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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걷는 음악 : 연재를 마치며...

에필로그

by 헬리오스


시간을 걷는 음악 - 언제나 곁에 두는 7개의 선율 :

이제 그 연재를 마친다.



시간을 걷는 음악, 그 여정의 끝에 나는 서 있다.


처음에는 그저 좋아하는 음악들을 따라 걷는 일로 시작했다.

바흐의 질서 속에서 길을 찾았고, 베토벤의 의지에서 인간을 보았으며, 쇼팽의 흔들림 속에서 감정의 깊이를, 멘델스존과 브루크너의 곡에서 자연의 아름다움과 위대함을 보았다.

라흐마니노프의 고통 속에서는 침묵을, 그리고 마지막 베토벤의 함머클라비어에 와서는, 모든 것이 사라진 자리, 아무것도 남지 않은 곳에 도달했다.


세상에는 귀로 듣는 음악도 있고, 가슴으로 기억하는 음악도 있다.

내게 이 일곱 곡은 후자다. 단지 아름다움 때문만이 아니다. 그 안에 내가 있고, 내 시간과 그림자가 함께 흐르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이 일곱 곡은 단지 음악이 아니었다.
그 음악은 늘 조용히 내 곁을 지켜준 존재였다. 나는 그것들을 통해 나를 기억하고, 이해하며, 때로는 나를 용서했다. 그 곡들을 들으며 나는 어떤 순간들을 지나왔고, 어떤 감정의 무게를 견뎠으며, 어떤 시선을 세상에 던졌는지까지 기억한다.

삶은 수많은 불협 속에서도 조용히 이어지는 하나의 선율이라는 것을. 기쁨과 슬픔, 환희와 좌절, 그 모든 것들은 결국 하나의 긴 음악 안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울린다는 것을.


이 일곱 곡은 내 생의 작은 등불이었다. 불안했던 청춘의 밤을 지났고, 희미하게나마 걸어야 할 길을 비춰주었다. 그 등불 아래서 나는 흔들렸고, 다시 중심을 잡았다.


일곱 개의 음악, 하나의 삶


음악은 늘 내 삶의 풍경과 겹쳐 있었다. 그래서 어쩌면 이 일곱 곡은 내 인생의 연대기 같다


첫 번째는 바흐의 '푸가의 기법'이다. 이 곡은 음악의 시작점이자 사유의 출발점이었다. 누구에게나 클래식 음악과의 첫 만남은 우연히 오지만, 내게 그 입구는 바흐의 푸가였다. 네 개의 현악기가 만든 질서는 차갑고 냉정하지만, 그 안에는 뜨겁게 절제된 감정이 숨 쉬고 있었다. 그것은 감정의 표출이 아니라,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를 스스로 묻는 음악이었다.


두 번째는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이 곡은 삶의 어떤 전환기, 이를테면 내가 내 힘으로 어떤 벽을 뚫고 나가야 했던 시기의 사운드트랙과도 같다. '운명'이라는 별명은 단지 유명해서가 아니라, 정말 그만큼의 현실적인 무게를 갖고 있다. 이 곡을 들으며 나는 감상적인 여운에 빠진 적은 별로 없다. 이곡은 오히려 나를 움직이게 하였으며, 때로 삶의 동력이자 의지의 음악이었다.


세 번째는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 그 시절의 나는 밝았다. 모든 것이 순조롭고, 특별한 이유 없이 좋은 날들이었다. 이 곡은 그 시절의 일상과 겹친다. 무언가를 성취한 것도, 큰 시련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가벼웠다. 지금 돌아보면 아주 짧고 소중한 시기였고, 그래서 그 밝고 투명한 시간들이 이 곡의 선율처럼 내 안에서 여전히 잔잔히 흐른다.


네 번째는 브루크너의 교향곡 8번. 이 곡은 나를 가장 깊이 성찰하게 만든 작품이었다. 처음엔 길고 무겁게 느껴졌지만, 듣고 또 들으며 그 안의 ‘공간’을 보게 되었다. 이 음악은 자연과 닮아 있다. 산과 계곡, 바람과 절벽 같은 거대한 풍경과 무한한 우주 속에서 나는 인간이, 내 자신이 작음을, 그리고 그 작음이 품은 큰 울림을 배웠다


다섯 번째는 쇼팽의 마주르카 49번.

이 곡은 마음 한구석에 남모르게 미뤄둔 추억과 닿아 있다.

