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계발과 우울감
'아이유의 팔레트 G-Dragon랩 부분을 아이유가 개사해서 부른 거야. 좋지?' 라며 친구가 가사를 보내주었다. 나는 바로 '니 스타일 아니야?'라고 반문했다. 적지 않은 기간 동안 바라본 그 친구는 딱 가사 구절과 같은 가치관을 지니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는 대학을 위해 달렸고, 재수를 하며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새내기 때는 미뤄둔 행복을 위해 노력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로 돌아와 치열하게 진로를 고민했다. 그 친구는 학점을 챙기고, 스펙을 쌓고, 원하는 직업을 얻기 위해 인턴생활을 하고 시험을 준비했다.
그런 그 친구에게 꿈이 무엇이냐 물어본 적이 있다. 친구는 답했다. 내 계획대로 일이 잘 돌아가고, 계획한 것들을 성취하며 뿌듯함도 느끼는 것. 금전적으로, 정신적으로 여유롭게 살며 몸과 마음 건강하고 주변 사람들과 행복한 추억을 많이 만드는 것. 그 친구는 이러한 꿈을 위해 뛰었고, 치열하게 공부했다. 동시에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상처를 남기는 것까지 허락하며 그들과 추억을 남기기 위해 노력했다.
팔레트를 부른 아이유라고 그 친구와 달랐을까? 무대에서 스스로에게 성취와 행복을 주문하던, 어린 시절 가난과 고생에도 가수로써 성공하겠다고 다짐하던, 만 15세부터 연예게 활동으로 쉴틈 없던, 시상식에서는 홀로 떠난 동료 아이돌에게 힘이 되어 주지 못해 후회했다던, 그녀에게 꿈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비슷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이제는 나에게 꿈이 무어냐고 자문한다. 그리고 답한다. 이제는 꿈 없이도 살고 싶다. 돌이켜보면 꿈이라는 단어를 참 많이 들으며 뛰어왔다. 어린 시절에는 건강하고 착하게 부모님 말씀 잘 듣는 것이 꿈이라 했다. 조금 더 나이가 들자 치과의사라는 꿈을 설명 들었다. 치과의사가 아니면 한의사도 괜찮고 삼성에 들어가는 것도 무난하다고 들었다. 언젠가는 꿈을 주입받는 것이 지쳐 내가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할지 고민해보았다. 짧지 않던 고민의 답은 모호했다. 결국 지금 하고 있던 것을 잘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시험 준비 말고는 해 본 것이 없었고, 수능에만 목매달았다.
그렇게 대입을 위해 뛰었고, 세 번의 수능을 거치며 얻은 것은 소진증후군(Burnout Syndrome : 의욕적으로 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극도의 신체적 정신적 피로감을 호소하며 무기력해지는 현상)이었다. 하지만 소진증후군 속에서도 성취를 내려놓을 수 없었다. 대학에서는 학점과 대외활동, 스펙 및 영어를 포함해 서툴렀던 인간관계 개선 또한 성취의 과제로 주어졌다.
그 과제들을 푸는 과정에서 가장 당혹스러웠던 것은 기시감이었다. 수능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에서 느꼈던 감정들이 반복되었다. 나는 뛰고 있었지만 왜 뛰고 있는지 몰랐고, 무언가 쌓이고 있다는 것은 확실한데 나의 방향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확신 없는 성취는 피로를 동반했고 나의 행동 자체에 의문이 생겼다. 그 와중에 읽던 소설에서 나의 행동을 반추해 볼 구절을 찾았다.
소설은 말했다. '우리는 미완인 상태로 완성된 사람으로 행동하길 요구하는 사회에 턱 세워졌다. 그래서 허겁지겁 이런저런 형식과 모델들, 당시 유행하는 것, 마음에 드는 것들을 자신으로 삼는다. 이후 그것들이 원래의 나인 것처럼 연기를 한다.' 나는 이 문장들을 접하고 머리를 얻어맞은 듯했다. 내가 살아가는 방식을 들킨 느낌이었다.
의문이 들었다. 내가 피로감을 느꼈던, 우울감을 느꼈던 이유는 연기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기 때문일까? 무례하지만 아이유나 그 친구도 혹시 성취를 위해 연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여전히 고민 중이지만 미완의 우리들이 피로를 감내하고 성취를 위해 연기를 한다면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본다. 하나는 사회가 시기에 따라 역할을 부여했고, 다른 하나는 사회가 할 수 있다며 계속 노력하기를 강요하기 때문이다.
