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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돼지고기 수출

1977년 8월 2일 경향 신문에 특집으로 기사화된 돼지고기 수출에 관한 이야기다.

그 시절 돼지고기 수출을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는 기사다. 

여름철 돼지고기는 잘 먹어야 본전이라는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말하지만 일본에서는 여름철이 오히려 돼지고기가 영양식으로 성숙기다 되고 있다.

우리와는 반대인 셈이다.

이같은 현상은 두나라 사이의 식생활의 차이와 가공, 요리법등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돼지고기를 비계와 껍질을 붙은채로 먹기 때문에 덥고 습기가 많은 여름철에는 자칫하면 소화불량이나 설사등을 하기 쉽지만 일본에서는 껍질과 비계를 떼고 고기만을 먹기 때문에 여름철을 피할 필요가 없다. 

요리법이나 가공 역시 우리나라는 주로 볶거나 구운 것 혹은 국거리로 많이 소비하지만 일본은 포크 커틀레스나 햄 소시지등으로 해 먹는다.

따라서 돼지고기를 수출할 때는 껌질을 벗기고 지방질도 5mm 이하로 떼어넨 정육 상태로 나가고 있다. 우리나라도 최근 국민소귿이 높아짐에 따라 육류소비가 급격히 늘고 있지만 일본 역시 육류소비가 많아 국내 생산으로는 소비를 못따라 해마다 많은 고기를 외국으로부터 수입하는데 특히 비싼 쇠고기보다 돼지고기의 수요가 급신장하여 일본은 세계에서 최대의 돼지고기 수입국의 꼽히고 있다. 

일본은 년간 소요량만도 1,205,000톤이나 되며 이중 수입분은 1976년의 경우 149,000톤이나 됐다. 

100kg 짜리 돼지를 도축하면 약 40kg 의 정육이 나오는게 보통이니 약 3,725,000여두분의 돼지고기를 수입하는 셈이다. 

우리나라의 돼지고기 수출은 100% 일본으로 나가는데 일본은 미국, 캐나다, 자유중국(대만), 호주, 뉴질랜드등 세계각국에서 돼지고기를 수입하고 있다. 

우리나가 수출을 하기 시작한 것은 63년 전후였고 이때는 생돈을 홍콩등지에 수출했지만 중국에서 덤핑을 하는 바람에 그대로 실패를 했고 일본에서 71년 하반기까지는 돼지고기 수입이 쿼터제로 묶여 있어 수출도 미미한 수준이었다.

대일 수출이 활발해 지자 1972년 8개 수출업들은 사육생산기반이 없이 마구잡이로 시장에서 돼지를 사들이는 수매경쟁이 벌어지기도 해 업체들은 전국을 8개 지역으로 나누어 수매지역을 정해 과당 경쟁을 방지한 일도 있었다.

이래서 1977년 현재 29개업체가 각각 3000마리이상을 사육하도록 되어 있으며 10,000마리 이상을 기르는 업체도 3개사나 있게 됐다. 

수출돼지고기는 모두 재래종이 아닌 개량비육돈으로 순종보다 고기 생산이 좋은 3원종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돼지고기도 국내에서는 소비가 계속 늘고 있어 국내에서 돼지값이 쌀때는 수출이 많이 나가고 비쌀 때는 주춤한 것이 특징이며 현재는 국내가격이나 수출가격이 비슷한 수준이지만 kg 당 국내는 1,417원 수출가 1,470원 수출을 할 경우는 머리를 비롯 껍질, 지방 내장,족발등이 부산물로 떨어지기 때문에 수지타산이 맞는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한국산 돼지고기는 사육시설이나 기술, 품종등이 외국 수준에 뒤떨어지지 않으며 오히려 기후조건이나 고기를 자르는 방법이 서구는 기계화되어 있지만 우리나라는 아직도 손으로 하기 때문에 일인들의 기호에 맞아 호평을 받고 있다는게 업계의 이야기다. 

흥미있는 것은 수출돼지고기는 냉동상태로 나가기 때문에 수출업체는 냉동시설을 갖추어야하는데 최근에는 수산물 수출업체들이 일부 여유가 있는 냉동시설을 활용, 돼기고기 수출에로 많이 진출하고 있다는 애기다.

이와 같이 냉동 컨테이너 확보등 수송문제도 우리나라 수출이 크게 늘어남에 따라 점점 어뤄지고 있다는 애기다.

수출용 돼지고기는 90~110kg 짜리를 규격돈으로 치고 있는데 국내에서는 60~70kg 짜리가 지방이 적어 좋다는 점과 좀 다르다. 돼지의 사육도 현재는 생후 6개월이면 규격돈이 될 정도로 사육기술이 늘어 연 2회아상 생산이 가능해졌지만 외국에서는 5개월로 단축되어 있어 양돈기술의 발전을 꾀해야 한다는 것이 하나의 과제로 제기 되고 있다. 출처 메이드 인 코리어 100억$ 

위의 기사를 보면

여름철 돼지고기는 잘 먹어야 본전이라는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말하지만 1977년 당시까지 우리에게 돼지고기는 계절 식품이었다. 여름철에 먹으면 안되는 아마 여름철 돼지고기보다 개고기의 인기가 더 있었을 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에서는 돼지고기를 비계와 껍질을 붙은채로 먹기 때문에  우리는 쇠고기는 120개 부위로 나누어 먹었던 미식의 민족인데 왜? 1977년에도 돼지고기는 살코기와 비계 그리고 머리, 족등 단순히 나누어 먹고 있었을까?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나라의 돼지고기 수출은 100% 일본으로 나가는데 일본은 미국, 캐나다, 자유중국(대만), 호주, 뉴질랜드등 세계각국에서 돼지고기를 수입하고 있다. 당시 덴마크나 유럽쪽은 일본이나 아시아쪽으로 수출에 그렇게 집중하지 않았던 것 같다. 

