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아무 것도 안 한 나.
싫었다. 시할머님이 돌아가시고 그 사람 서재에 있는 뵌 적도 없는 시할아버님의 영정 사진과 시할머님의 영정 사진이 있는 게. 그 사람은 사진을 나란히 높지 않은 책장 위에 올려놓았는데 그 방을 들어갈 때마다 묘한 감시를 받는 기분이어서 청소할 때 아니면 그 방을 들어가지 않았다.
나도 내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닌데. 나도 아버지와 둘째 언니가 보고 싶고 누구보다 사랑하는데. 그렇다고 내가 그들의 영정 사진을 놓고 있지는 않잖아. 이상해. 뭔가 이상해. 그런 생각이 자꾸 들어 그 방을 지날 때는 왠지 걸음이 나도 모르게 빨라졌다.
내가 경매를 시작하고 인테리어에 재미를 느껴 인테리어를 계속하고 싶어 하자 그 사람은 내가 마치 인테리어를 하고 싶어서 낙찰받고 싶어 하는 것 같다고 했다. 반은 그런 마음도 있어서 웃었다. 그 변화를 보는 게 마치 예전 한창 유행했던 프로그램처럼 극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날 중에 그 사람은 진지하게 나보고 인테리어 가게를 열어보는 게 어떻냐고 했다. 가게? 자영업? 사장? 말도 안 돼. 난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인테리어는 재미있지만 어떻게 내가 가게를 차려. 그것도 나 혼자 운영하는.
인테리어는 3D 직업 그 자체였다. 내가 실내 디자인과를 나와서 인테리어 쪽을 쳐다도 보지 않은 것은 그런 이유였다. 바보같이 전과를 하던가 했어야 했는데 그놈의 디자인이 뭐라고. 그러자 그 사람은 자신의 주특기인 설득의 기술을 이용해 뱀처럼 날 몰아가기 시작했다.
내가 월세를 못 내면 어쩌냐고 하자 그 사람은 월세는 못 내면 자신이 내주겠다며 어떻게든 나를 설득했다.
사실 그때 나이가 나는 40을 향해 가고 있었고 그 사람은 45를 향해 가고 있었으니 나는 가게도 가게지만 아기가 더 급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아기를 가져야 하지 않냐, 나는 가게를 하면서 임신을 하고 할 자신이 없다. 특히나 사무직도 아니고 이건 맨날 현장에 가야 하는데 시험관도 동시에 할 자신이 없다.'라고 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맨날 아기 핑계로 지금까지 아무것도 안 했잖아.
남들 다 아기 갖고 회사 다니고 해. 나 회사 다닐 때도 시험관 하는 여직원이 빈 회의실 가서 배에 주사 맞고 하더라. 왜 맨날 못한다고 해?"
라고 반문했다.
충격이었다. 나는 그 사람에게 지금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 말에 모든 게 담겨 있었다. 남들 다 갖는 아기를 갖지도 못하고 그 핑계로 아무런 경제활동도 제대로 하지 않는. 사실 그 때부터 복선은 있었는데. 소설 뿐만 아니라 인생에서도 복선이 있다.
그러나 우린 에이..아닐거야. 진심은 다를거야. 홧김에 한 말이겠지. 라며 지나가버리곤 한다. 주인공이 늘 그 복선을 놓쳐서 폭탄이 터지고 악당은 웃음 짓고 하는 일이 벌어진다.
나는 그 여직원이 아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나다. 왜 그 사람은 할 수 있는데 넌 못해. 이건 당신이 나를 나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 내 친구 둘도 만삭으로 꽤 먼 거리를 출산 일주일 전까지도 다녔다. 그런 것에 비교하면 나는 나약해 빠진 의지박약아였다. 그래도 그게 나다.
그림자였다. 난 지금까지 누군가의 그림자로 계속 살아왔으니까. 당신의 그림자, 어머니의 그림자, 언니의 그림자... 그런 내게 지금 갑자기 주체적인 삶을 살라고 하는 건가.
그런 상황이면 해야지, 그런 상황에서 못할 거라고 왜 미리 겁을 먹고 그러는가. 하지만 그게 나인데. 그 사람은 자신이 금요일이나 틈틈이 시간 날 때면 와서 도와주겠다고 설탕질을 했고 결국 그 설득의 왕에게 넘어가 가게를 열기로 결심했다.
그래, 일단 아기는 생각하지 말자. 나도 내 가게를 한번 운영해 보자. 그러고 나니 성격이 조급한 나는 또 미친 듯이 가게 자리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또 인테리어 가게를 하는 지인의 가게에 나가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나도 참 조정당하기 쉬운 스타일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묘하게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내 가게. 내 인생. 이제서야 그림자에게 벗어나게 될 것 같은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