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고기 잡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고려시대의 돼지와 돼지고기의 역사

식육마케터/식육역사학자 김태경Ph.D

우리나라 올댓 돼지

- 돼지와 돼지고기의 역사    

Ⅱ. 고려시대의 돼지와 돼지고기의 역사    

1. 고려시대의 돼지 

고려시대 들어 가축사육은 한층 발전하였다. 고려시대의 가축사육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진행되었는데, 먼저 국가가 운영하는 큰 규모 목장에서의 가축사육 형태이고, 다른 하나는 각 농가에서 자체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가축사육이었다. 국영 목장에서 사육한 말, 소, 낙타, 노새들은 전마(군마)나 물자 운반 등에 이용하였고, 농가에서 사육한 가축은 부림소(역우), 부림말, 돼지, 양, 닭, 개 등으로서 주로 축력, 고기와 알 생산에 이용하였다.

이 시대의 국영 목장 가운데 비교적 규모가 큰 목장은, 지금의 황해남도 청단군의 용매도 말 목장을 비롯하여, 황주, 청주, 개성, 광주, 봉천, 철원들에 목장이 있었다. 이밖에 비교적 규모가 작은 목장으로는, 철산의 백량목장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 설치되어 운영되었다. 

이것은 고려시대에 이미 큰 목장 운영에 필요한 가축사육 기술은 물론, 수의방역과 가축우리 건설, 번식 등에 대한 기술이 상당히 발전한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시대에 국가가 운영하는 큰 규모 목장에서 사육하는 가축으로는 소나 말, 낙타 등이 나타났으나, 돼지를 목장에서 길렀다는 자료가 없는 것으로 보아 돼지는 주로 전국에 걸쳐 분산하여 사육한 것으로 보인다. 1150년에 제정된 가축 하루먹이량 기준에도 돼지에 대한 자료는 없다.

『고려사』 권 77 백관지 2의 진구서조에 '잡축사육을 담당하였다'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서 잡축이란 당시 아무 먹이나 다 잘 먹는 가축, 즉 돼지라는 뜻이다. 돼지의 이러한 소화 생리적 특성을 이용하여 고려 사람들은 집집마다 돼지를 기르면서 뜨물이나 농부산물 등을 먹이면서 길렀다고 짐작된다. 그러므로 농경사회 초기, 가축으로 기르기 시작한 돼지사육은 가정에서 아낙네들이 하는 일로 취급되었다. 고려시대 돼지는 개별 농가에서 키워 농가 자체 소비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역사서나 문헌에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2. 고려 초기의 육식 문화 

고려 초기는 불교의 번성과 권농정책으로 육식 문화가 위축되고 절제되는 시기였다. 고려시대 왕들은 수차례에 걸쳐 소 도축금지령을 내리고, 이러한 금지령을 어겼을 때는 살인죄에 준하는 자자형(刺字刑)을 내리면서 도축을 엄격하게 통제했다. 조선시대에 우금령(牛禁令)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던 것에 반해, 고려 전반기에는 살생을 금하는 불교의 번성으로 도축금지령이 비교적 잘 유지되었다. 『고려도경』에 따르면, 살생을 꺼리는 풍조 때문에 도축이 서툴러 고기 맛을 버린다고 할 정도로 고려 전반기에는 육식 문화가 위축되어 있었다.

