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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육식의 시작

 인류 육식의 시작

일반적으로 ‘육식’이라는 단어는 동물의 고기를 먹거나 또는 그 고기를 원료로 만든 음식을 먹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사실 오로지 고기만 먹는 것을 육식이라고 하지 않는다. 즉, 식물성 식재료로 만든 음식만 먹는 것을 채식이라고 부르면서 그 반대의 의미로 육식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지만, 육식은 육류와 식물성 음식을 함께 먹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육식이라는 용어보다는 잡식(雜食)이라는 용어가 더 적합하다.
인류의 육식(잡식)문화는 식문화와 역사를 같이 한다.

40만년전 사람과 원숭이 둘 중 하나로 나눈다면 원숭이류(영장류)로 볼 수 있는 아르디피테쿠스(속)가 등장한다. 우리의 직계 조상 후보 중 하나다. 본격적으로 사람의 모습을 한 호모는 이후 여러 종으로 분화된다. 최초의 호모인 호모 하빌리스는 250만년~180만년 전에 등장했다가 사라졌는데, 호모 속에서 유일하게 사람이 아닌 것(즉 원숭이류)으로 보인다. 호모 하빌리스에 이어 호모 에렉투스가 180만년 전에 등장한다. 중국의 북경인과 인도네시아의 자바인이 여기에 속한다. 호모 에렉투스는 현생 인류가 번창하는 4만년 전까지 생존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호모 사피엔스가 15만년 전 아프리카에서 등장한다. 호모 사피엔스는 사촌격인 네안데르탈인, 그리고 다른 방계인 하이델베르그인, 그리고 직계 조상인 호모 에렉투스 등을 약 3~4만년 전에 멸종시키고 현재까지 유일하게 생존한 인류다. 
육식과 화식을 통해 인류의 뇌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뇌 435cc에서 지금의 1350cc로 커졌다고 한다. 
호모하빌리스(Homo habillis)는 신생대 제 3기 홍적기 전기에 아프리카 동부와 남부에서 살던 화식인류다. 호모하빌리스는 대체로 육식을 많이 했다고 한다. 적극적인 사냥이라기 보다는 소형동물을 사냥하거나 죽은 동물의 사체를 청소하는 청소부 역할을 하거나 다른 동물의 사냥감을 빼앗기도 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껜석기를 사용 다른 동물이 먹고 남긴 사체에서 뼈속 골수를 파먹었다. 
호모 에렉투스는 142만년전에 불을 일으켜 날것보다 익힌 것이 더 좋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류 진화 계통도. 오른쪽 위에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는 호모(Homo)들이 있다. 호모 속의 아래에는 원숭이로 분류할 수 있는 직계 조상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있고, 가장 아래에는 아르데피테쿠스(여기서는 방계로 되어 있네요)가 있다. 사람에 비해 침팬지의 조상이 거의 없다는 점이 특이하다.  인류의 기원과 역사 인류의 역사 네이버 블로그 
 



