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츠카 토시오(宮塚利雄)의 日本焼肉物語 서문
시작하는 말ㅡ「내장구이」와 「고기구이」의 유혹
시작부터지만 본서의 주제인, 내장요리에 관한 영화 이야기로 들어간다.
영화는 1985년에 제작된 이타미 쥬조(伊丹十三)의 『민들레』이다. 여자 혼자 손으로 낡아빠진 라면집을 꾸려가는 주인공(미야모토 노부코, 宮本信子)을, 주변 사람들이 도와서 번성시킨다는 스토리이다. 라스트 신 쯤에서 야큐쇼 코지(役所広司)가 연기한 흰옷의 남자가, 총에 맞아 막 숨이 넘어가는 장면에서, 애인에게 「겨울에는 멧돼지를 잡았지. 멧돼지는 말이야 먹을 것이 없으니까 땅을 헤치고 산마만 먹지. 그런 멧돼지를 쏘아 잡은 사냥꾼이 바로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어 구우면, 창자 안에 산마가 꽉차있어 산마소시지가 되는 거야. 그걸 잘라 먹었는데 맛이 기가 막혔어」라고 말하고 숨을 거둔다.
처음부터 웬 영화 이야기를 꺼내느냐 하면, 보통 사냥꾼은 멧돼지의 고기부터 먼저 먹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고 먼저 내장을 꺼내어 구워 먹는다는 사실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최근 고기구이집에 가면, 고기요리와 같은 정도로 내장요리의 메뉴가 있는데, 그 이유를 여실히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멧돼지를 잡은 사냥꾼은 왜 최초로 고기가 아니라 내장을 구워서 먹었는가 하면, 내장은 부패하기 쉽기 때문에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고 더구나 보존하기도 어려운 점도 있으나, 본능적으로 내장은 영양가가 풍부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초원의 사자가 사냥감을 쓰러뜨리면 먼저 배를 물어뜯어 내장을 꺼내 먹어치우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나라(奈良)시대에는 「(중략) 사슴의 뿔·발톱·털·가죽을 각각 이용하고, 고기나 간장은 날 것 채로 잘게 잘라서 먹었다. 이것이 회(膾)이다. 자른 고기를 식초에 절인 것을 회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 근세의 일이었고, 옛날부터는 식초에 한정하지 않고, 소금이나 된장, 간장 등을 이용했다. 짐승 고기를 날로 먹는 관습은 지금은 없어졌는데, 생선 쪽은 아직도 남아 있어 즐겨 먹고 있다. 이것은 우리 조상들이 생식을 좋아한 증거이다」 (櫻井秀·足立勇 『일본음식사 <상>』 웅산각출판, 1973년)라고 할 정도로 일본인만큼 동물단백질을 기피하지 않는 민족도 드물며, 「이러한 동물단백질에 대한 우리들의 잡식성은 인본인의 기원을 밝히는 하나의 열쇠가 될 것이다」 (近藤弘 『일본인의 미각』 중앙공론사, 1976년)고까지 말하고 있다.
그런데 내장은 일반인들 사이에서 “호르몬” 또는 “내장”이라고 부르는데, 이 호르몬의 이름 유래를 칸사이 방언인 “하르몬(放るもん, 버리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잘못된 속설이 진실인양 전해지고 있으며, 심지어는 사전류에도 이 설을 그대로 그럴듯하게 소개하는 있는 것조차도 있어 안타깝다. 호르몬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듣고 흘려버릴 수 없는 승복하기 어려운 해석이다. 또한 고기구이업계의 관계자들로서도 「하르몬(버리는 것)을 주워 와서, 고객에게 먹게한다」는 오해를 주게 되면 장사에도 좋지 않을 것이다. 내장이 썩어 먹지 못해서 버린다면 모르겠지만, 버려진 “하르몬(放るもん)”을 일부러 주워서 먹기 때문에 “하르몬(放るもん)”을 “호르몬”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은 지나친 억지이다. 앞에서 말한 사냥꾼 정도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내장은 귀중한 동물성단백질원이고, 동물을 아는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내장의 가치를 알고 있기 때문에, 함부로 내장을 버릴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호르몬이라는 말이 「내장은 영양가가 높고 정력에 좋다」는 독일어의 의학용어에서 유래한다는 설이 설득력을 가지게 되는데, 이렇게 내장을 가리키는 “호르몬”을 일본에서는 언제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오사카에서는 전쟁 이전부터 호르몬구이는 아니지만, 호르몬을 사용한 요리는 있었다. 이 호르몬요리를 메뉴로 내었던 점포는, 현재도 오사카시(大阪市) 츄오쿠(中央區) 서 신사이바시(西心齊橋)에 있는 오므라이스 전문점인 「북극성(北極星)」이다. 북극성의 창업은 1922년(大正11)으로 당시의 상호는 양식집 「빵집 식당」이었다.
