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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벽똘 Sep 20. 2020

그가 풍기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편치 않았다.

너와의 적응기


너 : "우리 진짜 너무 다르다"

나 : "맞아, 내가 너한테 맛있는 거 사주고 싶으면 내가 제일 먹고 싶지 않은 거 사면될 것 같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여러모로 다른 남자친구와 8개월가량 연애기간을 지나면서 

상대방도 '나'도 발견해가고 있는 요즘이다.




남자친구는 나보다 감성적인 편이다.

사귀기 전 나는 그가 가지고 있는 그런 자기만의 감성에 매력을 느꼈다. 

사귀고 난 후에도 딱딱하고 날카로울 수 있는 내 면면들을 말랑말랑하게 받아주는 게 놀라웠다.


이전에 교제했던 사람과는 각자의 논리를 무기로 파고들 때까지 파고드는 대화를 했다면, (지금 생각하면 정말 왜 그랬나 싶을 정도로... 서로 장문의 카톡에... 각주를 달고 문서화하고... ^^...) 지금 남자친구는 애교 아닌 애교로 반응하며 내가 굳이 더 말을 얹지 않고 싶게, 마음이 사르르 풀리게 만든다.


물론 내가 변한 부분도 있을 테고, 초반에는 이 사람과 진지한 대화가 가능할까? 내 말이 정말로 전달된 게 맞을까? 의구심도 들긴 했다. 하지만 나의 문제제기에 진실된 피드백(말과 행동)이 돌아오는 모습을 보면서 점점 신뢰가 쌓여갔다.




경험해본 적 없는 상대방의 반응(애교)에 놀랐던 나...




새롭게 알아가는 감정도 많았다.

아니면 그동안 내 감정에 충분히 눈길을 주지 않아서, 이제야 보이는 감정에 낯섦을 느끼는 걸 수도 있다.

설렘, 서운함, 바람, 행복, 소중함, 애틋함, 외로움, 안정감, 고마움 등

써놓고 보니 일반적인 감정인 것 같지만, '내가 감정을 느끼고 있다'라는 걸 요즘만큼 명확히 알던 때는 없던 것 같다. 감정을 풍부하게 표현하고 장난도 많이 치는 남자친구 옆에서 나도 덩달아 내 감정을 표현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새삼스럽게 느껴진 감정은 외로움이다.

겨우 코딱지 만한 방 한 칸 일 뿐인데 유투브도 채워주지 못하는 고요함. 

낯선 밤의 풍경이 방 안에 깔리고, 가만히 그 속에 앉아있다 보면 '이게 외로움인가?' 싶다.

남자친구와 옆에 붙어있는 시간만큼 없을 때의 허전함이 크다.


처음에는 '이래서 함부로 익숙해지면 안 되는 건데!'라고 생각했다가, 차가운 거에 익숙해서 차가운 것만 아는 것보다는 따뜻한 거 차가운 거 둘 다 알고, 내가 원하는 온도를 찾고 유지할 수 있는 법을 배우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찌 됐건 사람이 옆에 있다는 건 생각보다 따뜻한 일이었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 같은 너




머릿속에 '누군가에게 의존해서는 안된다'는 명제가 크게 자리 잡고 있던 나에게, 남자친구가 풍기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한편으론 편치 않았다. 


상대방 때문에 감정이 요동치는 것도, 무언갈 기대하게 되는 것도, 힘든 걸 대신해줘서(무거운 짐 들기 등) 내 몸이 편해지는 상황도, 내가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도 전부 날 불안하게 만들었다. 상대방 때문에 느끼는 행복감이 내 일상을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더 그랬다.


그래서 '집에 데려다주겠다'라고 하면 '그럴 필요 없으니 역 앞에서 헤어지자'고 옥신각신하며 서로 감정을 상하게 하기도 하고, (이 얘길 들은 과장님은 '청춘이시군요'라고 했다ㅋㅋ)  연애라는 것이 내가 들이는 시간과 에너지, 비용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인가 혼자 의문을 품으며 생각을 적어 내려가기도 하고, 너무 자주 보는 것 같으니 만나는 횟수를 정하자며 나름의 규칙을 만들려 하기도 했다.


나는 그런  불안한 심리에 대해 조금씩 소통했고, 소통할 때마다 상대는 잘 들어주면서 조심스레 거리를 조절했다. 주는 마음과 신뢰 덕에 나도 조금씩 더 마음을 열게 되었고, 지금은 이전보다 좀 더 편안해졌다. 


요즘은 함께 있을 때 느끼는 감정(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을 받아들이고 관찰할 수 있게 됐고, 앞으로의 근 미래를 그려보기도 하고, 도움이 필요할 땐 도움을 청할 수도 있게 되었다. 


여전히 마음 한 켠에는 걱정이 있긴 하지만... 당분간은 따뜻한 바람을 잘 누려보려 한다. 

그리고 나도 그에게 따뜻한 바람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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