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시간을 걷는 음악 : 네 번째-브룩크너 교향곡 8번

연재 : 7개의 선율-기억 4

by 헬리오스


내게 남은, 사라지지 않는 단 하나의 순간—기억 4


시간을 걷는 음악 - 언제나 곁에 두는 7개의 선율 : 네 번째 이야기

브룩크너 교향곡 8번 : 세르지우 첼리비다케 지휘 /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EMI)


"거대한 건축물,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간 음악"


오늘은 조금 다른 음악 이야기를 하나 해보려 한다.

음악이 듣는 것이라면, 왜 나는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고 느꼈을까?

어쩌면 말이 되지 않는다고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어떤 음악은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 안으로 몸을 들여놓는 체험으로 다가온다.

내가 이 곡을 처음 만났을 때가 그랬다.

음악은 나를 향해 울리고 있었고, 나는 그 울림 속으로 조용히,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지금 이렇게 적으면서도 ‘이게 말이 되나?’ 싶지만, 그냥, 내 느낌이 그러하니 편하게 적는다.


어떤 음악은 처음부터 마음에 들어온다. 몇 음만으로도 감정을 건드리고, 오래도록 기억 속에 남는다. 하지만 어떤 음악은 그 반대다. 내가 그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야 한다. 익숙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음악이 너무도 거대하여 내 감각이 닿는 데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쇼팽의 야상곡, 베토벤의 '운명'이나 '합창' 교향곡이 마음을 향해 다가오는 음악이라면, 브루크너의 교향곡 8번은 내가 조심스레 그 안으로 발을 들여야만 하는 음악이었다.


처음 들었을 땐 무척 당황스러웠다. 느림과 거대함, 긴장감은 있었지만 따라갈 감정의 서사도, 기억될 만한 선율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감상해야 할지조차 막막했고, 그저 그 무게에 눌릴 뿐이었다. ‘좋다’는 말도, ‘감동’이라는 표현도 이 음악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차라리 숨이 멎고, 생각보다 공간이 먼저 열리는 그런 경험이었다.


브루크너의 8번 교향곡은 음악은 크지만 요란하지 않았고, 느리지만 정지해 있지 않았다. 서두르지 않고, 과시하지 않으며,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었다. 나는 그저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판단도, 해석도 내려놓고, 그 앞에 잠잠히 서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마치 한 사람이 아니라, 또 하나의 세계와 조우하고 있는 듯한 순간이었다.


이 곡은 단순한 감상을 허락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곡의 길이부터 압도적이다. 약 1시간 30분에 이르는 이 작품은,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약 30분)과 비교하면 세 배에 달한다. 심지어 마지막 악장 하나만으로도 30여 분—즉, 운명 교향곡 전체와 맞먹는 길이다.



오페라처럼 막과 막 사이에 쉴 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여러 곡이 이어지는 조곡도 아니다.

브루크너의 8번은 순수한 4악장 관현악곡이다. 그렇기에 이 압도적인 길이와 밀도를 한 흐름으로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경이롭다. 구성은 끊임없이 발전하고, 긴장감은 끝내 느슨해지지 않는다. 곡은 처음부터 끝까지—이미 내가 걸어 들어온 그 세계처럼—자신을 펼쳐 보인다.


이 음악은 공간 속에서가 아니라, 시간 속에서 세워지는 건축물이다. 그 시간은 곧 존재의 밀도이고, 의식이 압축된 구조다. 한 음 한 음이 모여 거대한 건축을 이루고, 그 건축은 감정을 휘몰아치기보다는 존재의 깊이를 천천히 끌어내는 방식으로 내 안을 파고든다.


1악장의 도입부. 낮은 저음의 현악기 위로 서서히 떠오르는 관악기의 울림은, 마치 지각의 심연에서부터 올라오는 전율 같았다. 그것은 단지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아니라, 이 곡이 어떤 깊이에서부터 솟아오르고 있는지를 암시하는 신호였다. 그리고 그 위로 금관이 천천히 덧입혀질 때, 나는 마치 지하에서부터 바다를 지나 대지 위로 솟구쳐 오르는 거대한 구조물의 입면도를 보는 듯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이 곡을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니라, 마치 낯선 대지 위를 조심스레 걸어가는 체험처럼 느끼기 시작했다. 점점 이 음악이 단순한 작품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내가 마주한 어떤 음악보다도 거대했고, 어떤 언어보다 깊은 구조를 품고 있었다.

그것은 소리로만 감각되는 음악이 아니라, 발끝과 숨결, 기억과 시간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며 체험해야 하는 구조물—성채와도 같은 세계였다.


나는 그것을 멀리서 조망하지 않았다. 그 안으로 들어가, 천천히 돌아다니며 경험했다.

아치형 천장 아래로 금관의 울림이 돌기둥처럼 울리고, 지하수처럼 낮고 진한 현악의 진동이 땅속을 흐르고 있었다. 마치 고딕 대성당의 회랑을 걷는 순례자처럼, 나는 이 음악을 발로, 심장으로, 그리고 나 자신 전체를 열어 체험했다.