오므라이스나 양식구이라는 히트메뉴를 창안한 「북극성」 창업자인 키타하시 시게오(北橋茂男)는 프랑스어 통역사 아마리 이요지로(甘利伊代次郞)의 권유로 프랑스요리에는 없어서는 안 될 내장요리를 연구하고 있었다. 프랑스인의 레스토랑 경영자와 만난 키타하시는, 호르몬을 설탕과 간장으로 삶아보았는데, 맛이 없어 먹을 수 없었다. 그래서 소스를 찍어먹는 야키토리(燒鳥)에서 힌트를 얻어, 간장, 설탕, 깨로 소스를 만들었다. 거기에 냄새를 없애는 마늘이나 생강을 사용하여 “개량”을 거듭하여, 호르몬의 숙회요리 개발에 성공했다. 북극성에서는 프랑스요리점 개점 해에 「소의 장기에서 추출한 『호르몬』을 함유한」 요리를 「호르몬요리」라고 상표등록을 했다. 1950년 한큐(阪急)백화점에 「호르몬 매장」이 생겼을 때, 키타하시가 항의했다. 백화점 측은 「면목이 없게 되었다」고 사과하며 재빨리 꼬리를 내렸다고 한다. 그 무렵부터 고기구이 형태의 「호르몬구이」가 유행되고, 키타하시는 「상표침해자가 속출하여 유감스러웠다」 (기고문 『배달 된장』)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요리점은 1930년 무렵에 폐점하여, 「호르몬요리」는 북극성에서 사라졌다. 숙회요리로서의 「호르몬요리」는 정착하지 못하고 「호르몬구이」가 오사카에서 생겨났다(「고기구이와 호르몬」 『산케이신문』 1999년 4월 25일). 호르몬구이 전문점도 등장하는데, 이것은 외국인을 의식하여 이름을 붙인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이름의 유래하니까 생각이 나는데, 내가 좋아하는 음식에 나가사키챵퐁이 있는데, 본고장의 지인에게 챵퐁의 어원을 물어본 바, 잘 모르지만 「중국의 치판(吃飯, 식사를 의미)이 변하여 된 것은 아닐까?」라고 대답했다. 짬뽕의 유래에 관하여 도서관에서 본 잡지에는 「종의 소리 『챵』과 큰북 소리인 『퐁』」이 섞여서 이름이 붙여졌다고 나와 있었다. 이런 식이라면, 최근에는 그다지 볼 수 없게 되었지만 “칭칭” “퉁퉁”하며 종과 북을 두드리며 대열을 지어 가는 「칭퉁악대」(역자주;북과 장구를 치며 상품이나 점포를 선전하는 악대)의 유래와 비슷하여, 알기는 쉽다.
「파칭코」의 어원도 기계의 용수철 핸들을 튕길 때 나는 「카창코」이라는 음과, 맞고 나온 쇠구슬이 떨어질 때 못에 걸리면서 나는 「파치파치」라는 음이 합성되며,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어느 사이엔가 “파칭코”로 부르게 되었다고 들었다. 「하루몬, 放るもん」=「호르몬」도 절묘한 낱말 짜맞추기식 발상으로 무시하기엔 아깝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이야기가 옆으로 샜지만, 고기구이는 지금은 라면 등과 함께 대표적인 국민식(國民食)의 하나가 되었다. 총무성 통계국이 공표하고 있는 「사업소·기업통계조사보」에 따르면, 2004년 6월 현재, 전국에는 21,800개소의 고기구이집이 있으며, 매상고는 1조 1천억 엔(円)이다. 또한, 고기구이집은 자주 파칭코점과 함께 재일한국인의 생업의 대표적인 직업으로 되어있다.
오늘날에는 「고기구이집에 가서 고기나 실컷 먹어볼까」라는 말을 자주 들을 수 있는데, 소고기의 고기구이가 일본인 가정의 식탁이나 외식산업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랜 시대의 이야기가 아니다. 더구나 최근에는 고기나 내장과 함께 생선이나 야채를 도입한 건강지향적인 메뉴가 유행되고 있는데, 「비싼 마블링」 소고기 이전에는 돼지고기나 닭고기가 서민의 육식이었고, 전쟁 이후 잠깐 동안은 고래 고기가 식탁에 오른 적도 있다.