내가 삶에서 연기를 하는 이유는 어쩌면 사회가 요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해야 할 많은 중요한 일들의 시기는 우리의 문화가 결정한다. 나이와 상황에 상관없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고 성취할 수 있다는 말은 이상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새롭게 시작하는 것은 굉장히 어렵다. 내가 나아가고 싶은 분야에서는 이미 누군가가 많은 시간을 투자해 큰 성취를 이뤄내었고, 현실적인 진입 장벽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언제든 시작하여 성취할 수 있다'라는 외침은 '그랬으면 좋겠다'라는 희망이 반영된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우리는 상당 부분 정해진 시간표 안에서 살아간다. 유아기부터 남들이 걸을 때 걸어야 하고 남들이 말할 때 말해야 한다. 남들이 구구단을 외울 때 나도 외워야 하고 또래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고 학원을 다닌다. 게다가 시기에 맞춰 대학도 가야 하고 취직도 하고 결혼도 하라 한다. 이 모든 시기에 따라가야 갈 길은 꿈과 성취라는 표현 아래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조금 더 잔혹한 사실은 꿈과 성취의 과정에서 또래들은 동료이자 경쟁자가 되어버린다. 이 맥락에서 시간이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표현은 사회에서 경쟁자들이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사실과 닿아있다. 내가 쉴 때 친구들은 스펙을 쌓고, 꿈을 찾고, 행복을 향해 나아간다. 하지만 개인이 그저 잉여처럼 쉬고만 있으면 상대적 박탈감과 불안감에 혼란스러워진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어쩌면 위에서 말한 대학 입학 후 기시감을 느꼈다는 말은 성취라는 요소가 시간 별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시절의 성취와 대학교 시절의 성취, 대학교 졸업 이후의 성취는 제각각이다. 하나의 성취를 이뤘다고 끝난 것이 아니다. 또 다른 성취를 이뤄야 현재나 겨우 유지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시간과 또래들은 기다리지 않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성취와 피로 사이의 저울질 뿐이었다.
하지만 저울질 사이에서도 성취를 내려놓지 않았던 이유는 가능성 때문이었다. 성취 과정의 피로감을 털어놓으면 '좋은 사람'이라고 일컬어지는 이들은 대부분 '조금만 더 힘내!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을 거야'라고 이야기해주었다. '해봤자 안 된다'는 부정적인 이야기는 꼬인 사람들이나 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노력해서 성공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실패하거나 포기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 실패를 나의 탓으로 돌렸고, 자존감이 망가지기도 했다.
떨어진 자존감을 메우고 있던 찰나 우연찮게 강연에서 추천받은 책이 있다. 제목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는데, '피로사회'라는 제독 철학자의 저작이었다. 책에서는 우리의 성취에 있어 긍정 과잉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말한다. 긍정 주입으로 인해 도전하면 성공할 것 같으니 자기 착취를 통해서라도 노력하게 되고, 그 노력으로 이해 피로가 쌓인다고 말한다. 또한 이러한 과정에서 타인의 강요가 아닌 자신이 원해서 노력했다는 느낌을 주어, 자기기만적 자유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말한다.
위 내용들은 나에게 자유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조금 어려운 표현이지만 하이데거는 평범한 지성이 자유를 크게 두 가지로 사유한다고 한다. 긍정적 자유와 부정적 자유가 그 두 가지이다. 긍정적 자유란 할 수 있는 자유로서 자신의 삶을 통제하고 의미 있는 삶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부정적 자유는 벗어나는 자유로서 다른 사람의 지시에서 벗어나는 자유이다. 나는 피로사회를 읽으며 현대사회의 자유에 대해 두려움이 생겼다.
그 두려움은 기만적인 긍정적 자유와 허용되지 않는 부정적 자유 때문이다. 사회가 강요한 '할 수 있음'으로 노력하는 나 자신이 정말 긍정적 자유를 가지고 있는가? 와 일하고 싶지 않을 때, 공부하고 싶지 않을 때, 돈 벌고 싶지 않을 때 내 마음대로 군다면 사회에서 도태되는 나 자신은 자유를 가지고 있는가?라는 두려움이다. 고백컨데, 나는 그 두려움들이 나의 피로감과 우울감에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다시, 자기 고백적인 아이유의 노랫말로 돌아가 보자. "지은아 뛰어야 돼. 시간이 안 기다려 준대. 치열하게 일하되. 틈틈이 행복도 해야 돼." 나는 아이유가 행복이라는 단어를 맨 뒤에 배치했는지 궁금하다. 치열하게 일해야 행복할 수 있다는 우선순위를 반영한 것일까? 아님 행복이 가장 중요한 이야기라 뒤에 넣어놨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행복은 치열하게 일한 결과 거나 치열하게 일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라는 이야기일까?
아이유가 어떻게 생각했건 피로한 나에게는 행복해야 한다는 표현은 무게로 다가온다. 나만 특이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노력 없는 행복에 자주 죄책감을 느낀다. 하루 종일 집에 누워서 편안하면 무언가 이루지 못한 나 자신에게 불안해지고, 먹으면 살찔 걱정, 놀면 미래 걱정에 마음 한편이 찜찜하다.
어쩌면 소위 말하는 '피곤하게 사는 스타일'이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나에게는 자기 계발-> 성취-> 행복-> 자기 계발-> 성취-> 행복이라는 삶의 사이클과 행복은 그 자체로도 가치 있지만 '더 열심히 일하게 하는 원동력'이라는 생각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주위의 몇몇 지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이러한 가치관이 내재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 상황이 내가 말하는 행복에 인질이 되어 '자기 계발의 늪'에 빠지는 경우이다.
그렇게 여전히 나는 늪 속에서 허우적 대고 있다. 현실적으로 생각한다면 아이유처럼 기다려주지 않는 시간 속에서 치열하게 일하고 틈틈이 행복해야 하는데, 뭔가... 뭔가가.. 싫다. 아이유는 잘만 그렇게 사는데 나는 왜 안될까? 아이유와 나는 어떤 차이가 있을 것이다. 충만한 자기 계발 속에 행복을 찾는 아이유와 무언가가 비어있는 나. 그리고 난 여전히 비어있는 그 정체를 고민 중이다.