그래서 그런지, 들을 때마다 이상하게 모네의 수련이 떠오르고, 수줍게 웃던 그녀의 모습이 함께 스쳐간다. 물결 위에 조용히 피어난 연한 꽃잎처럼, 그녀는 내 곁에 있었지만, 손을 뻗으면 사라질 듯한 존재였다.

그래서일까. 이 음악은 언제나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결을 건드린다. 구체적인 슬픔이 아니라, 이유를 알 수 없는 아쉬움과 그리움 같은 감정.

어떤 가을 저녁, 혼자 오래 걷다 보면 어김없이 이 곡이 떠오른다. 그 선율은 미뤄둔 기억의 표면을 천천히 어루만지며, 사라진 것들에 대한 생각을 조용히 불러온다.


여섯 번째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 처음에는 이 곡의 화려함에 끌렸고, 나중에는 그 안의 고독함 때문에 더 오래 머물렀다. 특히 루빈스타인의 연주는 내 학창 시절의 밤과 연결되어 있다. 몸과 마음의 깊은 상처를 받은 날, 방 안에서 이 곡을 들으면서 나는 위로와 눈물을 동시에 경험했다. 시간이 흘러 리히터의 연주를 더 좋아하게 되었지만, 내 인생 속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여전히 루빈스타인의 것이다.


마지막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29번, '함머클라비어'. 이 곡은 감정보다 구조가 먼저 보이는 작품이다. 아무 이미지도, 이야기의 흐름도 없이 그저 무아의 세계만 남는다. 그래서인지 이 곡은 삶의 마지막 페이지처럼 느껴진다. 감정이 모두 지나간 다음, 남는 건 결국 침묵 속의 무아의 세계뿐이라는 걸 이 곡은 말하는 듯하다. 그래서 이 음악이 너무 완벽하게 들릴 때는 오히려 이상하게 인간적이다. 차가워서가 아니라, 너무 명확해서 그렇다.


이렇게 이 일곱 곡은 나의 연대기다. 시대도, 장르도 다르지만, 그것은 곧 내가 걸어온 삶의 모양과 닮아 있다. 어떤 곡은 내 눈물을 기억하고, 어떤 곡은 내 다짐을 기억한다. 음악은 나를 설명하지는 않지만, 분명 나를 만들어왔다. 그래서 나는 이 음악들을 단순히 ‘좋아한다’고만 말할 수 없다. 그것들은 내 일부이며, 지금의 나를 구성하는 또 하나의 삶이다


마치며...


이 작은 글을 마치는 데 꼬박 여섯 달이 걸렸다.
처음에는 두세 달이면 끝나리라 생각했지만, 막상 써보니 그렇지 않았다.
중간에 일상이 여러 번 끼어들었고, 문장은 그때마다 멈추었다. 그래도 지금, 이렇게 마침표를 찍는 일이 기쁘다.


돌아보면 이 일곱 곡을 쓰는 동안, 나는 내 삶의 절반쯤을 다시 걸어온 듯한 기분이 든다.
그만큼 이 음악들이 내 안에 차지하는 자리는 크다. 어쩌면 수십 년 가까운 음악의 시간이 이 여섯 달의 기록으로 정리된 셈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많이 아쉽고, 조금은 쓸쓸하다. 어쩐지 내 삶이 너무 단출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수십 년의 기억이, 겨우 몇 장의 글로 다 담겨버린 것 같아서.


그렇지만 괜찮다. 음악은 여전히 남아 있고, 나는 앞으로도 계속 듣고, 또 적을 것이다.

언젠가 또 다른 일곱 곡을 만날지도 모를 일이다. 걸음이 멈추지 않는 한, 음악 역시 끝나지 않는다.


Bach : Die Kunst der Fuge, BWV 1080: I. Contrapunctus I

Paolo Borciani · Elisa Pegreffi · Tommaso Poggi · Luca Simoncini


https://youtu.be/411eh23aHl0?si=1RwJr1Tk4ENiqcoU


Chopin: Mazurka No. 49 in A Minor, Op. 68 No. 2 - Lento

Arturo Benedetti Michelangeli (Piano)


https://youtu.be/Z_g9QGvaNz8?si=DegQ8hs1DWAd5d2C



Beethoven : Piano Sonata No. 29 "Hammerklavier": III. Adagio sostenuto

Svjatoslav Richter (Piano)


https://youtu.be/cn6tnAROG-4?si=z7gTMr27AZEXA9G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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