지 이야기(3)

http://www.newscj.com/news/articleView.html?    

유삼겹:삼겹살을감싸고있는아랫배유두가있는부위.우유를연상케하는달착지근한맛까지더해진다.·꼬들살:뒷목양옆으로단단하게잡히는부위.고기조직이굵어서씹으면꼬들꼬들하고고기맛이좋다.·삼각살:돼지코안쪽살로,삼각형모양이다.부드럽고쫄깃한식감이뛰어나다.·두항정:머리에붙은항정살이라두(頭)항정이라불린다.부드럽고기름져서구이용으로삼겹살뺨치게인기있는부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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