출처 위키백과 호모에렉투스

인류가 육식을 하였다는 증거는 많은 유적에서 발견된다. 구석기시대 원인(原因) 유적에서는 여러 가지 짐승의 뼈가 출토되었고, 신인류(新人類)가 출현한 뒤의 알타미라와 라스코 동굴 등에는 수렵광경이 그려져 있다. 이들은 고기 이외에도 나무열매나 풀의 싹 등 식물성 음식도 섭취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빙하시대(憑河時代) 및 후빙기(後氷肌)에는 추위에 견디기 위한 에너지의 공급원으로 사냥한 고기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리고 빙하시대가 끝나고 숲이나 초원이 늘어남에 따라 식물성 음식도 많이 섭취하게 되면서 인간은 실질적인 잡식동물이 되었다.
원시시대는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로 구분되는데, 처음 인류가 발생한 시기에는 식량은 당연히 자연에 존재하는 먹을거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채집과 사냥, 물고기 잡이 등이 식재료 확보를 위한 주요 활동이었다. 
  구석기시대에는 짐승사냥이 식량획득의 주요 방법 중 하나였다. 구석기시대에는 지금보다 짐승들의 종류와 수가 많았으며 원시인들의 좋은 사냥감이었다. 구석기시대의 유적들에서 발견되는 포유동물의 화석을 보면 이미 사멸한 종들도 많이 발견된다. 멧돼지, 말, 사슴, 말, 물소, 곰, 토끼의 뼈가 유적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아 당시 사람들은 주로 이런 짐승들을 사냥하여 식생활에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사냥을 통하여 얻어진 동물은 사람에게 영양가 높은 지방과 단백질의 좋은 공급원이 되었다. 또한 강이나 바닷가 주변에서 살던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가장 원시적인 방법으로 물고기도 잡아먹었다. 이처럼 구석기시대의 주민들은 짐승사냥과 물고기 잡이로 양질의 식량을 확보하면서 점차 생산 활동을 넓혀 나갔다. 
  구석기시대 원시인들의 식량획득 방법 중 다른 하나는 채집이었다. 그들은 생활과정에서 먹을 수 있는 식물의 열매와 잎, 뿌리 등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었으며, 그것들을 채취하며 섭취하였다. 지금으로부터 60만~40만 년 전으로 추정되는 구석기 시대의 유물들은 당시 인간들이 무리생활을 하면서 나무열매를 따먹거나 풀뿌리를 캐어 식량으로 삼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당시 기후는 지금보다 훨씬 더웠고 수풀이 우거져 있었던 만큼 나무열매, 풀뿌리와 같은 것들이 많았다. 10여 만 년 전에 살았던 원시인들의 유적지를 보면 나무열매나 뿌리열매, 즙 많은 식물의 줄기와 새싹, 전분이 많은 풀씨 등을 채집하여 먹은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신석기시대에 이르러 농업과 목축이 시작되었다. 인류는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 중기에 이르는 긴 세월 동안 자연물을 식량으로 삼았다. 그러나 자연이 제공하는 식재료만 이용하던 원시인들은 자연을 정복하기 위한 활동과정에서 점차 곡식을 심어 먹고 야생짐승을 길들여 키우게 되었다. 식용식물 채집으로부터 작물재배로의 이행은 자연의 구속에서 벗어난 새로운 진전이었으며 그들의 식문화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 농사의 보급으로 떠돌아다니며 생활하던 사람들을 정착생활을 하게 하였으며, 보다 안정되고 계획적인 식재료의 확보로 식생활의 개선이 이루어졌다. 
  특히,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목축을 통해 양질의 동물성 단백질 공급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게 되었다. 그들은 장시간 짐승사냥을 통하여 짐승을 사로잡아 가축으로 길들이고 기르는 법을 알게 되었고, 가축의 번식법을 습득하게 되면서 점차 많은 동물성 식품을 확보하게 되었다. 신석기시대에 길들인 짐승은 주로 개, 돼지, 소, 말 등으로 이렇게 가축화된 동물을 사육하면서 영양가 높은 고기와 젖, 기름을 식생활에 이용하였다. 물론 강이나 바다로부터 획득한 물고기도 주요 동물성 식재료로 이용되었다.  
  한편, 원시시대 사람들의 식문화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한 것은 불의 발견이었다. 인류가 불을 발견한 것은 구석기시대 전기로 처음에는 자연적으로 일어난 불을 보존하면서 이용하였다. 원시인들은 구석기시대 중기에 이르러 인공적으로 불을 일구게 되었으며 그것을 생활에 널리 이용하였다. 구석기시대의 유적지에서 타다 남은 짐승의 뼈들이 발견된 불모지터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원시인들이 구석기 중기부터 이미 고기를 익혀 먹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인류가 고기를 구워 먹거나 익혀 먹게 된 것은 인류가 이룩한 식문화의 시작과 같은 것이었다. 식재료를 굽거나 익혀 먹게 됨으로써 그대로 먹을 수 없었던 식물성 식재료도 여러 가지로 조리하여 먹게 되었고, 사람들의 소화와 건강, 영양분 흡수에서 변화가 일어나 체질 구조상의 진화를 촉진시켰다. 굽거나 익힌 음식물은 날것보다 상대적으로 오래 보관할 수 있고 위생적인 면에서도 좋은 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장점을 차츰 인식하게 된 원시시대 사람들은 날것을 그대로 먹던 생활에서 점차 익혀 먹는 식생활로 전환되어 갔다.
  인류의 불의 사용은 고기를 조리하는 기구들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구석기시대에는 돌로 만든 찍개, 긁개, 칼날 같은 단순한 조리용 도구들뿐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개껍질, 짐승뼈 등 여러 가지 재료로 만든 도구들이 나타났다. 특히 신석기시대에 질그릇이 생산되면서 더 다양한 조리도구들이 제작되어 이용되면서 종전에는 고기를 날것으로 먹거나 구워먹었는데 이때부터는 끓이거나 볶거나 조리거나 지져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가축화 역사
 동물, 특히 포유류는 인간 사회의 일부로 존재해 왔다. 그 한 가지 이유는 인간이 다른 영장류와는 달리 식용으로 다른 동물을 사냥하기 위해 지적, 무력적 우월성에 의존하는 육식동물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냥꾼으로서의 인간과 그 포획물 그리고 인간과 경쟁 관계에 있는 포식자와의 사이에 복잡한 사회적 관계가 발생한다. 이러한 상호 작용의 영향은 우리 현대인들에게도 여전히 남아 있다. 아직도 고도의 비언적(鄙諺的) 의사소통 방법을 사용한다는 사실이 가장 두드러진 증거일 것이다. Jc블록, “인간과 가축의 역사”, 새날, 2004, p23.
 
