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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고기 부위별 명칭의 유래

식육마케터 김태경  Ph.D


돼지고기 부위별 명칭의 유래


집에 어머니가 처녀 시절 고향 삼천포에서 국어선생님을 하면서 사두었던 국어 사전 한글학회 지은 큰사전 을유문화사 1957년 3판
이 있다. 낡은 책이라 그냥 가보라고 생각하고 가지고 있다.
고기의 인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소돼지의 부위별 명칭을 사전에서 찾아 보았다. 안심. 등심등 소의 부위별 명칭은 설명이 되어 있는데 돼지는 살코기와 비계 그리고 족발등 부산물 명칭만 적혀 있다. 
등심을 예를 들면  [명사] 소나 돼지의 등뼈에 붙은, 기름기가 많고 연한 고기. 네이버 사전
  현재의 네이버 사전등에선 소나 돼지라고 설명이 되어 있는데 1957년의 사전에는 등심: 소의 등골뼈를 발라낸 고기, 기름기가 많고 매우 연함(심살, 심육(心肉)) 이라고 되어 있다. 놀랍게도 우리가 돼지고기의 부위별 명칭을 사용한 역사는 그렇게 오래 되지 않는다. 돼지고기 부위별 품목제조허가는 1990년대 초에 가능했다. 
 돼지고기는 그냥 살코기와 비계 그리고 족발과 부산물로 구분되어 왔다. 이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소의 경우 미국 인류학자 마가렛 미드(Mead)는 한국인은 120개 소 부위를 식용한다고 밝혔다. 
35개 부위를 활용하는 영국인과 프랑스인의 4배, 51개 부위를 먹는 아프리카 보디족의 2배나 된다. 
1994년판 ‘동아 새국어사전’에는 소의 내장과 살코기에 관한 단어가 136개나 등장한다.  조선일보/박정배의 미식한담

 이렇게 소의 부위 명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데 돼지는 1980년대 이전까지도 거의 살코기와 비계만으로 나누어졌으니 우리민족이 쇠고기를 돼지고기보다 더 좋아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흔히 쇠고기의 대체재로 돼지고기를 먹는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사실 쇠고기를 대체해서 돼지고기를 먹은 역사는 해방이후 1980년대까지였다. 아주 짧은 기간이었다.  분명 해방 정국에서 서울사람들은 육식을 즐겨 쇠고기를 많이 먹었다. 당시는 소는 고기를 먹기 위해 키우는 것이 아니라 농촌에서 일소로 키웠다.  해방의 기쁨에 가득찬 서울사람들이 하도 쇠고기를 먹어서 일할 소가 없을지 몰라 양돈을 장려했다. 

반대로 조선시대에는 돼지가 귀해서 중국 사신의 접대를 위해 돼지고기보다 쇠고기를 쓰자는 조선실록의 기록도 있다. 조선시대 한양에서는 돼지고기 가격이 쇠고기 가격보다 비쌌다. 돼지고기가 쇠고기보다 더 귀한 고기였다. 

 동물로부터 고기를 얻는 데는 두 가지 전통적이고 오래된 방법이 있으며 ,각각 독특한 육질을 가진 고기를 생산한다. 한가지 방법은 생의 동반자로서 그 동물이 가진 고유한 가치대로 키우는 것이다. 황소와 말은 들판에서 부리기 위해, 닭은 알을 얻기 위해, 암소와 양과 염소는 우유와 털을 얻기 위해 키워으며, 돼지는 비료를 얻기 위해 키웠다. 그들이 고기로 변하는 것은 오로지 더 이상 본래의 가치를 생산할 수 없을 때였다. 이러한 시스템에서 고기를 얻기 위한 동물을 도축한다는 것은 살아있음으로써 더 가치 있었던 자원의 마지막 활용법이었다. 고기는 성숙한 동물들에게서 나왔으며 따라서 잘 단련되고 상대적으로 질겼으며, 지방이 없지만 맛이 풍부했다. 이러한 방법은 선사시대부터 19세기까지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었다. 동물로부터 고기를 얻는 두 번째 방법은 그 동물들을 오로지 고기를 목적으로 사육하는 것이다. 이것은 동물을 잘 먹이고 불필요한 활동을 억제하고 연하고 맛이 순하고 기름진 살코기를 얻기 위해 어릴 때 도축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방법 역시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제래용 돼지와 수병아리와 낙농 동물의 수컷들에게 적용되었다. 산업혁명과 더불어 서서히 기계가 집 운반용 동물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도시 인구 증가와 중간 계급의 성장, 그에 따른 고기 수요의 증가는 대규모의 전문화된 고기 생산을 부추겼다. 1927년, 미국 농무성은 근육속에 박힌 마블링의 량을 기준으로 소고기 등급 평가 시스템을 마련함으로써 지방질이 풍부한 도시형 고기를 권좌에 올려놓았다. 조선시대 아니 일제 강점기에도 돼지는 철저히 농촌형 고기였다. 농촌에서 비료를 생산하기 농업 부산물을 청소하기 위해서 키우던 가축이었다. 고기는 이용가치가 끝낼 때나 제사나 혼례가 있을 때 잡아 먹었다. 마을 잔치에 국밥이나 삶은 수육으로 마을사람들이 모여서 다 먹어 버리는 돼지고기는 부위별 명칭이 필요하지 않았다.
또 조선시대 재래돼지는 다 커도 30kg 미만이었으니 부위별 명칭을 특별히 구별할 필요도 없었다. 

