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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빨리문화와 삼겹살 구이

다큐 삼겹살 랩소디에서 백종원대표, 음식 연구가 박정배선생, 황광해 선생이 처음 나와서 이야기하는 것이 식탁위의 불

직화구이 문화를 이야기 한다.

삼겹살 랩소디에 성협의  고기 굽기  그림이 나온다.

사실 조선시대 이들 그림속 고기 굽기는 아마 지금 시대라면 강남에 유명 룸싸롱을 가거나 고급 클럽을 출입하는 것 같이 아주 상류층의 특권적 모습이었지 일반인들이 고기를 만날 수 있는 기회는 년중 그렇게 많지 않았다.

고기를 구워 먹는 건 양반과 권력자의 특권이었다.

농촌의 농부는 어쩌다 돼지고기를 맛 볼 수 있었지만 쇠고기 맛은 평생 한번도 못 볼 수 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상상할 수 없지만 전세계 어느 나라나 지금부터 300년전에는 고기는 권력자 그 자체였다.  

고기의 인문학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지 5년 정도 되었다.

그 5년 동안 고기에 관련된 3권의 책을 썼지만 아직도 찾지 못한 물음이 왜? 유독 우리나라와 일본만 식탁위에 불이 있는가 하는거다.

일본의 음식학자 정대성교수가 일본의 식탁위의 불은 일제 강점기 조선인들이 먹는 걸 보고 따라 한거라고 했으니 우리나라가 식탁위 불의 발상지인 것이 맞다.

정대성교수는 일제강점기 부터라고 하지만 우리나라의 그 어떤 자료에도 그걸 찾을 수 없다.

난 처음에 식탁위의 불에 대해서 별로 생각이 없었다.

1999년인가? 미국 덴버에 쇠고기를 사려 갔었다.

미국 패커들이 한국에서 바이어가 왔다고. 집으로 초대해서 정원에서 두툼한 스테이크 파티를 해 주었다. 미국 드라마나 영화에서 자주 보던 광경이었으니 이게 미국 문화구나 했다. 일차 스테이크 파티가 끝나고 실내 식탁에서 전기 그릴을 우리를 위해 특별히 구매했다고 하면서 엷게 썬 로스구이와 와인을 대접하는 것이 아닌가?

그때 참 한국에서 본  신기한 고기 문화라고 하면서

난 사실 그때까지 식탁위에 불은 어느 나라나 다 있는 고기 문화인 줄 알았다.

일본에 가끔 갔는데 일본은 완전 우리나라랑 똑같이 고기를 먹고 있으니 전세계가 고기를 식탁위에서 굽기도 하는 줄 알았다.

다큐 삼겹살 랩소디에서 직접적인 출연자 말고 인터뷰하는 사람중 내가 가장 무명이다. 워낙 쟁쟁한 분들이라 난 사실 이 직화구이 문화가 왜? 생겨 났는지 알고 싶었다.

지난 5년간 나름 많은 문헌자료들을 찾아 보아도 앞에서 언급한 정대성 교수의 글 밖에는 찾을 수 없었다.

조선 시대 두 그림 역시 야외에서 고기를 굽는 거지 실내에서 고기를 굽는 건 아니다.

그럼 언제 부터 누가? 왜? 고기를 실내에서 그것도 주방이 아니라 식탁위에서 직접 구웠을까?

1920년대 30년대 냉면집에서 갈비가 유행하던 시절에도 주방에서 갈비를 구워서 접시에 담아서 왔다고 하지 갈비를 식탁위에서 굽지는 않았다.

박찬일의 백년식당을 읽어 보면 서서갈비는 분명 실내에서 드럼통을 식탁으로 만들고 식탁위에서 직화로 갈비를 구웠다.

정대성 교수는 해방이전이라고 했는데 사실 해방 이전에 고기를 실내에서 굽는 건 찾아 볼 수 없었다.

누가 좀 찾아 주었으면 한다.

 

이규진 교수의 2010년 박사논문 ' 근대 이후 100년간 한국 육류구이 문화의 변화'에서도 식탁위의 불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왜? 우리나라만 식탁위에 불이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몇 가지 가설을 세워 볼 수 있는데

첫째,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있고 지금은 고기가 사계절 식재료지만 소나 돼지같이 몸집이 큰 가축은 보관상에 문제로 주로 겨울철에 집중해서 잡아 먹었으니 추운 야외에서 고기를 굽을 수 있는 기간에 너무 추워서 실내에서 구워 먹었다.

둘째, 숯과 화로의 발달이다.