이렇게 이 곡은 감정의 흐름이 아니라, 하나의 공간으로 이루어진 음악이다..

나는 그것을 따라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멈춰 서서 바라보고, 길을 잃고 다시 찾는 과정을 통해 음악 속에 존재했다.

그것은 거대한 숲 같은 세계였고, 나는 그 안을 걸었다.

곡이 끝난 뒤, 나는 말을 잃었다. 감상이라 부를 수 있는 언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이토록 웅대한 음악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나를 압도했다.


이 거대한 곡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면서, 나는 문득 작년에 처음 마주했던 이탈리아 돌로미티의 세체다 (Seceda), 그 거대한 봉우리를 조망하면서 걷던 순간이 떠올랐다.

브루크너의 교향곡 8번은 마치 처음 거대한 산맥을 올려다보며 걸어가는 등반가처럼—그 정상을 다 보지 못했음에도,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그런 음악이었다.



그러나 늘 거대하면서도 어딘가 약간은 허전하고 공허하던 이 곡이, 처음으로 하나의 완전한 세계로 다가오기 시작한 것은 첼리비다케의 해석을 만난 순간부터였다.


EMI에서 복원한 실황 음반을 통하여 처음 그의 브루크너 8번을 들었을 때, 나는 단순히 뛰어난 해석을 만난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의 음악과 마주하게 되었다.

이 거대한 건축물은 그의 손을 거쳐 처음으로 나에게 공간이자 시간, 그리고 존재로 다가왔다.

바로 이 해석이 지금은 나에게 있어 이 곡 해석의 정점이다.


그의 음악은 단지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소리가 머무는 공간을 듣는 체험이었다.

그는 시간을 단순히 흐르는 것이 아닌, 하나의 물질처럼 다루었으며, 그것은 시간이 멈춰 있는 듯한 체험을 만들어냈다. 음 하나하나가 공간에 완전히 퍼지고, 그 여운이 사라질 때까지 모든 것을 멈추는 기다림.

그 기다림 속에서, 울림은 곧 의식의 공간이 되었고, 그 느림은 해석이 아니라 음악에 대한 그의 태도이자 철학이었다.

이렇게 그의 음악은 단지 연주가 아니라, 음악이 '존재하는 방식' 자체에 대한 철학적 명상이었다.

생전 대부분의 녹음을 거부했던 그였기에, 오히려 이 실황은 더욱 선연한 여운을 품고 있었다.


* 첼리비다케는 음악을 일회적이고 비가역적인 ‘현존’으로 이해했다.


악보는 시작에 불과하며, 음악은 오직 그 순간, 그 공간, 그 청중과 함께할 때에만 비로소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는 말했다. “음악은 ‘가지고’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음악은 단지 ‘일어난다’고 말해야 한다.”

그는 녹음은 시간과 공간의 단절이며, 청자의 의식 상태를 무시한 재현은 비본질적 음악이라고 했다.

그에게 있어 음악은 저장되거나 반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 한 번, 그 순간, 그 공기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녹음된 음악은,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죽은 음악”이었다.

이미 시간이 멈춘 소리, 더 이상 여운이 흐르지 않는 음. 오로지 재생 가능한 기호로 환원된 파편일 뿐, 그것은 ‘음악’이 아니었다.

음악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라는 공간과 시간, 그리고 의식이 함께 있어야 했다.



* 첼리비다케는 일본의 선(禪) 사상에 깊이 심취한 지휘자였다. 그래서였을까.


그의 음악은 비워진 공간에서 충만함을 찾고, 울리지 않는 곳에서 더 선명한 울림을 만들어냈다.

그에게 있어서 침묵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었다.

그것은 음악의 가장 깊은 울림이 시작되는 자리였으며, 그는 소리와 소리 사이의 간극을 지휘했다.

연주는 끝나도 음악은 남았고, 음은 사라져도 울림은 시작되었다.

그것이 바로 첼리비다케였다.

그는 음악을 하나의 ‘존재’로 이해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감지되는 무게.

그 무게는 템포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의 느림은 단지 느림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태도였다.

음 하나가 울리고, 그 소리가 공간에 퍼져 나가 사라질 때까지—그는 기다렸다.

그 기다림은 음악의 공백이 아니라, 그가 가장 소중히 여겼던 음악의 핵심이었다.

바로, 소리와 소리 사이의 그 틈. 그 틈에서, 첼리비다케는 진짜 음악이 피어난다고 믿었다.

이렇게 그의 해석은 지휘라기보다는 기다림에 가까웠다.

마치 사물의 흔적을 억지로 조형하지 않고, 그것이 피어오르기를 조용히 기다리는 사람처럼—첼리비다케는 침묵 속에서 음악이 스스로 자라나도록 자리를 내어주었다.


이러한 그의 철학은 3악장 아다지오에서 절정에 이른다.