쇠고기도 120가지 부위 명칭이 있다고 하지만 그걸 설명하는 부위별 사진이나 해체 동영상 같은 건 아직 본적이 없다. 돼지는 지금의 부위별 스펙과 1900년대 초반의 부위별 스펙이 많이 차이가 있다. 



보본사실기 시생해체도
1923년 12월 조선말기의 도학자 송준필이 서문을 짓고 책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었다. 책의 첫 장에 보본(報本)과 보본사실기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보본사에 관한 기록을 모아 편집한 책 보본사실기에 제물로 바치는 돼지의 해체도가 있다. 당시의 시상해체도의 내용으로 보아 조선시대나 1900년대 초에도 갈비를 통체로 사용하고 복부 부분은 제례에 이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小牢饋食 [司士]升豕右胖 髀不升 肩臂[辟脅]臑膞骼正脊一 脡脊一 橫脊一 短脅一 正脅一 代脅一 皆二骨 
《의례》 소뢰궤식례(少牢饋食禮)에 이르기를, “돼지를 희생으로 쓸 경우에는 오른쪽 반(胖)을 올리는데 항문 부위인 비(髀)는 올리지 않으며, 앞다리의 어깨 부분인 견(肩), 넓적다리 부분인 비(臂), 정강이 부분인 노(臑), 뒷다리의 넓적다리 부분인 전(膞), 정강이 부분인 각(骼)과 등뼈의 앞부분인 정척(正脊) 하나, 중간 부분인 정척(脡脊) 하나, 아랫부분인 횡척(橫脊) 하나 및 갈빗대의 뒤쪽 부분인 단협(短脅) 하나, 중간 부분인 정협(正脅) 하나, 앞쪽 부분인 대협(代脅) 하나를 쓴다. 등뼈와 갈빗대는 모두 두 뼈로 되어 있다.


조선시대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돼지를 해체하던 기록에는 삼겹살이 없었다.

삼겹살 명칭의 유래

“처음에는 돼지고기 가운데 가장 인기가 없는 비계덩어리로 인식됐는데, 가장 맛있는 살코기 부위로 둔갑시킨 것은 장사수완이 좋기로 유명한 북한 개성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살코기에 그냥 비곗덩어리가 붙어 있도록 돼지를 키우지 않고, 비계 끝에 다시 살이 생기고 그 살끝에 다시 비계가 붙는 식으로 육질을 개량한 것으로, 비계가 적당히 섞여 좋다고 말한다.  서울신문 2005.5.17. 삼겹살에 미친 그들 

“지금처럼 삼겹살을 구워 먹게 된 유래에 대해 정설은 없지만 개성 지방에서 시작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개성은 예로부터 인삼으로도 유명한 곳인데 '삼삼하다'라는 말은 삼겹살과 인삼에서 각각 '삼'자를 따서 두 가지를 함께 먹을 때의 맛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국경제2009.3.4
“장사수완이 좋기로 이름난 개성 사람들이 인삼의 본고향인 개성의 삼(蔘)을 세겹살의 삼(三)과 매치시켜 부른 것” 경향신문 2005.3.3. 삼겹살데이
 개성출신의 동화 작가이자 미식가였던 마해송이 1957년 쓴 요설록에는 “ 개성산 삼층제육이 제육으로 치는 것은 정평이 있는 일이지만 개성산이라고 모두 삼층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양돼지 아닌 순종을 그것도 소위 양돈장 같은 대규모로 기르는 것이 아니라 과부댁 같은 데서 집에서 기르는 것이다. 뜨물을 얻어다가 먹이는데 얼마동안은 잘 먹이고 그다음 며칠 동안은 뜨물을 주지 않는다. 잘 먹을 때에 그것이 살이 되고 못 먹을 때는 기름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살, 비계, 살 삼층제육이 된다는 것이다. 고수하고 맛 좋은 품이 양돼지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상의 자료들을 근거로 하면 삼겹살의 명칭은 개성에서 시작된 것 같다. 삼겹살의 명칭 유래에 대한 다른 설도 많다.  아마 이 시절의 삼겹살은 지금의 삼겹살과는 스펙이 전혀 다른 부위였을지도 모르다. 언제부터 우리가 4,5번 갈비에서 삼겹살과 갈비를 분리했는지에 대한 기록도 정리된 것이 없다. 