통일신라시대에 경주의 모든 집에서 밥과 음식을 만들 때 숯을 이용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숯과 실내 화로가 발달되어 있어서 실내에서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었다.

셋째, 처음에는 실내 부엌의 아궁이에서 고기를 구웠는데 그게 발전되어 그냥 실내 식탁에서 구워 먹게 되었다.

넷째. 빨리빨리 문화 성격 급한 민족성 때문에 고기가 주방에서 구워 나오는 시간되 참지 못했다.

어느 것도 정답이 아닐 수 있는 추측이다.

다만 삼겹살의 유행과 빨리빨리 문화에의 상관관계는 분명 있는 듯 하다.

이규진 교수의 박사 논문' 근대 이후 100년간 한국 육류구이 문화의 변화'에 참 많은 자료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우리나라 육류구이 문화의 형성과정에서 로스구이, 시오야키(소금구이)의 역사는 그렇게 길지 않다.

로스구이는 roast 구이다.

물론 1970년 80년대 신문 기사를 보면 등심이라는 일본말 로스 즉 등심구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로스구이는 일제 강점기에 유행된 요리가 아니고 해방이후 미군정, 미군이 주둔하고 난 이후에 생겨난  요리다.

로스구이는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주로 쇠고기 요리였다.

로스구이는 미군이 주둔하고 나서 우리가 접하게 된 스테이크의 한국형이다.

해방후 미군정이 시작되고 미군이 주둔하면서 아마 밤마다 많은 파티가 우리나라의 상류층 사람들과의 교류를 위해서 열렸다. 거기에  미국 음식인 두툼한 스테이크가 주메뉴로 등장했을 거다. 당시 미국은 이미 육류 등급제가 시행되고 마블링 개념이 도입된 육우를 키우고 있었으니  당시 역우로 마블링이 거의 없었던 우리나라의 소고기보다 부드러웠다.  해방직후 해방에 기쁨에 취한 사람들이 소를 너무 많이 잡아 먹어서 농우가 부족한 사태가 벌어진다. 다들 미국이 우리 농우를 잡아 먹어서 소가 모자란다고 하니 미군이 공식적으로 자신들은 미국산 소고기를 가져다 먹는다고 발표를 한다.

우리나라의 구이문화는 주로 양념을 한 고기를 굽는 문화였다. 이는 맛도 맛이지만 질긴 고기를 마리네이드해서 부드럽게 만드는 중요한 요리법이다. 어느 책에는 하루정도 마르네이드를 하는 걸 거의 발효수준으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소금과 후추만으로 요리되는 스테이크의 맛 그것도 진한 마블링이 있는 미국 소고기의 맛은 우리나라의 상류층이나 권력층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집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당시 역우, 농우, 축우로 불리던 조선우(한우를 한우라고 부르기 시작한 건 1954년경이 아니였는가 하는 추측만 하고 있다.)로 두툼한 스테이크를 구워 봤다. 도저히 그맛이 안나고 요리하는데도 시간이 오래 걸렸다.    무진장 질겼다.

전쟁이 끝나고 1960년대쯤 일본에서 육절기가 도입되어 한우를 엷게 썰어서 구워서 먹으니 소고기의 풍미를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엷게 썰어서 구워먹는 로스구이가  숯불화로와 만나고 다시 로스구이용 핫프레이트랑 만났다. 한국의 로스구이용 핫프레이트는 1975년경에 만들어 졌지만 이미 일제나 미제는  많이 도입되어 있었다. 어릴 적에 우리집에 있던 일제 핫프레이트는 프레이트형이 아니라 사각 전골 냄비처럼 깊은 모델이었다. 겉은 은색이고 안은 검은 색 뚜껑이 있었는데 그 뚜껑에 작은 구멍이 있었다.  벌써 50년도 더 지난 기억인데 그 구이기를 기억한다. 주말 저녁이면 증조할머니,할아버지, 할머니와 4대가 모여서 불고기를 주로 구워 먹었던 기억

어릴 때 한번도 집에서 돼지고기를 특히 삼겹살을 구워 먹어 본 적이 없었다.

소고기 로스구이가 1976년 한우 파동으로 가격이 높아져서 자연스럽게 삼겹살 로스구이로 고기만 소고기가 돼지고기를 달라졌다. 삼겹살 구이의 원형은 한우 로스구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육류의 소비는 설과 추석에 집중되어 있었다. 특히 한우 소비는 더 명절에 집중되어 있었다. 주로 명절에는 산적이나 탕국용 부위가 인기가 있고 등심 부위가 저수요부위가 된다. 그 등심들을 모아서 냉동시켜 두었다가 식당에서 로스구이로 판매하게 되었다.

