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남보다 못한 사이
그렇게 남도 아니고 남보다 못한 사이인 한 집 생활을 이어나가게 되었다. 한동안 정말 그 사람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어서 최대한 집에 있는 시간을 줄였다. 그러다 보니 너무나 피곤했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지쳤다. 그리고는 불안증이 생겼다.
여느 날 같은 날이었는데 혼자 집에 있는 저녁 시간이었다. 갑자기 마음속에서 어떤 울렁거림이 올라오더니 숨이 잘 쉬어지질 않았다. 그리고는 너무나 불안해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온 집안을 미친 듯이 돌아다녔다. 불안감이 너무 심해 이 불안감을 끝내기 위해서는 정말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였다.
그러고 나니 너무 무서워서 다음날 바로 정신과를 찾았다. 이러다 뛰어내려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보다 그 불안증의 증상이 너무 괴롭고 힘들었다. 검사를 받고 공황장애와 불안증, 우울증 처방을 받고 약을 받았다.
살이 빠졌다. 밥을 못 먹으니 살이 쭉쭉 빠져서 옷들이 헐렁해 다시 사야 했다. 위가 줄어버린 것이다. 일은 일대로 하면서 내 나름대로 2년이란 시간을 생각하고 있었다. 난 너와 헤어지리라. 난 꼭 이혼하리라.
사실 그 사람의 그런 화내는 모습이 한두 번은 아니었지만 이번에 느낀 것은 아 이제 정말 끝이구나 라는 강한 현실이었다. 그래서 알게 되었다. 난 잘 맞춰주고 지금까지 그 사람 위주로 살아왔지만 다른 건 몰라도 나에 대해 부정당하는 것만은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구나.
난 살아오면서 친구나 지인이나 회사 사람에게나 화를 내거나 싸운 적이 거의 없다. 항상 내가 참으면 되지, 맞춰주면 되지 하면서 정말 못 참게 되면 그냥 아무 말 없이 돌아서곤 했다. 그리곤 그 관계는 종료. 불만을 말하고 너의 이런 점이 어떻고 그런 것이 너무 힘들었다. 그냥 나 혼자 떠나면 될 것을.
정말 잃고 싶지 않은 관계에 있어서는 한 두 명 정도 이야기를 하고 풀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것조차 안 볼 가정하에 말하는 비장한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아무리 화가 나도 너랑 안 살겠다고 말을 한 이상 그 사람의 마음에 정말 그런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화가 나거나 기분이 상해도 22년 동안 헤어지자는 둥 떨어져 있자는 둥 생각할 시간을 갖자는 둥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쉰소리라도 한 적이 없다. 그래서 더 충격이었다. 정말 나랑 못 살겠다는 말이 그 사람 입에서 나온 이상 그 사람은 못 살 것이다. 그런 강한 확신이 들었다.
매일 술을 먹고 주말이고 평일이고 일에 빠져 살았다. 다행히도 꾸준히 일이 들어왔고 점점 일도 많아져서 혼자 하기 버거울 정도였다.
한 번은 공사 전 엘리베이터 보양을 해야 해서 일요일 혼자 보양을 하러 가려는데 전체 보양이라 혼자 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자존심을 누르고 그 사람에게 넌지시 도움을 청했다.
"엘리베이터 보양을 해야 하는데 혼자 하려니까 정말 막막하네. 걱정이야."
그러자 그 사람에게서 "그러게, 힘들겠네."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다시 한번 지난 대화가 생각났다. 내가 힘들다고 일 좀 도와달라고 하면 그 사람은 '내가 내 회사일 도와달라고 한 적 있어? 네 일은 네 일이고 내 일은 내 일이야.'라고 선을 그었다.
더 이상 말해봤자 소용이 없을 걸 알고 다시는 그 사람에게 무엇을 부탁하지도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 사람은 내가 사업을 한 돈으로 투자를 하길 원했지만 사실상 그리 많은 돈을 번 것도 아니었고 사업의 특성상 어느 정도의 현금을 보유하고 있어야 했기에 난 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래, 그냥 주기 싫은 마음이 컸다. 내가 공사장에서 먼지 먹고 혼자 톱밥 쓸고 아침이고 밤이고 일해서 번 돈인데 도와 달라고 해도 니일, 내일 따져놓고 돈을 달라니. 줄만한 여유도 없었지만 더더욱 주기 싫었다. 그리고 난 독립을 위해 2년이란 시간을 최대로 잡고 있었기 때문에 돈을 모아놔야 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카드값이 모자란다면서 한 달에 100만 원, 200만 원씩 요구하기 시작했다.
아마 내가 일이 바쁘니 돈을 꽤 많이 번다고 생각했나 보다. 사실상 공사 한 건에 내가 버는 돈을 그리 많지 않았다. 마진을 작게 넣어서 견적을 넣어 계약을 따야 하니 이곳저곳에 돈을 주고 나면 남는 돈은 그리 크지 않았는데 참다 못한 내가 사실 내가 공사 한건에 이 정도밖에 안 남는다, 나도 많이 버는 게 아니다라고 하자 그 사람은 '그럼 경영을 잘못하고 있는 거지.'라고 했다.
하루하루가 힘들었다. 대화 한마디 한마디가 상처가 되어 아팠다. 그렇게 버티고 버티며 2년이란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