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7개의 선율 - 기억 7
이 곡 앞에서 나는 말할 수 없다.
언어가 불필요한 순간, 생각이 의미를 잃는 순간, 다만 걷는 자의 호흡만이 남는 자리.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29번, ‘함머클라비어’를 듣는 일은 높은 산의 능선을 따라 걷는 일과 닮았다.
그 능선은 매서운 바람이 불어 차갑지만 때로는 따듯하고 부드러운 빛이 스며든다. 나는 그 길을 걸으며 산의 능선을 본다. 그 길은 시작부터 묵직하다.
발을 딛는 순간, 돌과 흙이 뒤섞인 대지의 감촉이 전해진다. 소리는 공기 중에 떠 있지 않고, 발밑에서 울려 나온다.
그 울림은 무겁고 단단하지만, 동시에 투명하다.
마치 바위의 안쪽이 숨을 쉬는 듯하다. 걸음을 옮길수록 공기는 점점 묽어지고, 세상의 소리가 희미해진다.
저 아래에는 인간의 세상이 있다.
다투고, 욕망하고, 웃고 울며 살아가는 아수라의 세계.
사람들이 부딪히고, 울고, 웃으며, 무엇인가를 쫓고 있다.
그 모든 소리가 들리지만, 나에게는 더 이상 닿지 않는다. 그 소리들은 점점 작아지고, 멀어지며, 마침내 하나의 희미한 진동으로만 남는다.
나는 그저 한 걸음씩, 묵묵히 걸을 뿐이다. 햇빛은 구름 사이를 천천히 옮겨 다니고, 바람은 능선의 윤곽을 따라 쉼 없이 흐른다.
나는 그 모든 소리로부터 멀어져, 길 위를 걷는다. 걷는다는 것은 생각을 버리는 일이다.
나는 그 속에서 사유하지 않는다. 그저 존재한다.
생각이 걷히고, 언어가 사라지고, 남는 것은 걷는 몸의 감각과, 그 위를 따라 흐르는 ‘소리의 구조’뿐이다.
처음엔 ‘왜’라는 질문들이 따라붙는다.
왜 이 길을 걷고 있는지, 왜 이 곡을 듣고 있는지. 그러나 한참을 걷다 보면 그 모든 생각이 공기 속에 풀려 흩어진다.
남는 건 오직 걸음의 감각뿐이다.
발이 땅을 누르는 힘, 그 힘이 다시 몸으로 되돌아오는 반응, 그리고 그 반응이 만들어내는 리듬.
그 리듬이 곧 음악이다. 피아노의 음들이 그렇다. 그 어떤 감정을 호소하지도,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그저 소리 그 자체로, 존재로서의 울림으로, 한 걸음씩 나아간다.
그 구조는 완벽하다. 돌과 바람, 흙과 빛,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다. 함머클라비어도 마찬가지다. 이 곡에서는 아무것도 꾸며지지 않는다.
오직 질서와 자유가 맞닿은 자리에서, 소리들이 스스로의 법칙을 따라 흘러간다. 나는 그 법칙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그저 그 안을 천천히 걷는다.
느린 걸음의 여운 속에서 나는 내 안의 시간마저 잊는다.
산은 점점 고요해진다. 하늘이 가까워질수록 바람의 소리는 깊어지고, 공기는 서늘하게 변한다. 그 안에서 나는 모든 감각이 가라앉는 것을 느낀다.
눈앞의 풍경은 더 이상 ‘무엇’이 아니다.
산도, 나무도, 하늘도 하나의 이름 없는 빛으로 이어진다. 베토벤의 음악이 바로 그 이름 없는 상태다.
모든 형상과 감정을 벗겨낸 뒤에 남는, 이름 없는 순수함. 그 안에는 질서만 있다. 그러나 그 질서는 억압이 아니라, 자유의 호흡이다.
나는 그 질서 위를 걷는다.
한 음 한 음이 계단처럼 이어지고, 그 위를 걸을 때마다 균형을 잃지 않으려는 내 몸의 움직임이 음악의 흐름과 겹친다. 이곳에서는 내가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음악이 나를 걷게 한다.
