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절멸
나는 없어졌다.
그날 이후 나라는 존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멸종되어 버렸다. 22년간 한 사람을 바라보고 그 사람만을 위해 살아온 마지막 남아 있던 생명체로써, 그 사람과의 모든 날들을 함께 했던 나는 마지막 존재로 절멸했다. 그 사람의 연인이자 사랑했던 사이, 뒷바라지하는 그림자 같은 존재이자 배우자인 나는 이제 없어졌다.
내가 누군지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내가 왜 살고 있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되었다. 한 순간에 하루아침에 난 던져졌다. 아무것도 없는 흙먼지 가득한 딱딱한 땅바닥에 내던져졌다. 온갖 말로 포장했던 그 모든 것이 가면처럼 벗겨지면서 추한 현실만 남았다. 서로에게 감사하고 존중하는 마음은 진작에 바닥난 지 오래였다. 나 혼자 고등학교 때의 과외 선생님을 향한 마음과 설렘으로 그저 그렇게 살아왔던 현실을 깨달았다.
그 사람은 출근을 하고 미쳐버릴 듯한 혼란스러움에 가장 나름 의지하고 친하다고 생각하는 넷째 언니한테 전화를 했다. 이른 아침이라 언니는 자다가 전화를 받았다. 언니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울음이 터져 나오면서
"나 잘못 살았나 봐."란 자기 고백이 토하듯 쓴 입을 통해 튀어나왔다.
그래. 나 잘못 살았다. 잘 살지 못했다. 완전 틀린 방향으로 살아왔다. 의지하면 안 되는 사람을 의지했고 나의 삶을 살지 않고 그 사람을 위한 삶을 살았다. 그 사람의 발전은 그 사람의 발전인데 내 발전인 양 의기양양했고 그래도 그 사람의 우직함과 고지식함을 믿었다. 그런데 완전 잘못 살았다. 그러면 안 되는데 그게 아니었는데. 짧은 시간도 아닌 그 긴 시간을 그렇게 살아왔다. 그걸 인정하면서 정말 정신이 비틀어지며 미칠 것 같은 역겨움이 올라왔다.
내가 하도 미친 듯이 울자 언니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무슨 일이냐고 했고 난 어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울고 또 울었다. 언니는 당장 짐 싸서 친정으로 오라고 했다. 하지만 얄궂게도 그날 첫 실측이 있는 날이었다. 첫 실측을 펑크내고 싶진 않았다.
힘든 마음을 부여잡고 나간 실측은 최악이었다. 몇 팀이나 불러서 한꺼번에 실측을 하는 기본적인 예의가 없는 실측이었다. 망가진 마음은 갈 곳을 몰랐고 그 사람이 있는 집에 가기는 너무나 싫었다. 술에 쩔어서 사는 날들이 이어졌다. 하루에 밥을 한 숟가락도 넘기기 힘들었다. 하루에 몇 번이고 통곡을 하며 화장실에서 혼자 울곤 했다. 도저히 내가 자제할 수 없는 울음이었다. 울화가 터져 올라오는 구토 같은 울음을 울고 나면 지치고 지쳤다.
그 사람이 보기 싫어서 혼자 술을 먹거나 일하는 사람들과 술을 먹고 혼자 코인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부르고 밤 12시가 되어서야 집에 가곤 했다. 그 사람은 나에게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고 했고 난 나가서 살고 싶다고 했다. 가게 근처에 원룸이라도 얻어서 나가서 살고 싶다고. 그러자 굉장히 나를 넘치게 배려하는 그 사람은 여자가 혼자 자취하면 위험하다며 차라리 자기가 나가겠다는 알량한 제안을 했다. 혼자 남겨지기는 싫었다. 결국 한 집에 살면서 한 집에 사는 게 아닌 생활이 시작되었다.
울면서 친한 지인한테 전화해 하소연하는 게 전부였지만 그들은 누구보다 진하게 나에게 공감해줬다. 그 사람은 그때 나에게 그런 말을 했다. "좋겠다. 그래도 말할 사람이 있어서. 난 아무도 없어." 지겨운 끈질긴 자기 연민, 피해자 코스프레.
난 이 사람과의 미래를 더 이상 그릴 수 없었다. 이 사람에게 난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무 존재도 아니었다. 오히려 성가신 얹혀사는 그런 무능력한 존재. 그걸 인정하는 게 속이 뒤집어지는 듯한 고통이었다. 무엇보다 내 22년이란 시간이 모래처럼 내 손에서 다 빠져나가 버려서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을 느끼고는 텅 빈 껍데기만 남은 기분이었다.
지금도 가장 후회되는 것은 그때 바로 이혼을 했어야 했다. 하지만 가게를 오픈하고 한 달 남짓 넘은 상태였기 때문에 안정화되는 것이 필요했다. 난 2년을 생각했다. 2년 뒤 이혼하리라. 이런 내가 비겁하고 치사하게 생각되었다.
그러나 내 상황을 잘 알아주는 친구의 한 말이 나에게 용기가 되었다.
"뭐 어때. 그 사람은 널 22년 동안 이용해왔잖아. 겨우 2년 그 사람을 이용하는 게 뭐가 그리 나빠?"
불확실한 상황에서 확실성을 생각하는 나는 어느새 홀로 서기를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의식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이제 이 사람 없이 더 이상 의존하지 않고 나 홀로 살아가리라 다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무의식의 밑에서는 좀 더 꿋꿋이 내 두 다리로 걸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40줄이 되어서야 자라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