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시할머니의 죽음
시할머님이 돌아가셨다. 그 과정을 보면서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 우리나라의 의료체계와 여러 가지 상황이 나도 늙어서 병이 들면 저렇게 되는 건가 하는 두려움을 갖게 했다. 치료를 하지 않으면 병원에 입원할 수 없기 때문에 일반 요양 병원에 계셔야 했다. 그 사람과 나는 일주일마다 빼놓지 않고 면회를 갔다.
나는 당시 수술을 해서 움직이기 힘든 상황이었다. 큰 수술은 아니었으나 같은 곳을 두 번째 수술해서 잘 낫지도 않고 통증도 있었다. 수술 한 날도 그 사람은 일에 지쳐서 병실에 와선 내가 누워있던 침대에 누워있었다. 혼이 나간 얼굴로. 항상 그런 식이었다. 밖에서 모든 에너지를 다 쓰고 집에 와선 방전되어 버린 핸드폰처럼 나에겐 어떤 에너지도 쓰지 않았다.
무통주사를 꽂고 5일 만에 퇴원해서 집에 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집은 고양이 털뭉치들이 굴러다녔고 집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황폐하기 이를 때 없었다.
고양이들은 빗질을 안 해줘서 털이 뭉쳐있었고 불편한 오른팔을 못 쓰면서도 난 빨래를 돌려야 했다. 청소기를 돌리며 눈물이 나려는 걸 꾹꾹 참았다. 오른팔에 무통 주사를 달고 있었으므로 밥을 해먹기도 너무나 힘들었지만 혼자 어찌어찌 차려 먹었고 고통과 아픔은 고스란히 내 몫이었다.
머리를 일주일 가량 못 감았지만 그 사람에게 감겨달라는 로맨틱한 부탁 따위 사치였고 동네 미용실에서 머리를 감으며 미용사분께 무한 애정과 감사를 느꼈다. 그러면서 내 안에선 무언가 복수심이 자라났다. 만약 그 사람이 아프거나 수술할 일이 있으면 지금처럼 똑같이 해주리라.
그때 우린 동탄에 살고 있었는데 시할머님이 입원하신 요양원은 서울 신월동이었다. 하지만 정말 6~7개월 되는 사이 우린 단 한 번을 빼고 매주 시할머님을 뵈러 갔다. 모든 암이 그렇겠지만 위암도 잔인한 병이었다.
처음엔 덩어리 진 음식을 못 드시더니 나중엔 음료수, 그리고는 그마저도 못 드시게 되어서 코로 미음 같은 걸 섭취하셔야 했다. 그리고 앙상해져서 더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말라가는. 몸에서 생명력이란 생명력이 다 빠져나가는 겨울나무를 보는 듯했다.
시할머님의 돈을 받아갔던 고모들은 딸이면서도 몇 번 오지도 않았고 시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한 번은 시할머님이 발이 시리다고 하셔서 기모 양말을 사 갔는데 갈아 신겨드리다 보니 시할머님의 발이 건조해서 엉망이었다. 나는 로션을 시할머님 발에 듬뿍 발라드렸다. 발가락 사이사이 발 뒤꿈치 구석구석... 그리고 자주 오지 않는 딸들과 사람들이 이렇게 모질 수 있나. 이런 생각을 했다.
그 사람은 말라가는 자신의 할머니 앞에서 점점 무너져갔다. 면회를 가선 하루 종일 우는 날이 잦아졌다. 내가 환자에게 좋지 않으니 그렇게 울 거면 안 가는 게 낫다고 했지만 본인도 제어하기 힘든 것 같았다. 죽어가는 존재 앞에서 뭘 할 수 있을까... 매주 매주가 괴로웠다. 한 주 한 주가 다르게 말 그대로 죽어가는 사람을 본다는 건 정말 괴롭고 두려운 일이었다.
요양원에 주차를 하고 내리는 순간부터 어두운 주차장이 죽음의 공간으로 인도하는 듯이 눅눅하고 무거웠다.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서 시할머님을 뵙고 몇 시간 앉아 있다가 돌아오는 길에 이런저런 많은 생각이 들었고 솔직히 한 주 동안은 이제 그래도 이 무거운 수레를 잠시 내려 놓을 수 있다는 짧은 안도감마저 들었다.
그만큼 시할머님의 면회는 나에게 너무나 심적으로 힘든 일이었다. 막상 요양원에 가서는 나의 그 병이 도져선 발랄한 척 시할머님의 다리를 주물러드리고 수다를 떨었지만 속으로는 에너지가 쑥쑥 빠져나가는 모양새였다.
시할머님이 드실 수 있게 마시는 영양식과 손이 시리다고 하셔서 핫팩을 잔뜩 배송해드렸으나 그걸 다 써보지도 못하고 결국 시할머님은 돌아가셨다. 장례식장으로 이동하면서 남은 핫팩과 영양식을 챙기는 고모들을 보면서 난 조용히 "저거 내가 산 건데..."라고 읊조렸다. 돈이 아깝다기보다 그들의 행태가 너무나 파렴치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