『고려도경』은 외국인이 직접 보고 겪었던 12세기 고려의 모습과 고려인들의 생활상 등을 기록한 당대의 자료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으나, 송나라 사람의 시선으로 보았기 때문에 상당히 주관적일 수 있다. 서긍 스스로 언급했듯이, 그가 숙소 밖을 나가 본 것이 5∼6차례뿐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가 고려의 풍속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서술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고려 초기 백성의 생활과 풍속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데, 고려도경에서는 도축에 관한 나름 상세한 기록도 있어서 이 기록을 크게 인용하여 고려 초기 육식 문화가 위축되었다라고 대부분의 책과 보고서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백정, 양수척 등 도축과 관련된 역사에 의하면, 이 당시 도축을 업으로 살았던 사람들은 전쟁 포로로 잡혀 온 외민족들이라는 설이 있다. 귀주대첩은 1019년(현종 10)에강감찬(姜邯贊)이 고려를 침입한 거란 군을 귀주(龜州)에서 무찌른 전투를 말한다. 이때 살아 돌아간 거란병사가 수천이고, 수만 명의 거란군은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이 수만 명의 거란 병사들이 고려에 남아 소나 돼지를 잡는 일에 종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기록에 의하면, 양수척, 화적, 수척이라고 하던 무리들은 후삼국시대부터 존재하였다. 수렵시대부터 인간은 사냥을 하고 도축하여 고기를 먹었다. 가축을 사육하면서도 도축 기술은 담당자를 통해 전수되어 도축되었을 것이다. 또한 고려가 불교 국가여서 쇠고기를 안 먹었다고 하지만, 968년 광종을 시작으로 988년(성종 7년), 1066년(문종 20년),  1107(예종 2년)까지 몽고 간섭기 이전, 이후 1310년(충선왕 2), 1352년(충숙왕 2), 1371년(공민왕 20) 등의 시기에 도살 금지령이 내려진 역사만으로도 쇠고기에 대한 우리 민족의 기호는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다.

고려 초기 식육 문화에 대한 많은 기초 자료들은 일제 강점기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서 연구된 우리나라 역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 중, 고려도경에 대한 일본인 학자들의 오랜 연구도 있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고려도경 제8권 인물 편에는 이자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당대의 권력자인 이자겸의 집에 고기 선물이 너무 많이 들어와 썩는 고기가 수만 근이라는 대목이 나온다(선화봉사고려도경 제8권 인물 수태사상서령 이자겸). 

고려도경 제21권 조례 방자 편에는, 평상시에 고기 먹는 일이 드물어서, 중국 사신이 올 때는 바로 대서(大暑)의 계절이라 음식이 상해서 냄새가 지독한데, 먹다 남은 것을 주면 아무렇지 않게 먹어 버리고 반드시 그 나머지를 집으로 가져간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것은 지금의 로스구이의 원조 격인 방자구이를 간접적으로 의미하는 것으로서, 『고려도경(高麗圖經)』 방자 조에 따르면, 방자라 불리는 하인은 박봉으로 채소 등이 급여될 뿐이어서 간혹 윗사람이 먹다 남긴 고기찌꺼기를 비록 조금 변질되어 냄새가 나더라도 달게 먹고 집에 가지고 가기도 한다고 하였다. 방자구이는 소금만 뿌려서 굽는 것이므로 특별한 양념재료나 조리기술 없이도 누구나 쉽게 조리할 수 있고, 식품이 가지고 있는 자체의 맛과 향을 즐길 수 있다. 먹을 때는 날 파나 상추 겉절이를 곁들여 먹기도 하였다.

서긍의 고려시대 육식 묘사는, 평상시 고기 먹는 일이 드물었다라고 표현했다. 못 먹었다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당시 하급 관리가 고기를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사회 환경은 아니었을 것이다.방자구이는 양념하지 않고 소금만 뿌려 구운 고기음식인데, 이를 달리 해석해서, 방자는 관청에서 식재료 등의 검수를 담당하던 직책으로 납품된 고기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 고기를 구워 소금에 찍어 먹었다는 설도 있다. 

도축을 잘못해서 방혈이 안 되면 고기에서 냄새가 날 수 있다. 돼지의 경우 거세를 하지 않아도 냄새가 나고, 사료에 따라서도 냄새가 많이 난다. 현재는 배합사료를 먹이지만, 그 시절에는 잔반도 많지 않았을 것으로 보아 농업 부산물이나 인분이 주요 먹이였을 것이다. 특히 인분을 먹은 돼지고기에서는 냄새가 심했을 것이다. 

고려시대 권력 계급은 양과 돼지고기를 먹었다. 특이한 건 양고기에 대한 언급이다. 양고기는 별로 이야기된 적이 없는데 이렇게 기록되었다는 점은 더 깊이 연구해 봐야 할 과제이다. 

