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슬기로운 육식 생활
고려 초기의 육식 절제(위축)
고려시대 초기에는 살생을 금하는 불교의 번성으로 도축금지령이 비교적 잘 유지됐다. 『고려도경』에서, 살생을 꺼리는 풍조 때문에 도축이 서툴러 고기 맛을 버린다고 할 정도로 고려시대 전반기에는 육식 문화가 위축되었다. 그러나 고려가 불교 국가여서 육식(특히 쇠고기)을 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968년 광종을 시작으로 988년(성종 7년), 1066년(문종 20년), 1107(예종 2년)의 몽골 간섭기 이전과 이후인 1310년(충선왕 2), 1352년(충숙왕 2), 1371년(공민왕 20) 등의 시기에 도살금지령이 내려진 사실로 볼 때, 쇠고기에 대한 우리 민족의 기호도는 그만큼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도경 제23권 잡속2 도재[屠宰]에 따르면, ‘고려는 정치가 심히 어질어 부처를 좋아하고 살생을 경계하기 때문에 국왕이나 상신(相臣)이 아니면, 양과 돼지의 고기를 먹지 못했다. 또한, 도살을 좋아하지 않으나, [타국의] 사신(使臣)이 오면 미리 양과 돼지를 길렀다가 도착 시기에 사용하였다. 도축과 처리 방법은, 네 발을 묶어 타는 불 속에 던져, 숨이 끊어지고 털이 타 없어지면 물로 씻는다’라고 하였다.
백정, 양수척 등 도축과 관련된 역사에 의하면, 이 당시 도축을 업으로 삼았던 사람들은 전쟁 포로로 잡혀 온 외민족이라는 설이 있다. 귀주대첩은 1019년(현종 10)에 강감찬(姜邯賛)이 고려를 침입한 거란군을 귀주(亀州)에서 무찌른 전투를 말한다. 이때 살아 돌아간 거란 병사가 수천이고, 수만 명의 거란군은 포로가 됐다고 한다. 이 수만 명의 거란 병사들이 고려에 남아 소나 돼지를 잡는 일에 종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도경(高麗図経)) 제21권 조례 방자 편에는, 평상시에는 고기 먹는 일이 드물고, 중국 사신이 올 때는 마침 더운, 대서(大暑)의 계절이라 음식이 쉽사리 상해서 냄새가 지독한데도 먹다 남은 것을 [방자에게] 주면 거리낌 없이 먹어 버리고 먹고 남은 것은 집으로 가져간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는 지금의 로스구이 원조 격인 방자구이를 간접적으로 설명하는 부분이다. 방자라 불리는 하인은 박봉으로 채소 등을 수령하고, 간혹 윗사람이 먹다 남긴 고기 찌꺼기를 비록 조금 변질하여 냄새가 나더라도 달게 먹고 집에 가지고 가기도 한다고 했다. 방자구이는 소금만 뿌려서 굽는 것이므로 특별한 양념 재료나 조리기술 없이도 누구나 쉽게 조리할 수 있고, 식품이 가지고 있는 자체의 맛과 향을 즐길 수 있다. 먹을 때는 날파나 상추 겉절이를 곁들여 먹기도 했다.
서긍의 고려시대 육식에 대한 묘사에서, 이 당시에는 평상시 고기 먹는 일이 드물다고 표현했고, 못 먹었다고는 표현하지 않는다. 당시 하급 관리가 고기를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사회 환경은 아니었을 것이다. 여기서 방자는 관청에서 식재료 검수를 담당하던 직책으로 납품된 고기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 고기를 구워 소금에 찍어 먹었다는 설도 있다.