생각이 걷히고, 마음이 비워진 자리에서, 오히려 모든 것이 또렷해진다. 공기 속의 먼지 하나, 흙냄새, 바람이 머리칼을 스치는 순간의 미세한 떨림—그 모든 것이 음악의 일부가 된다.
함머클라비어의 세계는 인간의 감정으로는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을 가장 깊이 깨우는 음악이기도 하다. 이 음악은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침묵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고 있다.
침묵을 향해 걷는 것, 그것이 바로 함머클라비어의 마지막이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나’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 곡을 들을 때, 내 안의 모든 것들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을 느낀다. 욕망, 두려움, 후회, 기쁨—그 모든 것이 걷히고 나면 남는 것은 오직 ‘존재’뿐이다.
존재라는 말조차도 불필요할 만큼, 단순하고 투명한 상태.
능선 위에서 바람은 사방에서 불어오고, 구름은 내 발아래로 흘러간다. 바람이 잦아들고, 발밑의 흙냄새가 차갑게 식는다. 눈앞의 하늘은 멀리서부터 희미하게 푸르고, 그 끝에는 아무것도 없다.
나는 세상의 위에 서 있다기보다, 세상과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은 채 그저 ‘사이’에 있다.
위도 아래도 없고, 시작도 끝도 없다. 그러나 이 ‘없음’이야말로 원처럼 충만한 상태이다. 오직 지금 이 순간, 한 걸음의 리듬만이 이어진다.
음악도 그렇다. 시작이 있지만, 목적지는 없다. 모든 음은 사라지기 위해 울리고, 그 사라짐 속에서 비로소 완전해진다.
피아노의 음들은 이제 공기와 하나가 되어 내 몸을 감싸고, 나는 그 울림 속에서 걷는다. 산의 능선이 계속 이어지고, 멀리서 또 다른 봉우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것을 향해 오르는 일에도 더 이상 의미는 없다. 그저 걷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다.
나는 이제 숨을 깊이 들이마신다. 그리고 조용히 내려간다. 길은 여전히 산 아래로 이어지고, 세상은 다시 소리로 가득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소리들은 다르게 들릴 것이다. 한 번 침묵을 들은 자는, 다시는 예전의 귀로 돌아갈 수 없다.
바람은 여전히 불지만, 그 바람 속에는 이제 소리가 없다.
모든 것이 같은 자리에 있지만, 세상은 이미 달라져 있다.
이 곡의 끝에서 나는 늘 다른 감정을 느낀다.
같은 산이 매일 다른 하늘을 이고 서듯이, 베토벤도 나의 베토벤이라기보다 그날의 베토벤에 가깝게 다가온다.
도달이 아니라, 소멸의 감정이다. 모든 음이 제 역할을 다하고 사라진 뒤, 남은 것은 완전한 침묵의 자리. 그러나 그 침묵은 늘 다르게 다가오지만 공허하지 않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도 충만하다. 그 속에는 걸음의 흔적과 소리의 여운, 바람의 호흡이 함께 머문다.
그 순간 시간은 멈추고, 그 모든 것이 아무 말 없이 나를 둘러싼다. 그리고 나는 그 침묵 속에서 비로소 멈춘다.
멈춤은 끝이 아니라, 사라진 걸음이 남기고 간 고요의 흔적이다. 모든 음이 사라진 자리에서, 모든 의미가 흩어진 자리에서, 오히려 세계는 완전하게 존재한다.
함머클라비어, 이 음악은 세상에서 가장 깊은 고요 속을 걷는 자의 숨결이다. 그 고요가 끝나는 곳에서, 비로소 나는 사라지고, 음악만이 남는다.
‘함머클라비어’에서 능선 위를 홀로 걷는 듯한 감각을 가장 잘 전하는 연주는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의 것이다.
아래쪽의 소란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발밑의 리듬과 호흡이 맞춰지는 순간, 그 모든 건 먼 진동으로 물러난다.
리히터는 이 곡을 감정으로 밀어붙이지 않는다. 그는 한 음, 한 구절의 무게와 길이를 정확히 재며, 구조의 뼈대를 맨살로 드러낸다. 그래서 그의 ‘함머클라비어’는 뜨겁지 않으면서 뜨겁다. 불길 대신 여열(餘熱)로 데우는 연소다.