동물들이 가축화되던 초기에는 사냥꾼인 인간이 포획물인 동물의 행동과 생활에 동화하는 방향으로 진전되었다. 이러한 관계는 소 떼와 함께 이동하며 생활했던 미국 인디언들, 순록 떼와 함께 살아가는 노르웨이 북부의 라플란드 사람들에게서 오늘날에도 지속하고 있는 현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동물의 가축화는 수많은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또 반복적으로 시도되면서 오랜 세월에 걸쳐 서서히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과정 중에서 야생으로 돌아간 동물도 상당히 많으며 가축으로 성공적으로 자리 잡은 동물들에는 오늘날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소, 돼지, 닭, 말, 개, 토끼, 염소, 양, 오리, 거위 등이라고 할 수 있다.
야생동물로서 가축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영국의 인류학자 프란시스 골턴은 다음과 같이 6가지를 제시했다.
①몸이 튼튼해야 한다. 
②천성적으로 사람을 잘 따르고 좋아해야 한다.
③생활 환경에 대한 욕구가 너무 높지 않아야 한다.
④고대인들에게 유용성이 커야 한다. 
⑤자유로운 번식이 가능해야 한다. 
⑥사육이나 관리가 쉬워야 한다. Jc블록, “인간과 가축의 역사”, 새날, 2004, p25.

모든 야생동물에게 가축이 될 기회가 있었던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위의 여섯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 아득히 먼 옛날에 가축이 된 동물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때로는 한 가지 조건을 채우지 못해 탈락하는 일도 있었을 것이다. 인간의 문명이 발달하면서 이들 야생동물은 점점 생존에 위협이 가중되고 있는 실정이다. 야생의 동식물은 각종의 자연적 및 생물학적 조건에 의해 선택되고 진화되어 왔지만 가축으로 된 동물들은 지리적으로 격리된 상태에서 인간의 목적에 따라 선택되어 오면서 오늘날에 보는 바와 같은 여러 가지의 가축 품종으로 진화 정착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고학에 근거한 가축화의 대략적인 기간)

영어로 가축이라는 livestock을 그대로 풀어 보면 live+stock  즉 살아있는 저장품이라는 뜻이다. 야생의 동물들이 가축화된 건 사람들이 저장해 두고 필요할 때 먹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야생의 동물이 가축화된 건 특히 양, 염소, 소가 가축화된 건 종교적인 이유가 크다. 
양과 염소는 작아서 가축화가 쉬웠다. 월식과 일식 같은 자연현상이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면서 미리 시간에 맞추어 제물을 준비하기 위해서 야생의 가축을 잡아서 기르기 시작했다.