갈매기살 명칭의 유래

돼지도축이 도축장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하고 갈매기살은 처음엔 누구도 알아주지 않아서 대개는 그냥 버렸다고 한다. 또 한편에서는 갈매기살은 도부들이 도축과정에서 자기들만 구워 먹었다도 한다. 고기 자체가 얇은 근육질로 되어 있는데다가 질긴 껍질로 뒤덮여 있어서 살코기로 취급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정육점에서 돼지고기 부산물로 버려지다시피하던 이것들을 주어 모아서 껍질을 벗기고 다듬어 불에 잘 익혀서 팔기 시작하였는데 그 독특한 맛 때문에 의외로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 뒷고기라고 해서 도부들이 도축장 인근 식당에 몰래 술값으로 가져다 주어서 유통되었다고도 한다. 갈매기살이 이렇게 인기를 끌게 된 맛도 맛이지만 그 특이한 이름도 큰 몫을 하고 있다. “낭만적인 사람들은 그때 그 시절 연인과 거닐던 갈매기가 날아 다니는 바닷가 풍경을 회상했다. 야릇한 생각이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은 이고기가 간막이살인데서 칸막이 한 밀실 속의 그때 그 여인을 떠 올리면서 동상이몽으로 웃으며 친구와 술잔을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면 가로막살 고기는 어느새 서로를 가로막고 있던 마음의 담을 시원스레 허물어뜨리고 흉금을 터놓게 하는 뛰어난 효능이 있었다.” 전성우 갈매기살의 음식문화

참 아날로그적인 감성으로 갈매기살을 해석하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칸막이 있는 카페에서 연인들이 데이트를 했다. 

젖먹이 동물의 배와 가슴 중간쯤에 있는 횡경막을 순우리말로 간막이 또는 가로막이라고 한다. 간막이는 칸막이가 아니라 간(肝)의 아래쪽을 막고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가로막은 뱃속의 가운데를 가로(橫)로 막고 있다는 막(幕)이라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이 간막이와 가로막에 고기를 뜻하는 살이 합쳐지고 여러 변화를 거쳐서 부르기  쉽게 된 말이 갈매기살이다. 

간막이살 → 간마기살 → 간매기살 
가로막살 → 가로막의살 → 갈로막기살 → 가로매기살 
이렇게 변화해서 갈매기 살이 되었다.


족발 명칭의 유래

식용의 돼지발은 족발이라고 하여 살아 있는 짐승의 발을 일컫는 돼지발과 뜻을 구분하고 있다. 족발을 통째로 삶아 익힌 돼지고기인 족발은 값이 싸서 부담이 없고 그런만큼 푸짐하게 즐길 수 있는 음식이다. 
족이면 족이고 발이면 발이지 왜 같은 뜻의 한자말과 우리말을 나란히 붙여 써서 족발이라고 부르고 있는 걸까? 하나의 설은 축구와 족구, 발야구는 모두 발로 공을 차는 운동이지만 그 경기방법이 각기 다르듯 족발하면 그저 식용의 돼지발만을 지칭하는 것으로 우리들이 은연중 약속한 말이라는 설, 하나의 설은 우리가 역전(驛前) 이나 처가(妻家)를 굳이 역전앞, 처갓집이라고 부르듯 한자말 족에 우리말 발이 빈대 붙어 족발이 된 것이다. 족발은 한 마디로 족이라고 부르면 어딘가 허전한 느낌이 들어 족하지 않은데다가 손발(手足)이라는 말에 유추되어 형성된 말로 볼 수 밖에 없다는 견해도 있다. 또 하나의 주장은 쪽발이는 과거 일본 사람을 비하하는 말로 자주 사용되었다. 일제의 억압과 수탈에 시달려 먹을 것조차 턱없이 부족하던 시절 힘없는 서민들은 당시로는 비싼 살코기는 엄두도 못내고 그보다는 싼 돼지족을 술안주로 먹으면서 항일의 의지를 키웠다고도 한다.  

