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혼이야기.47

47.추억이란 이름의 쓰레기

by Jude

그 사람의 결혼 이틀 전이였다. 할 일이 많고 준비할 것도 많을 텐데. 뜬금없이 내 가게 앞이라고 전화가 왔다. 난 현장에서 마감이라 바빠서 현장을 빠져나갈 수 없었지만 빠져나가고 싶지도 않았다. 왜?라는 내 곱지 않은 말투에 그 사람은 내 앨범이랑 남은 짐 조금을 가져왔다고 했다.


얼마나 치우고 싶었으면 결혼 이틀 전에 직접 가지고 내 가게로 찾아왔을까. 헛웃음이 나왔다.


"비밀번호 알려 줄게. 넣어놓고 가."


가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 흉물스러운 상자에 뭐가 들어 있을지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그런데 운명은 날 가만두지 않았다. 자꾸자꾸 날 다그치며 구석으로 몰아세웠다. 평일 오후인데 갑자기 상담 손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런 경우가 흔하지 않은데. 난 결국 가게로 가야 했다.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그 상자가 보였다. 난 의식적으로 상자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곧 손님이 왔고 난 어영부영 상담을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리고 결국 상자와 나만 자리에 남게 되었다.


상자는 윗면이 투명하게 되어 있어서 뭐가 들어있는지 훤히 보였다. 열어보고 싶지 않아. 뭔지 보고 싶지도 않아. 더러운 오물이나 죽어가는 동물의 사체를 보듯 난 약간의 어지러움과 역겨움을 느꼈다. 그 상자 안에는 내 어린 시절 앨범과 대학교 앨범 그리고 그 사람의 삐뚤삐뚤하지만 앳된 글씨로 나에게 한껏 사랑을 전했던 군대 있을 때 나에게 보낸 편지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내가 모아놓았던 그 사람의 편지들이었다.


'서울시 마포구 xxx...'

편지 봉투에 쓰여있는 익숙한 우리 집 옛 주소.


매일매일 편지함을 뒤적이며 언제 편지가 올까 빨개진 얼굴로 기대하고 실망하고 기대하고 벅차 하고 했던 내 모든 나날들. 악필이지만 정감이 가득했던 내가 사랑하고 또 사랑했던 그때 그 글씨. 사랑을 속삭이던 젊은 날의 달콤한 말들. 모든 추억이 물결처럼 날 덮쳤다. 이게 급했구나. 넌 이걸 처리하는 게 급했어. 그래서 결혼 이틀 전날 나에게 와서 이 상자를 나에게 버리고 간 거야. 너도 니 감정의 추억 덩어리를 어떻게 하지 못했겠지.


네가 나를 아프게 하려고 이러는 건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넌 네가 가장 편한 방법을 찾아 날 가장 아프게 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냥 네가 가지고 있어도 되고 네가 알아서 처리해도 충분한 걸 내가 이따위 편지들 갖고 싶을 것 같니. 어쩜 그렇게 잔인하니.


이러면 안 되는 거야. 넌 예의가 없는 거야. 넌 너밖에 모르는 거야. 다른 것도 아니고 이건 아니지 않나. 그렇게 따지면 우리 어머니가 그동안 사줬던 옷들도 다 내놓지 그래. 그럼 넌 남은 옷이 없을 거야. 아들처럼 생각하는 사위라고 항상 백화점에서 옷이니 신발이니 없는 돈에 너에게 시즌마다 선물했던 우리 어머니의 생때같은 선물도 다 내놓지 그래. 난 시댁에서 받은 게 정말 팬티 한 장 없어. 온갖 생각이 결국 분노로 바뀌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난 당장 양동이 하나를 구해 불을 지펴 편지를 하나하나 태워 그 편지들이 불에 아스러져 가는 모습을 눈으로 보고 싶어졌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이별은 처음이라 나도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상자에 대한 존재를 의식하고 싶지조차 않은 것은 확실했다. 난 그 상자를 철저히 무시했다. 그리고 가게를 이전할 때까지 그 상자는 그 자리에 몇 날 며칠이고 방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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