돼지는 달랐다. 돼지는 스스로가 사람들이 있는 거주지 주변에 내려와 사람들이 소화하지 못하는 쓰레기와 인간 쓰레기 인분을 처리하는 청소부의 역할을 했다.
아마 돼지는 정해진 곳에 배설을 하는 습성이 있어서 거주지 주변의 쓰레기들을 먹고 일정한 장소에 배설을 했다. 그곳에서 작물이 잘 자라는 걸 사람들이 우연히 발견하고 돼지는 퇴비를 생산하는 주요 역할이 주어졌다. 사람들은 돼지가 뱀등 파충류에 물려도 죽지 않고 뱀등 파충류들을 잡아 먹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뱀을 집 주위에서 키우면서 뱀등 파충류가 집안으로 들어와서 해를 끼치는 것을 돼지와 함께 생활하면서 방지하였다. 
한자의 집가(家)를 풀어 보면 집(宀)인데 돼지(豕)를 기르는 곳을 의미한다.

흔히 인류의 가축화는 극동지역이라고 생각하는데 돼지는 극동지역은 물론이고 중국등 지구의 여러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가축화가 이루어졌다. 

돼지는 다른 가축과 달리 한 배에 10마리 이상의 새끼돼지를 낳고 우수한 어미돼지는 1년에 25마리 이상의 새끼 돼지를 생산할 수 있다. 또한, 발육이 빨라서 우수한 개체는 성장 기간 중 하루에 1㎏ 이상 자랄 수 있으며 돼지가 생산하는 고기는 단백질, 비타민 등 각종 영양소가 풍부하고 맛이 좋아서 인간의 중요한 식품으로 이용되고 있다.
현재 우리가 기르는 집돼지는 모두 야생멧돼지(Sus scrofa)의 일부가 순화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야생멧돼지는 유럽, 아시아, 북아프리카의 여러나라에서 오늘날에도 많이 살고 있으나 북아메리카에는 살고 있지 않으며 신석기시대에 가축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멧돼지는 현재의 개량된 집돼지와 비교해 보면 몸보다 머리가 크고 네 다리가 길며 앞몸 부위가 발달 되어 있다. 

이처럼 집돼지의 체형이 멧돼지에 비하여 크게 달라진 것은 인류가 멧돼지를 집돼지로 개량할 때 고기를 생산하는 능력이 우수하도록 변화시키는 동시에 인류에게 더욱 이용가치가 있는 몸 부위가 발달하도록 변화시킨 데 기인하는 것이다. 집돼지는 멧돼지보다 체형이 달라졌을 뿐 아니라 한배에 낳는 새끼 돼지의 수도 훨씬 많아졌다. 한 배 새끼의 수가 많으면 돼지를 길러 더욱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으므로 인간은 한배 새끼의 수가 많아지도록 개량하여 온 것이다. 
서아시아에서는 기원전 8000~7000년경에 멧돼지가 가축화되었거나 최소한 이 시대에 처음 인간의 간섭이 시작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초기의 정착 농경민이 양과 염소를 사육하기 시작한 것과 같은 시기에 멧돼지 사육을 시작했을 것이다. 반면 같은 시기(문화적으로 중석기 시대) Jc블록, “인간과 가축의 역사”, 새날, 2004, p.133.
에 유럽 북부와 서부에서는 멧돼지가 붉은 사슴과 함께 주된 식육의 공급원이었다. 2000~3000년 후에 초기 농민이 동쪽에서 유럽으로 이동하면서 사육된 돼지를 전파했다. 가축화 초기에는 돼지와 소가 가축 양이나 가축 산양보다 더 성공적으로 번성했다. 그 이유는 삼림이 울창한 지세와 지역적 환경이 염소와 같은 동물보다는 돼지와 소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돼지는 소나 염소보다는 개와 사람에 가깝고 여러 측면에서 습성 역시 육식동물의 중간형이고 인간이 교란한 자연환경에 적응하기 쉬운 우제류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이든 잘 먹어서 사람이나 개가 먹고 남긴 찌끼기로도 살아갈 수 있다. 돼지는 가족 집단의 다른 구성원과의 신체 접촉을 즐기는 성질을 갖는다. 이러한 특성은 그들의 번식 방식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돼지는 한 번에 10마리까지 많은 새끼를 낳는 데 비해 다른 우제류는 겨우 1마리 또는 많아야 3마리가 보통이다. 돼지의 또 하나의 특징은 보금자리와 잠자리를 꾸미기의 습성이다. 돼지는 모두 코로 땅을 파거나 모래나 진흙 위를 뒹굴어 움푹 파인 구덩이를 만든다. 암컷은 새끼를 낳을 보금자리를 꾸민다. Jc블록, “인간과 가축의 역사”, 새날, 2004, p.134.
 
