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차를 다마시고 봄날으로 가자
우리 집은 작은 섬에서 서점을 했다. 서점 매출의 대부분은 학생들 참고서였는데 섬에 학생수가 줄면서 그마저도 신통치 않았다. 그래서 나중엔 문구, 과자, 음료, 불법 가요 테이프 등 집 앞 고등학교 학생들이 살만한 건 모조리 팔았다.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건, 우리 집 고정 수입이 일정하지 않았음에도 4남매가 굶지 않고 무사히 대학교까지 마친 사실이다. 심지어 첫 째, 둘 째, 셋 째가 모두 대학생일 때도 있었다. 물론 학비 부담이 적은 국립대이긴 했지만.
당시, 어렸을 때 집에서 팔 던 물품 중에 졸업식 꽃다발, 무화과 잼, 유자차도 있었는데 이들을 만들 시즌이 오면 전 가족이 좁은 방에 모여 옹기종기 가내 수공업을 하곤 했다. 공정은 단순했지만 손이 많이 가는 작업들이었다. 옛날 졸업식 사진을 보면 너도나도, 우리 집에서 만든 커다랗고 촌스러운 화환을 목에 걸고 있었다. 파란 동백 나무 잎에 빨간 색 커다란 조화가 꽂혀 있는 화환이었다. 나는 주로 빨간 색 꽃을 꽂는 쉬운 작업을 맡았었다.
야 너네 누나 졸업식 화환 이거 내가 만들었던 거야.
겨울이 되면 또 유자차를 만들곤 했는데, 난 주로 유자차가 병에 담기면 뚜껑을 닫고, 뚜껑하고 병 옆 면에 스티커를 붙이는 작업을 했다. 이 유자차들은 대부분 도시에 있는 교회 바자회 물품으로 팔렸다.
유자차는 특히 온도에 민감해서, 겨울날 냉방에서 만들어졌다. 손은 설탕에 끈적끈적하고 날은 춥고, 잠은 못자고, 말은 못했지만 그야말로 아동 노동 학대의 현장이었다. 엄마 친구 집사님들이 아이고 애가 참 착하네, 군 말 없이 유자차도 다 만들고 칭찬을 할 때면,
아니예요. 제 친구들은 이 겨울에 부모님 일 손 돕겠다고 차가운 바다에도 들어가는데, 이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죠.
라며 어른스런 답변을 했다.
근데 사실이었다. 친구들은 새벽같이 일어나 배를 타고 부모님 바닷일을 도왔다. 그리고 학교에선 피곤해 꾸벅꾸벅 졸곤 했다. 그걸 알리 없는 선생님은 친구에게 의자 들고 뒤에 서 있으라는 벌을 내리곤 했지만.
풍족하지 못한 우리에게 겨울은 길었다.
유자차를 직접 만들던 후유증 때문인지, 꽤 오랫동안 유자차의 맛을 몰랐다. 지겹기도 했고 흔하기도 했으니까.
어제 아내가 스타벅스에서 유자가 들어간 음료를 6000원엔가 사왔다. 마침 목이 말랐던 터라 맛있게 먹었다. 내가 만들었던 설탕 범벅 유자차보다 고급스럽고 세련된 맛이었다.
그동안 내가 먹었던 유자차는,
어렸을 때 유자차 스티커를 붙이다 졸던 나를 옆 방에 이불을 덮여 누이고, 마저 밤새 작업을 하던 엄마의 집안 가계 걱정이 서려 있는,
차가운 겨울 같은 맛이었다.
이 차를 다 만들고 봄날으로 가길 바랬던, 엄마의 마음이 깃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