1977년 현재 29개업체가 각각 3000마리이상을 사육하도록 되어 있으며 10,000마리 이상을 기르는 업체도 3개사나 있게 됐다. 축산업협동조합중앙회 1998년 발행 축산통계총람에는 1,000두이상 농장이 1977년 12월말에 49개소가 있는 것으로 집계되어 있다. 과연 만두이상의 농장은 어디어디였을까? 그리고 1000두이상 49개소의 농장중 일본 자본이 들어와서 합작투자로 만든 농장은 몇 개였을까?

수출돼지고기는 모두 재래종이 아닌 개량비육돈으로 순종보다 고기 생산이 좋은 3원종이 대부분이다.  1977년 이미 3원종의 대부분 수출 규격돈 농장에서 사육되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게 사실이라면 우리 양돈의 기술 성장은 대단한 것이다. 

돼지고기도 국내에서는 소비가 계속 늘고 있어 국내에서 돼지값이 쌀 때는 수출이 많이 나가고 비쌀 때는 주춤한 것이 특징이며 일본의 생산비와 한국의 생산비가 어느 한쪽이 원등히 우월해서 지속적인 수출이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국내가격이 높으면 일본의 현지가격이 더 낮은 경우도 있었다. 또 당시 박정희 정부는 국내의 저임금 정책 유지를 위해 물가 안정에 신경을 많이 써서 육류 가격을 철저히 규제하고 있어 국내 소비자 가격이 상승하면 수출을 금지했다는 걸 알 수 있다. 어쩜 돈육수출은 상당한 외화 벌이가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협소한 국내 시장에서 육류 소비 패턴의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일시적인 일본수출 시장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그게 아니라면 대일 수출이 중단된 지금 양돈사육두수는 극감해야 하지만 지속적으로 사육두수가 증가하는 건 우리나라의 육류소비 패턴의 구조적인 변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현재는 국내가격이나 수출가격이 비슷한 수준이지만 kg 당 국내는 1,417원 수출가 1,470원 수출을 할 경우는 머리를 비롯 껍질, 지방 내장, 족발등이 부산물로 떨어지기 때문에 수지타산이 맞는다는 것이다. 1970년대 후반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삼겹살집이 대일 수출 잔여육인 값싼 삼겹살 때문이었다는 맛칼럼니스트들의 주장에 다소 무리가 있었음을 말해 주는 대목이다. 1977년까지 냉동 정육 full set로 수출 되었다. 즉 삼겹살까지 수출되었다는 말이다. 두, 내장, 족, 그리고 껍데기는 분명 수출 부산물이 국내시장에 많이 공급되었을지 몰라도 삼겹살이 수출잔여육 공급되지는 않았다고 봐야 한다. 단지 29개의 수출업체가 있었다는 건  어느정도 규모의 부분육 가공공장이 29개 있었다는 말이다. 이들 29개의 가공장에서 수출중단시 국내 수요의 부분육을 생산 유통 시켰을 거다. 그런 의미에서 1970년대 대일 수출의 영향으로 부분육 작업이 시작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필자가 1990년 롯데햄 식육사업부 근무시 삼겹살, 목살등 특정 부위별로 박스육을 생산했지만 그 생산품중 수출 full set 구성이 같은 반마리의 정육을 한박스에 담는 제품도 있었다. 

일본에서 한국산 돼지고기는 사육시설이나 기술, 품종등이 외국 수준에 뒤떨어지지 않으며 오히려 기후조건이나 고기를 자르는 방법이 서구는 기계화되어 있지만 우리나라는 아직도 손으로 하기 때문에 일인들의 기호에 맞아 호평을 받고 있다는게 업계의 이야기다. 우리나라의 공장형 육류 부분육 가공은 일본에 양고기를 보세 가공하는데서 시작된다. 일본 기술이 공유되었기 때문에 정선법이 일본과 거의 같은 수준이었을지 모른다. 단 추후 삼겹살에 인기가 높아져 갈비 5번 6번에서 삼겹살을 분리하던 것이 지금은 4번 5번 갈비 사이에서 삼겹살은 분리하는 것이 기본이 되었지만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갈비의 인기가 대단해서 아마도 5번 6번 작업이 표준이 아니었던가 한다. 앞에서 설명한 부분육 규격을 보면 삼겹살이 유독 지금은 수율보다 작은 걸 알 수 있다. 

수출용 돼지고기는 90~110kg 짜리를 규격돈으로 치고 있는데 국내에서는 60~70kg 짜리가 지방이 적어 좋다는 점과 좀 다르다. 지금은 수퇘지는 100% 거세를 해서 웅취를 방지하지만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적게 키워서 성징이 발달하기 전에 도축 했다. 

1970년대 후반에 와서 쇠고기의 가격이 인상되면서 돼지고기의 수요가 급증하는 걸 알 수 있다. 1970년대 후반 우후죽순처럼 삼겹살 집이 많아졌던 것 그동안 많았던 한우 로스구이집의 가격 인상으로 한우 로스구이의 대체재로 삼겹살 로스구이가 등장했기  때문 아니었을까?

수출을 명분으로 부업형이든 양돈이 처음으로 전업화하기 시작했던 1970년에 서서히 배합사료의 이용율이 높아지고 거세기술이 보편화되면서 돼지고기의 치명적 단점이던 냄새가 많이 개선 되었을 것이고 그래서 돼지고기도 로스구이로 소금만 쳐서 구워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지방은 맛있는 거다. 한우 로스구이는 돈이 없어서 못 먹어도 그럼 소주 한잔에 삼겹살이라도 배불리 먹고 살아야 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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