단순한 느림이 아니라, 시간의 순례에 가까운 이 악장은 서두르지 않는다. 소리는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머물며, 그 머무름이 시간의 깊이를 일깨운다. 어떤 순간에는 음 하나가 끝난 뒤, 다음 음이 오기까지 몇 분쯤의 침묵이 이어지는 듯한 감각마저 들었다. 그 침묵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라, 오히려 음악의 가장 밀도 높은 층위였다.

나는 그 침묵 속에서, 음악이 나를 듣고 있다는 감각을 처음으로 경험했다. 내 안의 의식과 음악의 외부가 만나는 지점—그 고요한 틈에서 나는 더 이상 청취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거대한 구조물의 일부가 되어 있었고, 음악은 나를 지나가고 있었다.

여운이 사라진 자리에 머무는 침묵, 그 침묵이야말로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전하고 있었다.


이어지는 4악장은 다시 세계의 재구성이었다.

30분 이상 이어지는 이 마지막 악장은 무너뜨릴 듯한 팽창성과 질서의 정밀함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금관은 천상의 종소리처럼 울리고, 현악은 지상의 리듬을 단단히 붙잡는다. 소리 하나하나가 정교하게 배치되어 있고, 마치 고대 성벽처럼 층층이 쌓아 올려진 음의 돌들이 있었다. 나는 그 안에서 작아졌지만, 동시에 그 구조물 안에서만 가능한 자리를 발견했다. 이 곡은 삶을 압도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크기를 그 안에 함께 담아낸다. 나는 무한히 작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이런 정적의 밀도, 여운의 깊이까지 포착해야 완성되는 음악을 듣고서 나는 어느 순간부터 이 곡을 들을 때, 오케스트라가 소리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재현해야 한다는 다소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때로 오디오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이 곡만큼은 실황에 대한 갈증이 더 깊어졌다. 그러나 몇 번 들어본 실황 공연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공간은 거대했으나, 지휘자가 그 거대한 구조물을 제대로 일으켜 세우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이 곡은 내가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듣고, 시간을 듣고, 나 자신을 듣는 음악이었다.

나는 그 안에서 길을 잃기도 했고, 무언가를 발견하기도 했으며, 어떤 날은 그저 그곳에 한없이 머물러 있고 싶었다.


첼리비다케, 그는 음악을 남기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지휘자로서의 그의 삶은 ‘불완전한 유산’으로 우리에게 남았다.

화려한 디스코그래피도, 대중적 명성도 없었다.

오히려 그가 남기지 않으려 했던 그 침묵은 지금까지도 살아 있다.

사후에 복원된 실황들조차 이상하리만큼 그가 말한 ‘현존의 기척’을 담고 있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그가 남기지 않으려 했던 음악이 아니라, 남길 수밖에 없었던 ‘침묵의 잔상’이었다.


나는 이 음악을 자주 듣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날엔, 그저 조용히, 홀로 있는 집에서 이 곡을 다시 틀고 싶어진다.

슬퍼서도 아니고, 위로가 필요해서도 아니다.

그저 이토록 거대한 음악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지금 내가 그것을 듣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순간은 하나의 기쁨이 되기 때문이다.

브루크너 8번은 감정을 흔드는 음악이 아니다.

그 대신, 감정의 심연을 조용히 응시하게 만든다.

다른 음악들이 감정의 파도를 일으킨다면,

이 음악은 고요한 호수처럼 나를 깊이 들여다보게 만든다.

거대한 우주가 내 앞에 있고, 나는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감정의 고조가 아니라, 존재의 감각으로.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나는 내 존재를 조용히 다시 만난다.


나는 첼리비다케의 이 음악을 앞으로도 계속 들을 것이다.

내가 그것을 다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 세계의 끝을 알지 못하더라도,

그저 이 음악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다시 귀를 기울일 것이다.

이 거대한 음악은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음악은 꼭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그 앞에 잠잠히 서 있으면 된다"고 말이다.

그렇게 나는 이 거대한 건축물을 보며, 그 안으로 다시 걸어 들어갈 것이다.


* 연주자 입장에서는 쇼팽의 야상곡이나 베토벤의 교향곡이 무척 어렵다고들 하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연주자가 아닌 감상자일 뿐이다. 그러니 내가 ‘쉽다’고 말하더라도, 그것이 곧 연주의 난이도를 가볍게 본다는 뜻은 아니라는 점을 밝힌다.




Bruckner Symphony No 8 : Celibidache / Münchner Philharmoniker

Live Tokyo 20 Oct 1990


https://youtu.be/elVHvTrEM34?si=AodzefU29Ti70jbz


Bruckner - Symphony No 8 (1890 version ed Nowak) - Celibidache, MPO


https://youtube.com/playlist?list=OLAK5uy_nS8An8BsgoLA20q1r8RO3VMeWH3dlAQoY&si=SWGeQBIawyCeM7vA


Bruckner - Symphony No 8 (1890 version ed Nowak) - Celibidache, MPO (1993)


https://youtu.be/JisEbG6dhh0?si=oVuQrKUBO7aXuBFX


keyword
이전 15화시간을 걷는 음악 : 세 번째-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