로스구이는 미국 스테이크의 한국화

과잉 미국화의 산물이다.  

주영하 교수는 '음식전쟁 문화전쟁'이라는 책에서 삼겹살의 기원이 주한미군부대 근처에서 미군들의 바베큐 파티를 보고 이를 주민들이 따라하게되면서 당시에는 그나마 구하기 쉬웠던 삼겹살을 폐드럼통에 구워먹은 게 시작이 아닐까라고 기술한 바 있다.( 음식 전쟁 문화전쟁 이 책을 읽었는데 이 내용이 왜? 기억이 안나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음식 역사학자도 미군 바베큐 파티설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봐서 내가 주장하는 로스구이는 미국 스테이크의 한국화설도 가능한 가설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우리 민족의 빨리빨리 문화가 더해져서 삼겹살구이는 지난 50년간 가장 사랑받는 육류 요리가 가장 인기있는 외식 메뉴가 되었다.

로스구이는 이제는 등심구이, 삼겹살구이, 오리로스등 다양한 육류의 한 요리법이다.이제는 로스구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이걸 옛날 방자구이와 같은 요리라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방자구이는 문헌에만 있는 요리이지 실제는 사랑받지 못한 요리였던 것으로 추측한다.  

빨리빨리문화라는 것이 그냥 우리가 이야기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나름 연구가 된 사회 현상이다.

로스구이에 대한 최초의 신문기사 1967년

빨리빨리 풍조는 산업화에 따른 전세계 공통적 현상이라는 의견이다. 노동의 패턴을 비교적은 자유롭게 정할 수 있는 농경사회과 달리, 산업화된 사회에서는 항상 빠른 속도로 일을 처리해야 되는 '마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원래 분업화된 공장 노동의 이점은 빠른 속도로, 각 노동자가 단순화된 작업을 더 빨리 해내는 것이다. 따라서 빡세게 돌아가는 공장이나, 매우 밀집된 대도시에서는 더욱 신경질적인 '빨리빨리'가 나타나기 마련이다. 사실, 이것은 한국뿐만이 아닌지라 아시아권이 전반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시간은 금이라'는 말도 있고, 이자가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지금 '선진국'으로 불리는 나라들은 대부분 18~19세기부터 산업화 사회에 진입한 나라래서 산업사회에 익숙해진 지 오래다. 그와 달리 한국은 이런 사회에 들어선 지 고작 수십 년 정도밖에 안 된 것. 옛날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저런 느려터진 조선인들"이라고 비난하고, 시간 관념이 느긋해서 느적느적 약속 장소에 오던 한국 사람들을 보고 '코리안 타임'이라고 했다. 그런 한편은 19세기 중엽의 일본을 방문했던 서양인들도 일본인을 시간 관념을 찾아볼 수 없는, 무책임하고 느려터진 민족으로 여겼다.

유독 한국은 산업화가 한 세대 만에 이루어져 그 속도가 급격했기 때문에 유독 빨리빨리 문화가 두드러진다는 의견이다.

한편 빨리빨리 문화가 남북분단으로 대표되는 냉전 경쟁의 영향 때문이라는 관점도 있다. 예컨대 빨리빨리 문화의 대명사로 불리는 박정희의 경제부흥 정책이나 새마을운동 등도 천리마 운동, 새벽별보기 운동 등 당시 북한의 속도전을 이기기 위하는 방편이었다는 것이다

나무위키

빨리빨리 문화와 삼겹살 구이와의 관련성을 더 연구해 봐야겠지만

빨리빨리 문화가 압축성장의 결과물이다.

역시 삼겹살 구이 문화도 압축성장의 결과물이다.

냉동 삼겹살은 한국형 패스트푸드다.

로스구이는 한국형 패스트푸드다.

소고기는 도시형 고기다.

돼지고기는 농촌형 고기다.  헤럴드 메기의 음식과 요리에서 정의한 도시형고기와 농촌형 고기와는 조금 다른 의미다.

조선시대 한양 사람들 양반과 권력자들은  17세기 이전까지는 주로 소고기를 즐겼다. 우리 조상들이 전세계에서 가장 소고기 탐식의 역사가 긴 민족이라는 건 다음 기회에 설명하기로 하자.

반면 조선시대 우리나라 인구의 90%였던 농민들은 돼지고기를 즐겼다.