고대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돼지의 사육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사용되어왔다. 그 하나는 돼지 치는 사람의 감시하에 많은 돼지 떼를 숲속에서 자유롭게 놓아 기르는 방법이다. 또 하나의 방법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행해지고 있는 것으로 돼지우리에서 기르는 방법이다. 로마 시대와 그 전후 최소한 1000년 사이에 숲에서 사육된 돼지는 털빛이 진하고 사지가 길었다. 체구가 몹시 작아서 아마도 멧돼지의 절반 정도였을 것이다. 고대 로마인들 사이에서 돼지는 자연이 우리에게 베풀어 준 만찬이라는 말이 떠돌았다는 사실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우리에서 사육한 돼지는 놓아 기른 돼지보다 몸집이 컸고 로마 시대부터 가죽이 매끄럽고 살갗이 희었다. 더군다나 너무 살이 쪄서 제대로 서 있기가 곤란할 지경이었다. 
돼지는 항상 가난한 사람들의 동물이었다. Jc블록, “인간과 가축의 역사“, 새날, 2004, p.139.
 중세 이후에 영국에서는 지방질이 많은 베이컨이 가장 경제적이고 일반적인 식육 원이었다. 거의 모든 가정에서 우리에 돼지를 길렀고 가족들이 먹고 남긴 음식 찌꺼기를 먹여 길렀다. 

우리 민족이 돼지를 키우기 시작한 역사에 대해서는 남한과 북한의 학자들간의 이견이 있다. 돼지는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자생하는 야생멧돼지가 있어서 유적에서 발견되는 뼈가 가축화된 집돼지 뼈인지 사냥해서 잡아온 멧돼지뼈인지 잘 구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남한의 학자들은 약 2000년내외로 가축화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반면 북한의 학자들은 기원전 2000년에서 1000년 사이에 돼지가 가축화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차이는 어쩜 북한 지역의 돼지 사육방식이 한반도의 남쪽까지 이동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수도 있다는 걸 의미한다.

소의 조상은 야생 오록스인데 오록스의 크기는 지금의 인류가 사육하는 그 어떤 소보다도 컸다. 현재 멸종된 오록스는 1.8미터의 높이를 지금 우리가 사육하는 젖소는 1.5미터 정도다. 무게도 오록스는 1톤이 넘었다. 
그런 소를 단순히 고기, 유제품 그리고 가죽을 얻기 위해서 인류가 가축화하였을까? 
야생 오록스의 쇠고기는 인류에게 매력적인 고기였겠지만 덩치가 큰 야생의 오록스를 가축화시키는 건 위험한 일이였다. 단순히 고기만을 얻기 위한 목적이라기 보다는 종교적인 목적이 더 컸다.
희생(犠牲) 이라는 한자를 보면 두 한자 모두 소(牛)자가 보인다. 
인류학자 Eduard Hahn는 풍요의 상징인 달이란 상징물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했던 사람들이 소의 뿔이 뚜렷하게 구부러진 모양의 초승달을 연상시켜 제사의 희생으로 소를 가축화 시켰다고 보았다. 지금도 인도의 힌두교에서 소를 우주의 어머니들로 여기는 걸 보면 소가 가축화된 건 제사의 희생으로 쓰기 위해서 였다. 키우다보니 은행에서 이자를 받아 쓰듯 죽이지 않고도 우유를 얻어서 유제품을 만들어 먹을 수도 있었다. 우유는 신이 준 선물로 받아 들였다. 축력으로 이동과 농사에 활용도 가능했다. 아마 가축화된 소를 완전히 길들이는데 상당한 시간이 더 필요해서 기원전 4000년경부터 이동수단으로 소가 이용되고 다음 우경을 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 가장 오래된 품종의 소는 이태리의 치아니나다. 이소는 2차세계대전이전까지 역우였으나 지금은 우리 한우처럼 육우로 개량되었다. 

인류가 소고기에 관심이 커진 건 아마도 산업혁명이후의 영국에서 시작되어다고 봐야 한다. 
아니 우리 조상들은 고려 후기 몽골의 간섭기 이후 쇠고기에 대단한 관심을 보인다.
우리민족이 소를 키우기 시작한 건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하던 기원전 2000년 경으로 추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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