그의 연주에는 격정이 아닌 집중이, 폭발이 아닌 내면의 긴장이 흐른다.
음 하나하나가 불필요한 장식 없이 본래의 질량으로 존재하며, 그 질량들이 모여 거대한 구조의 온도를 만들어낸다.
첫 악장은 그렇게 생각보다 낮고, 묵직한 걸음으로 시작된 길이다. 그것은 새 길의 시작이자, 끝나지 않은 여정의 회귀다. 돌을 밟는 발의 리듬 속에서, 음악은 몸을 일으킨다.
단단하고 무거운 화음이 울릴 때마다 계단을 오르는 것처럼, 혹은 바람이 거센 산길을 뚫고 지나가는 것처럼, 음악은 끊임없이 전진한다. 강렬한 추진력과 숨 가쁜 변화 속에서도 음악은 결코 흐트러지지 않는다.
이 세계는 혼돈이 아니라, 완벽한 법칙이 지배하는 곳이다. 처음의 음들은 돌과 같다. 거칠고, 단단하며, 차갑다. 그러나 그 안에는 아직 식지 않은 열이 남아 있다.
리히터의 손끝에서 울려 나오는 첫 화음은 무게를 가지고 땅을 두드린다. 그 울림이 공기를 깨우고, 그제야 길이 생겨난다.
그의 음은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이 다시 울림으로 채워진다. 음과 음 사이의 틈은 숨처럼 이어지고, 그 숨이 곧 구조가 된다.
돌길의 첫걸음, 그것은 결심이 아니라 존재의 확인이다.
“나는 여기 있다.” 이 음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리히터 연주의 미덕은 첫 페이지에서부터 드러난다.
그는 메트로놈 수치에 매이지 않는다. 대신 악절을 따라 걸음의 보폭을 고정한다. 결과는 대담한 빠름이 아니라 ‘정확한 느림’—휴지와 여백까지 포함해 구조가 살아나게끔 만드는 속도다. 이 집중된 걸음의 과묵한 속도 덕분에 음의 결들이 모래사장처럼 무너지지 않고 끝까지 입자를 유지한다.
2악장에서는 길이 한결 가벼워진다.
바람이 스치고 가는 것 같다. 산이 고요한 숨을 내쉴 때, 바람이 그 틈을 따라 흐른다. 피아노의 리듬은 바람의 흐름처럼 자유롭게 움직이고, 잠시 방향을 바꾼다.
짧은 웃음, 가벼운 춤, 그러나 그것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건반을 치는 손이 아니라, 바람이 건반 위를 스치는 듯하다.
그 모든 움직임은 무심하고, 자연스럽다. 마치 바람이 나무 사이를 통과하듯, 음들은 저항 없이 그저 흘러간다.
아다지오가 시작되면, 마치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서는 것 같다. 이 악장에서 리히터의 미학은 절정에 닿는다.
약 18분, 너무도 느리거나 과장되지 않은, 완벽히 통제된 시간. 고개를 한 번만 끄덕여도 파문이 끝까지 닿는 듯한 깊이. ‘노래’보다 ‘숨’을 앞세운 선율, 페달을 얇게 깔아 공명만 남기고 비명(悲鳴)은 걷어내는 터치.
그는 여기서 '투명한 성부 분리'로 가장 깊은 심연의 바다를 보여준다.
그의 느림은 눌림이 아니라 통로다. 여백은 빛이 사라진 어둠이 아니라 빛을 담은 그릇이다. 그리고 그 빛은 음 하나하나가 되어 물속의 파문처럼 멀리 번진다.
마지막 악장의 푸가에서, 무한히 엉켜드는 선율들이 마치 운명을 거슬러 올라가려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리히터는 여기서 ‘투쟁’보다는 ‘질서’ 쪽에 선다.
선율들이 엉키는 순간마다 그는 미세하게 손목을 접어 음의 모서리를 둥글게 한다. 그래서 직선적 추동력은 다소 덜해 보일지라도, 역설적으로 선율의 가닥과 대칭이 더 또렷하다.하나의 선율이 또 다른 선율을 따라잡고, 억제할 수 없는 자유의 힘이, 그러나 철저한 논리 속에서 질서 정연하게 흘러간다. 베토벤은 이곳에서 더 이상 인간의 감정을 노래하지 않는다. 그는 오로지 음악만을 이야기한다.