한양에서 돼지는 제례나 빈례를 위해 나라에서 키웠는데 이렇게 헤럴드 메기의 표현처럼 도시형으로 키우는 돼지는 생산비가 너무 비싸서 나라에서도 감당을 못했다. 반면 농촌에서는 집에서 한두마리 채비동물로 청소동물로 별 비용이 들어가지 않고 쉽게 키울 수 있는 것이 돼지였다.

돼지는 농민의 관혼상제에 요긴한 고기를 제공해 주기도 했다.

지금은 돼지를 키우는 목적이 고기를 생산하기 위해서지만 조선시대에는 비료를 얻고 농가 부산물들을 청소하기 위해서 돼지를 키웠다.  반면 소는 풀만 먹는 것 같지만 일년에 성인 남자 한사람이 먹는 콩등 곡류 사료로 주어야 하기 때문에 지주나 양반이 아닌 일반 농민이 소를 키우는 건 경제적 부담이 많이 되는 일이였다. 조선시대에는 농가 10가구당 소 한마리 정도를 사육했다고 한다. 돼지에 대한  조선시대 통계는 없지만 1909년 통계 자료에는 당시 일본보다 조선반도의 돼지가 더 많았다.  

농촌에서의 돼지고기는 주로 삶거나 끓여 먹는 습식 조리법으로 요리되었다.

삶거나 끓이는 습식 조리법은 조리시간도 길고 감량도 많이 생겨서 이윤을 남기는 장사보다는 공동체의 잔치같은 용도에 주로 이용되는 요리다.

산업화가 되면서 이농으로 도시로 몰려온 사람들은 습식 조리법의 장시간 조리 시간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을 빨리빨리 문화에 익숙해 지면서 점점 전통적인 습식 요리법으로 돼지고기를 요리해 먹는 일이 적어지고 삼겹살 구이에 집중하게 된 것이다.

주방에서 요리해 오는 시간도 기다리지 못하는 빨리빨리 문화

아마 압축성장 고도성장기에 적응하는 문화였다.  

이제 고령사회가 되고 저성장의 시대에 사회의 전반적인 문화가 변화한다면 삼겹살 구이 문화도 전통적인 습식 문화로 변화하지 않을까?

물론 마이야르 반응에 중독된 지난 50년간의 식생활이 갑자기 어느날 변하지는 않겠지만

삼겹살이 그저 값싸고 수출잔여육이여서 남는 부위여서 우리가 좋아한다는 말은 음식학을 연구하는 음식사회학이나 음식 경제학이나 음식역사학적으로 맞는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지난 50년간의 양돈업이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점,  그래서 한돈산업으로 우리 농업을 견인해 나갈 수 있게 양적 질적 성장을 할 수 있었던 점 , 수많은 양돈 선진국들의 삼겹살 전쟁에서 잘 싸우고 있는 건 대일 수출을 위해 산업을 현대화하고 규모를 키우고 과학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고 우수한 젊은 이들이 한돈산업에 참여했기 때문일 수 있다.

다시 한번 이야기하는데 영국에 소고기 정육을 수출하고 남은 갈비를 주워서 먹던  아르헨티나의 아사도문화와 우리나라의 삼겹살 문화는 좀 다른 성격을 가진다.

우리나라의 삼겹살 문화는 압축성장의 산업화가 가져 온 사회현상으로 이해해야 한다.

물론 복합 유기 생산체인 돼지 한마리를 균형있게 소비하지 못하는 건 우리 사회가 가진 여러 문제점처럼 한돈 산업의 문제다.

일본도 그들이 좋아하는 등심의 자급율이 20%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소비 불균형의 문제는 어느 나라나 가지고 있는 문제다.

단지 부위가 다를 뿐이다.

이렇게 일본과 우리나라가 육류의 부위별 선호가 심한 건

우리사회의 한국형 스테이크 로스구이라는 과잉 미국화의 결과물일 수도 있다.

조선 시대 아니 1960년대까지도 돼지는 농가 아녀자의 부업이고 돼지를 키우는 주 목적은 채비동물이나 청소동물이었다.

닭도 계란 생산이 주목적이었지 고기 생산이 목적이 아니였지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닭고기 , 돼지고기 요리가 소고기 요리에 비해서 발전하지 못했다. 이런 역사속에서의 가축의 역할론, 음식의 역사가 지금 식생활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나마 돼지는 이제 가정에서 각종 요리가 가능하게 사람들과 친밀해졌지만 아직도 닭고기는 치킨으로 사먹는 고기이지 집에서 요리하기는 부담스러운 덜 친밀한 고기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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