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돈육 수출의 역사 5

2.4 돈모 수출 (돼지털 수출)

2.4 돈모 수출

1960년대의 축산물 수출 중에는 생돈 이외에 돈모가 상당량 수출되고 있었다. 돈모는 당시의 돼지 도축이 탕박(열탕) 도축 위주로 돈모와 박피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돈모의 수집이 가능했다. 돈모의 수집은 노동집약적 작업으로 해외의 솔 제조용 털로 엄청난 물량의 수출이 가능하였던 품목이었으며 정부에서도 외화획득 품목으로 중요시 다루어 왔었다.

돈모는 도축된 돼지의 원모를 수집하여 불순물과 잔털을 제거하고 털의 길이가 같은 것을 정선하여 증기처리(화씨 200도 이상의 온도에서 4시간 찜) 등 가공하여 수출 상품화하였다. 돈모의 용도는 주로 의복 솔, 구둣솔, 페인트 솔 기타 무기 등의 브러쉬 제조에 사용되고 있었는데 한국산 돈모는 모질이 우수하여 브러시류 제조에 적합하였다. 특히 제주산 돈모는 해외 시장에서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돈모는 그 생산기가 12월~4월 중인 것이 가장 좋은 수출용으로는 주로 2~3인치가 적합하였다. 돈모의 주요 수입대상국은 미국, 영국, 호주, 홍콩이며 이밖에 일본, 서독, 네덜란드, 벨기에 등 유럽지역도 수출되었다. 1960년대 돈모 수출로 벌어들이는 외화가 연간 100만 달러에 달하여 당시 수출 상품 중 10위안에 드는 유망수출 상품이었다. 돈모의 생산실적은 약 45만 파운드로 추정하였다. 수집만 잘 되면 상당량 더 수출할 수 있을 것으로 당시 전망하고 있었다.

돈모의 생산은 도축장의 부산물로서 도축 시 제거하는 원모를 수집하여 혼합된 이물을 제거하고 선별하여 이를 가공 처리하여 생산한다. 돼지의 도축은 허가를 받아서 도축장에서 도축하는 이외에 밀도살이 성행하고 있어 정확한 도축 두수를 파악할 수 없어서 수집을 못 하는 원모가 많았다. 당시 도축 두수는 서울, 경기, 경남, 경북, 충북 순으로 많았다. 돈모 업자는 약 10여 개소며 돈모 가공공장은 서울, 대전, 조치원, 부산, 마산, 대구 등 각지에 산재하여 있었다. 원돈모의 수집은 제조업자가 직접 각 지방에 나가서 소량씩 수집하기도 하며 지방의 소재하는 상인이 수집하여 거래하기도 한다. 당시 돈모 생산의 가장 큰 문제점은 원모수집이었고 밀도축분의 원모를 수집하는 건이 문제였다. 1962년도에 한국 돈모공업협회에 의해서 알려진 돈모의 수집량은 약 83만근(498톤)이었으며 하모, 추모, 동모의 수집비율은 각각 15%, 25%, 60%였다. 각도별 수집량을 보면 전남이 18만근(108톤)이었으며 경남북, 충남이 각각 10만근(60톤)이었으면 기타 도가 10만근 미만이었다.

표1-6.png

돈모의 국내수요는 총생산량의 1% 선이어서 돈모는 수출 주력상품이었다. 돈모의 수출은 1959년 이후 증가 되어온 바, 1960년에 주로 미국, 일본에 453,561Lbs(205,731kg)을 수출하였으며 1961년에는 미국, 일본 외에 영국, 호주, 서독, 홍콩에도 수출되었다. 수출량은 443,935Lbs (201,365kg) 였다. 그러나 수출의 대부분은 대미수출이고 국내생산량의 약 99%를 수출했어 연간 약 170만 달러 정도의 외화를 벌어들였다(표 1-6). 돈모만 잘 수집된다면 수출 증대를 기대할 수 있는 유망 수출품이었다.
당시 돈모의 수출시장에서의 경쟁 상대는 서독과 중국인데 중국상품은 우리나라의 주 수출지역과는 경쟁이 될 수 없으며 서독상품은 백색돈모로서 매우 우수하였다.

국내 취급 사로는 당시에 동흥물산, 금덕상사, 이한산업, 대전돈모, 풍한산업, 남방물산, 금성물산, 덕풍상사 등외에 다수의 상사가 있었다. 이들 주요 수출상이 제기하고 있는 수출상의 애로점은 돈모의 검역제도의 완화 문제였다, 돈모의 검사는 당시 3중으로 되어 있는 바 합동 검사. 검역증 및 수출검사가 있다. 따라서 검사제도를 단일화하여 시설검역으로 하도록 요청했다. 돈모는 제조공정에서 살균되는 것이므로 원가만 높아지는 당시의 검역제도를 시정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돈모의 수출은 해외시장시세에 크게 의존하고 있으며 수출량은 증산은 국내에서 조직적인 수집망을 통함으로써 효율적으로 수집하며 동시에 중간수집업체를 제거함으로써 돈모의 원가를 절감시켜 원가면에서 보다 더 국제시장에 유리하게 진출 할 수 있었다. 연간 170만달러 정도를 수출할 수 있었던 돈모는 당시에는 유망 수출 상품이었다. 1970년도에도 돈모 단일 품목으로 140만달러의 수출 목표를 세워 놓고 수출을 하였으나 수익성이 낮아 돈모의 수집과 정선 등에서 결손이 생겨 수출이 부진해지자 돈모를 수출하는 상사에게는 우피를 연계(링크)해 수입케 하여 결손을 보전토록 한 바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60년대는 축산물 수출의 개화기였다. 5·16 이후 외화획득은 국가 재건과 부흥을 위해서 중요한 과제였으며 축산 분야에서는 국내 주둔 미국에 달걀의 군납을 위시하여 해외 생돈 수출과 돈모 등 수출에 주력한 결과 1960년대 중반기에 수백만 달러에 달하는 수출실적을 올리는 등 수출의 개화기였다고 할 수 있다.

축산물 수출 정책 면에서 1965년에 정부는 국내 농업에 필요한 비료의 원활한 확보를 위하여 생돈과 비료의 구상무역 방식을 채택하였다. 즉 일반 경종농업에 필요로 하는 비료를 선수입토록 허가해 주었다. 외화의 채무를 미리 떠맡고 외화상환을 위해서 생돈을 홍콩에 수출하는 방식으로 운영하게 되다 보니 생돈 수출이 외화획득은 될지 모르지만, 국내 식량 곡류의 부족 현상을 극심하게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어 생돈과 비료의 구상무역 방법은 실질적인 성과를 거둘 수 없다는 이론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또한, 이의 목표달성을 위한 생돈 수출의 강행으로 국내 시가보다 싸게 홍콩에 수출하는 결과를 가져오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1960년대의 생돈, 냉동 돈육 등의 수출은 1969년 일본에서 부분육(CUT MEAT) 수입을 요구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돈육 수출의 역사 제1기는 1959년 1968년까지의 대 홍콩 생돈/냉동 돈육 수출기로 일단락 짓는다.


#무역에서 대금결제 시 화폐가 사용되지 않거나 부분적으로만 이용되는 경우를 총칭하는 것. 무역에서 대금결제 시 화폐가 사용되지 않거나 부분적으로만 이용되는 경우를 총칭하는 것. 바터무역(barter trade)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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