또 일반적으로 고기구이집이라고 부르지만, 메뉴나 점포의 영업형태의 차이에 따라서 대중고기구이집, 고급고기구이집, 체인스토어·프랜차이즈 체인형 고기구이집, 한국고기구이집, 스시 무한리필 고기구이집, 궁중요리집 등 다양하게 분류된다.
그런데 이렇게 근처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게 고기구이집인데, 일본에서 「고기구이」라는 밀과 「고기구이 ○○집」이라는 상호를 붙인 식당이 등장한 것은 언제부터 일까?
일본의 고기구이업계의 살아있는 사전적 존재인 「서서원(叙々苑)」의 아라이 타이도(新井泰道)사장에 따르면, 「고기구이(燒肉)」이란 말이 생겨난 것은 1965년 이후의 일로, 배경에는 한국과 북한의 정치적 대립이 재일한국인 사회에도 영향을 미친 결과라고 한다. 그때까지는 대부분이 「조선요리집」이라든가 「호르몬집」 등으로 불렀는데, 한국을 지지하는 경영자는 「조선요리집」이 아니라 「한국요리집」이란 간판을 걸게 되었다. 이래서는 「조선요리」와 「한국요리」는 어떻게 다른 것인지, 최대의 고객인 일본인은 전혀 모른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생겨난 것이 “불에 구워서 먹는 고기”를 한반도에서는 “불고기”라고 하는데, 그것에 해당하는 일본어는 “고기구이(燒肉)”였다(이 경위에 대해서는 본문에서 자세하고 언급하고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결국 “고기구이(燒肉)”는 정치적 대립의 산물로서 생겨난 것이다.
아울러서 일본 최초의 조선요리집은 1905년에 한국인(1910년의 한국합병 이전의 조선은 대한제국이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한국인으로 했다) 이인직(李人稙)라는 인물이 토쿄의 시타야 우에노히로고지 미하시(下谷上野廣小路三橋) 쪽에 「한산루(韓山樓)」라는 조선요리점을 개업한 것이 시작이라고 전해진다(西東秋男 『일본식생활사연표』 낙유서방, 1987년). 1905년에 일본에 체재하고 있던 조선인의 수는 303명(『일본제국통계연감』)으로, 그 대부분은 한국정부의 외교관이나 유학생, 상인 등이었다.
1910년 한국합병 이후 한반도에서 많은 조선인이 일본에 와서, 토쿄나 오사카 등의 대도시나, 탄광, 광산, 군수공장지대에서 노동자로 살게 되면서 조선인 집단 마을이 형성되었다. 조선인 집단 마을이 생기면 당연히 고향의 맛을 찾는 사람들을 위한 「조선요리집」이 생길 법한데, 재일한국인의 노인 한 분이 말하는 「우리 조선 사람들 대부분은 매일 생활에 쫓겨서, 조선요리집에 갈 수가 없었다. 물론 작은 식당 같은 것은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처럼, 전쟁 이전에는 재일조선인이나 일본인 고객 상대의 조선요리집은 적었다.
예를 들면, 1928년에 조사한 「토쿄의 음식점」에 따르면 서양요리점이 1,619개로 1위이고, 이어서 소바집이 1,568개로 되어있고, 라면집도 444개있었으나, 「조선요리점·대만요리점」은 단 3개로(小菅桂子 『근대일본식문화연표』 웅산각, 1997년), 이 3개의 내역은 모른다. 물론 이것은 토쿄라는 제한된 지역에서의 점포수이며, 더구나 조선인의 일본으로의 도항은 1930년대부터 급증하기 때문에 그것에 수반하여 조선요리집도 증가하지 않았을까 생각되기도 하는데,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것에 대해서는 한국의 요리에 조예가 깊은 모리에다 타카시(森枝卓士)도 「옛 문헌을 찾거나 전쟁 이전 시대를 아는 세대에 물어보거나 했는데, 식민지시대는 재일조선인이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많이 살고 있던 지역에서 그들 자신을 위한 조선요리집은 있었을지 모르지만, 일본인을 상대로 한 점포는 존재하지 않은 것 같다」 (熊倉功夫·石毛直道編 『외래의 식의 문화』 도메스출판, 1988년)고 서술하고 있는 것처럼, 주로 일본인고객을 상대로 한 조선요리집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적은 조선요리집 중에 「명월관(明月館)」 (東京麴町區山王下. 전화·銀座57번, 3009번)이 있었다. 내가 이 명월관의 존재를 안 것은 본서의 취재·조사가 아니라, 『아리랑의 탄생』 (창지사, 1992년)의 자료 수집 중에 가끔 본 『조선독본』이라는 작은 책자였다. 이 책자는 명월관이 발행한 것으로 조선요리나 음악, 조선어에 대하여 소개한 것인데, 그 중에서도 「모(某)실업가의 실언(失言)」에 대한 묘사가 흥미롭다.
