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삶에 대해 커다란 깨달음을 얻은 듯, 옆에 있는 후배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고만고만한 사람이 잘나가면 사람들은 배아파해. 아니 쟤가 나보다 뭐가 더 낫길래? 이러면서 깔아뭉개고 끌어내려고 하지. 저 사건도 동일하다."
여기서 말한 사건은 회사 내 한 팀장이 임원 진급을 목전에 뒀는데, 누군가 정도경영에 그 사람의 겸업을 고발해 징계를 받은 사건을 말한다. 그렇게 그분의 임원 진급은 날아갔고, 그 팀장의 동기 중 한 명이 고발했다는 추측이 분분했다. 추측을 바탕으로 말하자면, 그니까 동기들끼리 보면 다 고만고만해 보이는 실력이다. 누가 더 정치를 잘 했고, 누가 더 라인을 잘 탔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압도적으로 잘하는 사람말고, 고만고만한 사람들끼리는 견제가 심하다.
예전에 내가 L모 전자에 다닐 때, 거기 문화는 수요일마다 전투체육을 했다. 수요일마다 오후 5시가 되면 땡하고 컴퓨터를 닫고 모두 축구를 하러 나갔다. 상대는 늘 다른 팀이다. 팀 대항전이고, 그 팀 대항전의 결과와 기록, 순위가 다음날 그룹웨어 메인 화면에 그대로 올라갔다. 선배들은 일 잘하는 거 소용없어, 우리는 강한 전사를 원한다며 아직 일을 끝내지 못해 어리버리한 신입들에게 빨리 업무를 마무리하라고 재촉했다.
라이벌 팀을 만날 때면 축구를 좋아하는 팀장을 필두로, 한 시간 전에 작전 회의에 돌입하기도 했다. 신입사원들은 첫 데뷔무대에 30분 이상을 뛰면, 그건 그대로 실력을 인정 받은 셈이다. 나같은 경우엔 10분만에 교체됐다. 중요하지 않은 경기에 투입되었는데도 순식간에 교체가 되었다.
"야 쟤 불러들여. 안되겠다."
라이벌 대항전에서 패배라도 하는 날이면, 그 팀과 경기 후 회포를 푸는 회식자리에서 팀장님은 조용히 홀로 맥주를 홀짝였다. 누구도 쉽게 팀장님에게 말을 걸 수가 없었다. 팀장님은 예의상 상대 팀을 향해 웃음을 지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쓸쓸해 보였다. 나에게도 축구 선수로서의 자질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 있었는데, 그건 골기퍼로서의 천부적인 재능(?)이었다. 마침, 골기퍼를 전담하던 연구원이 퇴사하는 바람에, 잉여 인력이었던 내가 골기퍼를 맡았는데, 첫 골키퍼 데뷔전에서 엄청난 선방을 세 차례 선보였던 것이다. 그 이후, 선배의 퇴사날 선배가 내게 골키퍼 복장을 공식적으로 전달하는 세러머니를 가졌다. "잘 부탁한다, 한 골도 허용해선 안돼. 알았지?" BGM은 팀 동료들이 부르는 석별의 정이었다. "오랬동안 사귀었던 정~든 내 친구여, 작별이란 웬 말인가. 가야만 하는가?"
아무튼 이렇게 축구 경기는 우리 회사 생활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다만, 이렇게 중요한 행사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는 인물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안책임님. 안책임님은 남자인데 목까지 내려오는 긴머리 스타일을 고수했고, 굵은 뿔테를 쓰셨다. 타이핑을 하는 손은 섬섬옥수, 따각따각 일정한 리듬으로 코딩을 하는 모습은 비트에 라임을 얹는 래퍼와도 비슷했다. 수요일에도 홀로 남아 조용히 일을 했다. CM이라고 팀의 문화를 부드럽게 유지하는 Culture Manager의 Role을 맡은 인원이 안책임에게 함께 축구하러 나가자고 제안하면, 팀장님은 CM 옆구리를 툭 치면서 '놔둬' 하곤 했다. 안책임님은 그야 말로 코딩의 신이었고, 개발에 특출난 소질이 있었다. 하지만 사회생활, 소통의 능력은 젬병이었다. 안책임님은 축구 안좋아하세요? 혼자 일하는게 재밌어요? 저는 혼자 일하면 속상하던데, 라고 물으면 안책임님은 희미하게 웃고 말았다.
오늘 안책임님이 갑자기 떠올랐다.
이유는, 내가 홀로 작업했던 논문 작업과 그 논문의 레퍼런스인 목업 시스템을 회사 내 누군가 샤라웃 해줬기 때문이다. 회사에 필요한 건데 하면서 아무도 시키지 않았을 뿐 아니라,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에서 시간을 쪼개 묵묵히 연구하고 제작했는데, 그걸 이제야 인정 받았다는 느낌에서다.
과한 자기애는 아닌가 싶지만, 말하자면 내가 바로 안책임이었다. 영화에서 연출을 한다면 3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던 안책임이 마지막 장면에서는 1인칭의 시점으로 바뀌는 지점이다. 실력은 안책임보다 많이 떨어지는데 사회성은 조금 가미된 안책임이라고나 할까. 이걸 이제야 알았다. 나도 소통에 젬병이었다. 상사들이 원하는 것, 가려운 부위를 긁어주지 못하고, 그거 아니라고 그렇게 하는 거 아니라고 생떼를 썼다. 그리고 늘 평가 결과에 좌절했다. 남들보다 특출나진 않지만, 부족하지도 않은데. 아니 오히려 더 잘하는 분야가 많은데. 일이 실제로 돌아가게 만드는거 그게 더 중요한 건데. 아, 왜 몰라주냐고!!! 한 눈에 봐도 압도적으로 잘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내 눈에 고만고만한 사람들에게 뒤쳐지면 그렇게 시샘이 났다.
그러니까, 내가 안책임이라면, 사회성이 결여되더라도 계속 이곳에서 살아 남으려면 조금 더 압도적인 실력을 갖춰야 한다는 결론이 된다.
이 얼마나 피곤한 삶인가. 사교성을 키우고 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