고려도경 제23권 잡속2 [屠宰] 도재에 따르면, 고려는 정치가 심히 어질어 부처를 좋아하고 살생을 경계하기 때문에 국왕이나 상신(相臣)이 아니면, 양과 돼지의 고기를 먹지 못한다. 또한 도살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다만 사신이 이르면 미리 양과 돼지를 길렀다가 시기에 이르러 사용하는데, 이를 잡을 때는 네 발을 묶어 타는 불 속에 던져, 그 숨이 끊어지고 털이 없어지면 물로 씻는다. 만약 다시 살아나면, 몽둥이로 쳐서 죽인 뒤에 배를 갈라 내장을 베어내고, 똥과 더러운 것을 씻어낸다. 비록 국이나 구이를 만들더라도 고약한 냄새가 없어지지 아니하니, 그 서투름이 이와 같다고 하고 있다. 

고려도경 제26권 연의 편을 보면, 술은 맛이 달고 빛깔이 진한데, 사람을 취하게 하지는 못한다. 과일과 채소는 풍성하고 살졌는데 대부분 껍질과 씨를 제거하였고 안주에는 양육(羊肉)과 제육이 있기는 하지만 해물이 더 많다고 나온다. 연례에 술과 안주가 나오는 걸 이야기하는데, 분명 양육과 제육, 즉 돼지고기 안주가 있음을 이야기 하고 있다. 

고려도경에는 고려 초기 육류 문화에 관한 몇 가지의 이야기가 있는데, 도재 편만을 인용하여 고려 초기 육식 문화가 위축되었다라고 판단하기엔 무리가 있는 것 같다. 어떤 근거인지는 몰라도 몽고 간섭 기에 몽고인들에 의해서 우리 민족의 육식 문화가 부흥된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이삼백년 동안 단절된 요리법이 지금처럼 다양한 요리 서적이 있는 시대도 아닌데 특정 시기에 다시 부흥되었다는 주장은 상식 밖이다. 맥적 등 고조선부터 발전했던 우리 육식문화의 전통을 이야기 하려면 고려도경에 대한 연구와 고려 초기 육식 문화를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3. 고려 후기의 육식문화

영조 대에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몽고어 사전인 몽어류해에 의하면, 몽고에서는 맹물에 고기를 넣고 끓인 것을 공탕이라 적고 슈루라 읽고 있다. 오늘날의 곰탕이나 설렁탕처럼 맹물에 고기를 넣고 삶는 조리법은 몽고 사람을 통해 전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송 대 말 또는 원대 초기에 저자 미상으로, 몽고풍이 강한 가정백과 전서로서 거가필용이라는 책이 있다. 조선조 요리서의 기본 바탕을 이루는 것은, 1715년경 홍만선의 산림경제라 하겠는데, 이 책의 조리편 육요리의 약 60%가 거가필용의 내용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이 거가필용의 고기 조리법은 80-90%는 굽는 조리법으로, 고기를 미리 유장, 술, 향신료 등으로 조미하여 굽고 있다. 몽고의 간섭 기부터 맥적은 설야멱적(雪夜覓炙), 설리적(雪裏炙), 설야적(雪夜炙)이라는 이름으로 되살아나서 정착되었다. 『산림경제(山林經濟)』(1715)에서는 ‘설야멱적(雪夜覓炙)’에 대하여, ’소고기를 저며 칼등으로 두들겨 연하게 한 다음 대나무 꼬챙이에 꿰어 기름과 소금을 바른다. 충분히 스며들면 뭉근한 불에 구워 물에 담갔다가 다시 굽는다. 이렇게 세 차례 하고 참기름을 발라 숯불에 다시 구우면 아주 연하고 맛이 좋다’고 하였다. 

『해동죽지(海東竹枝)』(1925)에는 ‘설야적(雪夜炙)’이 등장하는데, ’개성부(開城府)의 명물로서, 소갈비나 염통을 기름과 훈채로 조미하여 굽다가 반쯤 익으면 찬물에 잠깐 담갔다가 센 숯불에 다시 굽는다. 눈 오는 겨울밤의 안주로 좋고, 고기가 매우 연하여 맛이 좋다’고 하였다.

우리 민족이 쇠고기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진 건 몽고의 간섭 기 이후부터가 아닌가 추측할 수 있다. 몽고는 유목민족이라 돼지고기에 익숙하지 않았으니, 이 당시 지배 계급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고려 후기 우리 민족의 식생활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1921년 경성부 육류 소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