때는 아마도 만주사변(역자주;1931.9.18.일본 관동군이 남만주철도를 폭파하여 일어난 전쟁)과 상하이병란(上海兵亂) 무렵으로, 모(某) 실업가가 만찬을 위해 네온사인과 전광판이 휘황찬란한 저희 점포 방문했습니다. 저희 점포가 사설 외교관을 하시는 고객분들의 도움으로 만원 성황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 실업가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이상하다는 듯이 말하기를 「적국(敵國)인 조선요리가 이렇게 번창하는 것을 신기해하기에 앞서, 일본인은 지조도 충성심도 없다」라며 분개하셨습니다. 이것은 조선을 중국의 일부라고 오해하였던 탓인데, 이런 말을 실업가 계급에서 들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고, 다른 일반계급 사람들은 오죽할까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합니다.
이 실업가가 누구인지 알 수는 없으나, 조선에 대한 지식과 인식이 너무 결여되어 있다. 실업가 정도의 인식이라면, 「다른 일반계급 사람들은 오죽할까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다」고 말하는 것도 당연하다. 너무도 분개한 나머지 계속해서 「비상시는 말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자기선전 대목에서는 「일본인구 8천만은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거기에 포함되어 있는 2천만의 조선민족의 중요성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팔 다리 하나가 없을 때 부자유스럽고 볼썽사납다고 느끼면서 8천만의 4분의 1이 되는 동포의 역할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저희 점포 존재에 대한 사명감이 있습니다」고 부연설명하면서 자기 점포의 존재의식을 강조하고 있다(명월관에 대해서는 1장2항에서 자세하게 설명한다). 그런데, 일본에서 고기구이가 붐이 된 배경에는 1988년의 서울올림픽 개최가 크게 영향을 미쳤다. 「88올림픽」을 앞두고, 일본에서는 한국의 역사나 문화, 요리, 음악 등을 이해하려는 붐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지금도 고기구이요리에 관한 책이 많이 출판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내장요리를 소개한 책도 나오고 있다.
「고기구이」(불고기)나 「고기구이요리」의 세계에는 문외한인 필자가 감히 본서를 쓰게 된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오늘 날의 고기구이 산업의 번성에는 재일한국인의 “삶(생업”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거기에 서광을 비추기 위해서다. 필자가 고기구이의 뿌리로서 종전 이후의 암시장 시기의 물품·식량 부족시대에 되살아난 호르몬구이에 집착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재일한국인의 고기요리에 대한 지식과 경험은 「육식 민족인 영국인은 소를 35개로 분류하여 먹는다고 한다. 이것이 일본은 겨우 15개 정도로 분류한다. 그런데 한국인은 무려 120개로 분류하니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그런데 이것은 헝그리 정신 때문만은 아니다. 전통적으로 고기를 분류하는 법과 요리가 맛있었기 때문이다」 (孫濟河 「바다를 건넌 하이테크ㅡ한·일 과학기술사 17」 『조선시보』 1988년 6월 23일) 라는 한마디로 대표되지는 않을까?(물론 일본인 관계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또 하나는 같은 재일한국인의 또 하나의 생업인 파칭코 산업론에서도 나와 있는데(『파칭코학 강좌』 강담사, 1997년), 어느 산업이 성장·발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업계 나름대로의 「사람과 기술」이 존재한다. 고기구이산업에 있어서 그러한 「사람과 기술」을 중명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재료로서의 고기의질도 물론이거니와 이 고기의 맛을 북돋아 주는 간장, 된장, 소스 등의 조미료 제조기술이나, 숯불에서 가스 그리고 다시 숯불로의 회귀라는 연료의 변천(왜 비장탄이 인기가 있었을까?), 더욱이 고기구이에 있어서 냄새와 연기의 문제를 무연로스터를 만들어 해결한(완전하지는 않지만) 과정을 규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여름은 스태미나를 주는 고기구이를, 겨울은 뜨끈한 전골요리를“이라고 말들 하는데, 전골요리는 모르지만 고기구이는 연중 먹을 수 있어 계절감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그러면 독자 여러분들을 「호르몬(내장)구이와 고기구이의 세계」로 안내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