고려 초기에 과연 일반 민중들은 불교를 숭상했기 때문에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을까? 일반 백성들은 아마도 종교적인 이유보다는 경제 사회적인 이유로 육식이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고려도경 제26권 연의편을 보면, 술은 맛이 달고 빛깔이 진한데, 사람을 취하게 하지는 못한다. 과일과 채소는 풍성하고 실했는데 대부분 껍질과 씨를 제거했고, 안주로는 양육(羊肉)과 제육이 있기는 하지만 해물이 더 많다고 나온다. 이는 연례에 술과 안주가 나오는 것을 이야기하는데, 분명 양육과 제육, 즉 돼지고기 안주가 있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고려 초기 육식문화가 위축됐다고 판단하기엔 무리가 있다. 어떤 근거인지는 몰라도 몽골 간섭기에 몽골인들에 의해서 우리 민족의 육식문화가 부흥된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삼국시대에 불교가 들어오고, 육식 금지가 600~700년 동안 지속되면서 단절된 요리법이 특정 시기(몽골 간섭기)에 다시 부흥했다는 주장은 상식 밖이다. 따라서 맥적 등 고조선부터 발전했던 우리 민족의 육식 문화와 전통을 제대로 이해하고 전승하려면, 고려도경 등 옛 문헌에 관한 연구와 함께 고려 초기 육식 문화를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고려시대 육식 금지의 의미
광종은 도살하는 것을 금지했을 뿐 육식 자체를 금하지는 않았다. 고려시대 사람들은 육식 자체를 피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자겸과 같은 권신은 뇌물로 고기를 받았고, 고기가 수만 근이나 들어와서 썩혀 버려야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다만 왕공, 귀인 정도의 경제력이 아니면 고기를 먹기 힘들었으며, 민간에서는 버릴 정도로 상한 고기라도 귀하게 여겨 먹었다. 그러므로 고기를 먹을 기회가 있으면 불교를 숭상하는 것과 별개로 경제 사정이 허락하는 한 먹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려시대는 숭불로 인해 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생각할 만큼 많은 육식금지 사례는 왜 그리고 어떻게 나타났을까? 고려사에는 국가에 의해 육식을 하지 못 하게 한 사례(不食肉)가 육식 금지(禁肉食). 도살 금지(禁屠殺), 살생 금지(禁殺生)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된다. 그런데 이것들이 뜻하는 바는 조금씩 다르며, 반드시 불교의 영향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육식 금지(禁肉食)나 도살금지(禁屠殺)는 근신할 일이 있을 때 가축을 대상으로 관례로 행하는 경우가 많다. 즉 가뭄이 오래되면 도살을 금지하고, 왕은 반찬, 특히 고기반찬을 줄여 스스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다. 고려시대에는 가뭄이 군주의 부덕한 정사에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군주는 자신의 부덕함을 반성하고 잘못된 정사를 시정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한 노력의 실천으로 반찬 가지 수를 줄이는 것, 도살을 금지하는 등의 명령을 자주 내리게 되는데, 반찬 수를 줄이는 것과 도살을 금지하는 것을 비교적 자주 실행했다. 이것이 고려시대에 육식금지와 관련한 가장 흔한 사례이다.
한편 농우(農牛)가 감소하여 농사 활동에 필요한 소를 확보할 필요성이 있을 때도 도축을 금지하였다. 이런 경우는 고려 후기에 자주 나타났는데, 원(元)나라의 수탈과 외적의 침입으로 농우가 많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우금(牛禁)은 자연재해나 민간인들에 의한 도축, 도적에 의한 남살(濫殺) 등으로 농우가 부족하여 농사 활동이 우려될 때, 그리고 우역(牛疫)이 발생했을 때 실시된다. 그러므로 육식 금지와 도살금지는 숭불사상과는 크게 관련성이 없는 듯하다.
반면 살생 금지(禁殺生)는 부처의 자비가 모든 생물에 미치는 것으로서, 산 것을 죽이지 않는다는 가르침에 따라 가축의 도축뿐 아니라 어로, 수렵까지도 금지하는 것을 말한다. 즉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살생을 금지한다는 측면이 강해 불교사상과 깊이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고려시대에는 명시적으로 불교적인 이유로 살생금지령을 내린 예는 거의 없다. 다만 성종 7년 12월에 부도법(浮屠法)에 따라 정월, 5월, 9월을 삼장일(三長日)로 정하고 도살을 금지한 예가 있으며, 문종 20년 정월에 그해부터 3년간 조정과 민간에 걸쳐 도살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린 일이 있다. 이때의 도살금지령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고려시대에는 불교의 영향으로 고기를 먹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이유에서 고기를 먹거나 혹은 먹지 않았다.
고려시대 사람들은 육식을 즐겼다. 또한 이 시대 육식문화에 있어 몽골의 영향을 자주 거론하고 있지만, 몽골로 인해 일부 고기의 종류나 조리법에 변화가 발생했을 뿐 고려시대 식생활을 크게 바꿀 만한 것은 아니었다. 이 시대 축산은, 소 대신 먹을 수 있는 돼지, 오리, 닭, 개 등의 가축사육을 장려했고, 가축사육을 통해 고기 수요를 충족하였고 수렵을 통해서는 노루와 사슴 꿩, 고니가 공급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