제주도 아강발 명칭의 유래

육지에서 미니족을 제주도에서 아강발이라고 부른다. 아강발은 족발집에서 이른바 단족이라고 부르는 돼지의 발가락이 모여 있는 부위를 말하는데 직역하면 정강이 아래라는 뜻이다. 최근에 제주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돼지의 아기발이라서 아강발이라고 부른다고 뜻풀이 하는 사람도 있는데 새끼돼지 자체를 도축하지 않는 업계에서 아기돼지 발이 유통될 리는 만무하니 바른 해석이라 할 수 없다. 예로부터 아강발은 산모의 젖을 잘 돌게 한다 하여 해산후 보양식으로 끓여쥤다고 전하는데 실제로 한방에서도 인정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왜 족발 전체가 아니고 단족만을 끓였는지는 아는 이가 별로 없다. 또한 제주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현대의 족발을 따로 먹어본 적이 없다. 돼지고기는 먹었지만 족발을 먹지 않았다고 하면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는데 흔히들 똥돼지라고 불렀던 제주의 재래종 흑돼지은 다리가 매우 짧고 얇다. 그래서 족발이라고 부를 수 있는 쫄깃한 부위를 따로 썰어놓은 만큼 넉넉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아강발 위의 짧은 부위나마 그 독특한 식감과 맛이 있다는 것은 다 아는 터라 사돈이나 신랑, 신부 친구들처럼 특별한 손님들한테만 따로 썰어 내놓고는 하였다. 양용진 국밥


돼지고기의 대표 부위인 삼겹살도 전통 음식인 족발도 특이한 이름의 갈매기살도 명칭의 유래에 대한 정확한 해석은 없다. 다들 각자의 주장만 있다. 
요즘도 많은 돼지고기의 신종 부위명이 생겨나고 있다. 모서리살, 가오리살, 꼬들살 이런 부위들은 정확한 명칭 스펙도 명칭의 통일도 되어 있지 않은 새로운 돼지고기의 특수 부위들이다.

모서리살이 항정살의 사투리라고 선전을 하는 식당 배너를 보면서 필자는 오아시스를 아시나요? 라고 묻고 싶어진다.
혹시 독자분들중 오아시스 아시는 분?
사막의 오아시스가 아니라 1990년대 중반까지 충청도 지방에서 항정살 구이를 오아시스라고 불렸다.
1990년대 중반까지 오아시스, 항정살은 충청도 지방에서만 유행하는 부위였다. 다른 지역에서는 다들 앞다리살에 붙여서 유통되던 부위였다. 항정살을 천겹살이라도 하는데 이걸 명명한 사람은 고 유명선 사장이다. 유명선 고 유명선 사장 서울대 수의과 출신으로 미트저널 창간에도 참여하셨다. 
 사장이 미국에서 1990년대 중반 항정살을 수입하면서 천겹살이라는 새로운 부위명을 붙였다. 

특수부위가 구이용으로 유행하면서 모서리살, 가오리살, 꼬들살등 새로운 명칭이 생기는 건 환영한다. 다만 일반인들이 오해하지 않게 누군가 스펙과 명칭을 규정해 주어야 한다. 

필자는 미국의 목전지 Boston Butt 스펙을 보면서 우리나라 한돈도 더 많은 스펙으로 나누어서 메뉴로 개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앞다리는 앞다리살, 앞사태살, 항정살, 꾸리살, 부채살, 주걱살로 세분화된다. 뒷다리는 볼기살, 설깃살, 도가니살, 홍두깨살, 보섭살, 뒷사태살로 세분화된다. 이들 앞다리 뒷다리 부위 하나하나의 맛을 연구하면 새로운 메뉴들을 더 다양하게 개발할 수 있다. 
등심도 뼈등심 부위인 윗등심과 아랫등심으로 나눌 수 있다. 뼈등심은 고부가가치인 구이용으로 아랫등심은 지금처럼 탕수육이나 돈가스용으로 활용하면 된다. 

삽겹살도 요추 2번정도에서 나누어 다른 용도로 메뉴 개발을 할 수 있다. 쇠고기를 120가지 부위로 세밀하게 나누어서 먹었던 우리라면 이제 한돈의 숨은 부위의 맛을 더 세밀하게 찾아서 한돈의 부가가치를 높이고 한돈 식당들이 돈을 좀 벌었으면 좋겠다. 사람들은 더 맛있는 한돈을 먹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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