이 악장은 “트릴로 뒤덮인 광기 속의 형식”이라 불린다.
그러나 리히터는 푸가는 폭풍이 아니라 바람의 방향을 보여준다. 산등성이 위에서 바람이 일시에 몰아칠 때, 그의 음은 바람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바람의 결을 따라 선다.
어디서 불어와 어디로 빠져나가는지-이 무너짐 없는 세계. 그것이야말로 리히터가 보여준 베토벤이 마지막에 도달한 순수한 음악의 세계다.
표면은 거칠고 온도는 낮지만, 손을 얹고 오래 있으면 서서히 체온을 바꿔 놓는다. 그가 하는 일은 영웅처럼 정상을 점령하는 일이 아니다. 그는 능선을 따라 ‘끝까지’ 걷는다.
발아래 아수라의 세상은 점점 작아지고, 바람은 더 차가워진다. 첫 음이 문을 열고, 느린 음표가 시간을 만들며, 푸가가 방향을 가리키는 동안, 우리는 어느새 소리의 건축물 내부를 걷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울림이 사라지는 자리—그 침묵에서야 비로소 알게 된다. 이 연주의 미학은 말의 끝이 아니라, 걸음걸음이 멎는 자리의 고요에 있다는 것을.
나는 수많은 연주들 중에서도,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의 연주를 따라 이 길을 가장 오래, 가장 깊게 걸었다.
그의 연주는 템포를 통해 구조를 세우고, 터치와 페달로 성부의 투명도를 극대화한다. 감정의 고조 대신 시간의 밀도와 여백으로 울림을 만들어 낸다. 그의 베토벤은 감정을 숨긴 것이 아니라, 감정을 구조 속에 녹여 낸연주다.
그의 연주는 기술의 과시도, 감정의 폭발도 아니다.
리히터는 이 곡을 연주하면서도 연주하지 않는 듯 들려준다. 음은 그의 손끝에서 태어나지만, 그는 억지로 그것을 밀어내지 않는다. 그는 음과 음 사이의 간극, 그 정적 속에서 음악을 호흡하게 만든다. 그 사이의 정적은 단순한 쉼이 아니라, 음이 스스로의 무게를 찾는 시간이다.
그의 해석은 엄격하면서도 고요하며, 그 속에는 깊은 사유와 정직한 균형이 숨어 있다. 한 마디, 한 화음이 정확하게 제자리에 놓이되, 그 자리는 결코 수학적 계산이 아니라, 내면의 질서로 정해진 자리다.
그가 들려주는 세계는 거대하면서도 맑다.
나는 리히터의 '함머클라비어'를 듣고 나서, 이 곡이 얼마나 높은 곳에 존재하는 음악인지, 그리고 얼마나 낮은 곳까지 내려올 수 있는 음악인지를 동시에 느꼈다.
어떤 연주도 이 곡을 ‘설명’할 수 없지만, 리히터는 설명하려 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그 본질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다.
그의 함머클라비어는 마치 겨울 새벽, 산사의 긴 오솔길을 따라 걷는 듯하다. 바깥은 고요하고, 숨소리조차 얼어붙을 것 같지만, 그 침묵 속에서 하나의 중심이 서서히 드러난다.
그 중심은 소리가 아니라 침묵의 구조이자 시간의 골격, 존재의 그림자에 가깝다.
리히터는 그것을 감추지 않고 정직하게 보여준다. 그곳에서 비로소 음악은 인간의 감정을 떠나, 자신의 존재로 서게 된다.
1악장 : https://youtu.be/0oLmwiZbCmc?si=KGR6drbHLCvM5FBY
2악장 : https://youtu.be/lAk-B4KZiII?si=kTFEzhxGQj_8M6-S
3악장 : https://youtu.be/cn6tnAROG-4?si=xwjiEFlTdX8NyY8J
4악장 : https://youtu.be/cn6tnAROG-4?si=xwjiEFlTdX8NyY8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