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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의 가축화

소의 가축화

소의 조상은 야생 오록스인데 오록스의 크기는 지금의 인류가 사육하는 그 어떤 소보다도 컸다. 현재 멸종된 오록스는 1.8미터의 높이를 지금 우리가 사육하는 젖소는 1.5미터 정도다. 무게도 오록스는 1톤이 넘었다. 

그런 소를 단순히 고기, 유제품 그리고 가죽을 얻기 위해서 인류가 가축화하였을까? 

야생 오록스의 쇠고기는 인류에게 매력적인 고기였겠지만 덩치가 큰 야생의 오록스를 가축화시키는 건 위험한 일이였다. 단순히 고기만을 얻기 위한 목적이라기 보다는 종교적인 목적이 더 컸다.

희생(犠牲) 이라는 한자를 보면 두 한자 모두 소(牛)자가 보인다. 

인류학자 Eduard Hahn는 풍요의 상징인 달이란 상징물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했던 사람들이 소의 뿔이 뚜렷하게 구부러진 모양의 초승달을 연상시켜 제사의 희생으로 소를 가축화 시켰다고 보았다. 지금도 인도의 힌두교에서 소를 우주의 어머니들로 여기는 걸 보면 소가 가축화된 건 제사의 희생으로 쓰기 위해서 였다. 키우다보니 은행에서 이자를 받아 쓰듯 죽이지 않고도 우유를 얻어서 유제품을 만들어 먹을 수도 있었다. 우유는 신이 준 선물로 받아 들였다. 축력으로 이동과 농사에 활용도 가능했다. 아마 가축화된 소를 완전히 길들이는데 상당한 시간이 더 필요해서 기원전 4000년경부터 이동수단으로 소가 이용되고 다음 우경 즉 소를 이용해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소는 농업 발전에 기여했으며 유제품생산, 소고기, 소가죽은 주요 자원이 되었다. 고대에 소는 높은 교환가치가 있는 중요한 품목이 되었다.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 가장 오래된 품종의 소는 이태리의 치아니나다. 이소는 2차세계대전이전까지 역우였으나 지금은 우리 한우처럼 육우로 개량되었다.      

인류가 소고기에 관심이 커진 건 아마도 산업혁명이후의 영국에서 시작되어 다고 봐야 한다. 

영국의 농업학자인 로버트 베이크웰(Robert Bakewell, 1725년 5월 23일 ~ 1795년 10월 1일) . 베이크웰은 농업 분야에서의 일 외에도, 특히 가축의 체계적인 선별 사육을 최초로 시행했다. 그의 발전은 양, 소, 말의 특정한 향상으로 이어졌을 뿐만 아니라 인위적인 선택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에도 기여했다. 로버트 베이크웰은 주로 쇠고기에 사용되는 소를 처음으로 사육했다. 그는 긴 뿔을 가진 하이퍼와 웨스트모어랜드 황소를 건너 결국 디즐리 롱혼을 만들었다. 점점 더 많은 농부들이 그의 선례를 따랐을 때, 농장 동물들은 크기와 질에서 극적으로 증가했습니다.1700년 도살용으로 팔린 황소의 평균 무게는 370파운드(168kg)였다. 1786년까지 그 무게는 2배 이상 증가한 840파운드(381kg)였다.그러나, 그가 죽은 후, 디슐리 롱혼은 짧은 뿔 버전으로 대체되었다.
 

서구에서 육우로 유명한 애버딘 앵거스는 스코틀랜드의 애버션셔와 앵거스 지역에서 태어난 소의 후순이다. 앵거스는 1800년대 중반 스코틀랜드의 사육 업자 휴 왓슨이 고품질 고기를 대량으로 생산할 목적으로 특별히 개량하였다. 왓슨은 스코틀랜드 소에서 가장 좋은 표본을 골라 선택적이고 집중적인 교배법을 통해 앵거스종을 개량했다. 영국뿐 아니라 특히 미국에서도 인기가 있다. 애버딘 앵거스 쇠고기 품질은 1978년부터 certified angus beef, cab라고 알려졌다.     

현대 영어에서 비프(beef)라는 단어는 라틴어에서 유래되었다. 고대 로마인들은 소의 고기를 부플라(bubula)라고 불렀다.      

 우리 조상들은 고려 후기 몽골의 간섭기 이후 쇠고기에 대단한 관심을 보인다.

우리민족이 소를 키우기 시작한 건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하던 기원전 2000년 경으로 추측하고 있다. 우경을 시작한 것은 1세기 정도로 추측되며 우경이 본격화된 6세기경부터 우금령등으로 소를 잡아 먹는 걸 금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백제 사비시대에 일부 백제 지역에서만 소 무덤이 발견되고 다른지역에서는 전혀 발굴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나 신라에서는 일소로의 가치를 상실하면 잡아 먹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늙은 소고기의 맛은 그렇게 좋지 않았다. 고려초의 고려도경을 보면 소고기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를 근거로 우리나라 음식학의 대가인 고 이성우교수는 고려 중기까지 우리 조상들에게 소고기는 별로 인기가 없는 고기라고 까지 이야기한다. 우리 조상들의 육식생활을 고려 중기까지 불교의 영향을 육식을 삼갔다고 하지만 뚜렷한 근거가 없다. 고려 후기에 와서 몽골의 간섭으로 육식이 활발해졌다고 이야기하는데 사실 육식이 활발해 진 것이라기 보다는 몽골의 영향으로 지배계급의 소고기에 대한 인기가 높아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몽골는 유목민족이라 평생 힘든 농사일을 하는 소에 대한 연민이 없었고 몽골인들이 좋아하던 양의 사육이 불안정했던 고려에서 육식을 즐기던 몽골인들에게 소고기는 맛있고 인기있는 고기였다. 그걸 고려의 지배계급이 따라서 즐겼고 조선 건국이후에도 한양 양반들의 육식생활로 이어져 왔다. 반면 조선 시대에 한양에서 돼지고기는 키우기 어렵고 비싼 고기로 취급되어 양반층에서는 잘 먹지 못했다. 반면 농가에서는 채비동물로 한두마리씩 키우면서 새끼를 낳고 조금 크면 잡아서 마을 사람들의 잔치나 혼례와 제사에 주로 돼지고기를 애용했다.  고려말 우리 민족의 소고기 유행과 인기는 아마 세계에서 가장 먼저 소고기를 맛있게 즐겼다고 봐야 한다. 서양인들이 소고기맛에 관심을 가진 역사가 그렇게 길지 않다. 중세까지도 서양에서는 소는 유제품을 얻거나 축력을 이용하기 위해서 주로 키웠다. 우리 민족이 전세계에서 가장 소고기의 부위를 많이 나누어 먹고 있는 것이 소고기를 맛있게 먹고자 하는 시기가 전세계에서 가장 앞서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일두백미 우리 민족이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120가지 부위로 나눌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우리 민족이 소고기 탐식의 문화가 전세계에서 가장 길었기 때문이다. 

소고기를 좋아하는 영국이 소고기를 탐식하기 시작한 건 1750년 산업혁명때부터 였다. 우리 민족은 고려말 몽골의 간섭기니 1250~1350년경부터 소고기 탐식을 즐겼으니 우리민족의 소고기 탐식의 역사가 전세계에서 가장 길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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